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 하밀카르 바르카 Hamilcar Barca[1][2] | |
<colbgcolor=#eee8aa> 출생 | 미상 |
고대 카르타고 | |
사망 | 기원전 228년 |
히스파니아 | |
국가 | 카르타고 |
지위 | 카르타고 군사령관 |
가족 | 한니발 바르카(장남) 하스드루발 바르카(차남) 마고 바르카(삼남) 그외의 3명의 딸 보밀카르(첫째 사위) 한노(외손자) 잘생긴 하스드루발(둘째 사위) 나라바스(셋째 사위)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용병 전쟁 이베리아 정복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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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𐤇𐤌𐤋𐤒𐤓𐤕𐤟𐤁𐤓𐤒 / 𐤇𐤌𐤋𐤊𐤟𐤁𐤓𐤒Hamilcar Barca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 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2. 생애
카르타고를 건국한 디도 여왕의 후예를 자처한 저명한 카르타고 귀족 가문인 바르카 가문의 일원이다. 부모 및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의 생애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장남의 이름을 한니발로 정한 것은 아버지 한니발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주장했지만,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2.1.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47년, 하밀카르는 시칠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를 상대로 17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매우 곤궁한 처지에 놓였다. 시칠리아의 대다수 도시들은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카르타고에 남은 거점은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 뿐이었다. 또한 육군과 해군 모두 로마에게 연전연패해 막대한 전력을 상실했고, 카르타고의 피지배 민족인 리비아인과 누미디아 유목민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기에 시칠리아에 힘을 쏟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그에게 주어진 용병대는 로마에 비하면 소규모에 불과했다. 다만 로마군이 강력한 방어력을 갖춘 두 도시 공략에 실패한 데다 기원전 249년 드레파나 해전에서 로마 해군이 완패한 뒤 해상 운송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기세등등했던 로마군의 기세는 한 풀 꺾였고 전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하밀카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용병군으로 로마군과 정면 대결하면 반드시 패할 테고, 이 이상의 패전은 카르타고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 대신,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여전히 포위하고 있는 로마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식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유격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이탈리아 본토 최남부의 로크리와 브룬디시움을 기습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서 북서쪽으로 7마일 떨어진 헤렉테 산(오늘날 몬테 펠레그리노)에 강력한 요새를 세운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로마군 보급부대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로마군은 당연히 그의 존재를 거슬려 했고 헤렉테 산에 몇차례 공격을 가했지만, 하밀카르는 로마군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쳤다. 그러나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료를 제공한 폴리비오스가 "교전국 사이에서 매일 일어난 상호 매복, 공세, 및 공격의 모든 동기와 세부 사항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독자들도 지겨워할 게 분명하니 언급하지 않겠다"라며 이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고, 다른 역사가들도 하밀카르의 활약상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하밀카르와 로마군간의 전투 상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폴리비오스는 아래의 설명을 덧붙였다.
하밀카르는 상황과 장소에 따라 필요한 모든 군사적 속임수, 특별한 용기와 힘을 보여줬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결정적인 전투는 불가능했다. 로마군 진영 역시 그처럼 강력한 요새를 갖춰서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두 숙영지를 가로지르는 거리는 매우 짧았다. 소규모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면서도 승부를 낼 수 없었던 주된 이유다.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투 자체에서 죽었고, 재빨리 퇴각한 모든 사람은 참호 뒤에 숨어 위험을 벗어나려 했다.
하밀카르는 헤렉테 산에서 로마군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치고 적 보급로를 교란할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카타나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쿠마이에 이르기까지 해상 공격을 벌였다. 비록 로마군에게 점거된 도시를 한 개도 탈환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상대로 계속 물고 늘어져서 로마군의 자원을 계속 소모시켰다.
그러던 기원전 244년, 하밀카르는 로마군에게 포위된 드레파나 인근의 에릭스(현재 몬테 산 줄리아노) 산에 은밀히 이동하여 그곳의 산비탈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에릭스 시는 기원전 249년 로마군에게 점령된 뒤 드레파나를 공격하는 로마군의 후방 보급 기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 뒷편의 에릭스 산 정상에는 소규모의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에릭스 시를 기습하여 공략한 뒤 그곳에 있던 모든 식량과 무기 창고를 파괴한 후 산 정상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을 포위 공격했다(에릭스 산 전투). 그러나 그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항전해 적이 진영을 접수하는 것을 막아냈고, 그 사이에 드레파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에릭스 산으로 달려오면서 이번에는 하밀카르의 카르타고군이 역포위될 위기에 몰렸다.
이에 하밀카르는 로마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형이 험준하면서도 해상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 로마군과 대치했다. 양자는 3년간 소규모 전투를 연이어 치렀지만 승부를 쉽게 내지 못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한 번은 보도스토르라는 부하가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는 하밀카르의 지시를 거부하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약탈하다가 로마군의 역습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하밀카르는 로마군 진영에 사절을 보내 아군 전사자들을 매장하고 싶으니 일시적인 휴전을 맺자고 요청했다. 그러자 집정관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가 냉소적으로 답하며 거부했다.
"너희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죽은 자가 아니라 너희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휴전을 요청해야 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막심한 손실을 입었다. 이번에는 푼다니우스가 카르타고 진영에 사절을 보내 하밀카르와 같은 요청을 했고, 하밀카르는 이렇게 답하며 받아들였다.
"나는 오직 살아있는 자와 싸운다. 죽은 자들은 이미 합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로마군이 하밀카르를 상대로 피해만 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하밀카르의 군대 내부에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적지에서 고립된 것에 불안감과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심지어 1,000명의 켈트족 용병들이 아군 진영을 로마군에게 내주기 위해 로마군과 접촉했다가 하밀카르에게 발각되어 집단 처형된 사건이 벌어졌다. 하밀카르는 용병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상당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해 군심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하밀카르가 시칠리아로 온 이래 6년간 소모전만 벌어질 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로마 공화국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하나는 이 이상 전쟁을 벌이지 말고 카르타고와 협상해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 카르타고를 재기불능으로 삼은 뒤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정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하밀카르를 제압하는 것은 수년간의 소모전이 보여주듯 요원했으니, 남은 길은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공략하는 것뿐이었다. 해안 도시인 두 요충지를 공략하려면 해상 봉쇄가 필수적이었고, 그러려면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여 카르타고 해군을 물리쳐야 했다.
당시 로마 해군은 기원전 255년 카마리나 해상 사고와 기원전 254년 파노르무스 해상 사고로 인해 막대한 인력과 함대를 상실했고, 뒤이어 기원전 249년 드레파나 해전 참패와 카르타고 해군의 연이은 이탈리아 본토 습격으로 인해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전함이 얼마 되지 않았다. 로마의 이같은 사정을 파악한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가 조만간 협상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원주민 반란과 누미디아 등의 침략에 대처하는데 투입하고 시칠리아에는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으며,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함대를 대폭 감축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새로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국고는 이미 바닥났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전쟁에서 승리하면 카르타고에게 부과될 배상금을 받아가는 조건으로 배 한 척을 건조할 자금을 대출받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부유한 시민들은 앞다퉈 사재를 털어 정부에 기부했으며, 돈을 낼 수 없는 시민들은 직접 함선 제작에 뛰어들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약 200척의 퀸퀘레메(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가 건조되었고, 기원전 241년 릴리바이움을 해상 봉쇄하려는 로마 해군과 이를 막으려는 카르타고 해군이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맞붙었다. 해전 결과는 로마군의 압승이었고, 릴리바이움의 해상은 봉쇄되었다.
카르타고 당국은 로마와는 달리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함대를 새로 건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할당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까지 전쟁을 이어가면서 재정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인력 손실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인데다 설령 함대를 일으켜서 싸운들 승산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하밀카르에게 로마 정부와 평화 협약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아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가 버티고 있으니 새 함대를 일으킨다면 이길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에 분개해 협상을 이끌기를 거부했고, 릴리바이움 수비를 맡았던 기스코가 하밀카르를 대신해 협상에 임했다. 그 결과 양국은 '루타티우스 협약'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가까운 여러 섬도 양도한다. 단, 양도해야 하는 섬은 차후에 정한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2.2. 용병 전쟁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하밀카르는 에릭스 산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용병대 20,000명을 릴리바이움으로 데려간 뒤 지휘권을 기스코에게 넘기고 홀로 귀국했다. 이후 모종의 임무를 맡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밀린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스펜디오스와 마토스를 지도자로 선출하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용병 전쟁이 발발했다. 스펜디오스와 마토스는 카르타고에 귀속되었던 도시들에 서신을 보내 페니키아인들의 멍에에서 벗어나 자신들과 합세하라고 요청했다. 당시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물린 카르타고에 반감을 품고 있던 도시들은 용병들의 요청에 쉽게 응했고, 오직 비제르테와 우티카 시만이 카르타고를 계속 따랐다. 70,000명의 리비아인과 20,000명의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결성한 두 지휘관은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일전에 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와 원주민 반란군을 무찔렀던 한노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새로운 용병군을 모집했으며, 모든 장정을 무장시키는 한편, 시내에서 기병을 훈련시키고 잔존한 함대를 소집했다. 한노는 1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앞세워 우티카를 포위한 반군을 격파했지만, 흩어진 적군을 쫒지 않고 우티카로 들어가서 축하 행사를 벌였다. 그 동안 반란군은 재집결한 뒤 하밀카르 밑에서 배웠던 대로 유격전을 개시해 한노군이 식량난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결국 한노는 우티카에서 빠져나와야 했고, 고르자(Gorz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반란군에 격파당했다.
한노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70마리의 전투 코끼리, 새로 계약한 용병대, 그리고 용병 반란군 중 귀순한 이들을 제공했다. 이들은 총합해 8,000에서 10,000명에 이르렀는데, 다수는 한노를 따랐다가 반란군에게 패배했을 때 생존한 장병들이었다. 하밀카르는 이들을 철저히 훈련시키면서 카르타고를 옥죄고 있는 반란군을 격퇴할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카르타고로 향하는 산길은 마토스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점령되고 요새화되었다. 대규모 군대가 행진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바그라다스 강을 건너는 것뿐이었는데, 스펜디오스가 바그라다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옆에 숙영지를 세웠기 때문에 이 역시 뚫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밀카르는 두 반란군 지휘관과는 달리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곳의 지리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름에 사막 바람이 불 때 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진흙 퇴적물을 형성하여 강 어귀에서 건널 수 있는 길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숨긴 채 한밤 중에 카르타고를 떠나 자신의 군대와 함께 사막 바람이 만든 길을 건넜다.
다음날 새벽, 그는 스펜디오스의 군대가 주둔한 숙영지에 접근했다. 이에 스펜디오스는 10,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하밀카르를 대적했고, 우티카를 포위하고 있던 15,000명의 다른 용병군도 아군과 합세하기 위해 이동했다. 하밀카르는 적과 잠시 대치했다가 군대를 재편성하기로 하고, 선봉에 섰던 기병과 코끼리를 물러서게 하고서 팔랑크스 부대를 전진시켰다. 스펜디오스는 적 코끼리와 기병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 그들이 후퇴하고 있다고 착각해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의 무질서한 공세는 하밀카르가 내세운 팔랑크스에 가로막혔고, 뒤이어 하밀카르의 경보병이 공격해 반군을 패퇴시켰다. 스펜디오스는 우티카에서 달려온 아군과 합세한 뒤 군대를 재정비하려 했으나, 하밀카르의 기병과 코끼리가 그들의 측면을 요격해 격파했다.
바그라다스 강변 전투에서 반군 6,000명을 사살하고 2,000명을 사로잡은 하밀카르는 스펜디오스가 세운 숙영지를 점령한 뒤 기세를 이어가 우티카로 진격해 그곳을 포위하고 있던 반군을 몰아냈다. 하지만 비제르테를 포위하고 있던 마토스가 누미디아인과 아프리카인으로 구성된 정예병을 보내줬고, 스펜디오스 본인은 아우타리투스가 이끄는 갈리아 용병을 포함한 8,000명을 새로 편성할 수 있었다. 그는 즉각 하밀카르에게 반격하려 했지만, 누미디아 귀족으로 반란군과 함께 했던 나라바스가 2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함께 귀순한 뒤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보급이 끊어졌다.[3]
당초 마토스의 조언에 따라 하밀카르가 보유한 강력한 전투 코끼리와 기병을 피해 시에나 산악지대에서 농성하던 스펜디오스는 식량난이 갈수록 심해져서 군영 내에서 식인 풍조까지 발생하자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여기고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와 함께 하밀카르와 협상했다. 그 결과 하밀카르와 함께 싸우기를 원하는 이들은 카르타고군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방면되는 조건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스펜디오스의 군대 내에 있던 리비아인들은 스펜디오스가 자신들을 페니키아인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여기고 무기를 들어 카르타고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밀카르는 코키리병과 경보병들을 투입해 이들의 전열을 흐트러놓은 뒤 전원 포위 섬멸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40,000명에 달하는 리비아인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스펜디오스를 비롯한 살아남은 반란군을 방면한 하밀카르는 반군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도시들을 카르타고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에게 두번째 분견대를 맡겨 반군의 소굴인 튀니스를 공략하게 했다. 그러나 사르데냐에 주둔하고 있던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 장병 및 장교들을 모조리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카르타고 정부는 한노[4]에게 소규모 병력을 맡겨 사르데냐로 파견했지만, 한노가 이끌고 온 군대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반군에 가담했고, 한노는 체포된 뒤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한편, 마토스는 스펜디오스 등을 맞아들인 뒤 반란군 장병들이 하밀카르의 관용 정책에 감화되어 잇따라 귀순하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를 어찌 대처할 지 논의한 끝에, 하밀카르가 더이상 관용을 베풀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가서 장병들이 자신들을 계속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우티카 외곽에 군대를 소집한 뒤, 사르데냐와 튀니스 반군의 특사로 가장한 두 배우를 내세워서 카르타고군이 전우들을 거짓 사면으로 유인한 뒤 몰살시켰다고 밝히게 했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은 보복을 요구했고, 마토스 등은 그때까지 잡혀 있던 기스코 등 700명을 끌어낸 뒤 손과 발을 절단하고 무릎을 부러뜨린 뒤 도랑에 던져 죽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카르타고 정부는 반군에 사절을 보내 기스코 등의 유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반란군 측은 이를 거부하면서, 앞으로 카르타고에서 오는 모든 사절을 같은 방식으로 대하겠다고 위협했다. 하밀카르는 이 일에 극도로 분노해 관용 정책을 중단하고 사로잡은 반란군을 코끼리가 깔아뭉개거나 야수에게 잡아먹히게 했다. 폴리비오스는 이후로 누구도 평화를 논하지 않고 끝까지 서로를 해쳤다며, 전쟁의 명칭을 '협상 없는 전쟁'이라고 칭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났던 한노를 재기용해 하밀카르와 협력하여 반란군을 섬멸하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티카 인근에 각자 따로 주둔한 뒤 사사건건 마찰을 벌였고 서로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상황은 극적으로 악화되었다. 엠포이아에서 보급품을 가져오던 수송 함대가 폭풍으로 인해 침몰했고, 우티카와 히포 아크라 시에서 반란이 일어나 페니키아 수비대가 몰살당하고 반란군에 넘어갔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대로 가면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군대에 하밀카르와 한노 중 누구를 총사령관으로 삼을 지를 정하게 했다. 그 결과 하밀카르 바르카가 단독 사령관으로 선출되었고, 정부는 또다른 하밀카르(동명이인)의 아들이자 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했던 한니발을 하밀카르의 부관으로 선임했다.
그 사이, 스펜디오스와 마토스는 대규모 반군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육상에서 봉쇄했다. 그들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가 해상에서 보급품을 받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성벽 앞에서 반군이 자리잡은 상황은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줬다. 이에 하밀카르는 유격부대를 출격시켜 반란군의 보급로를 급습했고, 반군은 곧 식량난에 시달렸다. 이에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스펜디오스가 하밀카르의 군대를 상대하는 사이에 마토스는 카르타고를 계속 포위하기로 했다.
스펜디오스는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하밀카르의 유격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보급품이 그들 자신과 튀니스에 있는 동지들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했다. 이후 스펜디오스의 군대가 진군하자, 하밀카르는 그들을 추격했다. 스펜디오스는 일부러 적 코끼리병과 기병대가 효과적으로 활약할 수 없는 험준한 고지대로 나아갔고, 자신들을 쫓는 하밀카르를 상대로 소규모 접전을 잇따라 벌였다. 그러면서 하밀카르를 협곡으로 유인한 뒤 포위섬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여기에 넘어가지 않고 나라바스의 누미디아 기병대를 활용해 반군의 진군 속도를 효과적으로 저지했으며, 나중에는 그들을 앞질러 가서 진군로를 차단했다.
스펜디오스는 어쩔 수 없이 인근의 고개로 올라갔다. 이 고개 주변의 지형 윤곽선이 톱과 유사했기에, 폴리비오스는 "톱 전투"라는 명칭을 붙였다. 하밀카르는 반군을 효과적으로 포위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반란군은 몇 주 동안 버텼고, 식량이 고갈되자 말을 잡아먹었고, 말이 없어지자 포로, 노예를 잡아먹었다. 그들은 마토스가 자신들을 구출하기 위해 오기를 희망하며 계속 버텼지만, 마토스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밀카르가 구원을 요청하려는 반군 전령을 붙잡았거나, 마토스가 한노 휘하의 카르타고군 10,000명과 대치하느라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반란군 장병들은 스펜디오스 등에게 하밀카르와 재협상하라고 위협했다. 스펜디오스는 어쩔 수 없이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 및 부관들과 함께 고개 아래로 내려가 협상을 시도했지만, 하밀카르는 이들을 전원 체포한 뒤 코끼리를 선두에 내세운 전 병력을 동원해 지도자도 없고 굶주린 반군을 공격했다. 반란군은 대부분 살해되었고, 항복한 이들은 모두 코끼리 발 아래에 던져졌다. 마토스는 아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튀니스로 퇴각했다.
기원전 238년 후반, 하밀카르는 튀니스로 진군해 그곳을 포위했다. 이 도시는 동쪽과 서쪽에서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하밀카르는 군대의 절반을 이끌고 남쪽에 주둔했고 부관 한니발은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북쪽에 주둔했다. '톱 전투' 당시 사로잡힌 스펜디오스, 아우타리투스, 자르자스 등 반란군 지도자들은 튀니스에 잔존한 반란군이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에 마토스는 한니발의 진영을 향해 대규모 야간 기습을 감행했고, 이를 예상하지 못한 한니발은 숙영지를 잃고 30명의 유명 인사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그들은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스펜디오스 등이 박혔던 십자가에 못박혔다. 결국 하밀카르는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마토스는 토벌군을 격퇴한 뒤 식량이 고갈된 튀니스를 떠나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부유한 항구 도시인 렙티스 파르바로 향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튀니스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하밀카르에게 한노와 지휘권을 공유하라고 강요했고, 하밀카르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 후 하밀카르와 한노는 25,000명 이상의 병력과 많은 전쟁 코끼리를 이끌고 반군을 추격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반군은 궤멸되었고, 마토스는 체포된 후 카르타고로 보내진 뒤 가혹한 고문을 받고서 처형되었다. 이후 대다수 도시들은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아들였지만, 우티카와 히포 아크라는 계속 저항했다. 한노와 하밀카르는 이들을 포위 공격한 끝에 항복을 받아낸 뒤 막대한 배상금을 매겼다. 그 후 두 장군은 반란군 편에 섰던 누미디아 부족들에 대한 보복 공세를 가해 수많은 이들을 학살했다.
이리하여 용병 전쟁이 마무리된 뒤,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정부의 허락 없이 용병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하겠다"라고 약속해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한 혐의로 정적들에게 고발당했다. 하지만 하밀카르는 용병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국가를 구한 영웅으로서 많은 시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고, 많은 고관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 중에는 그의 또다른 딸과 결혼한 '잘생긴 하스드루발'도 있었다. 하밀카르는 사위 하스드루발의 도움 덕분에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2.3. 코르시카 및 사르데냐 상실과 히스파니아 정복
이 무렵, 사르데냐의 용병 반란군은 아프리카의 반란군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토벌대가 들이닥칠 것을 직감하고 로마 정부에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던 기원전 237년, 용병들의 압제에 분노한 사르데냐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용병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용병들은 이탈리아로 피신한 뒤 로마에 사르데냐를 점령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로마 내에서 이참에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이들의 의견이 관철되면서 로마군이 사르데냐에 진주했다.카르타고 정부는 자국의 영역에 군대를 진주시킨 로마의 행위에 항의했지만, 로마 정부는 사르데냐인들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이며 조약에 적시된 "추가로 양도해야 하는 섬"에 사르데냐가 들어갔을 뿐이라고 답했다. 카르타고 정부가 군대를 사르데냐에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리자, 로마는 카르타고가 자국의 정당한 영역을 침범하려 했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용병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쇠진해지면서 로마에 대적할 여력이 없었던 카르타고 정부는 결국 로마가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가지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1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시칠리아를 상실한 데 이어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마저 상실한 카르타고는 지중해 해상권을 거진반 박탈당해 막대한 무역 손실을 입었고, 카르타고 시민들의 로마에 대한 증오심은 증폭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와의 전쟁을 끝까지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애초부터 로마에게 적대적이었던 하밀카르 역시 로마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대부분의 로마 작가들에 따르면,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활로를 열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출진하기 전에 9살된 장남 한니발 바르카를 신전으로 데려가 평생 동안 로마를 적대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한니발이 로마에 대한 적대 의식을 그에게 물려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밀카르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주조한 은화.
기원전 237년경, 하밀카르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상실한 카르타고의 새 활로를 열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가데스[5]에 상륙한 뒤 바스테타니족과 투르데타니족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고 포로 3,000명을 아군에 편입시켰다. 이후 이베리아인 지도자 인돌트의 5만 적군과 맞붙었다. 인돌트는 전투 직전에 도주했다가 나중에 사로잡힌 뒤 실명형에 처해진 후 십가자형을 받았고, 5만 병력 중 대다수는 몰살당하고 10,000명만 풀려났다. 하밀카르는 이후에도 원정을 지속적으로 이어간 끝에 시에라 모레나 등 이베리아 반도의 풍부한 은광 및 금광을 확보해 로마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데 필요한 은화를 주조했으며, 많은 도시를 귀순시키거나 무력으로 점령했다.
하밀카르의 지속적인 원정으로 많은 이베리아 도시와 부족들이 카르타고에 귀속되자, 이베리아 해안지대에 살던 그리스인들은 불안감을 품고 로마에 개입을 요청했다. 기원전 231년, 로마 원로원은 하밀카르의 이베리아 반도 진출을 조사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하밀카르는 사절단에게 자신이 이베리아를 공략한 건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사절단은 이 말을 듣고 "그를 어떻게 비난해야할지 막막했다"고 한다. 로마는 결국 하밀카르의 행위에 어떤 트집도 잡지 못했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에 직접 개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기원전 230년경, 하밀카르는 그동안 점령한 영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후대 그리스 역사가들이 아크라 루케(Ἂκρα Λευκῆ: 하얀 곶 또는 하얀 성채)라고 명명한 이 도시의 페니키아어 명칭은 알려지지 않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카스트룸 알붐(Castrum Album: 하얀 성채)라고 명명했다. 이 도시는 나중에 로마에 귀속된 뒤 루켄툼으로 개명되어 기원후 1세기까지 번영을 구가했으나 3세기부터 쇠락하여 오늘날에는 유적지만 남아 있다.
2.4. 사망
하밀카르의 전쟁 중에 포획된 막대한 전리품은 병사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었고, 상당수는 카르타고 본국에 보내져서 시민과 정치인들이 자신의 전쟁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그는 말, 무기, 사람, 돈을 아프리카 전체에 공급했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228년, 하밀카르는 헤르케 마을을 포위 공격했다. 성채 공략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을 때 겨울이 다가오자, 하밀카르는 대부분의 군대를 아크레 루케로 보내 겨울을 보내게 하고 두 아들 한니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함께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포위를 이어갔다.이때 오레타니 족장 오리수스가 군대를 이끌고 접근했다.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던 그는 성채 공략을 돕기 위해 왔다고 밝혔고, 카르타고인들은 경계를 풀었다. 그러나 오리수스는 곧 돌변해 카르타고군을 공격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이 전투 코끼리를 활용해 격퇴하려 했지만, 오리수스는 미리 황소 떼를 숨겨뒀다가 코끼리들이 돌격했을 때 황소 뿔에 불을 붙인 뒤 코끼리들을 향해 돌진하게 했고, 코끼리들은 겁에 질려 달아났다고 한다. 반면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와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불타는 나뭇가지를 실은 전차를 동원해 코끼리들을 몰아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와 아피아노스는 오리수스가 속임수를 통해 카르타고인들을 물리쳤다고만 밝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하밀카르는 아군을 수습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두 아들이 위험에 처하자 적군이 자기 쪽으로 오도록 유도함으로써 그들을 구했지만, 도중에 중상을 입고 낙마한 뒤 강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는 그가 이베리아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이름없는 부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고만 밝혔다. 하밀카르를 경계한 로마가 암살자를 파견해 죽였다는 설도 제기되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
하밀카르 본인은 이베리아 정복 전쟁 도중 전사했으나, 그의 사위인 잘생긴 하스드루발이 그의 직위를 물려받고 카르타고 노바(오늘날의 카르타헤나)를 건설하는 등 에브로 강 이남에서 카르타고의 지배권을 굳건히 하였다. 나중에 그의 아들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반은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