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메온 전쟁 영어: Simeon's wars | ||
시기 | 894년 ~ 896년, 913년 ~ 927년 | |
장소 | 발칸반도 | |
원인 | 동로마 제국 황제를 제치고 정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려는 시메온 1세의 야망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불가리아 제1제국 |
지휘관 | 레온 6세 프로코피우스 크레니테스†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 레온 카타칼론 리엔티카 콘스탄티노스 7세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로마노스 1세 니콜라오스 미스티코스 대 레온 포카스 페타르◎ 파블레 자하리야 | 시메온 1세 페터르 1세 기오르기 수르수불 테오도로스 시그릿사† 마르마이스†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의 타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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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94~896년과 913~927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시메온 1세와 동로마 제국의 전쟁. 시메온 1세는 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거나 자국과 통합시켜서 발칸 반도의 패권과 정교회 최고 수장의 권위를 동시에 확보하는듯 했으나,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지 못하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차르로 인정받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2. 배경
863년,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의 강한 압박과 기근과 지진에 시달리는 국내 사정을 못이긴 보리스 1세는 정교회 개종을 결의하고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가리아 정통 신앙을 신봉했던 불가르 왕실과 귀족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은 형식상으로나마 불가리아의 칸에 대한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889년 보리스 1세가 퇴위한 후 칸위에 오른 장남 블라디미르는 반기독교 정책을 펴며 이교도 국가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892년 수도원에서 나온 보리스 1세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실명된 뒤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보리스 1세는 반정교회 세력을 숙청한 뒤 3남 시메온 1세를 칸위에 앉힌 후 도로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907년에 사망했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6세는 장인이자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를 체신부 장관(Logothetes tou dromou)이라는 요직에 임명해 제국의 대내외 정책을 총지휘하게 했다. 자우치스는 자기 심복 두명에게 불가리아 무역의 독점권을 내주었다. 그들은 제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물품에 대해 불가리아 상인들이 지불하는 관세를 대폭 인상하고 물자 집산지를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살로니키로 옮겼다. 그러자 불가리아와 제국간 무역로가 붕괴되었다. 시메온 1세는 즉각 항의했지만 무시당하자 동로마 제국에 실력 행사를 하는 한편, 이참에 동로마 제국을 굴복시키고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보리스 1세의 개종 이래 20여 년간 평화를 이어가던 양국의 전쟁이 막을 올랐다.
3. 전개
3.1. 1차 전쟁(894~896년)
894년, 시메온 1세는 트라키아를 침공해 약탈을 일삼았다. 레온 6세는 급히 스트라테고스 직책을 맡고 있던 프로코피우스 크레니테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하고 있던 하자르 경비대를 중심으로 한 수비군을 맡겨서 적을 무찌르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의 마케도니아 평원에서 참패했다. 프로코피우스를 비롯한 동로마 장성들은 전사했고, 생포된 하자르인들은 시메온의 명령에 따라 코가 베어진 뒤 "로마인들을 부끄럽게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수도로 보내졌다. 하지만 아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압박하기에는 준비가 덜 되었다고 판단한 시메온은 인근 마을을 약탈한 후 많은 포로를 거느리고 귀환했다.레온 6세는 남부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던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1]를 급히 소환해 시메온의 공세를 저지하게 하는 한편, 마자르족에게 사절을 보내 막대한 선물을 바치며 불가리아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동시에 아나스타시오스를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동프랑크 왕국의 통치자 아르눌프에게 보내, 그들이 불가리아와 손잡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시메온 1세에게 강화를 요청했지만, 그는 동로마 제국의 사절 콘스탄티나키우스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으로 응답했다.
895년 초, 마자르족이 동로마 함대에 올라타서 다뉴브 강을 거슬러 내려갔다. 불가리아군은 쇠사슬로 강을 차단했지만, 리엔티카가 이끄는 마자르군이 강 남쪽 기슭으로 건너가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당시 시메온 1세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불가리아와 동로마 국경 지대에 있다가 마자르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도브루자 인근에서 패배한 뒤 드리스트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농성했다. 마자르인들은 공성 기술을 몰랐기 때문에 요새를 함락시킬 수 없었고, 그 대신 드리스트라 주변 마을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파괴한 뒤 불가리아의 수도 프리슬라프로 이동하여 역시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에 불가리아 포로를 팔아넘긴 후 다뉴브 강 북쪽 지역으로 돌아갔다.
시메온 1세는 마자르족이 떠난 후 레온 6세에게 포로 교환 협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렸다. 이에 레온 6세는 지휘관들에게 불가리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자제하라고 명령하고 레온 조이노스파크테스를 프리슬라프로 보냈다. 그러나 시메온은 새 병력을 모을 시간을 벌 용도로 협상을 했을 뿐이었기에, 온갖 구실을 대며 사절의 접견을 지연했다. 이와 동시에, 마자르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페체네그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896년 초, 불가리아군과 페체네그 연합군이 마자르를 협공해 큰 타격을 입혔고, 마자르족은 적의 공세를 피해 카르파티아 고개를 넘어 판노니아 대평원으로 들어갔으니, 이 지역이 바로 헝가리다.
마자르의 압박에서 벗어난 뒤, 시메온 1세는 비로소 사절을 접견해 이전에 마자르인에 의해 동로마 제국으로 이송된 모든 불가리아 포로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레온 6세는 아랍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데다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병사해버렸기 때문에 시메온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896년 여름, 시메온은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에 예속된 슬라브 포로들을 아직도 가두고 있다는 구실을 들며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레온 6세는 서둘러 아랍인들과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아시아 지역에서 대부분의 군대를 발칸 반도로 옮기고 레온 카타칼론을 지휘관으로 삼아 불가리아군과 대적하게 했다.
양군은 896년 6월 7일 불가로피곤 평원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 육군 부사령관 격인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를 맡고 있던 테오도시오스를 비롯한 대다수 장병이 전사했고, 레온 카타칼론 본인은 소수의 추종자들만 거느린 채 전장에서 빠져나왔다. 이때 루카스라는 이름의 동로마 병사 하나가 목숨을 건진 뒤 전쟁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수도원에 입문했고, 나중에 수도자로서 이름을 떨치면서 정교회 성인이 되었다. 불가리아군은 불가로피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며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수많은 동로마인들을 잡았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레온 6세가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지만 시메온은 "우리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길 때까지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다"라며 거부했다. 이에 절박해진 레온 6세는 아랍과의 전쟁 도중에 붙잡았던 아랍인들을 석방시키는 대가로 불가리아에 맞서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포위했지만, 시메온 1세는 함락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협상을 재개했다. 그 결과 양자는 포로를 교환하고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으며,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디라키움을 포함한 30개 요새를 반환하는 대가로 흑해와 스트란자 산맥 사이의 영토를 넘겨받으며,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받기로 했다. 여기에 전쟁의 빌미가 되었던 교역소는 테살로니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시메온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프리슬라프에서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단행하고 세르비아 일대의 부족장 페타르를 통치자로 인정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게 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그는 내심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거나 불가리아에 굴복하게 만들고 싶은 야망을 품었다. 904년 아랍인들이 동로마 제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약탈하고 시민들을 대거 끌고가면서 도시가 텅 비자, 시메온 1세는 즉시 군대를 그쪽으로 보내 에게 해의 중요한 항구인 테살로니카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레온 초이로스파크테스가 레온 6세의 지시에 따라 시메온에게 가서 협상했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이 테살로니카를 계속 점유하는 대가로 불가리아가 영토를 남쪽으로 좀더 확장하는 걸 허용했다. 여기서 다른 영역을 대신 희생시키더라도 테살로니카는 사수해야 할 정도로 테살로니카가 당시 제국에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거의 정확히 천 년 뒤에도 반복되었는데, 당시 그리스 수상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진격하는 그리스군이 테살로니키와 마나스트르 중 어느 도시로 진격할 것인지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해오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라!(Θεσσαλονίκη με κάθε κόστος!)"고 지시했다고 한다.
3.2. 2차 전쟁(913~927년)
912년 5월 11일, 레온 6세가 사망하고 동생 알렉산드로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 알렉산드로스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평화 조약을 갱신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 조약은 형 레온이 맺은 것이니 무효라면서 앞으로는 조약 따위는 필요도 없고 더는 공물도 바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그들을 쫓아버렸다. 이에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할 준비에 착수했다.913년 8월, 시메온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2세의 급사와 당시 7살이었던 콘스탄티노스 7세의 등극,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에 불가리아군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맞서 싸울 수 없었다. 불가리아군은 순조롭게 남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이 세운 진영은 마르마라 해에서 황금뿔 만의 상류 구역까지 이어지는 육로 성벽을 따라 세워졌는데, 그 길이가 6km에 달했다고 한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어지는 육로를 차단하고 주변 촌락들을 철저하게 파괴하겠다고 으름장 놓으면서 햅도몬 궁전을 장악한 뒤 전령을 보내 협상할 의사가 있음을 통지했다.
당시 콘스탄티노스 7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니콜라오스 미스티코스 총대주교는 시메온의 두 아들을 수도로 초청해 콘스탄티노스가 참석한 가운데 블라케르나이 궁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헵도몬 궁전에 있던 시메온을 찾아갔다. 시메온은 총대주교 앞에 엎드렸고, 총대주교는 자신의 관을 시메온에게 씌우며 그가 차르를 칭하는 걸 용인했다. 이후 두 사람은 밀약을 맺었다. 시메온은 그동안 밀린 공물을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콘스탄티노스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것을 제안했다. 니콜라오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시메온은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 밀약이 알려지자 니콜라오스와 함께 어린 황제를 보좌하고 있던 섭정단이 반발했다. 니콜라오스가 그런 중차대한 일을 혼자서 결정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다 시메온의 딸을 황후로 삼게 했다가는 시메온이 공동 황제가 되려 들 테고, 그랬다간 불가리아 국왕이 제위까지 얻게 되므로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넘어갈 게 뻔했다.
섭정단은 914년 2월 정변을 일으켜 니콜라오스를 실각시키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던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태후를 복위시켜 섭정을 맡게 했다. 또한 황후의 옛 친구들과 조언자들 역시 원직에 복귀했다. 다만 니콜라오스는 정치 문제에 절대로 뛰어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총대주교직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딸을 황제에게 시집보내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시메온 1세는 915년 9월 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해 손쉽게 현지 총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이 황태후가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이렇게 빨리 맞대응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시메온은 황급히 철수했다. 이후 시메온은 2년 동안 테살리아와 이피로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수시로 공략했다.
917년 6월,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에 전력을 쏟기 위해 아바스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디라키움의 스트라테고스인 레온 랍도초스는 불가리아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리던 세르비아 공작 페타르를 설복해 동로마 제국 편으로 끌여들었다. 하지만 사전에 페타르의 배신을 전해들은 시메온은 테오도로스 시그릿사를 파견해 세르비아를 공격하게 했고, 시그릿사는 페타르를 순조롭게 무찔렀다. 페타르는 체포된 후 불가리아로 끌려간 뒤 그곳에서 사망했다. 시메온은 파블레를 새 세르비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한편, 크리미아 케르손의 군사 총독 요안니스 보가스는 조이 황태후의 밀명을 받았던 불가리아 북동부의 스텝 지대에 거주하고 한 때 시메온과 함께 마자르인들을 협공했던 페체네그인들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내며 불가리아를 협공하게 했다. 동로마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줄 것이며, 그동안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진군할 것이었다. 그러면 대규모 협공에 걸려든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함대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만나자마자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더니 로마노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페체네그인들은 제국 함대가 좀처럼 오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대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제국군은 거의 전멸했고 레온 포카스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재앙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지자,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를 공식 심문에 회부하여 실명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중재에 나서 준 덕분에, 로마노스는 간신히 처벌을 면제받았다.
917년, 시메온은 군대를 이끌고 헬라스로 진군해 코린토스 지협까지 도달했다. 수많은 피난민이 에우보이아 섬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했던 이들은 생포되었고 현지 주민들은 불가리아에 세금을 내도록 강요받았다. 헬라스 속주의 수도 테베는 함락당했고 주변의 요새들은 파괴되었다. 그해 겨울, 시메온은 동부 트라키아를 유린한 뒤 콘스탄티노플 성벽까지 밀어닥쳤다. 조이 황태후는 다시 레온 포카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레온 포카스는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육지에서 공격해봤자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쯤에서 물러났다.
조이 황태후는 2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레온 포카스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지만 황제의 가정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919년 봄에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황태후는 그에게 함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로마노스는 황태후가 보낸 시종장을 체포했다. 이에 황태후가 해명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돌맹이 세례를 맞고 쫓겨났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황태후는 부콜레온에서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그녀는 아들이 "어머니의 섭정을 끝내고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옛 섭정단원인 마기스테르 스테파노스에게 공동 섭정을 맡기겠다"고 연설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튿날 아침 한 무리의 병사들이 조이 황태후를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으로 호송하러 찾아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병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그 덕분에 그녀는 권력만 잃은 채 황궁의 규방에 머물 수 있었다. 대 레온 포카스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920년 12월 17일 공동 황제 로마노스 1세로서 권좌에 오른 뒤 자신의 딸 엘레니 레카피니를 콘스탄티노스 7세의 황후로 삼았다.
시메온은 로마노스를 찬탈자로 간주했으며, 일개 아르메니아 농민의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지위를 차지한 것에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로마노스로부터 혼인을 통해 친족 관계를 맺자는 제의를 거부하고 920년 가을 대군을 일으켜 트라키아로 진군해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하여 소아시아의 람파쿠스 시 바로 맞은편에 있는 갈리폴리 반도 해안에 숙영지를 세웠다. 만약 불가리아군이 갈리폴리와 람파쿠스를 확보한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에게 해로부터 단절될 수 있었다. 총대주교 니콜라오스가 시메온을 찾아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시메온은 "찬탈자 로마노스가 물러나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며 거부했다.
시메온은 자신을 격퇴하러 오는 동로마군을 잇따라 격파하고 황금뿔만 건너편의 스테논(Stenon) 일대를 약탈했고, 로마노스가 아끼던 페게(Pegai)의 궁전들을 불태워 버렸다. 한편 시메온에 의해 세르비아 공작으로 선임되었던 파블레가 동로마 제국의 편으로 돌아서자, 921년 자하리야를 파견해 그를 토벌하게 했다. 자하리야는 파블레를 물리치고 세르비아를 장악했지만, 얼마 후 동로마 제국의 편으로 돌아섰다. 923년, 시메온은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한 뒤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힌 모롤레온 총독을 고문 후 처형했다.
하지만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잘 알았던 그는 924년 파티마 왕조와 협상하여 함대를 지원받고 해상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아랍 대표들을 데리고 귀국하던 불가리아 사절들은 공해상에서 로마 제국 함대에게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다. 로마노스는 불가리아 사절을 억류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선물을 안겨주면서 칼리프에게 화친의 의사를 전하고 시메온이 주겠다는 선물보다 더 많은 공물을 매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로 인해 파티마 왕조는 시메온을 돕지 않기로 했다. 설상가상으로, 924년 배신자 자하리야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아 세르비아에 파견되었던 테오도로스 시그릿사와 마르마이스가 세르비아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메온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로마노스와 평화 협상을 갖기로 했다. 924년 9월 9일, 로마노스는 친히 협상 자리에 나와서 시메온과 대면했다. 그는 이어진 회의에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평화를 구걸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선한 본성에 호소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생각을 바꾸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또한 그는 연례 공물을 늘리겠다고 제안하면서도 그 제안을 설교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자신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로운 후원자가 선뜻 도와주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당대 문헌에 따르면, 그 순간 독수리 두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 함께 선회하더니 서로 떨어져서 한 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망루 위로 급강하하고 다른 한 마리는 서쪽의 트라키아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불가리아와 로마 제국은 하나로 뭉칠 수 없다는 신의 계시라고 여겼다고 한다.
평화 협상 결과, 제국은 매년 최고급의 공물을 불가리아에게 보내주는 대신 시메온은 제국의 영토에서 철수하고 그동안 점령한 흑해 연안의 요새들을 반환하기로 했다. 또한 동로마 황제는 시메온이 "불가리아의 차르"를 칭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메온 1세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확보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기에, 평화 협상을 맺은 후에도 비밀리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927년 5월 27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의 야망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4. 이후
시메온 1세 사후 차르에 오른 페터르 1세는 외삼촌 기오르기 수르수볼과 함께 원정을 개시하여 트라키아로 진군해 여러 요새를 공략한 후 동로마 제국에게 평화 협상을 다시 맺자고 제안했다. 이에 양자는 메셈브리아에서 협상했고, 927년 11월 페터르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찾아온 뒤 로마노스 1세의 손녀 마리아 레카피니와 결혼하면서 평화 협약이 최종적으로 맺어졌다.동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불가리아 군주의 차르 칭호를 인정하면서도, 불가리아 차르는 동로마 황제의 "영적인 아들"로 간주한다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은연중에 로마가 불가리아보다 우월한 국가라는 의식을 드러냈다. 또한 불가리아 대주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다섯번째로 독립적인 동방 정교회 교구청이 되었다. 불가리아는 시메온 1세가 점령한 트라키아, 테살리아, 헬라스 일대를 돌려주는 대신 마케도니아 대부분과 이피로스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는 40년간의 평화를 누렸지만, 모두가 평화를 반가워한 건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에 대한 강경책을 폈던 선제 시메온을 지지했던 이들은 페터르 1세의 평화 지향 정책에 반대했다. 928년, 페터르의 동생 요한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발각되자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930년 시메온의 장남 미하일이 수도원을 탈출한 뒤 스트루마 일대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가서 병사했고, 페터르는 미하일의 잔당을 소탕했다. 이렇듯 반란 세력을 성공적으로 분쇄한 뒤, 페터르 1세는 역대 불가리아 제1제국 군주들 중에서 가장 긴 재위기간인 43년간 집권하면서 교회에 아낌없이 기부하는 등 정교회 진흥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것이 역효과를 야기하여, 성직자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한 뒤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백성을 착취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민중은 이에 반감을 품었고, 많은 이가 이단으로 정죄된 보고밀파를 수용했다. 페터르는 이들을 강경하게 탄압하여 정교회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로마노스 1세, 콘스탄티노스 7세, 로마노스 2세, 니키포로스 2세 제위 기간 동안 아바스 왕조를 상대로 잇따른 승리를 거둔 끝에 유프라테스 강 중부의 아미다, 다라, 니시비스를 급습하고 에데사를 공략하고 크레타를 탈환하고 소아시아 일부 영토를 회복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품은 니키포로스 2세는 965년 공물을 수령하기 위해 찾아온 불가리아 대사 앞에서 불가리아인들을 혐오스럽고 더러운 거지 민족이라고 비난하고 불가리아 왕은 짐승 가죽 옷이나 입는다고 욕한 뒤 내쫓았다. 그후 니키포로스는 군대를 일으켜 불가리아 변방으로 쳐들어가 국경 요새 몇 곳을 함락시켰다.
니키포로스 2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키예프 루스 제4대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귀족 칼로키로스를 사절로 보내 금 1만 5천 파운드를 줄 테니 불가리아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스뱌토슬라프 1세는 968년 대군을 일으켜 불가리아로 쳐들어가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을 섬멸했다. 페터르 1세는 이들의 침략에 심한 압박을 받다가 970년 1월 30일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차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가리아는 무기력해졌고, 뒤이어 차르에 오른 보리스 2세는 불가리아의 수도 프레슬라프를 공략한 루스군에게 생포된 뒤 키예프 대공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까지 정복할 야심을 드러내면서,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간의 전쟁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