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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년의 유럽.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고트족. |
고트족의 확산 지역 | |
구별 색상 | 내용 |
◇ | 전통적인 예탈란드(Götaland): 스웨덴의 남부지역 |
◇ | 고틀란드 섬(Gotland) |
◇ | 3세기 비엘바르크(Wielbark) 문화 지역(지금의 폴란드) |
◇ | 체르니야코프(Chernyakhov) 문화 지역(지금의 우크라이나) |
◇ | 로마 제국 |
라틴어: Gothi, Gothones
스웨덴어: Goter
스페인어: Godos
이탈리아어: Goti
영어: Goths
1. 개요
5세기경 서고트족 병사. 손에 들고 있는 건 투창이다. |
그 이름은 고딕(Gothic) 양식이라는 역사, 문화 용어로도 남아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 북유럽 성당 양식을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세련되지 못했던 고트족에 빗대어 고딕 양식이라 일컬었으니[1],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닌 셈이다. 그래도 원래 명칭이던 고딕은 오늘날에는 훌륭한 문화 양식으로 인정받으므로 문화 파괴 활동 대명사인 반달리즘이란 오명을 얻게 된 반달족[2]보다는 대접이 나은 셈이다. 고트족은 3세기 때까지만 해도 게르만족의 대부분을 느슨하게나마 거느렸던 거물급 민족이었으니 그 대접이 과했던 것도 아니다.[3]
지금의 예텔란드 섬[4]과 스웨덴 남부인 예탈란드 지방에 살았던 기트족이 고트족의 원류라는 말이 있지만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기트족이 고트족인지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5] 원래는 지금의 폴란드나 발트해 연안에 살았던 민족으로 추정된다. 이후 로마 영내를 침범할 무렵에는 오늘날의 루마니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트족은 후일 서고트족(Visigoths)과 동고트족(Ostrogoths)으로 따로 일컬어진다. 참고로 'vis', 'ostro'가 방향이 아닌 다른 단어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는데, 테오도리크 대왕의 로마인 정치가인 카시오도루스가 이들을 동고트(ostrogoth)에 대비되는 비스고트라고 지칭하기 전까지 서고트족은 자기들을 서고트(visgoths)라고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종전의 견해대로 동/서에 따라 붙은 것이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 후기 민족대이동[6]
2. 3세기 이후
2세기 말부터 일부 고트족 분파가 로마군으로 복무했지만(3세기 사산 왕조와 고르디아누스 왕조와의 전쟁에서 그 존재가 또한 기록되어 있다) 고트족이 역사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건 3세기의 위기[7] 때부터였다.[8]376년에서 418년 서고트족의 이동 경로 |
국가 운영이 차츰 막장으로 기울던 로마는 최초에는 이들을 받아들여 북방 국경 안정화와 국경지대 경제 활성화라는 토끼 두 마리를 동시에 잡으려 했지만, 부정부패로 말미암은 삽질로 서고트족은 일부 동고트족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버린다. 결국 고트족의 지도자였던 프리티게른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심지어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발렌스와 동로마군의 고위 및 중간급 장군진, 그리고 주력 야전군의 3분의 2가 이 싸움에서 모두 전사했을 지경이었다.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을 간신히 제압하는 듯했으나, 때마침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긴장이 고조되면서 결국 동맹 협정을 맺어 고트족을 로마 영내에 아예 정착할 수 있게 허용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야만족이라 멸시하던 이들을 물리치기는커녕 동맹 상대로 승인하고 국내 거주까지 허용했다. 본래 고대 로마는 이런 '야만' 부족들을 국경 내에 정착하게 하고 동화정책을 꾸준히 수행해 인력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목적을 실현하려 했었다. 그런데 고대 로마 말기에는 '야만' 부족들의 국경 내 정착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고, 국내 사정 탓에 이 부족들을 전성기만큼 억제하지 못하면서 국경 내에 들어온 부족들이 깽판을 부리기 시작했던 것.
450년경 로마 제국의 세력도. 이미 서로마 제국은 브리튼 섬과 북아프리카에서 철수했고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 일대에 이민족 세력이 등장했다.[9] |
TETE RORO MAMA NUNU DADA TETE LALA TETE[11]
로마, 난 그대들을 내 손으로 파괴하겠다, 무기와 갑옷들을 내놓고 너희 자신들은 숨어라!
이후 서로마에 의해 아퀴타니아[12]를 할당받아 동맹자로 정착한 후 아틸라와의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의 동맹군으로 참여해 왕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훈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450년대 이후 서로마가 더욱 막장이 되자 주변 속주를 본격적으로 공격, 남서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에도 진출하여 잔여 서로마 지역을 차지하고 이 지역의 맹주로 있던 수에비족을 반도 북서쪽으로 축출해 버린다.로마, 난 그대들을 내 손으로 파괴하겠다, 무기와 갑옷들을 내놓고 너희 자신들은 숨어라!
500년경의 서고트 왕국 세력도.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은 수에비족 아래에 있었다. |
493년 ~ 540년의 동고트 왕국 세력도. |
전통적인 대제국의 수도 로마를 최초로 약탈하고 제국의 위신에 치명상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고트족의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다.
3. 쇠퇴
[13]
서고트는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경쟁 부족이었던 프랑크 왕 클로비스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왕 알라리크 2세까지 전사해버렸다. 이로 인해 셉티마니아(남프랑스 연안)를 제외한 오늘날 프랑스 방면의 영토를 잃고[14] 서고트는 이베리아 반도로 피난해 권토중래하여 세력을 다시 모았다. 이때 즉위한 어린 왕을 대신해서 동고트 족의 테오도리크 대왕이 섭정을 하기도 했고 그 후엔 내분에 휘말려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동로마 제국에 내주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50년 동안 힘을 결집하여 최종적으로 수에비 왕국 및 잡다한 이베리아 북부의 민족들과 남부의 동로마 세력을 전부 물리치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왕권 투쟁은 여전했다. 결국 100여 년 뒤인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침공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나 잔존 세력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 후에 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갈라진 여러 왕국들이 다시 통일되고 레콩키스타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 스페인 왕국으로 발전한다.
한편 이탈리아 본토에서 군림하던 동고트 왕국은 테오도리크 대왕 치세에 로마인과 동고트인이 1국 2체제 형식으로 평화롭게 잘 지냈으나 526년 그가 사망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외손자인 아탈라릭(Athalaric)이 후임 왕으로 즉위했으나 즉위 당시 나이가 10살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친이자 테오도리크의 딸이었던 아말라순타(Amalasuntha)가 섭정을 하였다. 아탈라릭은 즉위 8년 만인 534년에 사망했고, 아말라순타는 여왕으로 즉위한 후 공동왕으로 테오도리크의 조카 테오다하드(Theodahad)를 임명했는데 오히려 테오다하드의 계략에 말려 살해당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를 구실로 535년 동고트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후 이탈리아와 달마티아, 판노니아에서 고트 전쟁이라고 불리는 18년간의 전쟁이 벌어진 끝에 결국 동고트 왕국은 55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나르세스에게 멸망당했다.[15]
이후 적지 않은 동고트인들이 아나톨리아로 끌려가 대(對)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일부는 고토그라이키(Γοτθογραῖκοι)란 부대로 편성되어 동로마 제국의 핵심 정예 부대로 탈바꿈했다. 대 이슬람 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소수 부족 가운데 불가르족의 경우는 적지 않은 수가 탈영하거나 이슬람에 붙어서 배신을 했던 반면, 동고트 병사들은 의외로 동로마 제국을 잘 섬겼다. 이탈리아에 그대로 남은 동고트족은 동로마의 정규군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랑고바르드족과 싸워서 이들의 이탈리아 침공을 막아냈다. 그나마 이탈리아 내에서 로마 영토와 로마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고트족 출신 군인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등으로 전출당해 편성된 동고트인들의 부대는 훗날 옵티마테스 부대로 개명되었는데, 이슬람 제국의 맹공 때문에 제국이 어려울 때에도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시해하는 등의 부작용을 일으켰다. 이들이 적에게 투항하지는 않았지만 대우를 시원찮게 하는 황제를 곧잘 죽여서 콘스탄티누스 5세 때에는 전투 부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종합하면 이탈리아와 아르메니아, 발칸 반도의 동고트인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서고트 왕국이 이슬람에게 멸망한 후 정체성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동로마 제국에 융화된 것으로 보인다.[16]
본토에 남아 있던 기트족은 11세기경 스웨덴 왕국의 성립 이후로 북쪽의 스베아족과 점차 융합하여 스웨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성립하게 되었다.[17]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고트족의 이름은 현재 스웨덴 본토의 지명인 예탈란드(Götaland)와 고틀란드섬(Gotland)에만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18] 참고로 훈족의 침공 당시 크림반도에도 고트족이 거주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테오도로 공국 참조. 크림 반도의 고트족은 훈족, 아바르족, 동로마 제국, 제노바인들에게 지배받았지만, 18세기까지 근근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곳을 장악한 러시아가 고트족들을 아조프 해 북부로 이주시키고, 이후 종교가 같은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들과 통혼하여 점차적으로 동화되었으며 몇 만 명 정도만이 우룸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지닌 수준이다.
스웨덴에서 한때 고트족 열풍이 불어서 '스웨덴은 고트족의 역사 계승권이 있고 고트족을 이어 전 유럽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나머지 유럽인들은 이에 대해 가뿐히 논파하면서 무시. 고트족의 명성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1434년 바젤 공의회에서 고트족의 역사 계승권을 두고 스웨덴 대표와 스페인 대표가 언쟁을 했었는데, 스페인 측은 고향이랍시고 구석 촌에 처박혀 빌빌거린 야만인들보단 영웅다운 무용담이 전해 내려오는 서고트족의 후예인 스페인이 진정한 고트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스웨덴 대사의 말을 막은 일화가 있다. 스웨덴 왕의 정식 명칭은 '스웨덴인, 고트인, 반달인의 왕'이었지만 1973년 칼 16세 구스타프가 즉위하면서 '스웨덴의 왕'이란 명칭만 쓰고 있다.
4. 여담
고트족은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에 아리우스파 그리스도 선교사였던 울필라스(Ulfilas 또는 Wulfila)[19]에 의해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래서 가톨릭을 믿고 있었던 서로마인들과 결국 융화하지 못했다. 한편 울필라스는 선교를 위해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했는데, 현재에도 그 일부가 남아 있으며 자료가 태부족한 동게르만어군 연구에 대단히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18세기 중엽까지 우크라이나 남부의 크림 반도에 살았던 크림 고트족들도 크림 고트어를 사용했지만[20], 현지에 동화되면서 고트어도 소멸되었다.
서브컬처의 일종인 고스족과 한글 표기만 다를 뿐 영어 표기는 같다. 그래서 현대 고스족처럼 이 고트족도 바디 피어싱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 오해하기도 하지만 실제 고트족은 바디 피어싱을 한 기록이나 유물이 손에 꼽는 수준이다. 사실 현대에 유행하는 바디 피어싱의 대부분은 북유럽보다는 인도 쪽에서 개발된 것이 많고 전근대 시절에는 응급처치가 잘 발달해 있지 않아서 북구처럼 주위에서 약재를 구하기가 어려운 환경에서는 피어싱을 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5. 관련 문서
[1] 양식은 투박할지 몰라도 로마의 건축 유산을 이어받고 발전한 것이다. 고딕이라 업신여기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는 르네상스가 끝날 때까지 이런 건축술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로마네스크 양식만 고수했다.[2]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 당시 로마 교황이던 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를 만나 도시 파괴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고 반달족은 이 약속을 지켰다고 알려져 있다. 후대 역사가들은 반달족이 무자비한 파괴 행위를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두산백과). 그러니 반달족이 들었다면 무척 억울했을 법하다. 사실 그들은 로마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잘 받아들였기에 문화재를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를 파괴하지 말라’는 로마 교황의 당부에도 순응했다. 파괴하지는 않았다. 근데 약탈은 했다.;;; 후대 역사가들 역시 반달족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한경 경제용어사전)[3] 덤으로, 3세기의 반달족은 고트족에게 굴복했던 잡다한 민족 중 하나였다.[4] 현재 사용하는 지명인 고틀란드(Gotland)나 예탈란드(Götaland)도 '기트족의 땅'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다. 스웨덴 제2의 도시인 예테보리(Göteborg)도 기트족의 명칭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되고 있다.[5] 기트족(영문위키) 기트족은 영어식 표현으로 베오울프를 비롯한 고대 영문학에서 종종 언급되었다. 스웨덴 본토에서는 '예타르'(Götar)라고 부른다.[6] 4세기에서 6세기까지 게르만 여러 민족, 훈족, 알란족 등이 서유럽과 북아프리카로 대규모 이동해 정착한 일. 훈족에게 쫓겨난 서고트족이 로마 영내로 침입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민족이 잇따라 각지로 이동한 사건. 그 중에서 프랑크 왕국이 큰 세력을 형성해 중세 유럽 세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7] 서기 3세기경 디오클레티아누스 즉위 직전까지의 군인 황제 시대. 내전이 빈발하고 북방 게르만족의 침공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결로 여러 황제가 전사하고, 최초로 부획되는 황제까지 나오던 시기를 지칭한다. 제국이 3분할된 적도 있다.[8] 다만 238년 히스트리아를 약탈하거나 251년에 데키우스 황제를 죽여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고, 253~256년 아시아 속주들을 털어버리는 등 크고 작은 충돌은 있어왔다.[9] 지도에선 훈족의 영토가 매우 크게 그려져있지만 저정도 까지는 아니었다.[10] 로마가 아직 도시국가였던 기원전 390년에 브렌누스가 이끄는 갈리아족의 일파가 로마를 약탈하고 몇 개월 동안 주둔한 적이 있었으나, 그 때를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11] 띄어쓰기를 달리하면 이렇게 된다. TE/TE RO/RO MA/MA NU/NU DA/DA TE/TE LA/LA TETE → TE TERO ROMA MANU NUDA. DATE TELA, LATETE![12] 현대 프랑스의 아키텐 지방이며 보르도와 그 일대이다.[13] '브리티시 왕국'이 보이는데 브리튼인은 통일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 아서 왕 전설이 사실이라면 모를까... 게다가 아틸라의 영역이 스웨덴(!)까지 표시되어 있는 어처구니 없는 오류가 있다.[14] 이것을 계기로 프랑크는 갈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프랑스는 여기에 기초하고 클로비스는 실질적인 프랑스 건국 시조 반열에 올라선다.[15]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가 본국의 부족한 지원하에서도 이 전쟁의 대부분을 수행하면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으나 최종적으로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린 것은 나르세스였다.[16] 그러나 동로마 특성상 아들이 아버지의 병역을 잇는 군제였고, 후임 부대원은 선임 부대원의 아들이거나 조카 혹은 사위인 경우가 많아서 옵티마테스 부대에 옛 동고트족 군인의 피가 상당히 짙게 흘렀을 개연성은 대단히 높다.[17] 앵글로 색슨의 서사시 <베오울프>엔 6세기에서 7세기에 기트족과 스베아족 사이에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다른 스칸디나비아 사가에는 이를 다룬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특이하다.[18] 고틀란트섬에서 쓰였던 고틀란트어가 남아 있지만, 현재는 화자 500명 미만의 사어이다. 고대 노르드어의 특성이 잘 남아 있다. 본토의 기트족도 스베아, 데인인과 같은 동노르드어 계열 언어를 썼다. 다만 고틀란트어나 노르드어는 북게르만어군이다.[19] 참고로 울필라스 본인도 고트족 출신이다. 이름의 뜻은 고트어로 작은 늑대라는 뜻이다.[20] 이들이 세운 나라인 테오도로 공국은 역사상 최후의 고트족 국가로 여겨지며, 15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어 멸망했다.[21] 전승에 따르면 스베아족과 기트족의 혼혈로 기트족으로서 성장하였다. 다만 기트족이 고트족이 맞는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