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침공 영어: Invasion of Italy | ||
| ||
시기 | 서기 452년 | |
장소 | 이탈리아 북부 | |
원인 | 카탈라우눔 전투의 패배에 대한 설욕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이탈리아 북부 황폐화,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권위 실추 | |
영향 | 교황의 권위 강화 서로마 제국의 수명 연장 |
1. 개요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의 패배에 대한 설욕으로 아틸라의 훈족이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사건으로 아퀼레이아, 파도바, 밀라노등 이탈리아 북부의 대도시들이 훈족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돌연 레오 1세와 대화를 나눈 아틸라가 철수하며 이탈리아 침공이 일단락 되었지만 이탈리아 북부가 황폐화되었지만 로마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더욱 가시화 되었다.2. 카탈라우눔 전투
라인 강(레누스 강)을 건너 451년 봄 갈리아를 침공한 아틸라는 갈리아 북부를 휩쓸며 도시들을 약탈했다. 한편, 아에티우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갈리아로 진입했고 훈족에 맞설 병력이 부족했으므로 서고트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연합하여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아틸라의 훈족과 맞섰다.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등 동맹 부족들을 총집결시킨 아에티우스는 서고트와 함께 6월 20일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훈족과 조우하여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 끝에 훈족은 패배했고 아틸라는 간신히 탈출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로마군과 동맹군이 철수하자 아틸라는 라인 강을 건너 자신의 본거지로 후퇴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욕으로 이듬해인 452년, 아틸라는 전격적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3. 전개
카탈라우눔 전투 1년 후, 아틸라는 판노니아를 거쳐 베네치아로 진입했고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성곽으로 보호된 도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 뿐, 결국 압도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훈족의 공격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됐다.이어서 훈족은 파도바로 진군했다. 로마군은 훈족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기에 곧바로 파도바를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파도바를 약탈한 아틸라는 북이탈리아의 중심도시 밀라노로 진군했고 근처에 위치한 여러 도시들, 만토바,베로나,브레시아,베르가모를 빠르게 점령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윽고 밀라노에 도달한 아틸라는 도시 전체를 포위했고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토리노의 주교인 마시모 2세의 편지에 따르면 밀라노 공성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밀라노가 함락되면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이티우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진입했지만 카탈라우눔 전투가 끝난 후 동맹국들이 철수해 병력이 부족한 상태로 전면전을 치룰 여력이 없었다. 로마군은 소규모 게릴라전을 벌이는 등,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훈족의 후방을 타격하는 방식으로 훈족의 진군을 늦췄다.
남하하는 아틸라를 막아선 것은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세였다. 레오 1세는 평화사절을 보내 아틸라와 대화하기를 청했고 아틸라와 대화한 레오 1세는 돌연 병력을 돌려 본국으로 철수했다.당시 아틸라의 수하들은 철군을 만류하였으나 아틸라는 뜻을 물리지 않았다.
당시 아틸라가 교황의 중재안에 따라 철수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한 가설로 이탈리아에 창궐하던 전염병과 보급품 부족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위협 등 여러 가설이 제시되고 있다.
4. 결과
당시 기승을 부리던 기근과 약탈로 인해 북아프리카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으며 훈족의 대규모 침공에 유의미한 저항을 하지 못한 아이티우스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취약한 방위 능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후 마요리아누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야만족들에게 두들겨 맞는 신세로 전락했다.반면 교황 레오 1세는 이민족으로부터 로마를 구원했기에 많은 로마인들로 부터 칭송받았으며 사후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본국으로 돌아간 훈족의 아틸라는 453년 돌연 급사하며 강력했던 훈 제국은 그의 아들들의 내전으로 인해 급격히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