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C0FF,#2f2f52>카르헤 전투 Battle of Carrhae | ||
▲카르헤 전투 상상도.[1] | ||
시기 | 기원전 53년 5월 6일 | |
장소 | 터키 샨르우르파 주 하란 | |
원인 | 크라수스의 동방 원정 욕구. | |
교전국 | 로마 공화국 | 파르티아 |
지휘관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수레나스 |
병력 | 보병: 30,000 ~ 40,000명 기병: 4,000명 | 카타프락토이: 1,000명 궁기병: 9,000명 |
피해 | 사상자: 20,000명 포로: 10,000명 | 불명 |
결과 | 로마 공화정의 참패,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죽음. | |
영향 | 제1차 삼두정치의 붕괴와 공화정의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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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헤[2]에서 벌어진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의 전투이다.로마-파르티아 전쟁의 시발점이 된 전투임과 동시에 칸나이 전투, 아라우시오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 아드리아노플 전투, 야르무크 전투, 만지케르트 전투 등과 함께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투이다.
영어로는 Battle of Carrhae라고 쓰고, '카르헤'라고 읽는다. 고전 라틴어로 하자면, '카르하이' 정도가 될 것이다. 국내에선 카레, 카라이, 카르하이, 카르헤 등 다양한 표기가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어 Κάρραι를 전사한 것이므로 당시 발음으로 카라이~카레, 라틴어로 카라이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스어 지명을 일상적으로 썼으므로 r과 h를 분리해서 읽었을 리 없는 로마인들이 카르하이라고 읽었을리 만무한데 국내에서는 어째서 이런 독음으로 알려졌는지는 의문이다.
2. 전투 배경
▲크라수스의 두상. |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 |
기원전 1세기, 크라수스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로 로마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점점 흔들리는 입지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막대한 재력으로 대중과 원로원 의원들의 환심을 사면서 입지를 다졌지만 당대 로마 시민들이 가장 열광하던 군사적 업적이란 측면에서 경쟁자들에게 현격하게 밀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의 해적을 일소하고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당시엔 알렉산드로스 3세를 의미하는 '마그누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천재 장군이었고, 카이사르 역시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갈리아 전체를 정복하면서 막대한 인기와 부를 거머쥐었다. 이전까지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와 로마의 주요 재력가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으나 갈리아에서 쌓아올린 막대한 부로 모든 빚을 청산하게 된다. 카이사르에 대한 크라수스의 영향력이 떨어진 것은 명백했다.
반면에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제3차 노예 전쟁)을 진압한 공적은 노예 반란 자체를 쉬쉬하던 당대 분위기에서 은근슬쩍 묻히고 말았다. 원로원은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에게는 성대한 개선식을 열어주면서도[3]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크라수스는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다. 크라수스가 강력하게 요구해서 나중에 개선식이 열리긴 했지만, 폼페이우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규모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오로지 정복을 통해서 성장한 정복국가 로마에서 대중들이 크라수스의 노예 반란 진압보단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외 정복에 더욱 열광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크라수스는 새로운 군공(軍功)을 강렬하게 원하게 되었고, 그 목표물로 선택한 것이 동방의 떠오르는 강국 파르티아 원정이었다. 그때까지 파르티아는 로마에 특별히 적대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양국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로마 내에서도 파르티아 원정에 대한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로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일단 찬성하자[4]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력으로 모집한 군단들을 이끌고 시리아로 출발했다.
시리아에 도착한 크라수스가 본격적으로 침공 준비를 하자 깜짝 놀란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로마에 전쟁 자제를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파르티아는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데다가 강대국 로마와의 대결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을 하기로 굳게 결심한 크라수스와,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파르티아 사신의 태도 때문에 회담은 별 효과 없이 '오가는 욕설 속에 싹트는 험악한 분위기'만 조성되고 말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이 상황을 묘사하며, 파르티아 사신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크라수스 앞에서 읽었다고 전한다.
"만약 파르티아를 침공한 로마군이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것이면 샤한샤[5]께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가 망령 들린 크라수스의 탐욕 때문에 온 것이라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6]
한마디로 이런 뜻."국가 차원의 적대행위는 응징하겠지만 이런 개인의 공명심에 의한 돌발행위는 아직 타협의 여지가 있으니, 지금 당장 공격을 중단하고 돌아간다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
하지만 격분한 크라수스는 오로데스 2세의 서신을 무시했다.그러나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도 크라수스의 전쟁 준비는 허술하기 짝이없었다. 본래 크라수스에게는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와 동등한 10개 군단의 편성 및 지휘권이 원로원의 승인으로 인정되어있는 상태였으나 어째서인지 그는 군단을 충분히 증편하지 않고 7개 군단만 편성한 채로 그만두었다. 심지어 그 7개 군단도 완편이 아니고 정원이 상당히 미달한 상태여서 중보병 42000명이 아닌 35000명 수준밖에 되지 않는 상태였다. 돈이 아까워서 그랬다는 말도 있으나 정치 생명이 걸린 일생일대의 투자에서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병력 동원을 경시했다면 이미 거기서부터가 실격인 상태였다.
실제로 돈이 아까워서였다는게 상당히 설득력 있는게, 기껏 편성한 반푼어치 군단을 가지고 크라수스가 가장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약탈이었다. 아직 출병도 안 했고 적지에서의 약탈이 아니니 당연히 군수품 확보를 위한 목적은 아닐테고 투자금 회수한다는 느낌으로 신전이나 창고를 털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니 군단병들의 군사훈련은 뒷전이었고 군기마저 해이해져 크라수스의 군단은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 휘하의 전사 집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저 손쉬운 약탈이나 꿈꾸는 무뢰배 집단으로 전락했다. 총사령관이 이모양이니 폼페이우스가 파견한 고급 장교단이나 카이사르가 파견한 젊은 크라수스 휘하의 기병대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이미 시작부터 싹이 노란 상태였다.
크라수스에게 6,000명의 기병 지원을 약속한 동맹국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크라수스에게 평지 대신 파르티아 기병들이 활약하기 어려운 아르메니아의 산악 지대를 통해 이동하라는 제안[7]을 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사막 지대를 가로지르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최단 루트를 통해 파르티아의 중심 도시인 셀레우키아를 노리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것은 크라수스에게 있어 최대의 오판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준비도 없이 폭염으로 가득한 사막 지대를, 그것도 중무장한 보병이 통과한다는 건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크라수스가 진격해 오자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직접 아르메니아 공격에 나서는 한편, 수레나스를 파견해 크라수스의 침공에 대응하도록 했다. 파르티아의 침략을 받고 약속한 기병을 보낼 수 없게 된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크라수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는 파르티아를 격파한 후에 곧장 아르메니아로 지원을 가겠다면서 이 문제를 크게 신경쓰지 않고, 파르티아의 영토로 진군해 들어갔다.
당시 크라수스의 부관이자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으로 유명해지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진격하자는 주장을 했지만 거부당했고, 크라수스는 현지의 아랍 부족장인 아리암네스의 안내에 따라 사막 지대를 가로질러 진군했다. 아리암네스는 과거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에 협력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크라수스가 그를 신뢰한 것이었지만 아리암네스는 이미 파르티아 측의 사주를 받은 상황이었다.[8] 그리하여 결국 크라수스의 군대는 파르티아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최적의 지형인 사방이 뻥 뚫린 평탄한 사막 지대에서 수레나스와 조우하게 되었다. 로마군 장교 대부분은 물가에 캠프를 치고 하룻밤 쉰 다음 공격할 것을 원했으나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는 지체하지 말고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9] 크라수스는 아들의 주장을 따랐고 양군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3. 전투
3.1. 양군의 전력
크라수스군은 총 28,000~35,000명 정도의 로마 군단병과 4,000명의 경보병으로 총 3~40,000명 정도의 7개 군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보병의 대다수는 궁병으로 추정되며, 로마 군단병들은 모두 로리카 하마타(로리카 항목 참조), 글라디우스, 스쿠툼을 갖춘 중장 보병대였다. 기병 전력으로는 3,000명 정도 되는 아랍 및 소아시아 경기병들, 그리고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했던 푸블리우스 크라수스가 데려온 용맹한 갈리아 귀족 중무장 기병[10] 1,000명 등 총 4,000명[11]이 있었다.파르티아군은 9,000명의 경무장 궁기병, 4m 이상의 장창과 철퇴 및 장검으로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 기병 1,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은 없었으며, 낙타 1,000마리와 짐수레 200여 대로 구성된 화살 보급 부대가 있었다. 일부 미확인 자료에서는 카타프락토이 기병 1,200~1,500명 정도에 궁기병 10,000명이라는 기록도 있었다.
3.2. 배치 및 진행 과정
크라수스의 의견에 따라 로마군은 거대한 직사각형 진형으로 포진했다. 보병들이 바깥 쪽에 줄지어 배치되었고 그 안에 보급품 수송대와 기병대가 위치했다. 이는 파르티아의 대규모 기병대에게 측면을 잡히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배치였으나 기동성의 현저한 저하를 가져왔다.수레나스는 처음에는 카타프락토이를 이용한 공격 겸 탐색전을 시도했다. 로마군의 시야 범위에 접근한 카타프락토이들이 위장용으로 입고 있었던 겉옷들을 벗어던지고[12] 번쩍이는 갑옷을 과시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정면 돌격을 시도했지만 애초에 숫자가 1,000명을 약간 상회하는 규모밖에 안 되는 데다가 로마군이 한치의 동요도 없이 굳건하자 카타프락토이들을 뒤로 물린 수레나스는 궁기병들을 내보냈다.
넓게 퍼진 궁기병들은 순식간에 로마군의 사방을 에워싸고 화살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크라수스 측의 경기병과 경보병들이 맞서 싸웠으나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큰 방패와 갑옷으로 무장해 파르티아 기병의 화살 공격은 잘 막아낼 수 있었던 중무장 보병인 로마 군단병들이 근접 전투를 위해 전진했으나 발빠른 궁기병이 거북이같은 중보병들에게 잡힐리가 없었다. 이때 등 뒤로 활을 쏘면서 도망가는 파르티아 기병들 때문에 파르티안 샷이라는 말이 생겼다. 게다가 방패로 미처 가리지 못한 팔과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병들이 속출했다. 귀갑 진형을 갖추면 화살은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기동성과 근접 전투력이 현저히 저하되는 바람에 카타프락토이 기병들의 장창 돌격에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사람들은 35,000명이나 되는 로마 중무장 보병을 1,000명이나 1,000명을 약간 상회하는 파르티아군의 카타프락토이 기병이 어떻게 큰 타격을 줬냐고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건 대략 다음과 같다. 로마군의 조직은 대대, 중대, 소대로 이루어진 조직이었는데 한 낮의 사막의 고열에 탈진한 로마군이 카타프락토이 기병의 강력한 장창 돌격 공격을 받자 소대는 우왕좌왕했고, 그것이 중대와 대대에까지 악영향을 미쳐서 조직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것이었다. 어떤 자료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카타프락토이 기병이 활용한 4m 이상의 장창이 로마군 중무장 보병 2명을 한꺼번에 꿰뚫었다는 말도 있었다. 참고로 전투에서 자주 있거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거기다가 카타프락토이 기병들은 장창 돌격으로 로마군의 진형을 무너뜨린 이후에 숫적 열세로 금방 퇴각하는 걸 반복해서 피해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었다고 한다.
물론 일격에 로마군이 전부 박살난 건 절대 아니었지만 앞서 언급한 사막의 폭염 및 체력 저하에다가 크라수스의 로마 군단 훈련 부족,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기병을 능가하는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를 처음 접한 병사들이 느끼는 공포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로마군에 안 좋은 결과를 다수 발생시켰다. 파르티아군의 카타프락토이 기병이 돌격해서 로마군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물러나면 뒤이어서 다시 파르티아군의 궁기병대가 실행하는 중장거리 합성궁 사격이 계속되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군의 화살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고대 전장에서 숙련된 궁수는 10분에서 15분 정도면 자신이 소지한 화살을 모두 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조금만 견디면 로마군이 반격할 차례가 온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수레나스는 크라수스의 의중을 진작에 간파라도 한 듯 작정하고, 수천 개의 화살을 싣고 온 낙타와 짐마차들을 이용해 궁기병대에 끊임없이 화살을 공급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크라수스는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별동대를 조직했으며,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가 갈리아에서 데려온 1,000명의 갈리아 중무장 기병들을 포함한 별동대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파르티아 궁기병들을 추격하다가 역시 화살 소나기에 고전했고, 얼마 안가 카타프락토이 기병들의 정면 돌격을 당했으며, 곧이어 측면과 후면을 둘러싼 파르티아 궁기병에게 퇴로를 차단 당했다. 갈리아 중무장 기병들은 기마전때 일부 기병들이 카타프락토이의 마갑(馬甲)이 미처 가려주지 못하는 말의 배나 말의 다리를 창으로 찌르는 등 투혼을 발휘하며 끝까지 싸웠지만 전력의 열세로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를 비롯한 1,000명 모두가 전멸을 면하지 못했다. 일설에는 푸블리우스가 갈리아 중무장 기병의 전멸 직후, 자살했다고 한다.
아들이 위험에 처한 것을 파악한 크라수스는 로마군에게 전진을 명령했지만 화살을 보급받은 궁기병들의 역습으로 오히려 진형이 흐트러지고, 여기에 카타프락토이들이 다시 장창 돌격을 가하여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창대에 매달린 아들 푸블리우스의 잘린 머리를 보게 된 크라수스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그는 서둘러 남은 군대를 이끌며 근처의 고지대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보냈다. 이때 수천 명의 부상병들을 전장에 버려 두고 퇴각했으며, 이들은 모두 파르티아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다음날 양군은 교착 상태에 놓였고, 수레나스는 크라수스에게 회담을 제안했다. 참담한 패배와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크라수스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로마군 병사들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크라수스를 끌고 나가다시피해 회담 장소로 향하게 되었다. 두 발로 걸어나온 크라수스를 본 수레나스는 상당히 과장된 말투로 로마의 장군이 말을 타지 않고 자신의 다리로 걸어 나오다니 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니, 자신의 진영을 향해 말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곧 기수가 말을 한 마리 끌고 왔는데, 평범한 말이 아니라 온 몸에 화려한 장신구를 주렁주렁 치장한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자신을 모욕하기 위한 행동임을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던 크라수스는 정중하게 거절하려 했으나, 수레나스는 협박의 가까운 태도로 그 말에 타기를 요청했다. 크라수스가 마지못해 말에 오르자, 갑자기 말을 데려온 파르티아인 기수가 말을 미친듯이 채찍질하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도록 만들었다. 크라수스가 사색이 되어 어쩌지도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자, 크라수스를 호위하며 나온 로마군 병사들은 이런 무례한 태도에 분개하며 이를 제지하기 위해 수레나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수레나스는 애시당초 크라수스를 죽일 계획이었고, 호위병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크라수스 역시 미쳐 날뛰는 말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낙마하여 땅바닥에 처박혔고, 파르티아군 병사 중 한 명이 칼을 뽑아 크라수스를 살해해버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파르티아인들은 그의 탐욕을 조롱하기 위해 크라수스의 목구멍에 녹인 황금을 들이부었다. 협상 장소에서 파르티아군이 크라수스를 잡으려고 하자 로마군 장교가 상관이 포로로 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직접 찔러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은 로마군은 도주를 감행했지만 이미 사막 깊숙히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파르티아 기병의 화살 과녁 신세가 되면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거의 40,000명에 달하던 로마군 중 20,000명이 죽고, 10,000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파르티아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당연하게도 검이 주무기인 군단병으로 말의 무게 + 기수의 무게 + 기수와 말의 갑옷 무게 + 4m 이상의 장창으로 돌격하는 카타프락토이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으며, 궁기병이야 활로 장거리 사격하며 접근전을 피했기에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궁기병이든 카타프락토이든 호신용 칼 한두 자루는 있어서 근접전에 들어갔어도 창이나 활을 버리고 칼을 뽑아 싸웠거나 적이 완전히 붕괴되어 추격할 때는 가지고 있던 칼로 퇴각하던 적병을 공격했을 거라는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자료도 있다고 한다.
그나마 남은 10,000명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잘 수습하여 시리아 속주까지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4. 이후의 경과
카르헤 전투의 참패는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패배로 로마는 상당한 인명 피해를 겪은 동시에 많은 군단기(軍團旗)를 빼앗겼는데 이는 로마에 있어 엄청난 굴욕이었다. 특히 로마에게 있어서 20,000명이 몰살당하고 참가 군단의 군기 전기가 적들에게 노획당한 패전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유례가 없었다. 또한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크라수스가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남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권력을 두고 본격적으로 대결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졌다.크라수스의 수급은 오로데스 2세에게 보내졌고, 당시 오로데스 2세가 관람하고 있었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박코스 여신도들>[13]의 소품[14]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10,000명 가량의 패잔병을 이끌고 시리아에 도착한 카시우스는 몇 년 후 벌어진 파르티아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서 키케로의 칭찬을 들었다. 카르헤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을 겁주기 위해 거대한 북을 치며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내고, 수많은 깃발들을 휘날리며 난리를 쳤는데 이때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비단 깃발을 로마군이 보게 되어 로마에 처음으로 비단이 알려졌다고 한다.[15]
카르헤 전투의 승전과 동시에 아르메니아군을 격파한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점령했다. 수레나스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공이 너무 컸던 바람에 오히려 오로데스 2세의 의심과 질투를 사게 되었다. 파르티아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라 대귀족들과 유력 부족들이 왕과 연합한 형태의 국가였고[16] 오로데스 2세가 카르헤 전투 이후 수레나스의 급부상을 몹시 경계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그는 오로데스 2세에게 처형되었다. 일설에는 축하 만찬에서 오로데스 2세가 미리 준비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이후에 오로데스 2세는 파르티아군 전체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차후 시리아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을 정리한 뒤 이 패배에 복수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했고, 드디어 원정을 떠날 채비를 끝마쳤으나 출발하기 3일 전에 암살당했다.[17] 그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 패배의 복수를 명분으로 파르티아를 쳐들어갔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안토니우스는 크라수스의 전례를 참고하여 아르메니아의 산악 루트를 이용해 아제르바이잔의 도시인 프라스파를 포위했지만, 파르티아군의 공격으로 후위 부대가 운반해오던 공성 무기들이 큰 피해를 입자 별 소득없이 철수했다. 그 뒤 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꺾고 승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협상을 통해 빼앗긴 군단기와 생존한 포로들을 인도받는 선에서 파르티아측과 타협했고 이를 기념한 자신의 석상을 제작했는데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아우구스투스 갑옷 석상이 바로 이를 기념해 만들어진 것이다
카르헤 전투 당시 포로로 잡힌 로마인들은 파르티아의 동방 변경인 마르브 지역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농노 겸 변경 수비에 동원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후 중국의 한나라가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로마인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것이 중국인과 유럽인 사이에서의 최초의 접촉이었다고 한다. 카르헤 전투로부터 20여 년 후 현 중국 간쑤성 진창시(金昌市) 융창현(永昌縣)에 리첸촌(驪靬村)이라는 마을이 나타나는데, 21세기인 현대에 이 마을 주민들의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주민중 2/3 가 백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호머 덕스 교수는 이 마을이 파르티아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어찌어찌 중국까지 흘러간 크라수스 군단 병사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사 이 주장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국 판타지 영화가 <드래곤 블레이드: 천장웅사>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 제국 몰락 후 적백내전이 전개될 때 백군의 후예가 흘러들어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위 주장은 현재는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 포로가 된 로마인들이 압송된 마르브 지역은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중국이 이 지역까지 세력을 미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일부 로마군 병사들이 중국으로 도망쳤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리첸 마을 주민들은 실제론 이란계 혈통과 토하라인의 혈통이 섞인 것으로 밝혀졌다. 참고로 이란계 종족과 토하라인은 인도유럽계 백인이다.
5. 전투의 의의
카르헤 전투의 압도적인 결과 때문에 당시 로마와 파르티아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로마군은 야전에서 파르티아군을 당해내지 못한다.'"
라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카르헤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은 가장 큰 요인은 크라수스의 오만과 무능, 그리고 수레나스의 뛰어난 용병술이었다. 이후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의 전적을 보면 파르티아가 딱히 우세한 것도 아니었다. 기원후 1세기 동안에만 파르티아의 수도가 3차례나 약탈당할 정도였으니… 중보병 중심의 로마군과 기병 중심의 파르티아군 사이의 차이점은 확실했지만 각자 일장일단이 있었으며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은 그 외에도 매우 다양했다.한편 기세등등하던 로마군이 처참히 발린 것, 그리고 이후 파르티아가 로마와의 전적에서 카르헤 전투만 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수레나스를 시대를 앞서간 천재 비슷하게 보는 시각이 일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천재를 질투한 오로데스 2세가 수레나스를 죽였다는 설명이 곁들여지지만 수레나스의 전술은 전형적인 유목민 군대의 스웜 전술이었다. 후대의 파르티아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수레나스와 버금갈 정도의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후대의 로마군 지휘관들 중에 크라수스 만큼 무능한 자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카르헤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의 압승을 가능케 한 가장 큰 원인은 아랍 부족장을 매수하여 크라수스로 하여금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기에 최악의 장소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끌어들이고, 싸우기도 전에 적의 전력을 소진시켜 절망에 빠뜨리고, 로마군이 몇차례의 화살비는 견뎌낼 것을 예상하고 미리 화살 보급대를 배치한 수레나스의 전략은 훌륭했다. 사막이라는 지형에서 고열•건조하다는 기후와 병사들의 심리를 무시하고 물 보급도 무시한 것도 크라수스의 최대 실책 중 하나였다.
당대 로마군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와 비슷하게 무장한 아르메니아군 카타프락토이 기병들을[18] 상대로 승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기병이 기동하기 힘든 지형에 그들을 몰아넣은 뒤 압도적인 군단병의 물량으로 근접전을 강요하여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기병을 중시하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정주민 국가였던 아르메니아와 유목민 출신 국가였던 파르티아의 전술 차이를 간과하여, 카르헤 전투 당시 궁기병과 카타프락토이가 로마군을 포위한채 자유롭게 기동하면서 합동 전술을 구사하는 것을 전혀 막지 못했고 그 결과가 로마군의 참패로 이어진 것이었다. 거기에 약탈에만 신경쓰느라 군사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은 크라수스의 실책과 탐욕도 무시할 수 없다.
[1] 그냥 '파르티아 궁기병이랑 로마 군단병이 저거 비슷하게 생겼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보자.[2] 현재 튀르키예 남동부의 하란[3] 더불어 폼페이우스가 도망치던 스파르타쿠스 반군의 잔당들을 토벌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개선식 명분에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까지 덧붙인 것마저도 원로원은 그대로 인정했다. 크라수스에 대한 견제와 함께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중요도를 낮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당연히 크라수스는 격분했고, 이때의 경험이 카이사르의 제안에 따라 삼두정치에 참여하여 원로원과 대립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4] 다만 상황을 놓고 볼 때 적극적 찬성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묵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모두 크라수스가 자신들의 군공에 조금씩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파르티아 원정을 "언젠가는 터질 일"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모두 우려심을 드러낸 것도 있고, 정치적으로도 크라수스가 둘 사이에 중재자 또는 완충지대 역할에 머무르는 것이 더 낫기도 했다. 물론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나 군사적인 재능에 있어서 천재들이었으니 크라수스의 원정이 어찌될지 뻔히 알았고, 나름의 "제어장치"들을 마련하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아끼고 아끼는 갈리아의 정예 기병 1000명을, 청년 장교들 중에서도 유능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게 맡겨 귀한 기병 전력을 보태주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심복과도 같던 고급 장교단 중 일부를 크라수스에게 군사 고문으로 딸려보내 전략 수립 과정에서의 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둘이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크라수스가 전쟁 준비 과정 및 카르헤 전투에서 엄청난 삽질을 한 것이 문제였다.[5] 왕중왕, 대왕이라는 뜻.[6] 즉 파르티아 측에서도 로마 원로원이 크라수스의 원정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 이 원정이 오로지 크라수스의 군공 욕심 때문에 일어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7] 보병 위주의 군대로 기병 위주의 적을 상대한다면 당연히 선택할 만한 아주 상식적인 발상이다. 아래의 '이후의 경과' 항목에서도 나오듯 군사적인 재능으로는 크라수스를 압도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역시 이 진군로를 선택했다. 이런 상식적인 수준의 선택도 하지 못했을 만큼 이 전쟁 당시 크라수스의 사고와 판단에는 문제가 많았다.[8] 하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크라수스 본인이 사막을 강행 돌파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기를 택했던 만큼, 아리암네스가 매수되었다는 이야기는 로마 역사가들이 외부인인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9] 푸블리우스는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갈리아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는 등 군사적인 재능이 아버지보다 나았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가 안전장치로 작용할 것을 믿었으나, 푸블리우스가 상대했던 갈리아, 게르만 부족과 파르티아 군대는 질적으로 달랐던 것을 아직 젊은 푸블리우스는 알지 못하고 오판하고 말았다.[10] 철제 갑옷과 투구를 갖춘 갈리아 부족의 유력자 출신 기병들로 다시 만들수 없는 병력이었던 만큼 카이사르가 가장 아끼는 정예중의 최정예 기병이었다.[11] 모두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로마에선 말이 신분의 상징이라 할 정도로 고가에다가 말의 생산지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기병을 양성하기가 힘들었다. 로마군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건 지위가 높은 고급 지휘관들이나 전령들이었다. 그래서 기병은 비싼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도 비용 문제 때문에 많은 수를 고용하지도 못했다.[12]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이들은 위장 겸 장식용으로 화려한 겉옷이나 망토들을 걸쳤다. 화려한 옷이 어째서 위장용이 되는가 의아하지만, 사실 파르티아의 주력부대인 궁기병들은 대부분 밝은 색조의 옷을 입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섞여들어 눈에 잘 띄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13] 아들 파코로스 1세의 결혼식 연회의 일부였다.[14] 펜테우스의 잘린 머리.[15] 다만 젊은 시절의 카이사르가 비단 허리띠를 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상류층은 이미 쓰고 있었을 것이다.[16] 중세 유럽의 봉건제 국가와 비슷한 정도.[17] 어떻게 보면 파르티아 원정 직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암살 이후 민중의 여론이 카이사르파에 더 유리하게 작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문다 전투 이후 진행된 개선식에서 카이사르가 노골적으로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자신의 반대 세력을 조롱하는 퍼레이드에 시민들이 불쾌해했다고 하지만 본디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수장으로 평민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특히 파르티아 원정의 경우, 카이사르는 갈리아족과 게르만족 및 동방의 반로마 세력을 평정한 불패의 장군이었기 때문에 불과 몇 년 전에 벌어진 파르티아에서의 참패에 대한 복수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당대 민중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소집된 카이사르의 고참 군단병들도 마르스 광장에서 숙영 중이었던 상황에서 파르티아 원정의 성공 이후에는 왕위 주장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암살단의 한수는 오히려 시민들에게 평민의 이익 대변자 + 20,000명의 군단병과 정치적 동지 크라수스의 복수 및 동방의 적국 토벌 적임자를 참살한 격이 되어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는데 여기에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시민들에게 증여할 것을 지시한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시민들은 완전히 카이사르파로 돌아가게 되었다.[18] 이들은 훗날 로마가 제정이 되었을 때, 로마군의 기병이 되어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카타프락토이에 맞서 맹활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