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사 공방전 영어: Siege of Bursa | ||
시기 | 1317년 ~ 1326년 4월 6일 | |
장소 | 튀르키예 부르사 | |
원인 | 비티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오스만 1세의 공세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오스만 베이국 |
지휘관 | 사로스 | 오스만 1세 오르한 |
결과 | 오스만 베이국의 부르사 함락. | |
영향 | 오스만 베이국의 입지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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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17~1326년, 오스만 1세와 오르한이 이끄는 오스만 베이국이 비티니아의 중심지인 부르사를 포위 공격한 끝에 함락시킨 전투. 오스만 베이국이 처음으로 주요 도시를 공략한 공방전이다.2. 상세
1302년 바페오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한 오스만 1세는 비티니아 전역을 공략하고자 여러 차례 공세를 가해 여러 마을과 거점을 공략했다. 1308년경 마르마라 해에 있는 임랄리 섬을 공략한 후 해군 기지를 건설해 비티니아의 중심지인 부르사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간의 교역로를 차단했다. 또한 1316년 울루산의 여러 요새를 장악하면서 부르사와 다른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도시들간의 연락로마저 차단했다. 이렇게 해서 부르사를 완전히 고립시킨 튀르크군은 1317년부터 부르사를 포위 공격했다.부르사 시민들은 1318년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무역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도시가 봉쇄되는 바람에 재정난이 심각해지고 있으니 속히 구원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당시 동로마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한 데다 카탈루냐 용병들의 난동으로 인해 국토가 파괴되고 많은 국민이 학살당하는 등 내우외환이 극심했기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321년부터 안드로니코스 2세와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간에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하면서, 부르사는 자연스럽게 외면당했다.
부르사 시민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텼고, 튀르크인들은 공성 기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에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이 도시를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외부와 단절된 채 수년을 버티다보니 기근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시민이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수비대장 사로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326년 4월 6일 항복했다. 전설에 따르면, 오스만 1세가 이 날에 사망했다고 한다.
오스만 1세의 아들 오르한은 항복을 접수받은 뒤 부르사의 모든 거주민에게 금화 30,000개를 바친 후 도시를 떠날 권리를 부여했다. 하지만 대다수 주민들은 도시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오르한은 쇠위크에서 부르사로 수도를 이전하고 현지의 그리스 귀족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오스만 베이국의 지배계급에 편입했다. 부르사는 빠르게 경제력을 회복했고,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할 때까지 수도로서 기능했다[1].
[1] 1370년대의 어느 해에 에디르네를 함락한 뒤로는 공동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