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 반달 전쟁 Vandal War | ||||||||
시기 | 429년-442년 | |||||||
장소 | 북아프리카,튀니지 | |||||||
원인 | 반달족의 대규모 민족이동 | |||||||
교전 세력 |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 반달 왕국 | ||||||
지휘관 |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보나파키우스 세바스티아누스 아스파르 | 가이세리크 후네리크 | ||||||
결과 | 반달 왕국의 건국 북아프리카 속주 상실 서로마 제국의 서지중해 제해권 상실 |
1. 개요
반달족과 서로마 제국 양측이 북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전쟁. 반달족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가이세르크가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 왕국을 건국한다.2. 상륙
타라코 전투 이후 서로마 제국은 반달족이 바다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고 반달족은 425년까지 히스파니아 전역을 약탈했고 428년 군데리크의 뒤를 이은 가이세리크는 429년 5월 모로코인 팅기에 상륙했다.3. 전개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의 로마 세력을 공격했고 당시 코메스(comes)였던 보나파키우스가 아프리카 야전군을 지휘했다.보나파키우스는 430년 초반 누미디아의 칼라마에서 반달족과 전투를 벌였다.그러나 로마군이 질적으로 우세를 점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보나파키우스는 히포 레기우스로 퇴각한다.현재의 알제리 국경 부근으로 진군한 반달족은 히포 레기우스를 포위하며 장장 14개월에 걸친 공선전을 시작한다. 430년 6월 시작된 이 공성전은 가이세리크가 성벽을 뚫지 못하면서 장기전으로 흘러갔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가이세리크는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무렵 라벤나궁정에서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아스파르의 증원군이 아프리카에 도착했으며 히포 레기우스에서 보나파키우스와 합류해 반달족을 공격했다.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카르타고와 키르타를 중심으로 반격이 시작되자 가이세리크는 일시적인 패배를 겪었다.
그러나 보나파키우스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432년 촉발된 1년간의 짧은 내전이 발발하면서 보나파키우스는 아프리카를 떠나야 했고, 이탈리아, 리미니에서 아이티우스를 격파하지만, 심한 상처로 인해 사망한다.
보나파키우스가 떠난 틈을 노려 가이세리크는 아스파르가 이끄는 로마군을 격파하면서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으다. 그러나 공성무기의 부재로 공성을 수행할 수 없는 반달족은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으로 흘러가며 교착상태가 이어지자, 435년 2월 11일, 가이세리크는 마우레타니아 속주와 누미디아를 점령하는 대가로 후네리크를 로마에 인질로 보내며, 포이데타리 형식으로 서로마 제국에 편입되는 방식을 통해 서로마 제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한다.
그러나 439년 10월 가이세리크는 카르타고를 급습해 같은달 19일 카르타고를 점령한다. 북아프리카의 최고 거점 도시인 카르타고가 어이없게 떨어지자 서로마 제국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440년 시칠리아를 침공하는 반달족을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아 격퇴했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와 훈족이 동로마 제국을 압박하고 있었기에 동로마 제국은 공격을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했다. 결국 서로마 제국은 442년 양측 간에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4. 결과
가이세리크는 반달 왕국을 서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대가로 반달 왕국이 점령한 아프리카의 일부 점령지를 다시 서로마 제국에게 반환하며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일부 속주들만 영토로 삼았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서 제일 비옥한 토지가 반달족의 손에 떨어지면서 서로마 제국의 곡물값이 폭등하는 등 서로마 제국에게 식량 공급처의 상실은 뼈아픈 손실이었다.후네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인 에우도키아와 결혼 하며 서로마 제국은 일시적으로 나마 서로마 제국의 동맹국으로서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다.
양측의 동맹 관계는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되기 전 까지 유지되었으며 가이세리크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죽자 동맹이 파괴되었음을 구실로 2번째 로마 약탈을 자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