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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e5e5e5><colcolor=#fff,#1c1d1f> 수메르 관련 문서 | |
문화 | 수메르어 |
신화 | 메소포타미아 신화 |
수메르 𒆠𒂗𒂠[1](Ki-en-ĝir) | Sumer | |||
■ 기원전 30-20세기경 수메르의 지배 영역 ■ 기원전 30~20세기경의 해안선 | |||
기원전 4500년경 ~ 기원전 1900년경[2]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수메르어 | <colbgcolor=#fff,#212121> 𒆠𒂗𒂠 (Ki-en-ĝir)[3] 𒅴𒄀 (Eme-ĝi)[4] 𒅴𒂠 (Eme-g̃ir) | |
아카드어 | 𒋗𒈨𒊒 (Šumeru) | ||
시대 | <colbgcolor=#fff,#212121><colcolor=#000,#ddd>동기 시대(금석병용기) | ||
문명권 | 메소포타미아 문명 | ||
위치 | 비옥한 초승달 지대 └메소포타미아 지역[5] | ||
수도 | 우루크[6] 우르 | ||
문자 | 쐐기 문자 | ||
성립 이전 | 후기 신석기 시대 | ||
멸망 이후 | 아카드 제국 |
우르의 지구라트 폐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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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메르(Sumer)는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 최초의 문명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문자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는 집단이기도 하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인류에게 있어서 글이라는 개념과 역사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뜻이다.[7] 이라크 지역에 관련 유적이 집중적으로 포진되어 있다.이밖에 팔레스타인의 예리코나 이집트의 상고대 유적, 20세기의 고고학적인 발견인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 등이 수메르 이전에 등장했을 성읍의 존재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아직 그 규모와 연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문명으로 정의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지도 역시 검증된 바가 없다.[8] 이는 고고학에서 정의하는 문명(Civilization)과 문화(Culture)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2. 유래
수메르 문명의 건설자들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고원 지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대략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부터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주하기 시작하였고[9] 그네들의 문명은 약 2천~3천 년가량 지속되었다. 기원전 230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아카드 지방에 살던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들이 남하하여 아카드 제국을 세우고 수메르인을 복속시켰다.'수메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셈계 아카드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 또는 이들이 쓰는 언어를 부르던 말이었다.[10]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켄기(K-en-ĝi) 또는 키엔기르(Ki-en-ĝir), 곧 고귀한 주님의 땅[11]이라고 불렀으며, 스스로의 민족을 웅상기가(ùĝ-saĝ-gíg-ga)[12] , 즉 검은 머리[13]라고 불렀다. 아카드어 '슈메루'는 아마도 '수메르어'를 뜻하는 '에메-응기'(eme-ĝi)의 방언이었으리라 추측되지만, 왜 아카드인들이 이 남쪽 땅을 슈메루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히타이트의 산하르(Sanhar)는 모두 '수메르'의 서방 방언으로 볼 수 있다.
원래 학자들은 수메르에 앞서 아시리아 문명을 먼저 발견했기 때문에 아시리아에서 쓰이던 아카드어와 쐐기 문자를 수메르보다 먼저 알았다.[14] 그런데 유물들을 발굴하다 보니 분명 쐐기 문자인데 기존 방법으로 해석이 안 되는 서판들이 자꾸 발견되어서 학자들을 고민에 빠트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메르어-아카드어 사전》[15] 역할을 하는 서판들을 발견하면서 수메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서판 사진(영문 위키피디아) 즉, 고립어인 수메르어가 쐐기 문자를 사용하였는데 이후에 들어온 셈어 계통 아카드어를 사용하던 이들이 쐐기 문자를 차용해 자신들의 언어를 적은 것이다.
수메르인은 셈족 계통이 아니었고, 언어학자들이 수메르어의 바탕이 된 기저 언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때 침입자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기록은 초기 우바이드 시기(기원전 5200년~4500 또는 6090~5429)에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정착한 이후, 문화적 단절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졌으며 기존의 원주민들과도 평화적인 상호교류 끝에 서서히 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지방에 정착한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풍부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을 경작했다. 당시에는 강우량이 현재보다 적었기 때문에, 척박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거주하려 한 모든 인종들의 도전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잘 관리하여 농업용수와 식수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메르어에는 운하, 제방, 저수지 등에 관련된 단어가 많이 발견된다. 수메르인들은 북부 지방에서 농업 기술을 습득한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농부들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바이드 토기는 북부의 사마라 유적(기원전 5700년~4900)의 토기와 연속성이 있다.
사마라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 중류 지방에서 최초로 원시적인 경작을 시작한 부족들이었다. 우바이드 유적과 사마라 유적의 유사성은 라르사 근처의 텔 아웨이리[16]에서 발견된 사마라 토기와 유사한 전기 우바이드 토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북부 출신 농경민족이 제정일치 사회 구조를 이룩하고,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남쪽의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어 남쪽으로 이주한 듯하다.
3. 수메르인의 정치 구조 및 풍습
우르에서 출토된 《우르의 군기(軍旗)》(Standard of Ur)[17]에서 '평화의 그림'의 모습. 당시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18]
기원전 40세기 후반까지, 수메르는 10여 개의 독립된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대체로 수로와 경계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중앙에는 도시의 수호신이나 수호여신을 모시는 사원이 위치했다. 도시는 엔시(ensi)와 루갈(lugal)이 통치했는데 각각 성직자와 왕에 해당했다. 다음은 수메르의 주요 도시들을 위치의 순서대로(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열한 것이다. 괄호 안은 현재의 지명으로, 이들 중 이름이 'Tell-'로 시작하는 것들은 잔해가 묻혀서 생긴 인공 언덕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랍어로 '텔'은 언덕이란 의미로, 아랍에서 텔이 들어간 지명은 99%의 확률로 유적지이다.
풍속에 있어 수메르인은 매해 봄마다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두무지(탐무즈)의 부활제를 올렸다. 그들은 두무지를 성장의 신이자, 대지의 여신이 탐하는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 숭배했다. 이러한 풍년제 기간에는 모든 아내들이 자신의 남편뿐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남자와도 잘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인정받고는 자유롭게 사랑의 상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하나 남편 이외의 연인의 정액은 밖으로 흐르게 하여 임신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기 때문이었다.
우르의 왕릉에서 보석과 장신구로 치장된 유해가 발견되어 순장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평민(군인)과 하인으로, 독약이나 마약을 자발적으로 먹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둔기에 맞아 살해되었다. 죽어서도 왕을 보좌하고 내세에서 귀족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3.1. 수메르 도시 국가들
수메르 도시들의 분포도. 당시 현 바스라와 아마라 주는 바다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유적은 나시리야, 사마와, 디와니야, 엘힐라, 쿠트의 사각지대 내에 위치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르와 라가시로 대표되는 디카르 주에 밀집되어 있다.
- 키시(Tell Uheimir & Ingharra): 현 힐라 동쪽 15km 지점. 수메르 내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들 중 하나로, '키시의 왕(루갈)'은 일반적으로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자칭하는 호칭 중 하나였다. 칭호 중 엔/엔시는 한 도시의 지배자, 루갈은 그보다 높은, 수메르를 통일한 건 아니지만 그중 가장 서열이 높고 영향력이 강한 지도자들의 호칭이었는데 전승상 첫 번째 루갈을 배출한 도시가 키시이기 때문이었다.
- 보르시파(Birs Nimrud): 현 힐라 서남쪽 7km 지점. 현지 아랍인들에게 바벨탑으로 알려진 뾰족한 지구라트 유구가 남아 있다.
- 니푸르(Nippur): 현 디와니야 동북쪽 25km 지점. 엔릴 신의 도시이며 수메르 내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상징적인 도시였다. 많은 루갈들이 '니푸르에서 엔릴에게 선택받은'이라는 수식어를 차용했다. 마지막까지 수메르어가 쓰인 곳이기도 하다.
- 이신(Ishan al-Bahriyat): 현 디와니야 동남쪽 25km 지점.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한 이후 망명자들에 의해 이신 왕조가 건립되었고, 라르사를 지배권에 두며 짧은 시간 동안 패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 시기를 이신-라르사 시대라고 한다.
- 슈루파크(Tell Fara): 현 디와니야 동남쪽 45km 지점. 돼지 모양의 장난감이 출토되어 고대 중동에서 돼지 사육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 기르수(Tell Telloh): 현 나시리야 북쪽 40km 지점. 구데아 왕의 치세에 라가시 2왕조의 수도가 되어 번영했고, 이후로도 종교도시로 남았다.
- 라가시(Al-Hiba): 현 나시리야 동북쪽 35km. 주변의 이신 및 기르수를 정복하고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영역국가의 첫 발을 내딛은 곳이다. 이후 세 도시는 수로로 연결되었으며 서로 모시는 다른 신들 사이에 혈연관계를 추가하는 등 종교적인 통합의 첫 걸음을 딛기도 했으며, 이웃 도시인 움마와의 긴 전쟁은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전쟁 중 하나이다. 라가시의 엔시 중 한 명인 구데아는 사실 업적면에서 딱히 인상적이진 않지만 우연히 그의 기록이 많이 살아남은 덕분에 유명하다. 라가시의 주 신전이었던 에-닌누는 닌기르수('기르수의 주인') 신에게 봉헌되었다.
- 바드-티비라(Tell Al Medina): 현 나시리야 서북쪽 35km 지점. 라르사와 12km 거리이다.
- 우루크(Warka): 현 사마와 동쪽 30km 지점.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대표적인 메트로폴리스이자 수메르의 중심 도시였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가 바로 이 우루크의 왕이었다. 해독 초기에 이름이 URUK(우루크)로 재구성되어 정착되었지만 현재는 이 도시의 수메르어 이름을 UNUG(우누그)로 재구성한다.
- 라르사(Tell as-Senkereh): 현 나시리야 서북쪽 35km 지점. 이신 왕조 이후 수메르의 패권을 장악했으나 바빌론 제1왕조(고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우루크와 13km 거리이다.
- 우르(al Muqayyar): 현 나시리야 서남쪽 15km 지점. 우르 제3왕조로 유명한 도시이다. 우르는 후대의 아카드어 발음이고, 수메르어로는 URIM(우림)으로 재구성된다. 약 100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시적으로 아카드인이 아니라 수메르인에 의한 정치적 통제권을 되찾았고, 제3대 왕 아마르신은 왕의 신격화라는 고대 정치적 종교 통제의 중요한 진보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남겨져 있는 수메르어 문서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아브라함도 《성서》및 《쿠란》에 따르면 이곳 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르의 지구라트가 잘 보존되어 있다.
- 에리두(Abu Shahrain): 현 나시리야 서남쪽 25km 지점. 일부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으로, 엔키 신의 도시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에리두의 위치는 내륙이지만 당초에는 항구도시였다.
- 아다브(Tell Bismaya): 현 쿠트 남쪽 45km 지점.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로, 넉살좋은 표정으로 유명한 루갈 달루 조각상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 중소 도시
- 시파르 / 짐비르(Abu Habba): 현 힐라 북쪽 50km 지점.
- 쿠타(Tell Ibrahim): 현 힐라 동북쪽 25km 지점.
- 우룸(Tell Uqair): 현 힐라 동북쪽 30km 지점. 쿠타에서 불과 5km 거리이다.
- 젬다트 나스르(Jemdet Nasr): 현 힐라 동북쪽 35km 지점. 우룸에서 8km 거리이다. 우바이드 시대 및 우루크 시대에 이은 젬다트 나스르 시대의 어원이다.
- 딜바트(Tell ed-Duleim): 현 힐라 남쪽 14km 지점.
- 마라드(Tell Wanna es-Sadun): 현 디와니야 서북쪽 15km 지점.
- 에레쉬(Abu Salabikh): 현 디와니야 동북쪽 30km 지점.
- 파주리쉬 다간(Puzrish-Dagan): 현 디와니야 동쪽 25km 지점.
- 키수라(Abu Hatab): 현 디와니야 동남쪽 40km 지점. 이신과 불과 14km 거리이다.
- 자발라(Tell Ibzeikh): 현 나시리야 서북쪽 60km 지점.
- 움마(Tell Jokha): 현 나시리야 서북쪽 50km 지점. 위의 라가시와 전쟁을 벌인, 역사상 최초로 기록이 남은 패전국 중 하나이다. 기원전 24세기에 움마의 왕 루갈자게시가 정복전쟁으로 수메르를 통합했다.
- 쿠아라 / 키시가(Tell al-Lahm): 현 나시리야 남쪽 15km 지점.
- 에쉬눈나(Tell Asmar): 현 바쿠바 동남쪽 20km 지점.
- 악샤크(Akshak): 현 바그다드 엘라시드 지구의 보에이사 동부.
- 누지(Yorghan Tepe): 현 키르쿠크 서남쪽 10km 지점.
- 데르(Tell Aqar): 현 쿠트 북쪽 50km 지점.
- 케쉬(Tell al-Wilayah): 현 쿠트 서남쪽 20km 지점.
- 말기움(Tell Yassir): 현 쿠트 서쪽 40km 지점.
- 라라크: 현 쿠트 동남쪽 10km 지점으로 추정.
- 라가바: 현 힐라 동쪽 40km 지점으로 추정.
- 라피쿰: 현 라마디 인근으로 추정.
- 아완: 현 이란 수사 인근으로 추정.
- 하마지: 현 이라크-이란 국경의 자그로스 산맥 어딘가로 추정.
4. 언어
자세한 내용은 수메르어 문서 참고하십시오.5. 역사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선사시대의 우바이드기와 우루크 시대에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9세기경 초기 왕조 시대부터 역사적 기록들이 드물게 발견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26세기경 라가시 시대부터는 많은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수메르는 기원전 24세기에 아카드 제국이 들어서 수메르를 복속하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구티족의 지배 시기를 지나, 기원전 22세기 우르 제3왕조가 건설되면서 수메르 부흥기를 맞았다가 엘람의 칩임으로 멸망하고 기원전 20세기경에 아모리인이 침입한다. 아모리인의 이신 왕조는 기원전 1730년, 고바빌로니아(바빌론 제1왕조)가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할 때까지 유지된다.5.1. 우바이드기
우바이드기(-期, 기원전 6090년경 혹은 5200년경~기원전 4500년경) 동안에 특징적인 양식을 갖는 양직의 도기류들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만 영역에 분포되고 있다. 당시 수메르인의 종교적 중심지는 에리두였으나, 인근의 도시인 우루크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에리두를 추월하게 된다. 고고학적으로 우바이드기에서 우루크 시대로의 이동은 느린 물레에서 만들어진 채색 토기에서, 빠른 물레에서 양산하여 만든 비채색 토기로 바뀌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제4우바이드기에서 초기 우루크 시대로의 이러한 변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2. 우루크 시대
자세한 내용은 우루크 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우루크 시대(기원전 4500년~3100년)에 이르러, 대량의 물품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운하와 수로를 통해서 거래되면서, 거대한 신전 중심의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고, 집권화된 관료층이 전문화된 일꾼들을 고용했다. 이 시기에 노예제도가 시작되었다는 많은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많은 공예품과 우루크의 식민지들이 튀르키예의 타우루스 산맥과 지중해 서안, 이란 중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수메르 상인들과, 이민자들에 의해서 우루크 시대의 문명은 모든 주변 세력에게 영향을 미쳤고, 점차 주변 세력들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교될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수메르의 도시들은 먼 거리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할 만한 군사력은 갖추지 못했다.
우루크 시대의 끝은 기원전 3200년~2900년 무렵 기후변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 홀로세 최적기후(Holocene climatic optimum)라고 불리는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가 끝나고,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었다.
역사적 기록들은 대체로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와 같은 왕은 지중해, 타우루스, 자그로스 산맥까지 영역을 넓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보다 조금 전에, 에리두 문화가 우루크 문화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는 엔메카르와 길가메시와 같은 왕들도 넓은 지역을 통치했다.
5.3. 젬데트 나스르 시대
자세한 내용은 젬데트 나스르 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5.4. 초기 왕조 시대
자세한 내용은 초기 왕조 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수메르 왕명표》[19]가 초기 왕조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전설상의 인물도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다른 문헌으로 교차 검증이 되지는 않는 인물 중 가장 이전 시기의 왕은 키시 제1왕조의 제13대 왕인 에타나(Etana)이다.[20]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첫 번째 왕은 키시의 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로 제22대 왕이자, 끝에서 두 번째 왕이었으며,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이름이 언급된다. 당시 패권이 키시에서 우루크로 넘어갔던 것으로 미루어,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라가시의 왕 에안나툼은 우루크의 지배를 물리치고 수메르의 키시, 우루크, 우르, 라르사 등 모든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했고, 경쟁 도시였던 움마로부터는 조공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토는 페르시아 만을 따라 엘람의 일부까지 미쳤다. 에안나툼은 강력한 통치를 위하여 공포정치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독수리 석비에서 적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움마의 왕, 루갈자게시는 라가시 왕조를 전복시키고, 우루크까지 정복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고 수메르를 통합하여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그는 셈족 계통의 아카드의 군주인 사르곤 대왕이 등장하기 이전의 마지막 수메르인 왕이었다.
5.5. 아카드 복속
자세한 내용은 아카드 문서 참고하십시오.루갈자게시가 수메르를 통합한 후 수메르 북쪽에 위치한 아카드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사르곤은 기원전 24세기 수메르의 도시들을 공략해 차례대로 함락시키고 우루크마저 정복해 수메르를 모두 복속시켰다. 이 시대에 관한 내용은 아카드 문서 참조.
5.6. 구티족 지배와 수메르 부흥기
자세한 내용은 구티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우르 제3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
기원전 2200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한 아카드 제국이 기원전 2154년 구티족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새로운 수메르의 지도자였던 라가시의 구데아가 부흥하기 시작했고, 예술이 발달했으며, 사르곤 대왕을 따라 신권 정치를 표방했다.
기원전 2119년 우루크의 왕 우투헤갈이 구티족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몰아냈고, 기원전 2112년에 정권을 잡은 우르-남무 왕이 우르 제3왕조를 건설해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영향력을 미치면서 수메르는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재 발견된 성문법 중 가장 오래된 《우르남무 법전》이 이때 제정되었다. 이 시기는 수메르어 기록이 가장 많이 남은 시기이기도 하며, 중앙집권이 강해졌다. 그 일례로 초대 왕인 우르남무와 그 아들인 슐기, 손자인 아마르신의 비문을 비교하면 왕에게 붙는 수식어가 점점 화려해지다가 아마르-신의 경우, 자기 이름 앞에다가 신의 이름 앞에 사용되는 결정문자 DINGIR를 붙이기에 이르렀다.[21]
그러나 이미 수메르 지역은 오랫동안 셈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셈어파의 성격이 더욱 진해졌고, 이미 오랜 시간 동안 비셈어파인 수메르어와 셈어파인 아카드어가 공존했던 듯하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서쪽에서 진출한 아모리인은 후에 고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했고, 이들은 같은 셈어파에 속하는 아카드어를 사용했다. 중세에 라틴어가 계속 사용되었듯, 쐐기 문자가 계속해서 쓰이는 동안에는 수메르어도 여전히 학교에서 종교적 언어로 가르쳐졌다.
생태학적으로는, 수메르 땅의 염분 증가로 인하여 농업 생산력이 감소했다. 농업 용수의 증발량이 많아지면서 토양에 녹아 있는 염분이 증가한 것이 농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규모가 작은 도시부터 서서히 수메르 문화가 와해되어 갔다. 그리고 바빌론, 아수르, 니네베와 같이 비교적 북쪽에 위치한 도시들로 주도권이 옮겨갔다. 이러한 패권의 변화는 이슬람 정복 이후 쿠파와 바스라 등 아라비아 반도와 가까운 남부 지방에 암사르 도시들이 세워지는 서기 7세기까지 2,000년 동안 이어졌다.[22]
5.7. 쇠망
엘람인의 침략과, 이비신 왕 지배하(기원전 2004년)의 약탈 이후, 수메르는 다시 아모리인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이무렵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기원전 20세기~18세기의 아모리족 도시국가는 수메르의 왕명 목록에 '이신 왕조'로 기록되었고, 함무라비 왕(기원전 1792년~1750년 재위)의 고바빌로니아로 넘어간다.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토양의 염분 증가로 인한, 이라크 남부 지방으로부터 북부 지방으로의 인구 이동 시기와 일치한다. 이 지방에서 토양 염분 증가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경작된 토지에 배수가 잘 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조한 기후로 인한 수분의 증발은 토양 속에 소금 결정을 축적시켰고, 결국은 수확량을 결정적으로 줄어들게 했다. 아카드 제국과 우르 제3왕조 동안, 밀보다 염분에 더 강한 보리를 많이 경작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기원전 2100년~1700년 사이 인구는 거의 3/5으로 줄어들었다.
6. 후예
- 선술했듯이 드라비다어족과 언어적인 유사성이 발견되었지만 이 외에 혈연적인 연관성은 부정된다. 물론 수메르가 북인도 일대와 많은 교류를 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 과거 수메르 지역에 해당하는 이라크 남부의 토착 민족인 습지 아랍인이 일정 부분 수메르의 후예일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그들의 사회 구조는 베두인에 가깝긴 하지만 고대 수메르 문화의 갈대 집과 선박을 지금도 만들어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잔즈 반란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마이야 칼리파조와 아바스 칼리파조 시대에 유입된 동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노예들과 혼혈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연구는 이라크의 불안한 정세와 주류 아랍 사회의 무관심 속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 쿠르드족은 자신들이 수메르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쿠르드족의 근원에 대해서 이미 고대부터 수메르어 'guti' 라든가 쿠르드족 혹은 그 조상들이 그 지역에 뿌리내렸다는 기록이 발견된 데다가, 심지어 일부 어휘들이 쿠르드어와 수메르어가 겹치기 때문인데, 쿠르드족의 조상인 인도유럽어계 이주민들이 선주민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 물론 일반 이라크 아랍인들도 자신들이 수메르의 후예라고 자부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7. 유사역사학
- 기록된 최초의 문명이라는 점 때문에 《환단고기》 옹호론자 등 전 세계의 유사역사학자들에게 매우 좋은 떡밥이 되었다. 일례로 1980년대 반미 작가였던 윤정모[23][24]가 여기 빠져들어서 비슷한 수준의 에세이를 내었는데, 결국 주화입마해서 관련 작품을 발표한다. 그리고 영감을 준 사람이 문정창이다. 《환단고기》 맹신의 시초격인 인물이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이다. 수메르와 한국어 소머리의 언어적 유사성, 그리고 수메르 문명에서 만든 황금 소머리 유물을 보고 억지로 끼워 맞춘다. 한국에서는 수메르어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교착어이고 어순이 주어-목적어-서술어(SOV)로 같다는 점도 논리로 이용된다.
- 흑인 우월주의자들은 수메르를 흑인이 건설했다고 한다. 수메르인들이 검은 색깔의 머리를 가지고 피부가 어두웠다고는 했으나, 그런 외모는 중동계 사람들에게 흔하디 흔한 외모이다. 사실 흔히 금발 이미지가 많은, 서유럽에서도 흑발은 꽤 많이 보이는 머리색이다. 그리고 이라크에 과거 흑인 노예들의 유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흑인 및 흑백 혼혈인들이 상당수 주거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는 한데, 일부는 무역상이나 용병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노예로 끌려와 정착한 것이다.
8. 매체
9. 관련 문서
[1] 유니코드 6.0의 쐐기문자를 지원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다.[2] 기원전 24세기에 아카드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기원전 2112년~기원전 2004년경 우르 제3왕조가 들어섰을 때 수메르의 부흥이 일어났다. 현재 전해지는 수메르의 유물들도 이 시기의 것이 많다.[3] 수메르인이 거주하던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스스로 부르던 이름이다. 의미는 고귀한 주님의 땅이었다.[4] 아카드어 '수메르(슈메루)'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말로, 수메르어로 '수메르어(자신들의 언어)'를 부르던 이름이다. 의미는 고귀한 말이었다.[5]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를 말한다.[6] 실제로는 연맹왕국보다 결속력이 약한 도시국가들의 집합체 또는 제국(諸國)에 가까웠으나 우루크와 우르가 사실상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7] 이는 곧 선사시대의 종료를 의미한다. 선사시대의 정의 자체가 역사 이전의 인류 시대를 의미하므로 해당 문서의 설명처럼 지역에 따라 상이하지만, 어찌 되었건 인류 최초로 선사시대에서 벗어남을 의미하게 된다.[8] 예를 들면, 괴베클리 테페는 신석기 초기의 유적으로 금석병용기인 우루크와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또 규모 역시 괴베클리 테페는 우루크의 1/60 정도이다.[9] https://www.metmuseum.org/toah/hd/ubai/hd_ubai.htm[10] 다만 아카드인들이 기록한 문자나 음성으로도 정확히 수메르란 발음은 아니었고, '슈메루'에 가까웠다.[11] 𒆠(ki: 땅)-𒂗(en: 주인, 통치자)-𒂠(gir: 고귀한)[12] 𒌦(ùĝ: 사람들, 인구)-𒊕(saĝ: 머리. 단 hair가 아니라 head이다.)-𒈪 𒂵(gíg-ga: 검은)[13] 모든 동물 중에 머리만 검은 것은 오직 사람뿐이니 '검은 머리'는 즉, '사람'이란 뜻이다.[14] 그래서 수메르를 비롯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고고학, 역사, 언어, 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메소포타미아학이나 이라크학이 아닌 아시리아학(Assyriology)이라고 부른다.[15] 정말 기초적인 형태의 이국어 사전으로 단어 대 단어, 《한영사전》으로 예시를 들자면 사과 = APPLE 정도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16] 1980년에 프랑스 발굴단이 발굴했다.[17] Standard는 진짜 군기(軍旗)라는 의미로 명명된 이름이다. 기수로 추측되는 사람의 머리맡에서 발굴되어 발굴자 레너드 울리에 의해 우르의 군기라고 명명되었다. 레너드 울리는 이를 진짜 군기라고 믿었지만 요즘 학자들은 악기의 공명통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18] 전승 축하연의 왕과 귀족들의 모습이다. 반대편인 '전쟁의 그림'에는 전차를 타고 무기를 휘두르며 적군을 잔인하게 물리치는 수메르 군대의 모습이 있다.[19] 1900년대 초에 독일계 미국인인 헤르만 힐프레히트가 고대 수메르의 도시였던 니푸르 근처에서 발견한 석판으로, 고대 수메르 왕들의 명단과 재위 시기가 기록되어 있다.[20] 키시 제1왕조 제2대 왕의 이름은 아카드어로 '모든 사람이 왕이었던 시기'를 의미하는데, 초기 왕조의 불안정함을 뜻하는 이름으로 고고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다. 제3대에서 제10대 왕의 이름은 전갈, 가젤 등 아카드어로 동물 이름이었다.[21] 결정문자는 한자의 부수처럼 뒤에 따라오는 단어의 의미를 한정하는 역할을 하며, 발음하지는 않는다. DINGIREnlil이라고 쓰면 그 뒤에 나오는 이름인 Enlil이 신의 이름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줄여서 위첨자 d로도 쓰며, dAmar-Sin은 자기 자신을 신격화했다는 의미가 된다.[22] 그리고 10세기 이후 다시 이라크 중부나 북부로 중심이 옮겨졌고, 남부는 베두인들이 장악하면서 바스라나 쿠파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버려졌다가 19세기 오스만 제국에 의해 여러 거점들이 세워지고, 20세기 석유의 발견으로 개발되며 21세기에 들어서는 나름 균형이 잡힌 상태이다. 오히려 2010년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발호로 북부와 서부가 초토화되자 비교적 온전한 남부가 경제 중심지로 남은 상태이다. 또한 이라크 정국을 주도하는 시아파 역시 남부가 중심으로, 종교적인 패권도 있다.[23] 윤정모는 1980년대 민주화 관련 작품을 대단히 많이 남긴 작가이다. 문제는 이런 작가가 거의 극우적인 사람들이나 찾는 주제를 스스럼없이 믿고 있다는 점. 최근의 행보는 극단적인 민족우월주의라고 볼 수 있다.[24] 한국에선 일제강점기와 분단 현실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민족끼리 단결하자' 식의 민족주의가 개혁 진보 사상으로 분류된다. 민주주의 선진국과 공산주의 국가에선 민족주의가 전형적인 우파의 이념이다. 흔히 기득권 우파 세력이 '우리는 위대한 민족. 그러니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된다!"라면서 빈부격차, 사회 갈등을 덮어버리기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한다는 비판이 많으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외국인/인종 차별과 모든 사회 모순을 해결할 메시아를 부르짖는 단계에 이르면 나치 같은 극우 파시즘이 된다. 실제 1980년대 반독재 운동권 내에도 반미, 반일만 제외하면 지도자에 대한 무한 찬양, 절대적인 민족우월주의 등 극우에 가까운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