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년 로마 약탈 | ||
시기 | 서기 410년 8월 24일 | |
장소 | 서로마 제국 로마 | |
원인 | 알라리크의 이탈리아 침공, 호노리우스와의 협정 결렬 | |
교전세력 | 서로마 제국 | 서고트 |
지휘관 | 호노리우스 | 알라리크 아타울프 |
병력 | 불명, 약 400명 이상 | 약 40,000명 많은 수의 민간인들 |
피해 | 전멸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두 번째[1] 로마 약탈 | |
영향 | 서로마 제국의 쇠퇴 시작, 이민족의 영향력 강화 |
1. 개요
395년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는 일리리아 일대를 장악하고, 서로마 제국을 향해 칼 끝을 겨누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호노리우스는 무능한 암군으로 이 침공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최후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권력을 잡고 있었던 서로마 제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서고트족의 침공에 대응했다.401년 스틸리코가 북방에 신경쓰고 있었을 때 서고트족은 7,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제국을 공격했다. 하지만 폴렌티아 전투에서 대패한 서고트 군대는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욕을 버리지 못한 알라리크는 또다시 군대를 준비했다. 이번엔 북쪽의 동고트족의 족장 라다가이수스와 연합해 20,000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재침공했다.
그러나 이 침공 또한 스틸리코의 반격에 무산되었다. 하지만 로만 브리튼에서 건너온 대립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의 침공 때문에 스틸리코는 할 수 없이 알라리크에게 황금을 지불해 일시적인 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것에 불만을 품은 올림피우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모의해 스틸리코를 모함했고, 결국 그는 호노리우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참수당했다. 그러자 그것에 분노한 스틸리코의 게르만계 병사들이 집단으로 탈영해 알라리크의 서고트 군대에 합류했고, 알라리크는 제일 큰 방해물이 사라진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2. 제1차 공방전
알라리크는 호노리우스와의 협정 체결을 원했는데 "금과 인질들 그리고 판노니아 지방으로의 이주"가 그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오만하고 무능한 호노리우스는 거절했고,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의 처형 6주 후 전격적으로 이탈리아의 속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동생인 아타울프를 불러 군대에 합류시켰다. 서고트족의 군대는 아르미니움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파괴했고, 남쪽으로 진격했다.당시 로마시에는 무려 80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세상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것이었다. 408년 알라리크는 공격을 개시했고, 로마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테베레 강 유역이 서고트족에게 점령당하자 고립에 따른 질병과 기아에 고통받던 로마시의 서로마 제국 정부는 알라리크에게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그때의 대화가 압권이다.
알라리크는 협정을 체결하러 온 사절단에게 요구했다.
"건초는 무성할수록 베어내기 좋구나"
"모든 금과 은 좋은 가구들과 도시 내의 노예들을 내놓아라"
그러자 사람들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 것입니까?"
''너희들의 목숨.''
"건초는 무성할수록 베어내기 좋구나"
"모든 금과 은 좋은 가구들과 도시 내의 노예들을 내놓아라"
그러자 사람들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 것입니까?"
''너희들의 목숨.''
총 5,000 파운드의 황금과 30,000 파운드의 은, 4,000 장의 가죽, 3,000장의 염색된 천, 그리고 3,000 파운드의 후추로 로마시는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풀려난 노예들은 알라리크의 서고트 군대에 합류했고, 이로 인해 40,000명에 달하는 군대가 편성될 수 있었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몸값을 지불했고, 408년 12월 북쪽의 에트루리아 지방으로 서고트족이 철수했다.
3. 제2차 공방전
409년 1월, 로마 원로원은 라벤나 궁정에 있는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로마 귀족 아이들과 서고트의 귀족 아이들을 교환하여 알라리크와의 동맹을 더 견고히 다지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올림피우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던 호노리우스는 이를 거절함과 동시에 달마티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5개 군단을 소환해 6,000명의 통합군을 구성했다. 이들은 로마시와 다른 도시들을 방어하기 위해 소환되었지만 이들의 지휘관인 발렌스는 에트루리아의 서고트족을 공격했다. 하지만 알라리크의 총공격에 의해 전멸당하여 오직 100명 정도만이 간신히 탈출해 로마시에 이 참혹한 사실을 전할 수 있었다.두 번째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모였고, 이번엔 교황 인노첸시오 1세도 함께 했다. 서고트족에서는 아타울프가 협정을 맺기 위해 출발했다. 하지만 올림피우스는 이탈리아 북부에 존재하는 모든 군대를 규합해 아타울프를 방해하려고 했다. 이들은 피사 전투에서 충돌했고, 아타울프는 간신히 탈출했으며 1,100명의 고트족의 목을 벤 올림피우스는 아타울프가 탈출했다는 이유로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빈 자리를 차지한 자는 요비우스였는데 그는 스틸리코의 동료이자 알라리크의 친구였다. 그렇기에 새롭게 설립된 내각은 대서고트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알라리크는 그들에게 매년 황금과 곡물, 그리고 달마티아, 노리쿰 그리고 베네티아 속주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호노리우스 황제는 또다시 거절했고, 알라리크에게 모욕적인 편지까지 보냈다.
협상은 결렬됐고, 알라리크는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거병한 그는 다시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409년 로마를 포위했다. 또다시 기아와 질병에 고통받게 된 로마 시민들은 협상을 시도했고, 이번에는 로마의 장관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호노리우스 배제를 시도했다. 그런 와중에 4,000명의 동로마 제국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자신감이 생긴 호노리우스는 협상에 지지부진한 태도로 일관했다.
4. 제3차 공방전과 약탈
호노리우스와 알라리크가 라벤나에서 12km 떨어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호노리우스가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사루스를 시켜 알라리크를 급습토록 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하지만 알라리크는 살아남았으며 격노한 그는 로마를 함락시키라고 명령했다. 8월 24일 로마의 성문이 열리면서 서고트의 대군이 시내로 진입했고, 이로써 로마는 기원전 390년에 있었던 갈리아인의 약탈 이후 800년만에 최초로 이민족 군대에게 함락당했다.3일간의 대약탈이 이어졌고, 포로 로마노, 아우구스투스 영묘,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비롯한 과거 황제들의 능들이 파해쳐졌으며 귀중한 물건들이 전부 도굴당했다. 그들은 로마 전역을 약탈하면서 궁전들, 성당들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많은 시민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황제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몇 시민들은 간신히 탈출했고 일부는 노예로 팔려갔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해당하거나 강간당했다.
1,100년이 넘는 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의 수도' 도시 로마가 갈갈이 찢겨 나가는데는 불과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5. 여파
3일 후 알라리크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부유한 도시와 귀중한 인질(갈라 플라키디아)을 잡았다. 서고트군대는 캄파니아, 루카니아, 칼라브리아와 같은 이탈리아 남부 지역들을 약탈했고, 카푸아 시가 함락되면서 서고트족은 시칠리아 섬을 위협하기까지 했다.하지만 메시나 해협을 건너다가 많은 배가 침몰당했고, 알라리크가 병으로 급사하면서 침공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 쐐기를 꽂았고, 추후에 있을 게르만족과의 역학 관계가 전반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 기원전 390년의 켈트족에 의한 약탈에 이은 두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