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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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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ian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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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북아프리카 정복2.2. 로마 약탈2.3. 쇠퇴의 시작2.4. 칼게돈파로 개종한 힐데리크2.5. 동로마 제국의 침공
3. 역대 군주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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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429~534
위치 튀니지,알제리 일대
수도 카르타고
국가원수
주요 군주 가이세리크(428~477), 겔리메르(530~534)
민족 로마인, 누마디아인, 반달족, 베르베르인, 알란인
종교 아리우스파 기독교
성립 이전 서로마 제국, 알라니아 왕국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

1. 개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사르데냐, 코르시카에 위치해 있던 반달족알란족의 연합왕국이었다. (429 / 442 ~ 534년)

정식 명칭은 Regnum Vandalorum et Alanorum (Kingdom of the Vandals and Alans)으로 반달-알란왕국이다.

2. 역사

2.1. 북아프리카 정복

반달족의 족장인 군데리크는 알란족의 왕위를 얻은 후 북아프리카에 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반달족이 자리잡았던 히스파니아(스페인) 일대가 의외로 로마의 공격에 취약했기 때문이다.[1]

428년에 군데리크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가이세리크가 왕위를 이었다. 가이세리크는 비록 노예 출신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을 뿐 아니라 낙마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되었으나 용감하고 잔혹하면서도 지략이 뛰어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형의 유지를 받들어 북아프리카의 로마 영토인 카르타고를 점령하는 동시에 지중해 연안의 영토를 침공하여 정복하였다.

반달족은 429년에 지브롤터를 건넜고, 435년까지 마우레타니아누미디아를 석권한 후, 439년에 카르타고를 함락하였다. 442년, 가이세리크는 곡물 수출을 서로마 본국(이탈리아)에 계속해주는 대가로 사실상 독립을 인정받았다.[2] 여기에는 아프리카 백작(Comes) 보니파티우스(보니파키우스라고도 불린다)가 서로마의 중앙정치에 휘말려 432년 임지인 아프리카에서 멀리 떨어진 라벤나 근처의 이탈리아 아리미눔(現 리미니)에서 어이없게도 아에티우스와 일기토를 벌이다가(...)[3]중상을 입었고 머지 않아 죽어서 통치의 공백이 생겼던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서로마는 훈족의 침입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아틸라가 사망하자 반달족에 대한 대책으로 정략결혼을 추진했지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죽이고 황제가 되자 교섭은 결렬되고 455년에 로마에 침공하기까지 이른다.

2.2. 로마 약탈

파일:Genseric_sacking_rome_456.jpg

455년 6월 가이세리크 휘하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 군대에 의한 로마 약탈. 약탈은 2주에 걸쳐 자행됐으며, 서로마 제국은 410년 서고트족의 침탈에 이어서 두 번이나 로마가 이민족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461년 마요리아누스가 아프리카 원정에 착수하고자 이베리아 반도카르타헤나에 함대를 집결시켰지만 사전에 로마 내부의 배신자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가이세리크의 기습으로 실패했고, 468년 바실리스쿠스가 이끄는 동서 로마 연합 함대가 카르타고에서 40km 떨어진 본 곶에 집결하였으나 반달 왕국 해군에게 괴멸당하고 말았다.(본 곶 해전, 468) 이것은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 간의 마지막 합동 작전이었다. 이후 동로마의 황제 제노는 474/476년의 협정에서 가이세리크와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지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3. 쇠퇴의 시작

477년, 반달 왕국을 창시하고 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가이세리크는 88세의 고령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장자였던 후네리크가 반달 왕국의 2대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눈치를 보며 니케아-칼케돈 종파를 용인하였으나 이후에는 그에 개의치 않고 482년부터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종파의 신도들을 탄압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적도 다수 숙청하였으나, 숙청이 너무 과해 오히려 국력 약화를 초래했다. 이후 그의 치세에 잔존 로마 군단들과 로마화된 베르베르인이 세운 무어-로마 왕국에 의해 서쪽 지역을 빼앗기고, 남쪽 지역에서도 베르베르인들의 토착 왕국에 또 땅을 배앗기는등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여러 베르베르족들이 독립해 내륙 지역 영토를 잠식하고 약탈을 오기 시작하는 등의 행위가 이어졌다. 그가 484년에 죽은 후에는 군타문드가 즉위하여 니케아-칼케돈 정통파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였으나 이미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를 접수한 테오도리크의 동고트 왕국에게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베르베르인들에게 북아프리카 해안 도시들이 약탈당하는 등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496년, 군타문드의 사후 즉위한 트라사문드는 독실한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로서 니케아-칼케돈 정통파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나 후네리크 때와는 달리 유혈 박해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트라사문드는 28년간 통치한 후 523년에 죽었고 겐세릭의 손자인 힐데리크가 즉위하였다.

2.4. 칼게돈파로 개종한 힐데리크

힐데리크는 가이세리크의 장남이자 반달 왕국의 2대 왕인 후네리크의 아들이었는데, 어머니는 바로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였다. 그녀의 영향으로 힐데리크는 반달 왕국의 군주 중에서 삼위일체파 정통론자들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고, 그 스스로도 니케아-칼케돈 파로 개종하였다. 이후 힐데리크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한 세기 만에 카르타고 주교구가 회복되었으며, 잠깐이나마 카르타고 시민들은 반달 왕국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힐데리크는 전쟁을 기피하여, 해안 도시들에 대한 약탈을 지속하던 베르베르인들에 대한 전쟁을 사촌인 호아메르에게 일임하였는데, 이는 반달족 귀족들에게 나약한 왕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어 반감을 샀다.[4] 530년에 베르베르인에게 반달 군이 패배하자, 반달족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피지배층에게 지나치게 관용적인 왕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를 처형하였다.

2.5. 동로마 제국의 침공

46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 연안의 섬들을 장악하여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정치, 종교, 인종적으로 피지배인들을 너무나 억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였으며[5] 결국엔 동로마 제국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마지막 왕인 겔리메르는 항복 후 소아시아 내륙의 갈라티아에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파트리키우스(최고 귀족) 제의를 받았던 등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단 파트리키우스 제의는 제국의 공식 관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마 국교도(니케아-칼케돈파)였어야 되었는데 겔리메르 본인이 아리우스파에서의 개종을 거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6]

3. 역대 군주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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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육로로 이어져있다는 점과 로마의 최전방인 라인 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건 아니라는 점이 크다. 당장 얼마 전에 알란족과 실링기 반달족이 로마군과 서고트족 동맹군에게 얻어맞아 몰락했으니 군데리크는 그걸 아주 잘 알았을 것이다. 반면 북아프리카는 서로마에서 제일 세금이 많이 걷히는 꽤 쓸모있는 땅이었던 데다가, 주변에 위협적인 부족이 없어서 전통적으로 로마의 후방지역으로 간주되고 주둔 병력도 적었다. 이탈리아 본토와 가깝기는 하지만 당시 로마는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느라 바다 건너 북아프리카까지 대군을 투입할 만한 여유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2] 영어 위키백과 Vandal Kingdom 중, 'The Western Empire under Valentinian III secured peace with the Vandals in 442. Under the treaty, the Vandals gained Byzacena, Tripolitania, and part of Numidia and confirmed their control of Proconsular Africa.' 및 'The treaty in 442 between Rome and the Vandals seems to have ensured that grain shipments continued.'[3] 호노리우스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황권이 약해졌지만 어쨌든 교체하고 새로 세울 대안이 딱히 없어 계속 왕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로마의 테오도시우스 왕가가 유력 군인들 간 좋게 보면 충성경쟁 나쁘게 보면 갈라치기를 조장했다. 한국사로 따지면 최충헌이 확고하게 장악하기 이전의 무신정권 초기에 고려 명종이 유력 무신들 사이에서 취했던 스탠스를 생각하면 대강 맞아떨어진다.[4] 로마와 접촉한지 한 세기가 흘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전사다움이 왕의 덕목이라고 여겼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로마도 공화정 시절에는 저렇게 상무정신과 전사다움이 사회의 주된 기풍이었지만 패권국이 된 지 오래되어 사라진 것이긴 하다.[5] 북아프리카 등지로 향한 일부는 기독교도에게 혀를 채찍질당하는 만행을 겪어 보복으로 기독교도 2천여 명의 혀를 잘라버렸다.[6] 영어 위키백과 Vandal Kingdom 중, 'Gelimer himself was honourably treated and granted large estates in Galatia, where he lived to be an old man. He was also offered the rank of patrician but refused it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convert from Arianism to Nicene Christi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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