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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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스 전투 Battle of Sabis | ||
시기 | 기원전 57년 | |
장소 | 프랑스 북부 셀레 강 | |
원인 | 갈리아 전쟁의 일부 | |
교전국 | 로마 공화정 | 네르비 아트레바테스 비로만두이 아투아투키 |
지휘관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보두오그나투스 |
병력 | 40,000 ~ 45,000명 | 75,000명[A] 30,000명[B] |
피해 | 불명 | 59,500명[A] |
결과 | 카이사르의 기적같은 대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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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비스 전투는 갈리아 전쟁 중인 기원전 57년에 벌어진 전투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과 갈리아족 계열의 벨가이인인 네르비족이 싸운 전투였다.2. 전조
기원전 59년 삼두야합으로 집정관에 선출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실질적인 1인 통치를 행한 뒤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58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카이사르는 총독에 부임한 즉시 군대를 편성해 헬베티족을 아라르 전투와 비브라테 전투에서 격파하고 뒤이어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을 보주 전투에서 격파하여 갈리아에서 강력한 패권을 갖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군대를 갈리아에 그대로 남겼고,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갈리아인들은 벨가이인들을 중심으로 카이사르군과 맞설 군대를 편성했다.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선수를 치기로 결정하고 기원전 57년 여름 총독 임지였던 북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이동하여 8개 군단을 그의 휘하에 집결시켰다. 그 뒤 이 군대를 이끌고 벨가이인인 레미족의 영토를 침략한 뒤 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에 대응하여 벨가이인들은 레미족의 영토를 침범해 로마인과 대결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악소나 전투에서 격파하고 많은 벨가이 부족들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했으나 이에 불복한 네르비족은 카이사르와의 대결을 다짐하며 군대를 편성했다. 당시 스파르타식의 군사훈련을 하며[4] 세월을 보낸 네르비족은 매우 호전적인 부족으로 휘하에 10개 부족을 종속시키고 있었던 강력한 전투부족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이끌고 네르비족을 공격하기 위해 출진했다.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무장과 훈련, 전투 경험이 풍부했으므로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네르비족은 지형에 밝은 그들의 장기를 살려 행군 중인 로마군을 습격하기로 계획했다. 카이사르 휘하의 갈리아인들 몇 명을 포섭하여 내부 정보를 파악한 네르비족은 사비스 강가의 평지에서 카이사르군이 야영할 계획이라는 것을 입수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병력을 숲속에 숨겨두고, 카이사르군과 그들의 치중대가 모습을 드러내면 즉각 급습하여 이 치중대를 빼앗거나 불태우기로 작전을 세웠다.
치중대를 급습해 이것을 파괴하는 데 성공하면 장거리의 원정을 수행중인 카이사르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치중대의 급습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네르비족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군단 사이 사이에 치중대를 두는 방법이 병력의 유연성을 떨어뜨렸으므로 험지를 나아가는 행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2개 군단으로 치중대를 지키는 데 전념케 하고, 나머지 6개 군단으로는 전투에만 전념케 하는 방식으로 재편성했다.
이런 재편성에 대한 정보를 네르비족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매복은 기존의 전투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로마군의 강점은 엄격하고 가지런한 포진과 뛰어난 유연성을 발휘하여 보조병, 투창병, 정예병, 신병 등이 조화를 이루는 데서 나오는데 기습 공격으로 나가면 이러한 로마군의 강점이 발휘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네르비족의 숫적 우세함이 두드러 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위험에 대해 알 수 없었던 카이사르는 과연 네르비족이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군을 진입시켰다. 카이사르군은 도착하자마자 숙영지 건설에 착수했는데 이를 본 네르비족은 병력을 보내어 공격을 시작했다.
3. 병력
카이사르가 남긴 기록인 《갈리아 전기》를 참고하면 그의 휘하엔 8개 군단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로마군단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이 끝난 직후로 1개 군단에 5,120명의 전투 요원이 있었다. 다만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때 동원한 군단병의 경우, 각 병사들의 소속감을 극대화함으로써 각 군단이 서로 경쟁의식을 고취시키키로 했고, 그때문에 결원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신병을 보충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최소 3,500여 명이 한 군단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당시는 3개의 큰 전투를 치른 이후이나 로마군이 일방적인 대승을 했고, 때문에 각 군단이 5,000여 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중보병은 40,000여 명의 병력에 달했다.또한 카이사르의 경우 상당수 기병을 운용했는데 이 전투가 벌어지기 1년 전 갈리아의 동맹 부족에게서 4,000여 명의 기병을 조달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해에는 카이사르가 2개 군단을 추가로 편성했으므로 군단의 규모가 늘어났고, 또한 공화정 말기엔 12% 정도의 기병 비율을 유지했다고 하므로 대략 6,000명에 해당되는 기병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장보병의 경우 각 군단에 존재하는 5,100여 명의 중보병에 소속되어 6,000명의 한도를 채우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8~900여 명이 한 군단에 속해 있었을 것이고, 8개 군단이면 최대 7,000여 명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과 크레타 섬의 궁병을 파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들의 수가 언급되지는 않았는데 카이사르의 기록에 보면 이들로 구성된 부대가 네르비족과의 싸움에서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들은 각 군단에 할당된 저 7,000여 명의 경보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즉, 중보병 40,000명 + 기병 6,000명 + 경보병 7,000명 = 도합 53,000여 명의 병력이 카이사르의 휘하에 있었다.
한편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네르비족은 무기를 들 수 있는 자가 60,000명이 있었다고 하며, 네르비족의 휘하에 동원된 2개 부족의 경우, 작은 규모면 대략 1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므로 [5] 대략 90,000명에서 100,000명 사이의 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배치
네르비족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은 언덕길을 행군하여 사비스 강가에서 그날 밤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이 지역은 숙영지로 적당한 장소로 언덕과 강 사이에 평평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또한 사비스 강 바로 옆이었으므로 식수를 확보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이 장소는 또한 적군이 복병을 숨겨두기에도 매우 적합했는데, 이 평지의 강 건너는 숲이 우거져 있었으므로 매복해놓아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비스 강의 수심도 고작 1m 정도였으므로 이 매복한 군대가 재빨리 강을 건너 공격할 수 있었다.
네르비족이 이렇게 로마군에 있는 첩자를 통해 사전에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전장을 선택한 것은 그동안의 갈리아인들의 수준을 뛰어넘는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이었는지 카이사르는 별다른 의심없이 자신의 병력을 이 장소에 진입시켰고, 숙영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소에 진입한 6개 군단은 넓게 퍼져 나무와 돌을 캐내는 등의 숙영지 건설 준비에 착수했다. 이러는 동안 후방에서는 신병으로 구성된 2개 군단이 짐을 싣고 전진 중이었다.
(로마군의 배치)
로마군은 사진의 왼쪽부터 7, 12, 8, 11, 10, 9군단의 순서대로 포진했고, 뒤에서는 신병으로 구성된 13, 14군단이 군수 물자와 함께 전진 중이었다. 갈리아인들은 네르비족이 병력 60,000명을 가지고 좌익에, 비로만두이족이 중앙에, 아트레바테스족이 우익에 포진한 상태로 숨어 있었다. 이들은 숨어서 로마군이 숙영지 건설에 착수한 것을 잠시 지켜보면서 공격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5. 전투
로마군이 사비스 강가에 도착했을 때 소수의 벨가이인들이 머물고 있었고 카이사르의 기병대는 그들에게 신속히 접근하여 무찔렀다. 이 공세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사비스 강을 건너 달아났고, 뒤이어 벨가이인들의 기병대가 숲속에서 뛰쳐나와 로마 기병과 교전을 시작했다. 이때 벨가이 기병은 소수였으므로 이들도 곧 격퇴되었다.그것을 벨가이인들의 매복군은 지켜봤으나 이들은 로마군의 치중대가 나타날 때까지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숨어서 자신들의 대열을 정렬하고, 호흡을 고르면서 로마군 치중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윽고 치중대의 선두가 언덕의 길을 통과하여 평야 지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군용 나팔(카르닉스) 소리가 울려퍼지고, 벨가이인들이 숲에서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그들이 이미 구성해놓은 전열을 유지한 채 허리까지 차오르는 사비스 강을 단숨에 건너 숙영지 공사 중인 로마군을 덮쳤다. 이때 벨가이인들과 처음 맞닥뜨린 것은 경보병 부대였고, 이들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이윽고 벨가이인들은 로마군의 정예 보병인 군단병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해 벨가이인들의 공격은 마치 숲속에서 사람들이 왈칵 쏟아져 나와 군단병을 덮어버린 것과도 같았다고 회상했다.
벨가이인들의 기습은 대단히 신속했으므로 군단병 중 많은 이들은 투구조차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황급히 맞섰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특기인 레기온 포진을 짤 시간조차 없었으며 벨가이인들과 마구잡이 싸움을 벌여야했다. 많은 군단병들은 숙영지를 짓기 위해 나무와 돌을 쪼개고 나르는 등의 일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흩어져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소속 부대로 합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가까운 군기로 모여 대형을 갖춰 벨가이인들을 상대했다.
후방에 있었던 13, 14군단의 신병들은 전방의 고참병들이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황급히 전방을 돕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이미 벨가이인들로 가득 메워진 상황이었다.
이때 전황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로마군의 우익에서 7, 12군단은 네르비족의 대군을 상대했고, 중앙의 8, 11군단은 비로만두이족을, 좌익의 10, 9군단은 아트로바테스족을 상대했다.
로마군의 좌익을 담당한 10, 9군단은 무장과 훈련 수준이 우수한 로마 군단 중에서도 매우 정예한 병력으로 특히 10군단의 경우, 카이사르의 친위대라고 불릴 정도의 용맹을 자랑했다. 아트로바테스족의 경우 그들의 부족들을 모두 동원했으나 로마군의 2개 군단과 엇비슷한 숫자였다.(15,000명 vs 12,000명) 때문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점점 벨가이인들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중앙을 담당한 8, 11군단도 이를 보고 용기를 얻었으며, 역시 비슷한 숫자였던 비로만두이족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비로만두이족은 점점 뒤로 밀리면서 강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로마군 우익의 7, 12군단은 숫적으로 훨씬 우세한 네르비족(12,000명 vs 60,000명)을 맞이하여 포위당해 간신히 군기 밑에 모여선 그들의 위치를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네르비족은 비로만두이족과 아트로바테스족이 뒤로 밀려 로마군의 중앙 부분에 빈 공간이 생긴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들 중 족장인 보두아그나투스가 이끄는 네르비족의 병력은 즉시 이 빈 공간으로 병력을 이동시켰고, 따라서 로마군의 비어있는 막사와 물자를 차지한 뒤 로마군의 좌익과 중앙군의 후방을 찔렀다.
네르비족이 로마군의 막사를 차지한 뒤 잠시 물품들을 줍는 데 정신이 팔리는 틈이 생겼는데, 그때를 틈타 7, 12군단은 좀 더 높은 고지에서 싸우기 위해 군대를 후방으로 물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장교들이 전사했다.
카이사르는 이 상황을 보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는 중앙쪽으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여 지휘체계가 무너진 로마군을 그의 지휘를 받는 상태로 되돌려놓기 위해 사방에 전령을 보냈다. 이것은 효과를 봐 상당한 희생끝에 조금 높은 지대로 올라가 전열을 가다듬는 데 성공한 7, 12군단이 카이사르의 지휘하로 돌아왔다.
이때 로마군의 좌익에 위치한 최정예 10, 9군단은 아트로바테스 부족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트로바테스 부족은 사비스 강을 건너 달아났고 10, 9군단도 강을 건너 이들을 추격했다. 이를 본 숲속의 갈리아족 비전투요원들은 황급히 주변의 나무를 꺾은 뒤 쌓아놓는 식으로 바리케이트를 쳤다.
이때 7, 12군단은 카이사르가 직접 그들 가운데에 서서 지휘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수의 네르비족의 수에 밀려 점점 희생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때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여 군단기가 네르비족의 손에 들어갔고, 모든 트리부누스 밀리툼(대대장)들이 전사했으며 심지어 두 명의 레가투스(군단장) 중 한 명도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6][7]카이사르 본인 역시 후방의 병사 한 명으로부터 방패를 가져와 그 자신의 몸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면서 카이사르는 병사 한 명 한 명과 지휘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아는 대로 고함치며 불러가면서 그들이 간신히 버티도록 했다.
7, 12군단이 버티면서도 가까스로 언덕 위 높은 지대로 물러났고, 이때 보조병들이 7, 12군단의 뒤로 기동했다. 이들은 그들이 가진 투창을 들고, 일제히 낮은 지대의 네르비족들에게 던져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네르비족들은 잠시 주춤했고, 이틈을 타 카이사르는 위의 2개 군단의 후방에 남아있었던 군단병들에게 기동하여 전열을 넓게 펴도록 지시했다. 로마군은 황급히 이 명령을 수행했고 전열이 넓어진 군단병은 네르비족의 공격을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면서 카이사르는 전령들을 다시 급파해 후방의 신병들인 13, 14군단들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했으며 흥겹게 적을 패주시키고 있었던 좌익의 10, 9군단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다.
이 전령을 10군단이 제일 먼저 받았다. 당시 10군단을 이끌고 있었던 라비에누스는 즉시 추격을 중지했다. 이때 중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8, 11군단은 비루만두이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이것이 10군단의 눈에 띄었다. 비루만두이족은 사비스 강을 등지고 로마 군단의 거센 공세를 결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10군단은 강가에 정렬한 뒤 사비스 강을 도강하여 비루만두이족의 후방을 협공했다. 갑자기 후방을 덮친 로마군의 강공에 비루만두이족은 급격히 무너졌다.
비루만두이족이 패주하자 이젠 좌익의 네르비족만 남게되었다. 이때 드디어 후방의 신병들이 도착해 13, 14군단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7, 12군단에 합류했다. 그리고 중앙의 비루만두이족을 패주시킨 10, 8, 11군단, 그리고 9군단이 네르비족의 후방에 도착했다.
이렇게 되자 네르비족은 로마 군단에 의해 사방이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르비족은 용감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언덕 위를 점거한 7, 12, 13, 14군단의 공세와 후방에서 협공하는 나머지 4개 군단의 맹공은 매우 거셌고, 네르비족은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마침내 사비스 전투가 끝났을 때 네르비족은 500명만 살아남았다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는 기록하고 있다.
6. 사상자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네르비족은 60,000명에서 500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신뢰성이 의심가는데 훗날 네르비족은 《갈리아 전기》 5년째에 휘하의 10개 부족을 거느리고 키케로가 군단장으로 지키고 있는 숙영지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60,000명의 전사가 500명으로 감소했다면 이 전투 이후로는 10개 부족을 거느릴 수 없는 것이 타당하다. 게다가 과거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에게 완전히 포위 섬멸을 당했을 때도 전사자가 6할 정도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전사자의 비율은 지나치게 높은 수치이다. 결정적으로 전쟁 5년차에 네르비족은 암비오릭스와 함께 로마군을 공격했으며 이후 2년 후 벌어지는 알레시아 전투에서도 5천명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면 네르비족의 피해는 카이사르의 기록보다 한참 밑돌았을 것이다.로마군 전사자의 경우, 카이사르가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군단장 1명과 다수의 장교가 전사했음을 리비우스가 기록하고 있음을 보아 로마 측의 사상자도 상당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7. 평가
비록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 사비스 전투는 카이사르에게 있어, 베르킨게토릭스를 만나기 이전엔 가장 패배에 근접했던 전투였다. 스파이를 통해 로마군의 정보를 입수한 뒤 매복 공격한 네르비족의 작전은 완벽히 적중했고, 로마군은 전열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2배에 달하는 적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갈리아군은 승리를 거두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의 좌익을 상대로 한 로마군의 우익이 끝까지 버텼고, 그 사이에 로마군의 좌익이 갈리아군의 우익을 격파한 뒤 배후로 기동하여 그들을 협공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로마군의 우익이었던 7, 12군단이 먼저 무너졌다면 승리는 갈리아가 거머쥐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에 자신이 직접 그 2개 군단 속으로 뛰어들어가 지휘하면서 버티도록 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지휘를 받은 이들은 많은 장교들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가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그의 군단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군의 재빠른 대응과 대조적으로 무딘 갈리아 군의 움직임도 로마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우익인 7, 12군단의 경우 공격을 받으면서도 포위를 피해, 다수의 장교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언덕을 등지기 위해 물러나면서 버텼다. 언덕을 등지는 데 성공하자 그들은 언덕 높은 지대에서 경보병이 투창을 던지면서 적의 공세를 둔화시킨 뒤 곧바로 전열을 넓혀 포위당하는 상황을 차단했다. 로마군이 이렇게 세심한 움직임을 통해 견딘 것과는 달리 갈리아군은 60,000명에 달하는 네르비족이 계속 7, 12군단을 공격하는 데만 집중하여 배후가 노출된 중앙의 8, 11군단을 협공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결과 10군단이 중앙에 있는 적군의 배후를 쳤고, 중앙이 무너지자 네르비족은 포위당하여 무너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 사비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통솔력과 로마군의 놀라운 대응 능력으로 급박한 위기 상황을 극복한 혈전이라고 할 수 있다.
[A] 카이사르의 주장.[B] 현대 사가 추정.[A] 카이사르의 주장.[4]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이들은 포도주를 마시면 나약해진다고 믿어서 포도주를 파는 로마인 상인들을 자신들의 땅에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5] 이는 카이사르가 벨가이인의 연합군을 묘사하면서 큰 부족은 50,000명, 작은 부족은 19,000명에서 10,000명 사이의 병력 제공을 합의했다는 기록으로 추측할 수 있다[6] 이런 상황이면 패주하여 달아나는 것이 당연한데 최고 사령관인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하여 패주는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7] 카이사르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당도했을땐 12군단 4대대는 10명의 백인대장이 전원 전사하고 대대기마저 노획당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