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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1 14:07:45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고대 로마의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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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700> 시대 전쟁 · 전투 교전국
파일:SPQR_sign.png 로마 공화국 알리아 전투 파일:faction_emblem_senones_256.png 갈리아족(세노네스족)
삼니움 전쟁 파일:Samnites_league_mon_256.png 삼니움족
피로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7.png 에페이로스 왕국
제1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제2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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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타니아 전쟁 파일:external/a352ddf511b96cba04fbaa172c0df140c9cb8c8ae188ad8ddda8a5c3a3eae004.png 루시타니 부족연합
누만티아 전쟁 파일:external/b66a81d7e3c5440cfef450e3309a2b4b425f1dcd788e510bd84b747e2e2573be.png 아레바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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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파일:SoundCloud82837371853.jpg 아르메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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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유대-로마 전쟁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유대 반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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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라우눔 전투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Hun_flag.png 훈족
본 곶 해전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andal_flag.png 반달 왕국 }}}}}}}}}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영어: Third Mithridatic War
시기 기원전 74년 ~ 기원전 63년
장소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시리아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Bithynia.png 비티니아 왕국
파일:external/436a701f1ebef3a53c3c7e2ac6cc777e5961f6ef829d8f39f9db61a7931a3210.png 갈라티아
키지코스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0px-Artaxiad.svg.png 아르탁세스 왕조 아르메니아 왕국
파일:colchis_emblem_256.png 이베리아 왕국
사르마티아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트리아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미트리다테스 6세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탁실레스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헤르모크라테스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마카레스†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마르쿠스 마리우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0px-Artaxiad.svg.png 티그라네스 2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0px-Artaxiad.svg.png 미트로바르자네스
파일:colchis_emblem_256.png 아르토케스
알바니아의 오로에세스
결과 로마 공화국의 승리와 동방 제패.

1. 개요2. 배경3. 경과
3.1. 폰토스 왕국의 침공과 루쿨루스의 반격3.2. 루쿨루스와 아르메니아의 전쟁3.3.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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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74년 ~ 기원전 63년, 폰토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비티니아 왕국을 병합한 로마 공화국에 대항해 비티니아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로마 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패권을 확보했다.

2. 배경

폰토스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손상된 권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가 무적은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동방에 세력을 뻗치는 로마의 패권에 대항할 강력한 아시아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키웠다. 기원전 80년 아들 마카레스를 콜키스 일대로 파견해 그곳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공략하게 했다. 그러는 한편 로마에 사절을 보내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끝내면서 합의한 대로 카피도키아 영토 일부분을 넘기는 걸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기원전 7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사망했고, 원로원은 국내 문제로 바빴기 때문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힘으로 카파도키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기 딸을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와 결혼시켜 아르메니아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이후 아르메니아 왕이 카파도키아를 침략하도록 해, 폰토스는 이 일과 무관한 척했다. 아르메니아 왕은 수많은 전리품과 300,000명에 달하는 주민을 포로로 삼아 아르메니아로 데려가 자신이 수도로 정한 티그라노케르타에 거주하게 했다. 이무렵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로마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민중파(포풀라레스)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어 옵티마테스파가 지원하는 로마에 공동 대항하기로 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자신이 로마의 정권을 되찾는다면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갈라티아 외에 아시아의 모든 로마 영토를 폰토스 왕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즉시 수락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이에 더해 자신의 부관인 마르쿠스 마리우스를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보내 부관으로 삼게 했다.

기원전 74년, 비티니아 왕국의 군주인 니코메데스 4세가 사망했다. 그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비티니아는 이에 따라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가 유언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제우스포세이돈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백마가 모는 전차를 바다에 빠뜨렸다. 이후 장병들 앞에서 로마인들이 이탈리아와 로마 자체를 노예로 만들 정도로 권력과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을 부리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들은 조약을 준수하지 않고 여전히 기만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로마가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를 상대로 어려운 전쟁을 벌이고 있고 바다에서는 해적들의 침략을 받고 있으며, 고귀한 시민 일부가 자신과 동맹을 맺고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로마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린 뒤, 탁실레스와 헤르모크라테스와 함께 비티니아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3. 경과

3.1. 폰토스 왕국의 침공과 루쿨루스의 반격

기원전 74년, 폰토스군은 비티니아를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비티니아로 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던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폰토스군의 압도적인 군세에 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휘하 병력을 이끌며 칼케돈으로 퇴각했다. 그리하여 비티니아를 손쉽게 공략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뒤이어 칼케돈으로 진군하여 코타의 부관인 누두스의 로마군을 격파한 뒤 칼케돈을 포위했다.(칼케돈 공방전) 한편 그의 함대는 칼케돈 항구로 항해하여 도시를 지키던 로마 해군을 격파하고 항구를 장악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원로원 계급의 루키우스 만리우스를 포함한 3,000명의 로마군이 전사했고 함선 64척이 노획되거나 침몰했으며, 폰토스군의 사상자는 2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칼케돈 해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여세를 몰아 니케아, 람사코스, 니코메디아, 아파메이아를 공략하고 여전히 로마를 따르는 키지코스로 진격해 포위했다.(키지코스 공방전) 로마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전직 집정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킬리키아 총독으로 선임하여 폰토스군을 제압하게 했다. 그는 로마에서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의 지휘를 받던 2개 군단 잔여 병력과 다른 2개 군단을 연합하여 총 30,000명의 보병과 1,600명의 기병을 편성하여 아시아로 이동했다. 얼마 후, 탈영병으로부터 키지코스 인근에 진을 치고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폰토스군이 300,000명에 달하며, 육로와 해로 모두에서 보급품을 전달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군 병사들은 코타는 내버려두고 별다른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폰토스로 진격해 약탈을 벌이자고 촉구했지만, 루쿨루스는 이를 거부하고 칼케돈으로 진군했다. 루쿨루스의 군대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협력하고 있었던 로마의 반역자 마르쿠스 마리우스와 니케아 인근의 오트로이아에서 맞붙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군대 사이에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물체가 떨어졌다. 모양은 피토스(포도주 항아리)와 비슷했고, 색은 녹은 은과 비슷했다고 한다. 양군은 이에 놀라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물러섰다. 이후 마리우스는 보급품이 며칠 밖에 남지 않아서 철수했고, 루쿨루스는 칼케돈을 구원한 뒤 키지코스를 포위한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가깝고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언덕에 숙영지를 세워서 폰토스군이 키지코스 반도에 갇히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곧 해상에서의 보급도 끊어질 예정이었기에, 대규모 병력이라 막대한 보급품을 마련해야 했던 미트리다테스 6세는 곧 곤경에 처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키지코스 포위 공격 중에 병에 걸리거나 부상당한 자들을 후방으로 보내기로 하고 기병대에게 후송을 맡겼는데, 루쿨루스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10개 코호트를 이끌고 린다코스 강변에 매복했다가 그들이 강을 건너는 도중에 습격했다.(린다코스 강 전투)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15,000명의 병사와 6,000마리의 말이 로마군에게 포획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의 부관인 에우마코스가 이끄는 폰토스군의 별동대는 프리기아를 침공하여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다수의 로마 시민을 학살하고 피시디아, 이사우리아, 킬리키아를 정복했다. 그러나 갈라티아의 분봉왕 중 한 명이었던 데이오타로스가 공격하여 에우마코스에게 타격을 입혔다.

기원전 73년 초, 미트리다테스 6세가 이끄는 폰토스군 진영에 비축되었던 보급품이 고갈되었고, 육상에 이어 해상에서의 보급마저 끊겼다. 그 결과 굶주림이 창궐했고 일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일부 병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신을 뜯어먹기까지 했으며, 나머지는 나물을 캐먹었다고 한다. 여기에 역병까지 창궐하면서 폰토스 군대의 사기가 급락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키지코스를 계속 공격했지만, 키지코스 주민들이 공성 무기를 불태우고 폰토스 진영을 빈번하게 습격하자, 결국 철수를 결심했다. 그는 우선 로마군을 피해 람사코스에서 농성하고 있는 주민들을 돕기 위해 몇 척의 함선을 파견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마리우스, 파플라고니아의 알렉산드로스, 그리고 내시 디오니시오스의 지휘 아래 10,000명의 정예병과 50척의 배를 에게 해로 보내고, 나머지 육군은 람사코스로 진군하게 했으며, 자신은 함대와 함께 파리오스로 향하기로 했다.

폰토스군은 밤에 행군을 개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이세포스 강과 그라니코스 강을 건너면서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폰토스군이 달아난다는 걸 알게 된 루쿨루스가 끈질기게 추격해 20,000명을 사살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다수의 병력을 수습하여 함대에 싣고 니코메디아로 떠났지만,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6세 본인도 물에 빠져 죽을 뻔했지만 그와 동맹을 맺은 해적들이 구조 작업을 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후 루쿨루스는 에게 해로 이동하는 폰토스 함대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테네도스 섬과 아카이아 본토 항구 사이에 있는 13척의 배를 나포했다. 폰토스 주력 함대는 렘노스 섬과 스키로스 섬 사이에 있는 네아이 섬이라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배를 정박시켰지만, 루쿨루스는 육로를 통해 네아이 섬을 가로질러 폰토스군의 후방을 습격했다. 그리하여 적선 32척을 침몰시키거나 노획했고, 디오니시오스는 자살했으며, 파플라고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생포되었다. 마르쿠스 마리우스는 동굴로 숨었다가 체포된 후 루쿨루스에 의해 처단되었다.(네아이 전투)

기원전 72년, 루쿨루스는 부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트리아리우스에게 해군을 맡기고,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또한 코타에게는 4,000명의 폰토스군이 주둔한 헤라클레이아 폰티카 공략을 맡겼다.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복속되었던 소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은 대부분 로마에게 도로 귀순했지만, 테미스키라 주민들만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지지했고, 강력한 요새인 아미소스에서 버텼다. 루쿨루스는 아미소스를 포위하여 맹공을 퍼부었지만, 주민들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함락시키지 못했다.(아미소스 공방전)[1] 그러는 사이, 미트리다테스 6세가 동원한 40,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이 아미소스 요새 인근의 카비라에 도착했다. 루쿨루스는 이들을 먼저 상대하기로 하고, 산길을 통해 카비라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어진 기병전에서 로마군이 패배했고,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던 폼포니우스가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루쿨루스는 일단 군대를 산으로 후퇴시켰고, 미트리다테스 6세가 평원에 군대를 배치한 후, 루쿨루스에게 회전을 벌이자고 요구하는 걸 들어주지 않았다.

루쿨루스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폰토스군 기병대 때문에 평야로 내려가길 주저했다. 그러던 중 아르테미도로스라는 사냥꾼이 찾아왔다. 그 지역의 모든 산길을 알고 있었던 그는 평원과 폰토스군 기병을 피하면서 폰토스군 진영의 바로 위쪽에 있는 요새로 들어가는 진로로 안내했고, 루쿨루스는 거기에 진영을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에 대항하여 로마군의 보급을 차단하고자 기병대를 수시로 파견했다. 루쿨루스는 보급품을 얻기 위해 중무장한 호송대를 보내기로 하고, 소르나티우스의 지휘 아래 10개 이상의 코호트로 하여금 보급마차를 지키도록 했다. 폰토스군 기병대가 이들을 공격했지만, 로마 군단병들은 그들을 격퇴했다. 이후 마르쿠스 파비우스 하드리아누스가 이끄는 또다른 보급 호송대가 이동하던 중 4,000명의 폰토스군 기병들의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현장의 좁은 계곡이 폰토스군 기병의 전투력을 제한한다는 걸 눈치채고, 반격을 가해 폰토스군 기병 2,000명을 사살했다.

그날 밤 목숨을 건지고 돌아온 기병들로부터 참패를 보고받은 미트리다테스 6세는 퇴각하기로 마음먹고 심복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짐을 비밀리에 꾸리게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도중에 누설되었고, 병사들은 몹시 동요하여 지휘관의 명령도 받지 않은 채 막사에서 뛰쳐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트리다테스 6세가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루쿨루스는 폰토스군이 혼란에 빠진 걸 보고 대부분의 기병을 보내 도망치는 적을 살육하도록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2,000명의 기병과 함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에게 망명했다. 이때 그는 내시인 바키데스를 왕궁으로 보내 누이와 왕비 그리고 후궁들을 죽이게 하여 로마군에게 유린되지 않도록 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6세의 누이인 닛사 만이 죽지 않고, 루쿨루스에게 사로잡혔다고 한다.(카비라 전투)

왕이 아르메니아로 달아나자, 폰토스군 수비대 지휘관들은 루쿨루스에게 대거 항복했고, 아미소스 요새 역시 결국 함락되어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루쿨루스는 뒤이어 폰토스 왕국의 항구도시인 시노페를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해 함락시켰지만, 이번에는 주민들이 원해서 저항한 게 아니라 미트리다테스 6세가 주둔시킨 폰토스군의 강요를 받은 점을 고려하여 약탈을 허용하지 않았다.(시노페 공방전) 이후 칼데아와 티바레니를 공략하고 소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한편 코타는 헤라클레이아 폰티카를 포위 공격한 끝에 기원전 71년 함락에 성공한 뒤 기원전 70년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원전 67년경, 그는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로부터 전리품을 횡령했다는 고발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추방당했다.

3.2. 루쿨루스와 아르메니아의 전쟁

기원전 70년,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의 대왕 티그라네스 2세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를 넘기라고 요구하고자 처남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보냈다. 풀케르는 안티오키아에서 티그라네스 2세를 만나
"루쿨루스의 개선식에 참석할 미트리다테스를 맞이하거나 당신에게 선전포고하기 위해 왔다."
라고 말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티그라네스 2세는 젊은이가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찬 태도로 나오는 것에 놀라워하여 호화로운 선물을 보냈지만, 아피우스는 왕이 보낸 선물 중 그릇 하나만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티그라네스 2세는 루쿨루스가 서신에서 자신을 왕중왕이 아니라 '왕'이라고만 칭한 것에 분개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를 넘기길 거부했다. 이에 루쿨루스는 아르메니아 왕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69년, 루쿨루스는 카파도키아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2,000~3,000명의 기병대를 귀족인 미트로바르자네스에게 맡겨 로마군을 견제하도록 했다. 미트로바르자네스는 로마군이 숙영지를 설치하고 있을 때 돌격했지만, 3,500명의 강력한 분견대가 이들을 격파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패배 소식을 접하자 만카이오스에게 티그라노케르타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타우루스 산맥에서 전투 부대를 모집하기 위해 떠났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티그라노케르타는 25미터 높이의 두껍고 우뚝 솟은 성벽이 있었으며, 식량이 풍부해서 장기간 농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티그라네스 2세가 이 도시를 건설할 때 수많은 주민을 강제로 끌고 왔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티그라네스 2세를 원망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주민들은 루쿨루스를 응원했으며 티그라네스 2세의 군대가 도시 인근의 언덕에 나타났을 때 로마인들에게 그쪽을 가리키며 조심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루쿨루스는 2개 군단과 500명의 기병만 이끌었다고 한다.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16,000명의 군단병과 3,000명의 기병, 투석병, 궁수를 갖췄다고 기술했으며, 에우트로피우스는 로마군의 병력이 18,000명이었다고 기술했다. 한편 아르메니아 전역에서 동원된 티그라네스 2세의 군대 규모는 로마군을 압도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250,000명의 보병과 50,000명의 기병이 왕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루쿨루스가 원로원에 보낸 편지를 인용해, 20,000명의 투석병과 궁수, 55,000명의 기병, 150,000명의 보병이 티그라네스 2세의 지휘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더 나아가 무려 600,000명의 아르메니아 카타프락토이와 100,000명의 보병이 루쿨루스를 상대했다고 주장했으며, 헤라클레아의 멤논은 80,000명의 보병과 기병이 티그라네스 2세의 지휘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계는 이러한 수치가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고 보지만, 로마군에 비해 압도적인 수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6세는 티그라네스 2세에게 루쿨루스를 먼저 공격하지 말고, 보급로를 차단해 굶주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티그라네스 2세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자신이 로마군을 격멸하여 명성을 떨치는 걸 시기해 그러는 것이라 여기고, 전투대형을 갖춘 로마군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절로 왔다기엔 너무 많고, 싸우러 왔다기엔 너무 적다."
아르메니아의 대군이 진격해오자, 루쿨루스는 부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에게 6,000명의 보병을 맡겨 포위를 계속하게 하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며 적을 맞이했다. 마침 이날(10월 6일)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게르만계 킴브리족에게 참패한 아라우시오 전투가 있었던 날이었다. 병사들이 이 점에 우려를 표하자, 루쿨루스는 담담하게 답했다.
"내가 이 날을 로마인들에게 행운의 날로 만들어줄 것이다."
양군은 수도 티그라노케르타의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바트만수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로마군은 아르메니아군 기병대에게 측면을 찔리는 걸 저지하고자 전선을 최대한 넓게 형성했다. 이후 루쿨루스가 몇 개의 코호트를 바트만수 강 하류로 이동시키자, 티그라네스 2세는 로마군이 도망치려 한다고 여기고 카타프락토이를 투입시켰다. 적의 중기병대가 몰려오자, 루쿨루스는 갈리아 기병대와 트라키아 기병대에게 그들을 상대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아르메니아군 중기병대가 묶여 있는 사이, 루쿨루스는 2개의 코호트에게 마니플루스 대형을 갖춰서 바트만수 강을 건너 아르메니아군 기병대를 후방에서 공격하도록 했다. 그는 선두에서 돌격을 이끌었고, 강둑에 올라서자마자 로마군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전우여! 오늘은 우리의 날이다!"
루쿨루스는 병사들에게 말의 다리와 허벅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기마들이 유일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부위였기 때문이다. 아르아군의 카타프락토이들은 로마군의 후방 급습에 큰 타격을 입고 아르메니아군쪽으로 도주했다. 아르메니아군 보병대는 이 광경을 보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붕괴되었고, 티그라네스 2세는 짐을 실은 전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5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부상당한 반면, 아르메니아군은 100,000명의 보병이 죽고 기병은 전멸했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이 바트만수 강 전투가 아르메니아 왕국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건 분명하다고 본다.

왕이 패주하자, 티그라노케르타의 수비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다. 로마군은 도시로 들어가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했고, 8,000달란트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티그라네스 2세의 보물을 약탈했다. 이후 루쿨루스는 병사 개개인에게 800드라크마씩 나눠줬다. 또한 콤마게네 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 등 여러 군주들이 사절을 보내 루쿨루스에게 경의를 표하며 로마와 동맹을 맺길 청했다. 한편 참패한 티그라네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 북부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으면서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의 왕 프라아테스 3세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구원군을 보내준다면 파르티아로부터 탈취했던 영토를 되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루쿨루스는 포로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고 파르티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과 동맹을 맺으면 티그라네스 2세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라아테스 3세는 양측의 제안에 딱부러진 대답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루쿨루스는 소르나티우스 등 폰토스에 남아있는 부하들에게 병사들을 동원해 자신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매사에 엄격한 루쿨루스를 따르기보다는 소아시아에 남아서 약탈을 벌이길 갈망했다. 장교들은 이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루쿨루스를 돕지 못하고 폰토스를 떠나야 했다. 이 소식이 고르디에네에 있는 루쿨루스의 진영에 이르렀을 때, 장병들은 이들을 부러워하며 자기들도 자유롭게 약탈하길 갈망했다. 루쿨루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얼른 전투를 벌여서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마무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티그라네스 2세가 결전을 회피하자, 루쿨루스는 결전을 강요하기로 하고 기원전 68년 아르메니아의 옛 수도인 아르탁사타로 진군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결전을 미룰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로마군과 격돌했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군은 또다시 참패했고, 아르탁사타는 루쿨루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아르탁사타 전투)

이후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가 캅카스 산맥 너머로 도주하자, 루쿨루스는 이들을 추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병들은 약탈을 제한하고 힘든 행군을 강요하는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대장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선동에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루쿨루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비옥하기로 유명한 메소포타미아의 아르메니아 영토를 침공하도록 강요했고, 루쿨루스는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별 소용이 없자 어쩔 수 없이 메소포타미아로 남하하여 니시비스를 포위했다.(니시비스 공방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틈을 타 기원전 67년 봄 폰토스로 쳐들어갔다. 그는 소규모의 로마군 분견대를 사로잡은 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트리아리우스가 루쿨루스를 지원하기 위해 폰토스에 주둔한 2개 군단을 이끌고 이동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즉각 트리아리우스를 요격했고, 젤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4명의 대대장과 150명의 백인대장을 포함하여 7,000명이 전사했고, 폰토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루쿨루스는 니시비스의 포위를 그만두고 소아시아로 진군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와 대항하려 했지만, 병사들은 그를 더 이상 따르길 거부했다. 그들은 지갑을 루쿨루스의 발 앞에 던지며 그가 이 전쟁에서 개인적으로 이익을 얻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전쟁을 하고 싶으면 그 혼자 하라고 조롱했다. 루쿨루스는 어쩔 수 없이 갈라티아로 철수했고, 티그라네스 2세는 이때를 틈타 아르메니아로 돌아가서 세력을 재건했다. 이리하여 루쿨루스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공적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에 로마 당국은 기원전 66년 지중해 해적 토벌을 완수한 폼페이우스를 새 지휘관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3.3.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

갈라티아에 도착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로부터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일련의 사태로 심기가 매우 좋지 않았던 루쿨루스는 그를 사냥개가 쓰러뜨린 사냥감을 낚아채는 새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탐욕스러운 인간이라고 조롱했으며, 루쿨루스를 따라 전쟁을 수행해온 베테랑 병사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선사해 순식간에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루쿨루스는 굴욕감을 간직한 채 로마로 쓸쓸히 귀환했고, 폼페이우스는 폰토스 왕국을 향해 진격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루쿨루스와의 전쟁 여파로 병력 자원이 부족하여 로마군을 상대로 정면전을 치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산맥 깊숙히 후퇴하면서 로마군의 보급로를 최대한 길게 늘어뜨려 보급에 곤란을 겪게 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보급 관리에 있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고, 로마군은 별다른 보급 문제 없이 폰토스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순조롭게 공략했다.

전쟁에 지친 폰토스군의 장병들이 꾸준히 탈영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들을 잡는 대로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눈을 찢거나 산채로 불태웠다. 그러면서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어떤 조건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그쪽으로 귀순한 모든 로마군의 탈영병을 제공하고, 무조건 항복하라"
고 답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탈영병이 급증할 것을 우려해 이를 거부하고, 로마인들의 탐욕 때문에 절대로 그들과 평화를 맺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직후 폼페이우스는 기병대를 보내 폰토스군의 전초 기지를 습격하여 도발한 후 퇴각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폰토스군이 추격했다가 라코스 강변에서 참패했다.(라코스 강 전투)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로 도주하려고 했지만 티그라네스 2세가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하자 콜키스로 도망쳐 그곳의 산악지대에 몸을 숨겼다.

폼페이우스는 아르메니아쪽으로 진군하면서 파르티아에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아르메니아의 왕이었던 티그라네스 2세의 아들 티그라네스는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다가 파르티아 궁정으로 도망쳤다. 프라아테스 3세는 젊은 티그라네스 왕자를 자기 딸과 결혼시킨 뒤, 파르티아군을 맡겨 아르메니아로 가도록 했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아르탁사타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되지 않자 젊은 티그라네스에게 분견대를 맡긴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티그라네스 2세는 아들을 물리쳤고, 젊은 티그라네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폼페이우스를 직접 찾아가 로마의 동맹국이 될 테니 평화협약을 맺자고 호소했으며, 폼페이우스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후 폼페이우스는 여전히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지지하는 알바니아와 이베리아 왕국을 상대하고자 북상했다. 알바니아 왕 오로에세스는 로마군이 사투르날리아 축제를 벌이고자 분산된 틈을 타 급습하려 했지만, 로마군은 이를 가볍게 격파했다. 결국 오로에세스는 저항을 포기하고 로마군에 귀순했다. 뒤이어 이베리아 왕 아르토케스를 압박하자, 아르토케스는 로마와 동맹 관계를 맺겠다고 제안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첩자들로부터 이베리아인들이 비밀리에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기원전 65년 봄 이베리아를 기습 공격해 하르모지케 요새를 공략했다. 아르토케스는 급히 쿠라 강 좌측 강둑으로 후퇴했고, 로마군은 우측 강둑에 이르렀다. 아르토케스는 적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다리를 무너뜨린 뒤, 다리를 복원하고 식량을 공급할 테니 평화협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따르는 척했다가 아르토케스가 다리를 복원하자마자 곧바로 다리를 건너 그를 추격했다.

아르토케스는 아라그비 강으로 철수한 뒤 다리를 다시 파괴했고, 일부 이베리아군의 투사들은 숲에 숨어서 지나가는 로마 군인들을 향해 원거리 무기를 쏘고 적이 쫓아오면 후퇴했다가 재차 공격하길 반복했다. 이 유격전에는 이베리아 여인들도 상당수 참여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는 숲을 베거나 불태우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베리아군의 투사들은 결국 패배했다. 폼페이우스는 뒤이어 아르토케스를 추격해 이베리아 깊숙이 진격하여 펠로루스 강 인근에서 따라잡았다. 아르토케스는 우수한 궁수대를 활용하여 로마군에게 화살 세례를 퍼붓게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신속한 보병 돌격으로 궁수들을 무력화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펠로루스 강 전투로 이베리아군 9,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10,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아르토케스는 더 이상 항전하는 건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막대한 귀금속을 바치며 휴전을 요청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아이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아르토케스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저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아라그비 강을 건너 이베리아군을 압박했고, 결국 아르토케스는 아이들을 인질로 보낸 뒤 로마 공화국의 속국을 자처했다.

그리하여 이베리아 왕국을 굴복시킨 뒤, 콜키스의 여러 부족들을 외교전으로 복속시킨 후 아직 보스포루스에 숨어 있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봉쇄하고자 세르빌리우스 휘하의 함대를 파견했다. 이때 알바니아에서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폼페이우스는 즉시 알바니아로 진군했다. 이후 사막을 가로지르며 반란군을 추격한 끝에, 아바스 강변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아바스 강 전투) 이에 알바니아인들은 항복했고, 카스피 해의 많은 부족들은 로마와 평화협약을 맺기 위해 사절들을 보냈다. 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는 소규모의 기병을 이끌고 콜키스에서 크림 반도까지 도망친 뒤 로마군에 맞서기 위해 또다른 병력을 모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의 지배자이자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인 마카레스는 아버지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를 살해한 뒤, 또다른 아들인 파르나케스 2세에게 크림 반도의 지배권을 맡기고, 병력을 모집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민중은 더 이상 왕을 따르려 하지 않았고, 파르나케스 역시 자기도 형 마카레스처럼 아버지에게 살해당할 걸 우려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미트리다테스 6세가 머물고 있었던 판티카파에움 성채로 몰려들었고 장수들 마저 더 이상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절망에 빠져 독을 삼켰다. 그러나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처럼 독살당할 것을 염려해 독약을 아주 조금씩 복용해왔기 때문에 내성이 생겨 독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는 방식으로 고통스럽게 자살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6세는 켈트족 출신의 경호원이자 친구인 비투이투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는 파르나케스 2세로부터 미트리다테스 6세의 시신을 접수받은 뒤 폰토스 왕국의 옛 수도인 야마사(아마시아)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무덤에 묻었다. 이리하여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종결되었다.

4. 이후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의 유해를 넘기고 귀순한 파르나케스 2세를 폰토스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로마인의 친구'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 후 시리아로 진군해 끊임없는 내전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던 셀레우코스 제국을 시리아 속주로 병합하고, 유대 왕국을 속국으로 삼는 등 동방의 질서를 재편했다. 폼페이우스는 병사들에게 1인당 1,500드라크마를 나눠준 후 로마로 귀환하여 기원전 61년 9월 29일 거대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폼페이우스는 동방 원정을 통해 로마 공화국의 1년 예산을 2,000만 세스테르티우스에서 3,600만 세스테르티우스로 늘리는 등 지대한 공적을 세웠고, 사람들은 그를 마그누스(위대한 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너무 큰 위세를 떨치는 걸 우려한 원로원은 그의 동방 정책 승인을 3년간이나 미뤘고, 폼페이우스가 거느렸던 군단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문제 역시 질질 끌었다. 폼페이우스는 이에 대해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칩거하다가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삼두정치를 맺고 나서야 겨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카이사르는 그와 크라수스의 후원에 힘입어 집정관을 역임한 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속주를 배정받았고, 이를 토대로 갈리아 전쟁을 단행했다.


[1]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아미소스 요새 수비대는 도시를 에워싸는 참호를 건설하는 로마군을 막기 위해 곰을 비롯한 큰 동물들과 벌떼를 동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