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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8 07:53:19

아바리쿰 공방전

갈리아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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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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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52년 3~4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비투리게스족이 지키는 아바리쿰을 포위 공격하면서 벌어진 처참한 공방전이다.

2. 배경

기원전 53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지난해 겨울에 발발하여 사비누스의 제14군단을 전멸시키고,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끄는 로마군 부대를 2주일간 포위 공격한 암비오릭스의 난을 진압했다. 그는 전후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소집한 부족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로마군이 근처에 이르자 항복한 세노네스족의 족장 아코를 체포한 뒤 부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한 후 목을 베었다. 그 후 갈리아가 조용해지자, 이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갈리아 각지에 숙영시킨 뒤 행정 처리를 하기 위해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이동했다.

그러나 켈트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었다. 부족장들은 비밀리에 회동을 갖고, 아코의 죽음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자기들도 언젠가 아코처럼 될 거라 우려했고,[1] 카이사르가 멀리 떠나 있는 사이에 봉기를 일으켜, 카이사르가 군대와 합류하는 걸 저지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인질을 교환하는 건 로마군의 경계 때문에 어려우니, 영지 내에 활동하는 로마인들을 모조리 살해해 카이사르와 맞설 뜻이 있음을 증명하기로 했다. 이후 노르망디를 지배하던 카르누테스족을 시작으로 여러 부족이 로마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 무렵, 갈리아 남부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아르베르니족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과거 부족장이었던 아버지가 살해당한 뒤 숙부에 의해 축출되었는데, 무리를 끌어모은 뒤 친 로마적인 행보를 보이는 숙부를 몰아내고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에 올랐다. 그는 주변의 갈리아 부족들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에 맞서 싸우겠다는 서약을 할 것을 요구해 호응을 얻어냈고, 그들로부터 켈트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각 부족으로부터 볼모를 받아내고, 병력과 무기의 공출을 요구했으며, 규율을 엄격히 세우고 이를 위반한 자들을 처형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각지에서 대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적들이 군대로 복귀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어서 쉽사리 갈리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 부대가 나르보를 향해 쳐들어오자, 카이사르는 신병들을 긴급 모집한 뒤 나르보로 이동했다. 그는 기병을 이끌고 6피트에 이르는 눈을 뚫으며 산맥을 넘은 뒤 아르베르니족의 영역을 습격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자기 종족의 위기를 좌시할 수 없어서 나르보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카이사르는 데키무스 브루투스[2]에게 기병대를 이끌고 약탈을 계속하다가 적이 다가오면 철수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비엔나로 가서 게르만 기병을 인계받았다.

이후 카이사르는 하이두이족의 영토를 가로질러 링고네스족의 영토에 숙영 중이던 2개 군단과 합세했고, 동시에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머물던 2개 군단에게 6개 군단이 머물고 있었던 아게딘쿰(상스)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뒤 자신 역시 2개 군단을 이끌고 아게딘쿰으로 이동해, 얼마 후 10개 군단이 집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르킨게토릭스는 하이두이족에 종속되어 있었던 보이족의 도시인 고르고비나를 포위 공격했다. 보이족이 무너지면 로마가 우방 종족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줄 것을 우려한 카이사르는 즉각 구원하기로 하고, 2개 군단을 숙영지에 남겨놓은채 8개 군단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는 먼저 벨라우노두눔을 점령한 뒤 케나붐에 이동해 주민들이 도망쳐서 텅빈 도시를 약탈하여 식량을 조달한 후 고르고비나의 근처에 있는 노비오두눔으로 이동했다. 노비오두눔의 주민들은 일시적으로 항복했지만, 베르킨게토릭스의 원군이 당도하자 다시 갈리아 측에 붙었다. 양군은 기병전을 벌였는데, 카이사르가 고용한 게르만 기병 400기의 맹활약으로 로마군이 승리했다. 이에 노비오두눔 주민들은 반란 주모자들을 모두 붙잡아 로마측에 넘기고 항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고르고비나 공격을 포기하고 전면적으로 철수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현 상황에서는 로마군을 전투로 꺾을 가망이 없다고 본 후, 로마군이 식량과 보급품을 위해 의존하는 지역 농장과 마을들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청야 전술을 감행하기로 했다. 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아바리쿰(오늘날 프랑스의 부르쥬)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이같은 입장을 밝혔고, 족장들은 이에 따라 로마군 주위의 20여 개 마을을 단 하루만에 파괴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대도시인 아바리쿰 역시 파괴하길 원했지만, 이 도시의 소유자인 비투리게스족은 아바리쿰 만은 파괴할 수 없으며, 천혜의 요새인 만큼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밝혔다. 갈리아인들의 추대를 받아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아르베르니족 자체가 그리 강한 부족이 아니라서 다른 부족들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베르킨게토릭스는 어쩔 수 없이 비투리게스족의 뜻대로 하도록 했다. 그 후 로마군이 아바리쿰을 포위 공격하면서, 아바리쿰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카이사르는 비투리게스족의 영역에 들어선 이래 지나가는 곳마다 파괴되어서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간 로마군이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붕괴되리라 여기고,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아바리쿰을 가능한 한 빨리 공략해 식량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바리쿰은 공략하기 매우 까다로운 곳이었다. 도시는 강과 상당한 습지로 보호되어서 방벽을 쌓아서 도시를 포위하기가 힘들었고, 접근로는 하나뿐이었으며 그마저도 많이 좁아서 대군을 운용하기 까다로웠다. 카이사르는 그 좁은 입구 밖에 숙영지를 세우고, 거대한 공성탑을 세운 후 언덕을 쌓기 시작했다.

한편,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의 뒤를 따라가다가 아바리쿰에서 15마일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웠다. 이 숙영지는 고지 위에 세워졌고 늪으로 보호되어서 로마군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로마군의 수렵대가 본진에서 멀리 떨어질 때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은 갈리아군의 지속적인 훼방으로 인해 식량을 수집하기 힘들었으며, 그동안 로마의 우방 부족으로서 식량을 주기적으로 공급하던 하이두이족이 이제는 식량 공급을 꺼리고 있었기에 물자가 점점 궁핍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로마군이 끝내 참호 공사를 완료하여 아바리쿰을 완전히 포위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새 진영을 아바리쿰 인근에 세워서 로마 수렵대를 습격할 준비를 했다.

정찰병이 적의 움직임을 보고하자, 카이사르는 수렵대 파견을 취소하고 적의 본진을 공격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군의 수렵대를 헛되이 기다리는 동안, 카이사르와 로마군 본대는 언덕 위의 갈리아군 진영에 접근했다. 그러나 갈리아군의 방어 태세가 굳건했고 늪이 사방에 깔려 있었기에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대치만 하다가 돌아갔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족장들이
"대리인을 임명하지도 않고, 진영을 떠나 위기를 자초하다니, 그러고도 지도자로 자처할 수 있는가!"
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급기야 그가 군대를 배신하려고 계획했다는 모함까지 받았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 포로를 잡아서 로마군 진영의 물자가 궁핍하다는 증언을 하게 하는 식으로 겨우 위기를 만회할 수 있었다.

로마군은 27일간 공사를 이어나갔다. 그 동안 물자가 바닥나서 굶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고, 공성전 내내 비가 내려서 땅은 진흙탕이 되어버렸으며 많은 병사가 질병에 걸렸다. 하지만 장병들은 이제까지 승승장구한 자신들이 이런 고난에 무너질 수 없다며, 카이사르의 독려를 받고 공사를 꿋꿋이 이어갔다. 그 결과, 공사를 시작한 지 25일째에 로마군이 쌓은 언덕이 폭 330피트, 높이 80미터에 달하여 아바리쿰 성벽의 높이에 거의 도달했다. 이에 비투리게스족 수비대는 언덕 아래에 터널을 파서 언덕을 지탱하는 기둥에 불을 질러 언덕을 붕괴시키려고 들었다. 이로 인해 언덕이 다소 가라앉았지만, 로마군이 사태를 조기에 파악하고 터널로 침입한 비투리게스족 병사들을 죽이고, 불을 끈 덕분에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바리쿰 수비대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후, 아바리쿰을 탈출해 습지를 건너 베르킨게토릭스와 합류하기로 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떠나려고 했지만, 아바리쿰에 함께 살던 여인들이 자기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했고, 이를 수비대가 받아들이지 않자 로마군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리지르는 바람에 로마군에게 들키면서 실패했다. 이 소동을 들은 카이사르는 아바리쿰에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세 27일째 되던 날,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로마군이 언덕을 통해 성벽으로 올라갔다. 로마군이 성벽을 제압하자, 비투리게스족 수비대는 마을 중심부로 후퇴하여 쐐기 진형을 이루고 끝까지 싸우려 했다. 그러나 로마군이 성벽으로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지켜보자, 공포에 질린 수비대는 곧 진형을 풀고 탈출로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곳 역시 카이사르가 사전에 파견한 기병대에게 막혔다.

아바리쿰 공성전을 치르는 동안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로마군 장병들은 수비대와 주민 40,000여 명을 모조리 학살했다. 오직 800명 만이 습지를 통해 가까스로 빠져나와 베르킨게토릭스와 합류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6월 초까지 아바리쿰에서 병사들을 푹 쉬게 하고 도시에 남아있는 식량으로 배를 채우도록 했다. 그는 이 일로 베르킨게토릭스가 실각하길 기대했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일찍이 아바리쿰도 파괴하고 주민들을 이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비투리게스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제 자기 말대로 안해서 이런 대참사가 일어났다고 주장해 다른 족장들의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이에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아르베르니족의 수도인 게르고비아를 공략해 그의 정치적인 입지를 완전히 박탈하기로 하고, 게르고비아 공방전을 감행했다.


[1] 심지어 아트레바테스 족장 콤미우스는 본래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원정을 직접 돕다가 적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카이사르에게 큰 신임을 받던 인물이어서 카이사르의 사고방식과 전투방식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런 인물까지 카이사르를 배신할 정도로 카이사르는 큰 패착을 저지른 것이었다.[2] 훗날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