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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르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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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의 역사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공화국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
페니키아어: Qart-Hadašt
라틴어: Carthago
영어: Ancient Carthage
파일:Carthage323.png
카르타고의 강역
파일:external/1.bp.blogspot.com/carthage_carte.jpg
<colcolor=#000><colbgcolor=#f0e68c> 존속 기간 기원전 814년 또는 기원전 750년경 ~ 기원전 146년
면적 325,000 km2(추정치)[A]
188,479 km2(추정치)[B]
37,826 km2(추정치)[C]
인구 430만 명[4]
수도 카르타고
공용어 페니키아어, 베르베르어, 푸닉어, 그리스어
정부 형태 군주제귀족공화제
통화 카르타고 셰켈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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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colbgcolor=#f0e68c> 페니키아어 𐤒𐤓𐤕𐤟𐤇𐤃𐤔𐤕
(Qart-Hadašt; 카르트 하다쉬트)
라틴어 Carthago / Karthago (카르타고)
고전 그리스어 Καρχηδών (카르케돈)[5]
아랍어 قَرْطَاج ‎(카르타지)
영어 Carthage (카시지)

1. 개요2. 상세3. 발전4. 포에니 전쟁과 몰락
4.1. 로마에 패배한 이유
5. 제도 및 사회6. 역대 국왕 목록7. 고대 말기 이후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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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의 문장
Urbs antīqua fuit, Tyriī tenuēre colōnī,
Karthāgō, Ītaliam contrā Tiberīnaque longē
ōstia, dīves opum studiīsque asperrima bellī,
quam Jūnō fertur terrīs magis omnibus ūnam
posthabitā coluisse Samō; hīc illius arma,
hīc currus fuit; hoc rēgnum dea gentibus esse,
sī quā Fāta sinant, jam tum tenditque fovetque.
Prōgeniem sed enim Trojānō ā sanguine dūcī
audierat, Tyriās ōlim quae verteret arcēs;
hinc populum lātē rēgem bellōque superbum
ventūrum excidiō Libyae: sīc volvere Parcās.

옛 도시가 있었다. 튀리아 이주민들이 정착한
카르타고, 이탈랴티베리스 하구를 멀찍이
맞선 땅[6], 물산이 넘치고 전쟁에는 되우 굳센
도시, 여기를 유노는 어느 땅보다 오직 아껴
사모스를 떠났다 한다. 여기에 여신은 무기를,
여기 전차를 두었다. 이 땅이 만방의 맹주이길,
운명이 승낙한다면 그리 꾀하려 공들였건만,
헌데 여신은 트로야 혈통후손이 생겨 나와
튀리아 성벽을 장차 파괴한다고 들었으니,
이로 광활한 지배자, 전쟁에 억척스런 백성
리뷔아를 없이 한다, 그리 운명은 짜놓았더라.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1권 12-22행, 김남우 번역

현대의 튀니지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대 국가. 고대 로마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던 국가이다.

과거에는 기원전 860년에서 기원전 814년 사이에 건국했다고 여겼지만,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면서 현대에는 기원전 750년 무렵 건국했다고 추정한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 카르트 하다쉬트고전 그리스어음역한 단어를 다시 라틴어로 옮긴 것이다. 카르트 하다쉬트란 페니키아어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포이누스(Poenus)라고 하는데, 라틴어 문헌에서는 카르타고인을 가리켜 '포이누스'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인들은 '페니키아'라고 하면 레반트의 원 페니키아보다도 카르타고를 떠올렸기 때문이다.[7] 포에니 전쟁(Bellum Punicum)이라는 표현도 이 '포이누스'에서 온 것이다.

2. 상세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814년 디도[8][9] 여왕이 카르타고를 세웠다. 동쪽 페니키아(현 레바논) 티레의 공주 디도는 부왕이 죽은 후 왕이 된 형제가 그녀의 남편을 죽이자 위협을 느껴 티레를 떠나 서쪽 땅에서 신도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 디도 여왕이 그곳을 통치하는 동안 그곳의 토착 세력의 왕이 결혼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10]

페니키아인은 바다 통상에 의존하는 민족이었고,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장기간 원양항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안 곳곳에 1천 명 남짓을 남겨 보급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페니키아인들처럼 바다로 진출하려는 그리스인들과 경쟁하는 동안 이런 일은 더욱 잦아졌고, 그 결과 지중해 전역에 두 민족이 건설한 소규모 해안정착지들이 많이 자리잡았다. 이들 중 몇몇 정착지들은 번영을 누리며 인구가 증가하여 도시국가로 발전했는데, 카르타고도 그러한 도시였다.

이들 페니키아 도시들은 모두 이들의 어머니 도시 티레에 속하였고, 어느 정도 상납금을 티레에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티레 본국은 페르시아와 같은 강력한 중동의 제국들과 싸우면서 쇠퇴했고, 마침내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멸망당했다(티레 공방전).

티레가 멸망하자 그 역할을 시돈이라는 페니키아 도시가 대신했지만, 중동에 위치한 시돈 역시 티레와 마찬가지 이유로 외적의 침입을 자주 받아 쇠퇴하고 곧 카르타고가 그 뒤를 이었다. 카르타고는 지리적으로 지중해 서부와 동부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지중해 서부에 집중된 광산의 원자재와 동부의 질 좋은 문화생산물을 교환하기에 적합하였다. 그리하여 카르타고는 번영을 누렸고, 페니키아 도시들의 맹주 역할을 하면서 이들로부터 받는 상납금도 국고에 들어오자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로마가 지중해에 관심을 두기 직전까지 지중해 일대에서 최강의 해상국가는 카르타고였다. 당시 카르타고인은 지중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심지어는 대서양 연안으로 진출해 남쪽으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북쪽으로는 영국도버 해협까지 이동하며 교역했다는 설이 있다. 기원전 218년에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의 발레아레스 제도,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의 서부, 북아프리카의 해상과 해안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에 로마와 포에니 전쟁으로 싸우느라 많은 해군과 영토를 상실하여 영향력을 잃자, 누미디아인들조차 카르타고를 무시하고 공격했다. 이후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을 거치면서 로마에게 완전히 패배하여 카르타고는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카르타고인들은 로마 등 각지에 노예로 팔려갔다. 후에 로마가 제정시대에 접어들어 도시가 재건되자, 로마는 카르타고인들을 모아서 한곳에 거주하도록 했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로마인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훗날 로마의 20대 황제로 등극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카르타고인의 혈통이 섞여있었기에 카르타고가 로마에 대해 나름의 복수(?)를 이뤄낸 셈이 되었다.

3. 발전

기원전 8-7세기에 걸쳐 카르타고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기원전 650년에는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600년에는 그리스와 충돌하여 전쟁을 벌였고, 기원전 585년에 티레가 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포위공격을 받자 티레로부터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여전히 명목상으로 티레에게 종속되어 꾸준히 상납금을 바쳐야 했다. 심지어 포에니 전쟁 때도 한 번도 안 거르고 상납금을 꼬박꼬박 티레로 보냈다고 한다.[11]

이렇게 다른 도시국가에 상납금을 보내는 것은 그리스와 페니키아, 북아프리카 일대 연안 도시국가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그 규모가 매우 작아 어느 정도 도시가 성장하고 나면 태어난 후손들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당시의 기술로는 인구가 일정 이상 늘어나버리면 한정된 경작지와 무역 수입으로 부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주라고 해서 무작정 쫓아낸 것이 아니다. 새 정착지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힐 때까지 부모 도시국가에선 식량과 자원, 인적지원을 해줬으며 군사적 보호도 담당했다. 그리고 정착지가 자립할 정도로 성장하면 반대로 부모 도시국가에게 상납금을 지불했다.

어째서 카르타고가 티레를 대신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카르타고 옆 우티카는 카르타고보다 더 오래된 데다가 카르타고와 지형적 조건도 비슷했다. 하지만 우티카는 카르타고와 같은 영향력을 얻지 못했고, 맹주 역할도 카르타고가 했다. 이에 대해 티레와 시돈과 같은 대륙 페니키아 도시들이 동방 제국들의 공격을 받을 때 거주민들이 카르타고에 망명하여 카르타고가 다른 도시들을 뛰어넘는 규모로 팽창했다는 설이 있다.[12]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이주민들이 다수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였다. 원주민들보다 수가 적은 페니키아인들은 노예를 부려 산업화된 농업과 상업으로, 특히 해양활동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서지중해 각지에 식민도시들을 세웠지만 이는 본토의 인구압력을 줄이는 것보다는 안정적인 무역 및 해군 거점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 이는 훗날 로마와의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크게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데, 카르타고는 전성기 때도 로마보다 인구가 100만 이상 부족했다. 게다가 패자를 포용하는 로마와 달리 카르타고 식민지인들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았으므로 로마 동맹국들보다 맹주를 향한 충성도 역시 낮을 수 밖에 없었고, 실제 시칠리아 전쟁이나 포에니 전쟁 등 카르타고가 치른 굵직한 대전들에는 항상 식민지의 대대적인 반란이 수반된다.

전성기에는 북아프리카 해안가와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 대부분을 세력권 아래 두었지만 시라쿠사를 필두로 한 서부 지중해의 그리스인들과 2세기 가까이 전쟁을 치렀다. 이를 시칠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니움 전쟁으로 주변을 흡수하고 강성해진 로마와 달리 내부 역량만 소진했을 뿐 결과적으로 시칠리아 서부 1/3 가량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전쟁 과정에서 사르데냐, 아프리카 등 각지의 반란으로 고생했고, 시칠리아 전쟁의 최종장인 7차 시칠리아 전쟁에서는 아프리카 본토까지 적의 침입을 허용하는 바람에 1차 튀니스 전투에서 신성 기병대가 전멸하는 등 카르타고의 전쟁 수행 능력은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주전장 시칠리아 역시 기나긴 전쟁의 여파로 초토화되어 인구가 크게 줄었으며, 오죽하면 6차 시칠리아 전쟁 당시 코린트 군 사령관이었던 티몰레온이 그리스인의 이민을 받겠다고 하자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6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에 응해 시칠리아로 이주했다고 한다. 피로스 전쟁 당시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들과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를 침공한 피로스 1세에 맞서 훗날 포에니 전쟁으로 철천지 원수가 되는 로마를 지원했으며[13] 피로스의 시칠리아 원정으로 시칠리아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기도 했으나, 피로스가 시칠리아에서 철수한 이후 영토를 되찾았다.

4. 포에니 전쟁과 몰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Rome_carthage_218.jpg
카르타고와 로마 공화국
지중해에서 위세를 떨치던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점점 지중해로 진출하던 로마 공화국과 충돌하게 된다.

기원전 264년 일어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주 무대로 싸웠으며,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참전했다. 그러나 해군력이 강한 카르타고임에도 육전은 물론, 해전에서도 까마귀라는 신무기[14]를 고안, 해전의 양상을 백병전으로 바꿔버린 로마군에게 조금씩 밀렸고, 결국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패배하여 시칠리아를 완전히 로마에게 빼앗긴 뒤 평화조약을 맺으며 패배했다.

기원전 218년 시작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의 여러 군단을 패퇴시켜 전쟁을 승리 직전까지 이끌었으나, 본인을 제외한 카르타고 지휘관들의 심각한 무능과 보급의 부재로 조금씩 전황이 불리해졌고, 결국 카르타고 본국과 한니발의 동생들이 운영하던 이베리아 식민지가 로마군에 함락되어 결국 패배했다. 이 패배로 카르타고는 본국을 제외한 모든 식민지를 잃어버리며 로마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격차가 벌어졌다.

기원전 149년 발발한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화평을 위해서[15] 성안의 무기란 무기는 죄다 버리고 투항했지만, 자비심 없는 로마군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그대로 쓸어버리겠다고 선언하자 맨주먹으로 수년을 버티었으나 결국 패배하여 멸망하였다. 맨주먹으로 수년을 버틴 것을 기적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당시 공성무기가 마땅치 않아 농성 상태의 적을 상대로 장기전이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과장된 면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이 결정되자 공장을 다시 돌려 매일 검 300개, 창 500개, 방패 140개 투사무기류 약 1000개를 생산했다는 말이 있으므로 확실히 과장. 그 정도 되는 도시국가가 무기공장 하나 없었을까. 하지만 전쟁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포위당한 후에 농성전을 하면서 더 이상 재료를 조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재무장하기가 쉽지 않음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긴 하다. 카르타고 항구는 입구가 요새 형태였는데, 공성전이 시작되자 로마군은 배를 항구 입구에 가라앉혀 막음으로써 해상보급을 봉쇄하고 도시를 포위하였다.

방어전은 굉장히 치열했으며 성벽이 뚫린 이후에도 로마군과 카르타고 시민들은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카르타고군과 카르타고 시민 40만명 정도가 대부분 무장한 채 로마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거나 자살하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함락시켰지만, 학을 단단히 뗐는지 살아남은 주민 5만 명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리고 도시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재건하기 전까지는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르타고 시를 함락한 직후 지휘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언젠가는 트로이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라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글귀를 읊으며 조국인 로마도 언젠가는 그러한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침통해 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스키피오는 로마 최대의 라이벌인 카르타고가 완전히 멸망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이를 로마와 빗대어서 소회를 나타낸 듯. 결국 로마의 최후도 스키피오의 말처럼 비슷한 결말로 끝났다.

하지만 카르타고 시민들만 몰락했을 뿐, 우티카를 필두로 카르타고의 지배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페니키아계 도시 주민들은 살아남아서 여전히 북아프리카 부의 핵심지역인 과거 페니키아 식민지 해안도시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라틴어로 포이누스(Poenus, 복수형: Poeni)[16]라고 불리며 로마 치하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다가 아랍의 정복 이후로 봇물처럼 밀려오는 아랍인에게 동화돼서 사라졌다.

한편 카르타고와 3차례 전쟁을 하는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만을 차지한 지역맹주에서 지중해의 여러 섬들과 히스파니아, 갈리아 남부,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서부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거듭났다. 수십 년 동안 카르타고군에게 털리기도 하고, 털기도 하면서 전쟁기계로 탈바꿈한 로마군은 동방 및 북방으로 진출, 이후 수백 년 동안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삼은 세계제국 로마의 건설에 앞장서는 첨병이 되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으로도 명성을 떨쳐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하며 과학적인 영농법으로 생산량을 크게 늘리는 플랜테이션 농법을 발명했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이후, 이 농법은 로마 제국의 부유층들에게 이어졌고(라티푼디움 참고)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막대한 이득을 올렸다. 그리고 로마 군대의 중추를 이루는 로마의 자작농들은 카르타고의 농업기술로 만든 북아프리카 플랜테이션 농장과 벌인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결국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의 자작농 병사들이 카르타고의 농업기술에 몰락하고 마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4.1. 로마에 패배한 이유

파일:carthaginian-soldiers.jpg
고대 카르타고 군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카르타고와 로마 간 군사의 질적, 양적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17] 카르타고는 용병에 주로 의존했지만, 로마는 사실상 국민개병제나 다름없는 시민군 제도였다. 물론 카르타고도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이 있었지만, 페니키아인은 이주민족이었으므로 인구가 원주민에 비해 적어서 시민군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용병을 썼다. 포에니 전쟁 이전 시라쿠사의 그리스인 참주들과 벌인 전쟁에서 시민군을 대거 동원했다가 큰 손실을 입은 후로 시민군은 거의 본토 방위에만 동원되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40만 정도, 피지배 민족이 그 6~7배 정도 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는 일단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되, 배신 안 하고 보조병만 일정 수 제공해주면 참정권만 없을 뿐 나머지는 로마 시민권과 똑같은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또한 지방토착세력의 특권은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고 서서히 동화하는 방식을 이용했으므로, 카르타고에 비해 병력 동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로마는 본토인 이탈리아가 전장이 되고 반도 남부의 동맹시 상당수가 로마를 배신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또다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고, 결국은 한니발을 이탈리아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반면에 카르타고는 기본적인 인구도 열세인 데다가 원주민 통제력도 약했다.

다만 카르타고가 선민사상이 특별히 심해서 병력 동원 능력이 떨어진 건 아니다. 포에니 전쟁 시점에선 이미 카르타고의 지역 통치가 수백 년 지속되면서 많은 원주민들이 동화되어 카르타고에 충성했다. 이들은 주로 리비아인, 리비아-페니키아인, 혹은 아프리카인으로 불렸고, 주로 북아프리카 및 남이베리아 해안가에 거주했다. 이들은 당시 기준으론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다. 카르타고 정치에 참여 못하는 대신 군대에 징집되고, 높은 자치권, 그리고 카르타고 시민들과 거의 비슷한 혜택을 누렸다.

카르타고군의 주력은 용병이 아니라 카르타고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이민족들이었는데, 이들은 카르타고의 완전한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이들을 완전히 정복할 의지가 없었고, 대신 군사와 조공을 뜯어내는 관계로 만족했다.[18] 이는 결과적으로 카르타고에 큰 재앙이 되었는데, 이들은 카르타고의 세력이 약해질 때마다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의 국력을 지속적으로 소모시켰고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때는 로마에 붙어 카르타고가 패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때에는 로마에 비해 카르타고가 해전에 능하다고 평가되었다. 카르타고가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국가이기도 했고, 시민들이 해군 지원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카르타고는 해전에서도 로마에 열세였다. 카르타고는 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몇개에서만 로마에 반짝 우세했을 뿐 그 뒤로는 해전에서도 로마와 싸우는 족족 패배했다. 결국 피 같은 페니키아 시민들이 물귀신으로 전락하는 꼴인데[19] 그걸 감당 못해서인지 2차 포에니 전쟁 때는 카르타고가 해전을 회피했다. 이렇게 해전에서 열세인 원인이 우선 카르타고는 노잡이와 같은 선원 숫자가 부족하여 함대 규모가 로마에 비해 작았고, 로마는 전함에 더 많은 수병들을 실었기 때문이다. 수병을 적게 싣고 주로 충각으로 들이받는 전법을 쓰던 카르타고 함대는 함상 백병전이 벌어지면 답이 없었다.[20]

특히 카르타고는 인구에서도 로마보다 열세였는데 말 잘 안 듣는 피지배 민족까지 다 합친다고 해도 로마보다 인구가 100~200만은 적었다. 그래서 여러 동맹국들을 잔뜩 끌어들여 숫적 열세를 극복하려 했으나 문제는 이렇게 해도 로마에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농업국가 로마의 인구와 동원능력은 지중해 각지에 흩어진 교역도시들의 연합체인 카르타고에 비해 한참 우위에 있었다. 전근대의 국가에서 인구수는 국력과 직결되는 수치이고, 제아무리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농업의 인구부양력은 상업 따위와는 비교가 무의미할 격차를 형성한다. 카르타고 외에도 후세의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상업으로 패권을 형성한 국가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결국엔 주변국의 압도적인 인구와 생산력을 못 이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장에 천조국이라는 미국도 겉으로 보기엔 상업으로만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나, 미국은 현대의 강대국들 중에서 프랑스와 더불어 식량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드문 나라로 식량자급율이 세계 제일이다.[21]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상업이 굉장히 발달했고 이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와 비교가 안 되는 농업기술이 바탕으로 인구와 시장을 받쳐주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날도 자연재해나 가축, 작물에 전염병 등이 발생해 식량 생산에 문제가 생기면 민생이 난리가 나고 기업들과 같은 상인들도 당장은 뭘 어떻게 못하고 그저 물가를 올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걸 생각해보자. 단순히 생산이 줄어드는게 이정도인데 농업이 무너지고 대다수 인구가 굶주리는 사태가 온다면 상업 역시 망하는 수 밖에 없다. 카르타고도 농업으로 유명했으며 이를 통한 플랜테이션 농법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지만, 어디까지나 해상 무역을 위한 상품 작물 생산에 쓰였지 인구부양을 위한 식량 생산과는 상관없었던 것이 문제였다.[22]

카르타고 영토의 절반을 차지한 스페인 식민지는 규모는 컸지만, 카르타고에게 복속된 지 수십 년밖에 안 되어 반(反)카르타고 감정이 강했다. 게다가 현지 상황도 지극히 불안정하여 여러 번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상당수 병력이 여기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또 정예병인 한니발의 부대는 이탈리아에 고립되어 로마군이 식민지를 공격하러 왔을 때 다른 카르타고 군대가 이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카르타고는 연합체의 특성상 유사시 다른 교역도시들에게 징병이나 징발을 하기 어려운데다가, 평소 이들에게 인심을 못 얻은 탓도 커서 우티카 같은 만만치 않은 경쟁세력이 나중에 전세가 더 악화되자 오히려 로마를 편드는 악재까지 발생해 안 그래도 부족한 전쟁동원능력이 더 떨어졌다.

전략전술 측면에서도 로마는 북방 켈트족과의 전쟁, 이탈리아 통일전쟁, 에페이로스 왕국의 왕 피로스 1세의 침공 등으로 단련된 베테랑 장교들이 많았던 반면, 카르타고는 하밀카르나 한니발 등 몇몇 특출난 인물을 제외하면 미숙한 페니키아인 상류층이 전쟁을 지휘했다.

또한 카르타고는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를 사형에 처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패전으로 인한 전술적 교훈을 활용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고, 패전의 처벌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해 결정적인 승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카르타고인들도 한 번 졌다고 바로 죽였다가는 전투 지휘관이 기피 직업이 되어 군대를 지휘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 제도를 무조건 적용하지는 않았다. 한니발만 해도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후퇴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런데 카르타고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는 이 관행조차 사실은 카르타고의 시민 인구가 적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카르타고는 시민 인구가 적다보니 큰 전투에서 패배하면 그 인구 타격의 '슬픔과 분노'가 로마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고 그만큼 시민들의 분노도 맹렬했던 것이다.[23]

반면 로마는 거의 해마다 크고 작은 전쟁을 수행하던 나라답게 귀족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온 시민이 사실상 전사였기에 상대적으로 이런 죽음에 대해 훨씬 익숙했다. 또, 인구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그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도 재동원이 가능했다. 이런 크고 작은 전쟁에서 평민만 피를 흘린 것이 아니고 귀족들 역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신분갈등이 비화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로마는 군단을 편성할 때 평민들로 백인대를 편성하고 편성된 각 백인대 장교를 귀족들이나 기사계급에서 투표로 뽑는 체계였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대에서 복무했음을 명예로운 경력으로 여긴 로마 상류계층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다했다. 칸나이 전투 당시 군단병 백인대 장교부터 기병대로 참전한 원로원 의원들이 평민들과 나란히 싸우다가 다수가 전사한 것이 대표적인 예. 그렇기에 전투에서 대패해 많은 사상자가 생겨도 그 사상자엔 귀족, 평민이 가리지 않고 포함되었기 때문에, 평민들 입장에서는 '우리만 생고생하는 게 아니고 위의 귀족 나으리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는 것.

이러한 양측의 근본적인 국력 차이는 당대에도 충분히 인식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한니발이 시도했던,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를 공략하고, 로마를 직접 공격하기보다 동맹국을 공격하는 대전략이 현대에 들어서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국력 차이를 의식하였음을 감안하면 카르타고가 로마를 이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켈트족 용병을 고용해 카르타고 측의 인명 손실을 줄이고,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로마와 동맹국들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양국의 국력 차이를 줄이는 것이 한니발의 대전략이었다고 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아무리 로마의 인구가 많더라도 이탈리아 동맹국들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카르타고 '연합'보다 더 동원력이 우위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로마가 지구전으로 버티면서 한니발 본대를 붙잡아두는 동시에 각지로 전선을 넓히자 한니발의 대전략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남부를 상당부분 이탈시키고 장악하기에는 성공했지만, 시칠리아와 이베리아로 전선이 넓어지면서 소모전 양상이 되고 카르타고 연합이 공격당하였다. 이러자 한니발 본대에 지원을 보내는 속도도 더뎌져서 본대는 본대대로 지지부진해지며 공세의 속도가 줄어들었고 카르타고 전체의 전쟁역량도 축소된 것이다. 결국 로마군의 끈질긴 공세로 이베리아 전선이 무너지고, 시칠리아까지 점령당하자, 역으로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동맹국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패배한 것이 2차 포에니 전쟁의 결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카르타고는 시민들의 인구가 적었던 데다가 그나마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어려워서 로마에 패배했다.

5. 제도 및 사회

초기에는 왕정이었다가 기원전 480년 하밀카르 1세가 사망한 후 실권이 장로회로 넘어갔다. 이후 보밀카르가 왕권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공화정이 되었다.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정으로 공화정 시기의 로마와 유사하게 해마다 집정관 2명[24]을 선출했다. 의회는 장로들로 구성된 원로원, 고관 104명으로 구성된 백인회,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민회가 존재했다.

가죽으로 만든 통화를 썼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다만 카르타고에서 발행한 동전들이 현존하고, 대영박물관에서도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역사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인드로 몬타넬리의 로마 이야기에선 로마가 통화를 주조했을 때 카르타고는 이미 은행권 지폐를 발행하고 있었다는 등, 카르타고의 화폐는 지중해의 전 지역에서 통용되었으며 오늘날의 달러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서술되어있다.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에는 2~5층 정도 되는 건축물이 많았는데, 이것을 최초의 아파트로 간주[25]하기도 한다.

유달리 동명이인이 많아 역사서에서 이름을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잦다(한니발, 하스드루발, 마고 등). 당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만 한정해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지휘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럿 등장한다. 왜냐하면 카르타고에서는 이름을 이어받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인데, 주로 한 가문의 후계자가 가문을 이어받을 때 이전 가주가 쓰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가주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것은 그 어떤 상속문서보다도 확실하게 가문의 다음 주인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26]

문화 쪽에서는 로마나 그리스와 달리 페니키아 문화의 영향이 강해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대 카르타고 서적 중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항해일지나 농장경영서 등 실용서적들이다.

어린아이를 산채로 불에 태워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의식이 유명하다.[27] 카르타고 유적지에는 희생된 아이들의 유골을 매장한 묘지인 토펫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토펫에 매장된 유골이 인신공양이 아니라 질병 등으로 자연사한 아이들의 유해라는 견해도 일부 존재하지만, 학계의 주류는 실제로 인신공양을 했다고 본다.

6. 역대 국왕 목록

7. 고대 말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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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의해 재건된 카르타고
로마 제국에서 옛 카르타고가 있던 자리에 재건한 도시. 원조(?)인 페니키아인의 도시 카르타고는 로마군이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카르타고의 유적은 거의 로마 제국 시절의 것들뿐이다. 다만 옛 카르타고 항구의 일부 흔적과 비르사 언덕의 주거지, 인신공양으로 희생된 아이들의 유해가 묻힌 토펫 등 원래의 카르타고 유적이 약간은 남아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병사들은 어린아이들의 영혼이 자신들에게 저주를 내릴까 두려워하여 다른 건 다 불태우고 부쉈지만 토펫만큼은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해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워낙 항구도시로서 입지가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도 카르타고의 공포가 희미해져가자 재건 논의가 자주 있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암살당하면서 중지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가 재건하였다. 도시는 옛 흔적이 거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재건되었으나, 그래도 이 일대에서 사용하게 된 라틴어는 본토 이탈리아의 라틴어에 옛 카르타고적(Punic) 억양과 습관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로마 시기만 해도 존속 기간이 기원전 146년에서 698년까지의 총 844년에서 반달 왕국 기간인 439년에서 533년까지의 총 94년을 제외한 딱 총 750년으로서, 원조(?) 카르타고의 존속 기간을 가장 넓게 잡았을 때인[29] 기원전 814년에서 기원전 146년까지의 총 668년보다도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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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누스 목욕탕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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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카르타고를 포함한 마그레브 지역에서의 로마화의 정도를 지도[30]

새롭게 건설된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 시대에 아프리카 속주(지금의 튀니지 북부)의 중심도시로 부와 번영을 누렸다. 로마 제국의 3대 도시가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였는데 이 3대 도시 바로 다음 가는 대도시가 카르타고였으며, 이후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이후 시점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기존 3대 도시 다음 가는 5번째 대도시였다. 아예 로마 시기의 카르타고(동로마 포함)에 대한 별도의 영어 위키백과 문서까지 있다. 특히 로마 제국이 동, 서로 분열되고 부유한 마케도니아, 소아시아, 이집트 속주들이 모두 동로마로 넘어갔을 때,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남프랑스) 지역, 히스파니아 지방과 더불어서 서로마의 몇 안되는 중요한 세수원 지역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화한 이후 카르타고의 일반 시민들과 그 일대의 소작농들은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던 도나투스파[31]를 믿으면서 정통 교리를 믿던 지주 & 대상인 계급과 반목했다.

이후 북아프리카 속주를 수비하던 로마군들이 내전에 투입되어 사막 유목민들의 약탈에 노출되면서 로마의 지배력이 취약해졌다. 429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북아프리카 서부에 상륙하였고 도나투스파 신도들의 지지를 받으며 몇 년 뒤에는 카르타고를 위시로 한 북서 아프리카 대부분을 순조롭게 점령하고 반달 왕국을 세우게 된다. 부유한 카르타고 지방의 상실은 이민족들의 침략에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었던 서로마 제국에 치명타로 작용하였으며 결국 잦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한 서로마는 훈족의 침입을 격퇴한 유능한 장군 아에티우스가 암살당한 이후로 급격하게 무너지게 된다.[32]

흔히 서로마 제국 말기 반달족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고 몰락한 것으로 여겨지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카르타고는 반달 왕국의 통치하에 오히려 고대 로마 시대보다 더한 번영을 누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반달 왕국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북아프리카 지방에서 많은 토지가 버려진 사실인데,[33] 이는 로마 제국시기 제국에서도 가장 대규모 농장이 발달한 아프리카 속주의 특성상[34] 상당수의 자영농이 몰락하여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륙지역의 반사막 토지로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달 왕국의 통치가 시작되며 구질서가 완전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무너지며[35] 농민들에게 쓸만한 토지들을 분배할 여유가 생겼고, 그 반작용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륙지역의 반사막 토지들이 대거 버려진 것이다. 굳이 농지면적만을 번영의 기준으로 잡는다면 반달 왕국이 통치하던 시기 카르타고가 쪼그라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번영의 기준을 잡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극심한 타격을 받은 시기가 한 번 있긴 했는데, 바로 533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수복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에 편입된 직후. 막 통치자가 뒤바뀌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주둔군의 반란, 무어인들(산재했던 부족들 및 무어-로마 왕국(Mauro-Roman Kingdom) 둘 다 포함)의 침입, 급작스런 선 페스트의 발흥까지 여러 악재들이 겹치는 바람에 카르타고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재정복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속주들에 상당한 금액을 써야했던 동로마 제국은 심각한 자금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반달 왕국은 단시간에 정복된 듯 보였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시작이었다. 548년에야 산재했던 무어 계열 부족이 진압되어 어느 정도 평정되었으며, 이후 넓은 의미에서 같은 무어 계열이지만 로마화된 정도가 좀 더 깊었던 무어-로마 왕국의 가르물 왕의 반란이 578년에 제압되어 거의 완전히 평정되었다. 영어 위키백과 Praetorian prefecture of Africa를 보면 'First Moorish uprising', 'Military mutiny', 'Second Moorish uprising and the revolt of Guntharic', 'Conflict with Moorish kingdom of Garmul' 등 소문단 하나하나가 다 이 평정 과정이다. 그 와중에 아프리카군 사령관 겸 총독이었던 솔로몬이 전사하기도 했을 정도로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카르타고 수복은 제국에게 큰 이득이 되었는데, 훗날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레반트와 아나톨리아 지방을 대거 상실한 동로마 제국이 이라클리오스(=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절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것이나,[36][37]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대반격 시절 중요한 재원을 담당했던 것만 보아도 여전히 제국의 손꼽히는 중요도시이자 부를 축적한 번영하는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한 이후 로마에 복속되어 재건된 후 지배자가 여러번 바뀌는 중에도 계속해서 번영을 누렸으나, 역사의 중심에서 빗겨나간 탓에 유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카르타고라는 도시의 최종 소멸은 698년 아랍인의 침략이다.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극적인 반격과 호스로 2세의 암살로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경선은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중동의 두 거대 거대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아라비아 지방의 아랍인들, 즉 이슬람 세력이 크게 발흥하게 된다. 7세기 중반 아라비아를 통일한 이슬람 왕국은 바로 칼끝을 약화된 두 제국에게 돌리며 시리아로 쇄도해왔고 결국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 동방 야전군의 주력부대가 소멸하면서 로마 제국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속주들을 포기하고 아나톨리아까지 밀려나게 된다. 이 결과 동로마 본토와 육상으로 단절되게 된 아프리카 속주들은 방위가 극도로 취약해졌고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로마 중앙군을 아나톨리아에 붙들어 놓는데 성공한 아랍인들은 이집트 속주를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아프리카 지방을 점령해나가기 시작한다. 북서아프리카 및 카르타고 지역의 도시들은 이집트와는 달리 20여 년을 더 버텼으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 이후 동로마 제국의 내란을 틈타 지속적으로 침입해온 아랍인들에 의해 도시가 결국 함락되었다. 후계 황제인 레온티오스가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결국 격파되었고 이는 황제 자신의 실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후 동로마 제국에서 해군을 보내 재탈환하는 바람에 다시 공성전을 벌여야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예를 떠올려 역습의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카르타고 성벽을 허물고 시가지를 황폐화시킨 후 근처에 튀니스를 건설했다. 1400년에 이르는 도시의 최후였다.

다만 이는 카르타고 시의 몰락이었을 뿐 북아프리카 전체의 황폐화는 아니었다. 흔히 알려진 오해로, 아랍인의 북아프리카 정복이 관개시설의 파괴와 방치를 불러온 탓에 지나치게 관개농업이 발달하여 큰 생산성을 누리던 북아프리카 지방이 쇠퇴했다는 설이 있다. 태생이 사막 유목민족이었던 베두인 출신의 아랍인이 들어오자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모르는 지배자들에 의해 토착민들은 기술을 전달할 틈도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고, 사람 손을 타지 못한 밭과 과수원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힘이 없어져 결국 급속한 사막화로 북아프리카 지방 대부분은 현재의 사막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 아랍인들은 유목민족 베두인이 아닌, 메카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농경민들이었다.

아랍인의 대정복시대 당시 아랍 측 인적자원의 중심 핵이던 헤자즈 지방의 주민들은 농업 따윈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매우 열악한 사막지대인 아라비아에서도 오아시스 농업으로 아득바득 생계를 이어 오아시스 도시들을 건설했던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아랍인들은 방치되었던 페르시아-로마의 낙후된 관개시설을 보수하고, 기존의 낙후되어 있었던 동로마의 관개시설을 신기술로 새로 발명된 기계장치들로 보강해 광활한 이슬람 신문명권 지역의 농업에 혁신을 불러왔다. 기존에 방치되었던 강, 시내, 오아시스, 하천, 지하 깊숙히 자리잡은 지하수 등 이용되지 않던 수원이 없어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기존에 재배되지 않거나 일부 지역에서나 재배되던 쌀, 수수, 경질소맥, 사탕수수, 수박, 시금치, 겅퀴, 토란, 광귤, 레몬, 목화, 가지, 코코스 야자, 망고, 플랜테인, 바나나, 라임에 더불어서 섬유식물, 약초, 조미료, 미용, 의약, 염료, 조경 작물들이 아랍인들이 통합한 대서양부터 인더스 강까지 널리 퍼졌다. 이와 같은 농업적 혁명은 수원부족으로 방치된 농업 가능 토지들을 개간해 뺴곡히 경작지가 들어섰으며 심지어 기존에 농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황무지 사막들조차 개간해 신 작물을 재배해서 놀랄 정도의 수확량을 기록했다. 또한 이 당시 튀니지는 아글라브 왕조의 통치하에서 현재의 몰타와 이탈리아 남부까지 확장해나가는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북아프리카의 토지들은 아랍인들의 진출 이전에 이미 지력이 많이 고갈되고 있었다. 이미 북아프리카-이집트-레반트 지역이 지나친 토지개발과 소빙기로 인한 토지염화와 지력쇠퇴로 인해 나날이 수확량이 감소하는 탓에 버려지고 방치되어 유적으로밖에 남지 않은 도시 폐허들이 속속 생기기 시작하던 때가 고대 로마 말기의 시기였다.[38] 오히려 이런 로마 시대의 점진적인 쇠퇴가 아랍 시대 들어 단숨에 뒤집혀, 수확량 폭등을 바탕으로 영광이 빛에 바랜 기존의 로마 도시들을 능가하는 번영을 구가하는 도시들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북아프리카의 농업의 쇠퇴와 사막화의 원인은 후에 11세기에 수니파 반란으로 일어선, 종교적인 광신으로 유명한 파티마 왕조에 있다. 파티마 조는 북아프리카 지방의 수니파 반란에 대응해 매우 극단적인 이스마일파 광신도로 악명이 높았던 베두인인 바누 하이랄, 바누 수랍 부족을 반란지인 북아프리카 동부로 이주시켜서 보복으로 마그레브의 거주지와 농경지를 철저하게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이들은 심지어 마그레브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카이르완까지 점령했다. 즉, 앞서 언급된 베두인들이 본격적으로 북아프리카에 들어온건 약 500년 이후의 일이며, 이들 베두인으로 인해 아포칼립스가 펼쳐지게 되었던 것. 어떻게 보면 베두인족 때문에 아랍인들과 베르베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억까된 면도 있다.

베두인 부족은 철저하게 농경지와 관개시설을 황폐화하고 박살내는 동시에 보이는 족족 대학살을 벌여, 북아프리카 동부 지역인 알제리 동부, 리비아와 튀니지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살아남은 베르베르인들은 서쪽과 남쪽의 산지로 도망쳤으며, 덕분에 기층 민중의 교체마저 이루어졌다. 베두인들은 순수 유목민으로 농업을 멸시해서, 황폐화된 도심과 농경지를 목축지로 사용하였다. 뒤이어 다른 베두인 부족들이 물밀듯이 들어와서 이들 지역의 사막화와 베두인화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결국 중세를 지나 현대에 와서 석유가 발견될 때까지 이 지역은 어업 외에 별다른 산업이라곤 해적들과 노예상만이 있을 정도로 군사력말고는 별 볼일 없는 동네가 된다. 현재도 관광산업이 발달한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석유 빼면 시체인 건 마찬가지.[39]

하지만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은 고대 유적이 현재 별볼일 없는 상태로 남아주는 것을 더욱 반긴다. 이유는 고대 유적 위에 도시, 특히 층수가 높이 올라가고 그만큼 그걸 받쳐주기 위해 땅을 깊게 파려면 개발 등으로 인해 발굴 및 조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신라 멸망 후 소도시로 남은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서라벌 유적은 보존이 잘 되어있는 편이지만 백제의 초기 수도였던 서울 송파구석촌동 고분군 문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20세기 강남 개발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역사를 조사하는 역사학자들 입장에서는 유럽에서 조사하는 것보다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조사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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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마우레타니아 왕국 게툴리 부족
(제나타 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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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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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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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질마사)
파티마 vs
우마이야
분열기 페스
미크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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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카르타고의 최대 전성기[B] 1, 2차 포에니 전쟁 후 면적[C] 3차 포에니 전쟁 때 면적[4] 기원전 221년 당시 추정치[5] 소아시아 지명 Χαλκηδών(칼케돈)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6] Karthago, Italiam contra: 라틴어 contra는 마주 본다는 뜻도 있지만 서로 대립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즉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을 암시하는 표현이다.[7] 카르타고가 페니키아계 식민도시에서 출발했으니 이상한 표현도 아니다.[8] 그녀의 이름인 디도는 '사랑받는 자'를 뜻하는 다윗과 같은 뜻과 같은 어근을 가진 이름으로, 사실상 같은 이름이다.[9] 이름이 '엘리사'라고도 한다.[10] 아이네이스에서는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의 사랑 이야기가 창작된다. 사실 아이네이아스의 시대는 디도의 시대보다 300년 이상 과거의 시점이다.[11] 물론 포에니 전쟁 때에는 어떻게든 페니키아 본토를 지배하는 헬레니즘 국가들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실제로 포에니 전쟁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와 마케도니아 왕국, 미트라다테스 왕국 등이 카르타고 편을 들었으나 결국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건 로마였고 카르타고 멸망 후 이들 나라들도 로마에게 쓸려나갔다.[12] 티레가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으로 함락된 티레 공방전 당시 구원차 파견되었던 카르타고 선박들이 전투의 절망적인 상황을 깨닫자 제기, 신전 창부를 비롯한 사제집단과 고위 귀족을 태워 자국으로 망명시킨 사실이 있었다. 다만 이들 망명자들이 카르타고의 지배층을 교체한 것도 아닌데 이 사실만으로 카르타고가 우티카 등을 압도할 수 있는 권위를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13] 나중에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이 당시 카르타고가 로마를 지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이따금 나오나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주장일 뿐이며 당시 카르타고는 피로스를 로마보다 훨씬 위협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 초기 피로스의 목표는 타렌툼의 구원이었지만, 전쟁 중기로 넘어가면 목표가 시라쿠사의 구원으로 바뀌었고, 기원전 278년~275년 피로스의 전쟁 상대가 바로 카르타고였으며 주전장 역시 시칠리아였다.[14] 다리 밑부분에 말뚝을 박은 간이교로, 라틴어로는 Corvus라 칭했다. 이것을 카르타고 함선의 갑판에 박고 카르타고 함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여, 충각 전술로 벌어지던 기존 해전의 양상을 작은 육지에서 벌어지는 육전의 형태로 전투 양상을 바꾸었다.[15] 이 시점에서 로마는 지중해에서 적수가 없는 최강국이었으므로 로마에 맞섬은 자살행위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동방의 안티고노스 왕조, 셀레우코스 제국같은 헬레니즘 제국들도 전부 로마에게 패배해 복속당하거나 쪼그라든 시기였다.[16] 라틴어 포이누스(Poenus)를 형용사화한 포이니쿠스(Poenicus)에서 영어로 고대 페니키아인들을 가리키는 퓨닉스(Punics)가 나왔다.[17] 카르타고가 그나마 선전한 포에니 전쟁 시점에는 양국의 인구수 자체가 거의 100만 명 이상 차이났다. 다시말해 로마 제국 입장에서 카르타고 역시 그나마 체급이 큰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다.[18] 사실 완전히 정복할 능력도 부족했다.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정복이 안 된 누미디아인들은 거의 유목민들이었는데, 여러 역사적 사례가 알려주듯 이런 유목민들을 완전히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훗날 지중해 최강국이 된 로마조차 이들을 1차로 굴복시키기 위해 유구르타 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르고도 여러번의 전쟁을 진행하고 나서인 아우구스투스 치세가 되어서야 완전히 정복한다. 이는 로마 이후로도 이어지는데 당장 러시아 제국이 유목민들을 제압한건 시베리아 철도가 개발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은 가야하고 이란과 오스만 같은 중동권 국가들도 자국내 유목민들을 통제하는데 애를 먹었다.[19]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꾼들이 노예로 대체됨은 기술이 발전해 노꾼에게 숙련도가 필요없어진 중세 이야기고, 고대에는 노꾼들은 쉽게 대체하기 힘든 고급 인력이었기에 주로 자국의 시민 계층이 맡았다. 그래서 대규모 해전에서 완패하면 시민 계층에 막대한 손실이 온다.[20] 초반에는 이 충각으로 들이받는 전법으로 카르타고가 크게 재미를 보았으나 이후 로마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백병전을 해전에 도입하는 방법이 연구되었고 그 결과 까마귀(코르부스)를 배에 달아 백병전을 유도하는 식으로 해전의 방향을 바꿔서 승리하게 되었다. 물론 코르부스는 항해에 있어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 로마군이 해전에 대충 익숙해지자마자 바로 사장되었다.[21] 괜히 고대 국가가 중농주의를 펼친 게 아니다. 당장 조선도 사농공상 정책으로 대표되는 농업 중시 정책을 펼친 이유도 이게 아니면 국력을 획기적으로 늘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술이나 상업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발달한 현대에서도 식량 물가 조절이 되지 않으면 정권이 요동칠 정도로 식량은 국가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22] 카르타고 주변의 영토도 식량 생산력도 높아서 로마에 정복된 후에는 주요 식량 생산지가 되었고 이는 아랍 통치기까지 이어졌다. 북아프리카가 오늘날과 같은 사막 지대가 된건 아랍인의 지배가 끝나고 그 자리를 채운게 농사를 짓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는 베르베르 계통 왕조가 생기고 나서다. 단지 동시기 라틴 지역과 비교하면 훨씬 모자랐을 뿐이다.[23] 사실 이 부분은 카르타고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부분 도시국가들은 당시 공존하던 동방의 왕국과 제국들이나 후대에 출현하게 될 왕국이나 제국들보다 인구가 적었다. 그렇기에 전쟁에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소모품이라고 보지 않았다. 특히 그들에게 병역은 의무이기 이전에 시민이라는 자질을 갖게 하는 사명이며 시민이기에 누릴 수 있는 "권리"로도 취급되었다. "의무일 뿐만 아니라 권리". 그리스에서는 시민권 뿐만이 아니라 아예 정예병인 중장보병에 배속되기까지 했고. 그렇기에 전투에서 크게 패해 이런 소중한 시민들을 많이 잃으면 그 분노 역시 엄청났다. 일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는 해군이 후퇴하면서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하여 해군 제독들을 처형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이 폭풍우 때문에 불가피하게 급히 후퇴하였음에도 이러하였을 정도였다.[24] 로마의 콘술과 유사한 직책으로 카르타고에서는 수페트라고 호칭했다. 수페트라는 명칭은 고대 이스라엘의 판관과 명칭이 동일하다.[25] 복층 주택 자체는 로마의 인술라 등 고대에도 이미 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특이한 것은 아니다. 로마의 인술라를 최초의 아파트라고 하기도 하는 등 복층 주택에 흔하게 붙는 수식이다. 제대로 된 현대적인 아파트는 르 코르뷔지에가 지은 것이 최초이다.[26] 실제로 이러한 풍습은 전혀 다른 지방인 중앙아시아의 돌궐, 요, 몽골에서도 나타나며 현재의 사하라 북쪽 일대의 유목민들에게도 이러한 풍습을 관찰할 수 있다. 아일랜드러시아도 이러한 문화가 아직 남아있다.[27] 몰렉 문서에서 보듯 페니키아인들은 대개 이런 풍습이 있었다.[28] 반쯤 전설적인 인물이다.[29] 로마의 기원전 753년 건국이 역사적 사실보다는 거의 전설로 여겨지는 것처럼, 카르타고도 마찬가지이다.[30] 육상교통보다 해상교통이 빠르고 원활하던 전근대에는 남이탈리아 기준으로 북이탈리아보다도 카르타고가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와 가까웠기 때문에, 카르타고 인근은 거의 완전히 로마화(라틴화)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31] 성령이 강림하지 않은 미사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다른 기독교 교파의 예배를 무효 처리하고 아예 이교도 취급하던 극단주의 성향의 교파였다.[32] 원래 아에티우스가 활약하던 당시 북아프리카를 수비하던 사령관은 보니파키우스였는데, 아에티우스보다 더 뛰어난 장군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내전 중 북아프리카 수비병력을 긁어모아와서 아에티우스와 전투를 벌여 이겨가던 도중 아에티우스의 일기토 신청을 수락하고 그와 일대일 대결을 하다가 전사했다고 한다.[33] 정확히 따지자면 반달리즘으로 유명한 반달족이 통치했다는 게 가장 클 것이다. 대략 "반달족? 걔네 때문에 북아프리카 막장됨!"의 느낌이다.[34] 한창 때는 아프리카 속주 영지의 절반 가까이가 황제의 개인 영지였고, 이후 북아프리카 속주 농토의 1/6을 개인소유로 보유한 원로원 의원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기도 한다.[35] 영지고 뭐고 다 버리고 로마로 도망친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다.[36] 황제 즉위 이전의 이라클리오스가 가졌던 직함이 바로 카르타고 총독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자신의 옛 본거지로 천도하려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과거 자신들이 멸망시킨 도시를 새 수도로 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중국의 금나라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만주-요동에서 북중국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정강의 변으로 멸망시킨 북송의 수도 카이펑으로 천도했다.[37] 따지고보면 당시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도 자신들이 멸망시킨 도시를 수도로 삼은 것이니 로마 입장에서는 카르타고를 새 수도로 삼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38] 특히 리비아의 도시들과 시리아 내륙도시들이 유달리 심했다. 덕분에(?) 오늘날엔 로마 시대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39] 다만 이집트는 고대-중세 시절부터 농업이 잘되는 꿀땅으로 명성이 높았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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