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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바빌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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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메소포타미아 종교 | ||||
성립 이전 | 고바빌로니아 | ||||
멸망 이후 | 신아시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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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assite Dynasty고바빌로니아(바빌론 제1왕조)의 제6대 왕이자 명군이었던 함무라비 대왕이 승하한 후 혼란스러웠던 고바빌로니아가 히타이트의 침공으로 멸망한 뒤 바빌론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왕조이다. 중바빌로니아, 혹은 바빌론 제3왕조라고도 한다.[1] 가장 오랜 세월 동안 바빌론을 통치했던 왕조로, 미탄니, 아시리아 등과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놓고 겨루기도 했다. 다만 셈계 아모리인의 고바빌로니아와 셈계 칼데아인의 신바빌로니아에 비하면 그 인지도가 확연히 떨어지는 편이다.[2]
잘 알려지지 않은 왕조이지만 한때 아시리아 등과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양분해 다스리던 왕조였다. 바빌론 일대를 중심으로 당시 중동 일대 최고의 문화 중심국들 중 하나였고, 히타이트나 엘람, 심지어 저멀리 고대 이집트에게까지 문화적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바빌론을 통치한 수많은 왕조들 사이에서 유난히 독특한 왕조이기도 하다. 바빌론 제1왕조인 고바빌로니아, 바빌론 제10왕조인 신바빌로니아 등 다른 바빌론 기반 왕조들을 보면 하나같이 명군 한 명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뒤 그 사후에는 급격히 쇠락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카시트 왕조는 무려 400년 동안이나 바빌론 지방을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이때 카시트 왕조가 워낙 오랫동안 바빌론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린 나머지 카시트 왕조의 멸망 이후에도 메소포타미아를 통치한 왕조들은 죄다 수도가 바빌론이었다. 하도 오랫동안 번성했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 = 바빌론'이라는 공식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2. 역사
카시트 왕조를 세운 카시트인이 어디서 발원했는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저 북쪽 자그로스 산맥 어딘가쯤에서 이주해오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중이다. 카시트인들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18세기 고바빌로니아인들이 남긴 것부터 시작하지만 워낙 관련 기록이 적어서 확실하지는 않다. 기록에 남은 카시트 민족 최초의 지도자는 부르나 부리아스 1세이다. 이때 이후로 카시트인들은 착실히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당시 메소포타미아와 바빌론 일대의 정치 판도는 상당히 복잡했다. 한때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제패했던 고바빌로니아 제국은 함무라비 사후 급격히 쪼그라들더니, 결국 기원전 1595년에 히타이트에게 치명타를 얻어맞고 멸망했다. 고바빌로니아 멸망 직후에 바빌론을 차지한 세력은 '시랜드 왕조'(Sealand Dynasty)였다. 시랜드 왕조라는 독특한 이름을 얻은 이유는 이 왕조의 본거지가 바다와 가까운 메소포타미아 최남단의 '시랜드' 지방이었기 때문이다.[3] 어쨌든 시랜드 왕조는 잠시 동안 바빌론을 차지하고 인근 일대를 지배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래서 이 시랜드 왕조를 함무라비의 바빌론 제1왕조에 이어 바빌론 제2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시랜드 왕조 자체는 옛 고바빌로니아 제국에 비하면 불쌍할 정도로 정국이 불안정했다. 국력도 약했고 영향력이 미치는 도시도 몇 개 없었다. 결국 시랜드 왕조는 세력이 급부상하던 인근의 카시트인에게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카시트의 왕 아굼 2세는 시랜드 왕조를 남쪽으로 쫒아낸 뒤 바빌론을 수도로 삼았다. 이걸 '카시트 왕조', 혹은 바빌론 제3왕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후 카시트 왕조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기원전 1450년 경에는 우루크, 우르, 라르사 등을 함락시켰고, 남쪽으로 쫒겨난 시랜드 왕조까지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재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고바빌로니아에 이어서 140여 년만에 메소포타미아 남부 일대를 다시 통합했던 것이다.[4]
카시트 왕조는 기원전 14~13세기에 전성기를 찍었다. 카시트 왕조는 미탄니, 이집트 신왕국, 아시리아 등과 함께 중동 지방의 최대 패권국들 중 하나였고, 스스로를 '사루 라부', 당시로서는 황제나 대왕 같은 호칭으로 높여 부르기도 했다. 패권국들 사이에서는 무력으로 부딪히는 일도 빈번했지만 항상 싸움박질만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결혼동맹을 맺거나 보석이나 사치품들을 교환하는 등 평화적인 외교술을 펼치기도 했다. 이때의 국제 정세를 기록한 것이 바로《아마르나 문서》이다. 신왕국 제18왕조 말기의 이단 파라오였던 아케나톤(아멘호테프 4세) 시대의 중동 국제 정세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문서이다. 이 문서를 보면 카시트 왕조의 국왕들이 저멀리 히타이트나 엘람 왕실에 공주를 시집보내거나 사절을 자주 왕래시켰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당시 카시트 왕조의 바빌로니아가 가장 문화가 발달한 지방들 중 하나였기에[5] 이를 기반으로 문화적인 패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왕 니부레레이아, 나의 형제여, 당신의 형제이자 카르두니아쉬[6]의 왕 부르나 부리아쉬가 서한을 보냅니다. 나는 평안히 살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문, 당신의 아내, 당신의 자녀, 당신의 나라, 당신의 위인, 당신의 말, 당신의 전차, 모든 것들이 잘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나의 조상과 당신의 조상이 친교를 맺은 이래 수많은 놀라운 선물들이 오고 갔으며, 그 어떠한 환대의 요청도 거부된 적이 없었습니다. 나의 형제께서는 황금 광산 2개를 선물로 보내셨더군요. 만약 현재 금이 많으시다면, 당신의 조상이 그랬던만큼의 금을 보내주기를 바랍니다. 만약 지금 금이 부족하다면, 당신의 조상이 그랬던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금을 보내주기를 바랍니다. 왜 선물로 겨우 금광 2개만을 보냈단 말입니까?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신전에 돈이 매우 많이 들어가고 있으며, 신전을 완공하는데 차질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최대한 많은 금을 보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만약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보내줄 수 있도록 나에게 서한을 써주었으면 합니다.
-《아마르나 문서》의 일부.
-《아마르나 문서》의 일부.
수도 두르-쿠리갈주 (아카르 쿠프 عَقَرْقُوف) 유적의 지구라트 |
고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했던 기존의 셈계 아모리인들과 마찬가지로 카시트 왕조 역시 전통적인 수메르-아카드 문화를 유지, 발전시켰다. 특히 셈계 아카드어 문학은 카시트 시대에 크게 발전했고, 아카드어가 고대 근동의 공용어로 자리잡는 배경이 되었다. 카시트 왕조는 기원전 14세기 쿠리갈주 1세의 치세때 전성기를 맞았다. 쿠리갈주 1세는 동쪽의 엘람을 공격하여 수도인 수사를 함락시키는 업적을 이루었고, 딜문도 복속시켰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딴 '두르-쿠리갈주'를 건설해 반쯤 수도로 삼기도 했다. 물론 그 중요성은 바빌론에 비하면 훨씬 덜했지만 두르-쿠리갈주는 쿠리갈주 1세 사후에도 오랜 기간 카시트 왕조의 핵심 도시들 중 하나로 번영했다. 이로써 카시트는 아시리아 & 히타이트 & 이집트 신왕국과 함께 근동의 4대 강국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바빌로니아가 영혼의 라이벌 아시리아와 치열한 패권 경쟁을 시작한 것도 이 카시트 왕조 시대부터였다. 원래 아시리아는 딱히 두각을 드러내는 국가가 아니었다. 아시리아는 크게 고아시리아-중아시리아-신아시리아 시대로 구분하는데, 고아시리아 시대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경제적 중심지였을 뿐 별다른 힘은 없었다. 고아시리아는 고바빌로니아가 히타이트에게 멸망할 때 독립해서 잠깐 뜨나 싶었지만 신흥 강대국으로 등장한 미탄니에게 바로 짓눌려 속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미탄니가 시리아를 놓고 히타이트와 벌인 전쟁에서 대패하고, 내분이 일어나자 아시리아는 기원전 1363년 미탄니의 속국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되찾았다. 고아시리아는 명군이었던 아슈르우발리트 1세의 통치하에 군사력을 급격히 키워나가며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호령하는 제국으로 성장했는데, 이때부터를 중아시리아라고 부른다.
아시리아의 독립과 급성장 덕분에 메소포타미아 북부는 중아시리아가, 남부는 카시트 왕조의 중바빌로니아가 차지하는 형세가 만들어졌다. 카시트 왕조를 다스리던 부르나 부리아스 2세는 아시리아를 여전히 속국 취급하면서 동등하게 대우해주지 않으려 했지만 냉혹한 국제 정세 앞에서는 결국 아시리아를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르나 부리아스 2세는 아슈르우발리트 1세의 딸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아들 카라하르다쉬를 낳았다. 카라하르다쉬는 기원전 1333년, 카시트 왕조의 왕으로 즉위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살해당했고 그 뒤를 이어 나지부르가쉬가 즉위했다. 외손자가 살해당하자 아슈르우발리트 1세가 화가 난 것은 당연지사였다. 곧 아슈르우발리트 1세는 군대를 몰고 바빌론을 침략하여, 나지부르가쉬를 쫒아내고 자신의 또다른 외손자이자 카시트 왕조의 핏줄인 쿠리갈주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기원전 13세기 경 고대 중동 지방의 세력도.[7] |
쿠리갈주 2세는 외조부인 아슈르우발리트 1세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아시리아에 충성했지만 아슈르우발리트 1세가 승하하자 바로 충성을 철회했다. 아시리아는 당연히 카시트 바빌로니아를 때려잡으려고 들었다.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바빌로니아를 침공해 수도 바빌론을 약탈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인질로 끌고 갔다.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바빌론 함락 이후 바빌론에 허수아비 왕들을 옹립해놓으려고 시도했지만 바빌론과 결혼동맹으로 얽혀있었던 엘람인들이 쳐들어오면서 상황이 곤란하게 돌아갔다. 엘람의 왕 키딘-후트란이 성지 니푸르를 공격해 초토화시키는 한편 아시리아군을 끈질기게 괴롭히며 아시리아를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투쿨티-니누르타 1세가 기원전 1208년에 암살당하고 중아시리아가 혼란에 빠지면서 카시트 바빌로니아는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바빌론의 왕 마르두크-아플라-이디나 1세가 아시리아의 왕위계승전쟁에 참여해 니누르타-아필-에쿠르가 아시리아의 왕으로 즉위하도록 도와주었지만 니누르타-아필-에쿠르가 즉위 이후 뒤통수를 치고 다시 바빌론과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어떤 쪽도 서로를 완벽하게 제압하지는 못했으며, 결과적으로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양측간에 끝없는 소모전이 반복되면서 국력이 약해질 뿐이었다. 게다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왕들 모두가 쟁탈 과정속에서 핏줄과 가문이 어지럽게 꼬이는 바람에 왕위에 대한 정통성도 점점 약해졌다.[8]
이때 바빌론의 왕위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세력이 현재 이란 지방의 엘람이었다. 엘람의 왕 슈트룩나흐훈테는 결혼동맹 덕에 엘람 왕가에도 카시트 바빌로니아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핑계로 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 결국 기원전 1160년 경에 슈트룩나흐훈테가 바빌론을 침략해 인근 지방을 초토화시키고 수많은 재화를 약탈해갔다. 참고로 이때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엘람 지방으로 반출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카드 제국의 명군 나람신 대왕의 석비와 바빌론 제1왕조때의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카시트 왕조의 왕들은 도망쳐서 끈질기게 엘람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엘람의 쿠티르나흐훈테 3세가 저항운동마저 끝장냈고, 기원전 1155년 경에 완벽히 몰락하면서 카시트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때 바빌론의 지구라트가 무너지고, 마르두크 신상이 엘람으로 끌려갔다고 한다.[9] 이후 카시트인들은 디얄라 강 유역에 모여 살았으나, 기원전 702년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되고 강제 이주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1] '바빌로니아'라는 국가는 하나의 단일 왕조가 아니었다. 그냥 대도시 바빌론을 중심으로 했던 모든 왕조와 세력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것이다. 다만 바빌로니아라고만 뭉뚱그리면 헷갈릴 우려가 있기에 서수를 붙여서 바빌론 제1왕조, 바빌론 제2왕조... 이런 식으로 부른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함무라비 대왕의 고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왕조, 네부카드네자르 2세때 번영했고 바빌론 유수를 일으킨 신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0왕조라고 부른다.[2] 역설적으로 고대 오리엔트 역사에서 메소포타미아 주요부를 '연속적으로' 가장 오래 통치한 민족은 바로 수메르, 아카드, 아모리도 아닌 카시트인이었다. 약 기원전 1550 ~ 1150년까지 400년 가량 통치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후대 역사를 고려해봐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만이 겨우 견줄 정도이다.[3] 자체 명칭은 전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바다의 땅'이라고 표기되었던 지방이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고, 바다와 가까운 지역이었다고 한다.[4] 이때 바레인 지방을 영토로 통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에는 '딜룸'이라는 지명으로 불렀다.[5] 당시 국제 외교 언어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원한 셈계 아카드어일 정도였다.[6] 카시트인들의 본거지였던 바빌론을 의미한다.[7] 초록색이 카시트 왕조의 중바빌로니아이다.[8] 엄밀히 말하면 바빌로니아가 전반적인 열세였다. 아시리아의 아슈르단 1세가 마르두크-아플라-이디나 1세와 후임 왕들로부터 바빌로니아의 북부 영토를 지속적으로 빼앗아갔기 때문이다.[9] 이는 훗날 바빌론 제4왕조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가 회복하여 다시 바빌론에 안치했고, 이로써 마르두크는 최고 신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