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기원전 154~133년, 히스파니아를 공략하던 로마 공화국이 누만티아 부족연합을 상대로 벌인 전쟁.2. 배경
누만티아는 스페인 카스티야 레온 주 소리아 지방의 가레이 마을 인근에 위치한 요새 도시로, 철기 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 대 플리니우스는 이 도시가 펠레도니아인에 의해 세워졌다고 기술했지만, 스트라본과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레바키족이 세웠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본래 펠레도니아인이 세웠지만 기원전 4세기에 소리아 북쪽에 거주하던 켈티베리아 계통의 아레바키족이 이들을 몰아내고 누만티아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아레바키족은 누만티아를 중심지로 삼고, 인근의 여러 마을과 무역 거래를 하면서 생필품을 확보했다. 특히 바케오스족으로부터 밀 등 주요 곡물을 수입했다. 그들은 20,000명의 보병과 5,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막강한 군사력을 갖췄고, 이를 토대로 주변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가 히스파니아 정복전에 착수했을 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카르타고의 동맹 부족이 되었다가, 제2차 포에니 전쟁때 히스파니아를 석권한 로마에 귀순하여 동맹 부족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이 보조군을 대량 징발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치라며 강요하고 내정 간섭까지 벌이자, 양측은 곧 충돌하기 시작했다.
3. 경과
기원전 154년, 켈티베리아족이 수도 세게다를 확장하고 8km의 새로운 성벽을 건설했다. 여기에 로마군에 복무할 군인을 보내는 것과 공물을 납부하는 것 모두 거부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에게 30,000명의 병력을 맡겨 이들을 징벌하도록 했다. 일개 도시에 대규모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세게다 주민들은 집과 소지품을 전부 버리고, 누만티아로 피신했다. 풀비우스가 그들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아레바키족은 켈티베리아족과 연합하여 로마군에 대항하기로 결의했다.아레바키-켈티베리아 연합군의 사령관이었던 세게다의 카루스는 누만티아로 진군하는 로마군을 기습 공격하여 6,000명 이상을 사살했지만 그 자신도 이때 전사했다. 풀비우스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누만티아로 진군하여 공성전을 개시했다. 이때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의 군주 마시니사가 그에게 전투 코끼리 10마리를 포함한 지원군을 보냈다. 누만티아 수비대는 코끼리의 맹공에 당황했고, 곧 성이 함락될 듯했다. 그러다 큰 돌 하나에 맞아 부상을 입은 코끼리가 미쳐 날뛰면서 로마군이 혼란에 휩싸이자, 수비대는 즉시 반격을 개시해 4,000명에 달하는 로마인을 죽였다. 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데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풀비우스는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겨울 숙영지로 철수했다.
기원전 152년 풀비우스를 대신하여 새 지휘관이 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아레바키족, 벨리족 및 다른 켈티베리아 부족들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피해가 누적되자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평화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아레바키족이 평화에 동의하여 협상이 타결되자, 마르켈루스는 사절을 원로원으로 보내 평화 제안을 받아들여 전쟁을 끝내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고, 이듬해에 히스파니아로 파견될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151년 집정관 선거에서 당선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새 사령관으로 삼기로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르켈루스는 루쿨루스가 도착하기 전에 평화를 이루고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그러나 아레바키족은 마르켈루스와 합의했던 휴전을 파기하고, 로마와 손을 잡은 네르고브리게스족의 도시인 네르고브리가를 공격했다. 로마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레바키족의 수도 누만티아를 포위했지만, 누만티아의 지도자인 리텐논이 마르켈루스와 회담을 갖고 아레바키족과 벨리족을 대표하여 로마와 평화협정을 맺겠다고 제의했다. 마르켈루스는 즉시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부족들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필요한 인질과 돈을 건네줬다.
이리하여 마르켈루스는 루쿨루스의 군대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냈다. 루쿨루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공적을 세우기 위해 로마와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 바카에이족을 원로원의 허가없이 공격해, 코카 마을을 포위 공격하다가 평화협정을 맺는 척하다가 급습하여 주민 20,000명을 학살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팔렌티아가 부유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곳을 공격했다가 막심한 손실만 보고 투르데타니족의 영역으로 퇴각했고, 나중에 고발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가문의 힘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로마는 루시타니아 전쟁을 치르느라 누만티아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원전 143년, 루시타니아의 영웅 비리아투스의 맹활약으로 로마군이 잇따라 패배하자, 아레바키족은 이에 고무되어 로마를 상대로 봉기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지휘 아래 30,000명이 넘는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메텔루스는 2년간 작전을 수행하며 아레바키족을 연이어 격파했지만, 누만티아 공략에는 실패했다. 이에 그들과 협상한 끝에 인질, 의복, 말 등 공물을 바치고 무기를 인도하는 대가로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 부족이 되는 협정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누만티아인들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끝내 무기를 인도하지 않았고, 로마는 누만티아 같은 작은 도시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에 격분해 재차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기원전 141년 새 사령관으로 부임한 퀸투스 폼페이우스는 30,000명의 보병과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누만티아로 진군해 초기에 작은 승리를 거두고,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오랜 공성전에도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없고 혹독한 겨울과 식량 부족 현상으로 인해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원로원이 자신을 소환하여 책임을 물을 걸 두려워해 그들과 화해하기로 했다. 그는 누만티아인들에게 공개적으로는 항복하라고 요구했지만, 비밀리에 인질을 돌려줄 테니 30달란트만 지불하라고 요청했다. 누만티아인들은 로마가 이를 받아들일지 의문을 품고,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폼페이우스는 누만티아가 항복했다고 선전하며 군대를 철수시켰다.
기원전 139년 가까운 히스파니아의 새 총독으로 부임하여 히스파니아 주둔군 사령관을 맡게 된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누만티아에 접근하여
"항복했으니 무기를 반납하라"
고 요구하자, 누만티아인들은 "전임 사령관이 맺은 협약대로 하라"
고 요구했다. 라이나스는 폼페이우스에게는 누만티아인들이 무조건 항복했다고 전해들었는데 정작 누만티아인들이 '전임 사령관과 맺은 협약'을 운운하자 깜짝 놀랐고, 아직 히스파니아에 남아있던 폼페이우스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은 누만티아인들에게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누만티아인들이 보낸 사절은 이에 대응해 폼페이우스와 합의를 이뤘을 때 동석했던 트리부누스 밀리툼과 레가투스들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라이나스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골머리를 앓은 끝에 폼페이우스와 누만티아 사절을 로마로 보내 원로원 앞에서 증언하게 했다.폼페이우스는 여전히 자신이 아무런 양보나 보증을 하지 않았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누만티아 사절은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를 논리적으로 밝혔다. 이에 원로원 내 수많은 인사들은 폼페이우스가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속였다고 규탄하며 그를 누만티아인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는 전임자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군대를 자신에게 넘겨주기 위해 모든 병사를 동원 해제하고 식량이 있는 창고를 약탈했으며, 심지어 군비를 유용했다며 책임을 떠넘기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누만티아인과의 합의를 무효로 규정했고, 라이나스는 원로원이 허락하지 않은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누만티아를 포위 공격했지만 상당한 손실을 입고 패배했다. 이 일로 폼페이우스는 로마 시민을 속인 죄로 기소되었지만, 막대한 뇌물을 배심원들에게 넘긴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원로원은 누만티아를 어떻게든 굴복시키기로 작심하고,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에게 40,000명의 병력을 맡겼다. 만키누스는 즉각 누만티아를 공격했지만 4,000명의 수비대에게 연이어 패배하여 절반을 잃어버렸고, 급기야 적군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만키누스는 당시 재무관으로서 종군 중이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적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 그라쿠스는 아버지 대 그라쿠스가 누만티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걸 잘 활용해 그들과 협상한 끝에 20,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온전히 빠져나오게 하는 대가로 누만티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공물을 바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맺기로 했다.
로마 정계는 이민족의 아량으로 풀려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만키누스와 그라쿠스를 비롯한 장수들을 모조리 재판에 회부했다. 그라쿠스와 다른 부관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만키누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협약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원로원의 의지로 누만티아에 알몸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누만티아인은 로마의 배신을 한 사람에게만 물 수 없다며 만키누스를 되돌려보냈다.
기원전 137년 후임 사령관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는 누만티아를 쳤다가 전임 지휘관들처럼 실패할 걸 우려해, 바케오스족의 영토를 대신 공격했다. 그는 친척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와 함께 부족의 수도인 팔렌티아를 포위 공격했다. 원로원이 포위 공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따르지 않고 공성전을 이어갔으나, 보급품이 바닥나자 부상자와 병자들을 남겨두고 후퇴했다. 바케오스족은 재빨리 이들을 추격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후의 사령관들도 하나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인내심이 바닥이 난 로마인들은 기원전 134년, 과거 제3차 포에니 전쟁때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정복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누만티아를 정복하도록 했다.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에 작전을 수행할 만큼 충분한 군대가 있고, 적도 최근 몇년간 큰 손실을 입었기에 대군을 이끌고 갈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4,000명의 병력만 이끌고 갔다. 여기에는 친구 중대라고 불리는 500명의 분견대도 함께 했는데, 이들은 스키피오의 클리엔테스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가담한 이들 중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있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현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병사들의 규율이 엉망이고 사기는 바닥이라는 걸 파악한 후, 이를 개선하기로 했다. 먼저 숙영지에 정착한 많은 상인, 매춘부, 점쟁이들을 내쫓고 노예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음식 조리와 같은 간단한 일만 하는 노예들은 모두 숙영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기에 가축과 마차의 수를 대폭 줄였으며, 군인은 계급을 불문하고 천막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없었고, 조리기구도 최소한으로 국한되었다. 여기에 히스파니아 일대에서 나는 향신료와 맛있는 음식을 별도로 사들이는 것 역시 금지했다. 또한 엄격한 행군 훈련을 실시하고, 실전과 비슷한 수준의 전투 훈련도 병행해, 병사들의 투지를 되살렸다.
한편,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의 동맹 부족들로부터 보조군을 받아내고, 유구르타 왕자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대도 수용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총 6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렇게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누만티아로 진군했다. 하지만 도시를 즉시 공격하지 않고, 다른 켈티베리아 부족들로부터 누만티아를 고립시키기 위해 인근 바케오스족의 농경지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로 인해 누만티아인들은 곡물을 구할 길이 막막해졌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와 더불어 켈티베리아인들을 상대로 소규모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듭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한번은 팔렌티아 시 인근에서 벌어진 접전에서, 대대장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기병 사단이 달아나는 켈티베리아인들을 너무 열심히 추격하다가 언덕을 넘어갈 때 매복 공격을 당했다. 스피키오는 즉시 자신의 기병대를 2개 사단으로 편성해 켈티베리아인들을 공격한 후 루푸스의 퇴각로를 엄호하라고 명령했고, 부하들은 작전을 잘 수행했다. 이리하여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누만티아 주변의 켈티베리아인들을 복종시킨 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비로소 누만티아 공성전을 감행했다.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눠서 하나는 동생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넘겨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누만티아인들이 성에서 나와 도전장을 던졌지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도랑과 흉벽으로 연결된 7개의 요새를 건설하여 도시를 에워싸서 굶주리게 했다. 켈티베리아인들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연이어 기습 공격했지만 모조리 격퇴당했다. 누만티아 족장 레토게네스가 로마 방어선을 간신히 뚫고 루티아 시에 도착한 뒤 누만티아를 구해달라고 호소하자, 그곳 젊은이들은 누만티아를 돕자고 주장했지만 장로들은 로마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스키피오에게 알리기로 했다. 스키피오는 루티아로 잠입하여 400명의 청년을 사로잡고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또한 레토게네스를 생포한 뒤 처형한 후 누만티아 성벽 앞에 버렸다.
알레조 베라 작, <누만티아의 마지막 날>
누만티아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15개월간 버텼지만, 역병과 기근에 시달리며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가 기원전 133년 여름 결국 항복했다. 그러나 대다수 수비대와 시민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길 거부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로마군은 누만티아를 철저히 약탈하고 모든 집을 허물었으며, 최후까지 살아남은 주민 50명을 데리고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쓴 뒤 노예로 팔았다. 이리하여 누만티아 전쟁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