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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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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만티아 전쟁 파일:external/b66a81d7e3c5440cfef450e3309a2b4b425f1dcd788e510bd84b747e2e2573be.png 아레바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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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 파일:SoundCloud82837371853.jpg 아르메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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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년~8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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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년~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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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8년~10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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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7년~10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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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원정
1096년~1099년
파일:룸 술탄국 국기.svg 룸 술탄국 · 파일:Seljuk Turks Flag.jpg 셀주크 제국
필로밀리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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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이아 전투
1122년
페체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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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미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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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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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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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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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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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battle of hadrianopolis
시기 서기 378년 8월 9일
장소 로마 제국 트라키아 속주 하드리아노폴리스 근교
원인 훈족의 침공 이후, 로마 제국과 고트족 사이의 관계 악화
교전세력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로마 제국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isigoth_flag.png 동게르만계 테르빙기족(서고트족)
파일:greuthingi_mon_256.png 동게르만계 그레우퉁기족(동고트족)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Alans_flag.png 이란계 알란
지휘관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발렌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트라야누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세바스티아누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플라비우스 리코메르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발레리아누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포텐티우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바쿠리우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빅토르
파일:east_roman_mon_256.png 에퀴티우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카시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플라비우스 사투르니누스
파일:external/wiki.totalwar.com/100px-Visigoth_flag.png 프리티게른
파일:greuthingi_mon_256.png 알라테우스
파일:greuthingi_mon_256.png 사프락스
병력 15,000 ~ 30,000명 12,000 ~ 20,000명
피해 10,000 ~ 20,000명[1]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로마 제국 중앙군 궤멸, 동방 황제 발렌스 전사.
영향 테오도시우스 1세의 등극으로 인한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성립
동방 로마 제국의 중앙군(기동 야전군) 궤멸로 인한 동방 로마 제국의 방어 위기
로마 제국과 이민족 사이의 역학 관계 급변.

1. 개요2. 배경
2.1. 훈족의 침공으로 인한 고트족의 동요2.2. 로마 제국의 자폭과 고트족의 궐기2.3. 발렌스 황제의 출정
3. 전개
3.1. 양군 전력
3.1.1. 로마군의 전력
3.1.1.1. 편제3.1.1.2. 주요 지휘관3.1.1.3. 규모
3.1.2. 고트족의 전력
3.2. 전투 경과
3.2.1. 전초전3.2.2. 운명의 날
4. 결과5. 평가6. 기타

[clearfix]

1. 개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역사상 최소 16번이 있었는데[2], 그중 일단 여기서 다룰 전투는 표제어로서 가장 대표성이 있는[3] 378년 고트족 연합군이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로마 제국의 동방 황제 발렌스가 직접 이끄는 로마군을 격파하고 황제 발렌스까지 전사시킨 전투로써,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 간의 역학관계를 급변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칸나이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 카르헤 전투에 비해 잘 부각되지 않은 편이나, 전투 결과는 이 전투들과 비교해도 한 수 위로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으며 기병이 보병을 상대로 거두며 전쟁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온 전투로 인용된다.

2. 배경

2.1. 훈족의 침공으로 인한 고트족의 동요

서기 376년경 훈족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 이북에 거주하던 고트족은 훈족이 가하는 압력을 못 이겨 로마 제국에 보호를 요청하게 되었다. 당시 고트족을 이끌던 알라테우스프리티게른 등의 고트족의 주요 족장들은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이자 동방 황제인 발렌스에게 제국이 고트족의 도나우 강 이남 거주를 허락해 준다면, 고트족을 이끌고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면서 얌전히 살겠으며, 훈족 등 외적들이 침공한다면 제국의 포이데라티(foederati, 외원군)가 되어 열심히 싸우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때 황제 발렌스는 고트족의 요청을 쾌히 승낙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동게르만계 고트족이 로마 제국에게 주었던 군사적인 인상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다. 군인 황제 시대때의 황제인 데키우스가 고트족과 싸우다가 전사한 적도 있었고,(아브리투스 전투)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칭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클라우디우스 2세) 황제는 고트족을 괴멸시켰다는 이유로 짧은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군인 황제 시대의 손꼽히는 명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이미 당시 로마군에는 상당수의 고트족 병사들이 가담하고 있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고트족 병사들의 활약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적도 있었다.

둘째.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으로 로마 제국은 더 많은 인적 자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발렌스는 강력한 군주였던 서방의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보다는 기량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그래도 무난한 지도자였다. 다만 페르시아와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군사적인 긴장 상태가 고조되고 있었기에, 당시까지 제국 북방 전선의 제1 경계대상이던 고트족이 로마 제국에 종속된다면 동방 전선에 힘을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셋째. 발렌스 황제 자신의 개인적인 초조감도 한몫했다. 가뜩이나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보다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평가에 신경을 쓰던 그로서는, 형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은 조카인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명한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라티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제3대 황제로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렸던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위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또한 동•서 로마 제국 전체에 주권을 주장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발렌스로서는 어떻게든 서방에 대해 동방의 황제로서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실적이 필요한 시기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제국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인 고트족을 고스란히 포섭할 수 있다는 건 업적의 필요성을 느끼던 발렌스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매력적인 떡밥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의 도나우 강 도하를 허락했고, 모이시아와 트라키아 등 고트족이 정착할 것으로 예정된 속주의 로마인 관리들에게 고트족의 정착과정에서의 지원을 명령했다. 그러나 고트족의 수가 너무 많았던 나머지 도하 과정에서 통제가 제대로 되지 못해 고트족 일부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2.2. 로마 제국의 자폭과 고트족의 궐기

하지만 일부가 빠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족 단위 전체를 데리고 온 만큼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로마 제국의 운송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고 하며, 설상가상으로 황제 발렌스가 고트족에 대한 대민지원을 맡겼던 속주의 로마인 관리들은 극심한 부정부패로 유명한 탐관오리들이었다. 모이시아와 트라키아의 총독이었던 루피키누스막시무스는 새로 이주해온 고트족을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대로 착취하고 괴롭힐 수 있는 호구로 보아 고트족을 지원하기 위해 발렌스 황제가 보낸 물자와 돈을 착복하고, 고트족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치우며[4], 반항하는 고트족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과거 로마 황제의 주력군도 갈아버렸던 전력을 가진 고트족에게 삥뜯기를 시전할 정도로 지방관의 탐욕이 심각했고, 제 몸 사리는 재주도 없으면서, 그런 인간을 기용할 정도로 인사체계도 망가지는 등 동방 로마 제국 행정체계는 문란했다.

이에 격노한 고트족의 족장들이 회합을 가지고 제국에 항의하려 했으나,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연회를 빙자하여 이들을 몰살시키려는[5] 졸렬한 음모나 꾸미다가 실패했다. 고트족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프리티게른은 제국 관리들의 음모로 죽을 뻔한 뒤 휘하 고트족과 동료 족장들을 설득하여 궐기했다. 이후 루피키누스가 이끄는 약 10,000명 규모의 제국군을 프리티게른이 5,000명 남짓의 고트족 병력을 가지고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하면서, 고트족과 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은 그 규모가 걷잡을 수없이 확대되었다.

이때 고트족 반란군의 규모를 최대 1,000,000명까지 보는 견해도 있는데, 물론 비전투 인원을 모두 포함했거나 고대 역사가들 특유의 과장이 섞인 표현이겠지만, 규모가 어느 정도였건 간에 당시 로마 제국으로서는 거대한 자폭이 맞았다. 동방의 대국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 신경을 쓰느라 황제 발렌스와 그가 이끄는 정예부대부터 동방 전선에 상주하고 있었고, 고트족을 비롯한 북방 민족 출신들이 계속 늘어나던 당시 제국군으로서는 고트족 반란 진압에 열의를 보이려야 보일 수도 없었다. 만만한 백성들을 약탈하고 착취하는 데에나 능했지, 군사적인 수완은 쥐뿔도 없었던 속주 총독들도 한몫했다.

2.3. 발렌스 황제의 출정

서기 378년, 동방 정제(아우구스투스) 발렌스가 드디어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을 맺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회군했다. 발렌스가 회군하기 전에 이탈리아의 세바스티아누스가 각 군단으로부터 300명씩 차출하여 조직한 별동대를 이끌고 트라키아 속주 남부의 로도페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고트족을 괴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발렌스는 세바스티아누스의 승전보 때문에 고트족을 과소평가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동방군만으로 고트족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조카인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서게르만계 알레마니족을 아르겐타리아에서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시기하여 자신도 단독으로 고트족을 격퇴하고자 하는 공명심에 들뜨게 되었다.

발렌스는 그 해 8월 6일, 고트족의 군대가 하드리아노폴리스(현재의 에디르네)로부터 20km 서쪽에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하드리아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세바스티아누스의 서방군과 합류했다.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정찰병으로부터 고트족의 병력이 10,000명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받은 발렌스는 단독으로 고트족을 상대하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3. 전개

3.1. 양군 전력

3.1.1. 로마군의 전력

3.1.1.1. 편제
발렌스 황제의 군대는 당시 동방 제국이 보유하고 있었던 3개 야전군의 대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발렌스 황제를 따라 대 페르시아 전선에 종군하고 있었던 황제 직속의 2개 근위군과, 고트족과의 교전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던 트라키아군이 그것이었다.

전체적인 규모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 직속 군단으로 편성된 약 7개 군단의 보병 전력이 중핵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7개 군단이라면 약 5,000명에서 7,000명 정도의 규모였다. 여기에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이래로 맹위를 떨쳤던 근위기병대 스콜라이와 기마 궁수 부대, 그리고 아라비아 지방에서 징병한 경기병대가 합류했다. 다만 근위기병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기병대는 스커미쉬 전술에 특화된 부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대대 규모로 추정되는 바타비아[6] 출신의 게르만족 용병대와 바쿠리우스가 이끄는 이베리아(그루지아) 일대의 중무장 기병대 및 궁수 부대가 가세했다.
3.1.1.2. 주요 지휘관

이외에도 약 40명 정도의 대대장을 비롯한 동방 로마 제국의 주요 간부들이 거의 다 참전했다.
3.1.1.3. 규모
역사가인 워렌 트레드골드는 서기 395년, 트라키아 야전군의 규모가 25,000여 명 정도였고,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제1근위군과 제2근위군의 규모가 도합 42,000여 명에 달했던 것을 바탕으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당시 로마군의 규모를 추산해보려고 시도했다.

다만 395년 당시 제국군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과 동맹을 체결하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해 간신히 재건한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듭된 전쟁으로 피해가 컸던 378년 당시 제국군과는 동일시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총병력 70,000명에 달하는 저 규모를 그대로 신용하더라도, 각지에 수비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렌스가 70,000명에 육박하는 대군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 동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현대 역사가들 대부분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 동원된 로마군은 보병 10,000명에 기병 5,000명, 즉 도합 약 15,000명 정도를 하한선으로, 최대 30,000여 명 정도까지 추산하는 편이다. 병력 자체는 황제가 지휘한다고 하면 최대 100,000명에서 최소 50,000명 단위의 병력을 연속적으로 동원하던 예전의 제국군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지만, 기병대의 비율이 보병대 대비 50%에 육박하는 등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또한 대부분의 병사들이 고참병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로든 어쨌든 간에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충분히 강력한 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휘하에서 단련되었던 로마 서방군이 지원군으로 가세할 예정이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3.1.2. 고트족의 전력

고트족은 기병보다는 보병을 주력으로 운용했다. 다만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등의 기록을 보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은 최대 5,000기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기병대를 운용했다고 하고 실제 전투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은 기병대가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트족 군대는 크게 2개 부대로 나뉘었다고 여겨지는데, 프리티게른이 지휘하는 테르빙기족[7] 부대와 알라테우스사프락스 등이 지휘하는 그레우퉁기족[8] 부대가 그것이었다. 다만 수적으로 프리티게른의 테르빙기족 부대가 좀더 많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는 고트족 연합군의 기병대 대부분과 소수의 보병대를 지원했다. 고트족 보병대 중에는 이란계 알란족 부대도 소수 가담했다고 전한다.

암미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개전 직전 로마군 정찰대는 고트족 부대의 규모를 약 10,000명 정도로 추정하며 보고했다고 하는데, 이는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 등의 그레우퉁기족 지원군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 역사가들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 참전한 고트족 부대의 총병력을 15,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다만 중간중간 지원군이 가세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았을 수도 있고, 규모 자체는 로마군과 대등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암미아누스를 필두로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이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며, 심지어 이후 수천 년 동안 이어지게 될 기병대 중심의 군사적 경향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보병대의 비중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이 이후 발견된 기록들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기병대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기병대와 보병대의 공조가 거의 없었던 고트족 지휘체계의 결함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3.2. 전투 경과

3.2.1. 전초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군대를 정비하던 발렌스 황제는 이탈리아 주둔군을 지휘하던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을 선발대로 파견하여 트라키아 주둔군을 재편성할 것을 지시했다. 세바스티아누스는 약 2,000명 규모의 선발된 부대를 지휘하여 고트족을 습격, 하드리아노폴리스로 접근하던 고트족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고, 프리티게른은 니코폴리스 근교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서방군의 정예부대를 판노니아 일대로 진출시켰으나, 이때 하필이면 라인(레누스) 강 일대에 있었던 알레마니족이 침공을 시도했고, 그라티아누스는 화급히 부대를 소환하여 아르겐타리아(지금의 프랑스 콜마르) 근교에서 알레만니족을 격파했다.(아르겐타리아 전투) 그러나 이 때문에 서방 로마 제국의 지원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는데 막대한 차질이 빚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발렌스 황제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알레만니족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들은 발렌스 황제가 자기도 이제 공을 세워야겠다면서 교전을 서두른 것이었다.

마르키아노폴리스로 이미 진군했던 발렌스는 8월경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세바스티아누스의 선발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8월 6일, 정찰을 위해 파견한 수색대가 고트족의 규모가 10,000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첩보를 보내왔다. 당시 고트족의 주둔지는 하드리아노폴리스 북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때 리코메르 장군은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전갈을 발렌스에게 전했다. 자신이 달려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동방군의 주요 장군들도 이에 동의했지만, 발렌스 황제는 고트군의 규모가 예상보다 적고, 서전에서 다른 놈들이 이겼으니 이제 나도 승수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빠져 이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개전을 결의했다. 고트족의 실제 규모도 파악하지 못했고, 장거리 행군과 계속된 교전으로 로마군의 병사들이 지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렌스는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이었다.

반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는 몰라도, 프리티게른은 로마군의 정세를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8월 8일, 프리티게른은 로마 제국에 강화를 제안하고, 적당한 영토를 보장해 준다면 당초 약정했던 협약을 준수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미 공명심에 미쳐있었던(...) 발렌스는 이를 단박에 거부해버렸다. 전투에 필요한 시간을 벌면서 제국군을 도발하기 위한 프리티게른의 속셈을 전혀 간파하지 못한 그는 결국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3.2.2. 운명의 날

서기 378년 8월 9일, 발렌스 황제는 아침 일찍 하드리아노폴리스 외곽에 주둔 중이었던 20,000여 명의 보병대와 10,000여 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발렌스는 직접 고트족을 발견하서야 그들이 10,000여 명이 아님을 깨달았다. 고트족은 둥글게 배치된 짐마차 방벽 뒤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다니는 고트족의 습성상 비전투원들은 짐마차 방벽 뒤에 숨어 있게 하고, 전투를 담당할 사람들만 짐마차 방벽 밖에 둥글게 포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트족의 가장 큰 문제는 동맹군으로 이루어진 기병대 대부분이 마초와 식량 보급을 위해 이탈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로마군이 중앙에 보병대가 포진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는 전통적인 진형을 취하는 사이에 프리티게른은 사절을 보내 정착할 토지와 필요한 곡식 및 가축을 공급해 준다면 무기를 버리고 로마 제국의 방위를 위해 돕겠다는 의사를 보냈다. 다른 곳으로 간 동맹군의 기병대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자 한 것이었다. 발렌스 황제는 프리티게른이 보내는 고트족 사절들에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 올 것을 요구하면서 그들의 협상안을 거부했다.

이에 고트족은 로마 측에서도 인질과 같은 높은 자격의 인물을 고트족 진영에 보낼 것을 요구했고, 로마 측에서는 리코메레스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협상이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로마군 병사들은 기온이 40도나 되는 8월의 더위로 인해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 로마군 병사들은 새벽에 출발한 이후, 물도 식량도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수 시간이나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고트족이 주변의 건초와 나무들에 불을 붙여 로마군 병사들은 열은 물론 연기와 사막의 먼지에 의해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리코메레스가 로마군 진영을 출발하여 고트족 진영으로 가는 동안 로마군의 우익이 발렌스 황제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고트족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에 놀란 양측 지휘부는 협상을 결렬시켰고, 리코메레스는 본진으로 귀환했다.

전투는 로마군의 공격을 고트족 보병이 방어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로마군은 전투단위와 명령체계가 분명한 반면, 고트족은 비록 프리티게른이 총지휘를 맡고는 있었으나 사실상 부족 단위별로 나누어져 개별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개시되자 로마군은 이미 교전상태에 들어갔던 우익 기병에 이어 좌익 기병도 전투에 가세했고, 좌익 기병은 고트족을 밀어내며 짐마차 방벽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보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제때에 지원하지 못해 좌익 기병은 밀려나고 말았다.

로마군은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전투에 임하면서 서로 동조할 수 없었다. 오히려 보병대의 측면을 보호해야 할 기병들이 너무 앞서나가 보병의 측면을 노출시켰다. 이때 갑자기 로마군의 배후에 5,000여 명의 기병이 출현하면서 전투의 양상이 갑자기 돌변했다. 고트족 동맹군 기병대가 프리티게른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돌아온 것이었다. 고트족 기병은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기병과 궁기병이 섞여있는 상태였는데,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도 못하고 전투에 참가했다.

비록 고트족 기병은 진형을 정비하지는 못했지만 로마군 우익 기병의 배후를 덮치는 형태로 전투에 임했기에 손쉽게 로마 우익 기병을 물리칠 수 있었다. 더구나 로마 기병 대부분이 경무장이었기에, 중장기병 중심의 고트족 기병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로마 좌익 기병마저 퇴각하고 말았다.

이제 로마군 중장보병은 가장 취약점인 측면을 노출한 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둥글게 진을 치고 있었던 정면의 고트족 경보병들이 반월형으로 진을 변형해 로마군을 압박하고 있었고, 로마군 양익은 고트족의 중장기병에게 훤하게 노출된 상태였으며 퇴로는 고트족의 경보병이 끊어버렸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로마군은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전투 이후 로마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황제인 발렌스가 전사했고, 대대장 35명과 군단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병력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로마 제국 국경 안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는 점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일찍이 기원전 3세기 경 제2차 포에니 전쟁 시절에 겪은 칸나에 전투 이후 최악의 패배로 평가받게 되었다.

4. 결과

로마군이 고트족 동맹군에게 대패하고, 황제 발렌스도 죽자 로마인들은 멘붕에 빠졌다. 사실 피해 규모로만 보면 과장 섞어 80,000명이 죽었다는 아라우시오 전투나 50,000명이 죽었다는 칸나이 전투 등을 비롯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상 가는 처참한 패전이 수두룩했지만,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가 준 충격은 그런 패전들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일개 장군도 아니고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제국의 주력군이 기습도 아니고 정면으로 벌인 회전에서 참패한 것도 문제였지만, 상대가 제대로 된 군대나 게르만족의 연합체도 아니고 난민 집단에 가까웠기에, 이건 제국군이 사실상 난민 집단도 제압 못한다는 걸 인증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이 전투 이전에는 그나마 게르만족의 침략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었고 영토도 보전했지만, 이후부터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동방 지역의 방위선도 이 전투 한방에 붕괴되었는데, 당시 로마군의 규모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으로 600,000명까지 불어난 병력을 경제난으로 더 유지하지 못해 줄어든 데다가 그나마도 대다수가 야전에 부적합한 리미타네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제가 10,000~20,000명의 친위군을 이끌고, 리미타네이가 방어전을 하는 동안 침입한 적군을 요격하는 것이 4세기 경 로마군의 패턴이었는데, 우세한 적군을 제압하기 위해서 정예부대로 구성되었고, 이를 육성하고 유지하는 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친위군이 전멸했으니 이건 고트족에게 제국 동방을 마음대로 약탈하라는 허가를 내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20,000명의 전멸은 그냥 전멸이 아니었다. 정예 병력 20,000명이 전멸한 것이었고, 경제적으로 망해가던 말기 제국에서 정예병 20,000명의 소멸은 군대의 주력이 소멸한 것과 진배없었다.[9]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발 빠르게 테오도시우스 1세를 옹립했고, 새 황제의 활약으로 혼란은 수습되었지만,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제국군은 고트족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적이 거의 없다. 결국 고트족 수만 명을 외원군으로 받아들이면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대 고트 전쟁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376년경 고트족이 로마 제국에 대해 거의 데꿀멍상태였던 것에 비교하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고트족과 로마 제국의 역학관계는 제국의 열세가 두드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 후기의 군인 황제들과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의 황제들의 활약으로 계속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한방에 무너지면서, 명분상으로는 고트족이 제국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상 대등한 교섭 관계가 되다시피 했다. 결국 설욕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게 가능했던 건 동로마 제국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6세기 중반. 그러니까 100년도 더 뒤의 일이었다.

로마 제국 붕괴의 시작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이런 장기적인 문제에 기인한 바가 크다.

5. 평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로마 제국의 정규군 주력이 난민에 가까웠던 고트족에게 대패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전쟁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았고, 오랫동안 고트족 기병이 로마의 중장보병을 상대로 승리한 것으로 믿어졌다. 이후 중장보병이 전장을 지배하던 시대를 마감하고, 중장기병이 새롭게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중세 유럽을 지배할 '기사'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고도 했고, 고트족 기병이 이렇게 뛰어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등자 사용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이 최근에 대대적으로 제기되었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라 유럽의 등자 사용은 서기 6세기 이후에나 이루어졌다는 점이 증명되면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이 등자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게 되었다. 더욱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보병과 보병이 충돌하고, 양익에서 로마군 기병을 제압한 고트족 기병이 로마군 중장보병 대열의 취약점인 측면과 배후로 기동하여 포위 섬멸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와 제2차 포에니 전쟁때부터 등장한 고전적인 회전의 전형이었다. 엄청난 정치적 파급력과는 별개로 전술적으로 독창적이거나 새로이 주목할 만한 요소는 딱히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 기병이 로마군 기병을 압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예는 로마 전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군은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면서 갈리에누스 황제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를 통해 중장보병 위주의 편성을 포기하고, 게르만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같은 기병 위주의 적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기병 예비대를 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를 중장기병의 중장보병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한 전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로마 제국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 로마군의 최고위 직급으로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기병대장)을 신설했을 정도로 기병 병과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사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한 원인은 바로 로마군 내부에 있었다. 발렌스 황제의 정찰 부족에 의한 상대 병력 오판과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성급히 전투를 벌인 황제의 공명심, 그리고 로마군의 무너진 군율에 의한 무질서한 공격이 더해지면서 발렌스 황제의 로마군은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

6. 기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의 알라리크 캠페인의 인트로에서 언급된다.


[1] 3분의 2가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 '최소'인 이유는 기록 안 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어 위키백과에 가면 Siege of Adrianople(378)도 따로 있긴 한데, 그것은 설명할 이 전투의 연장선이라서 하나로 간주한다.[3] 영어 위키백과에도 Battle of Adrianople은 이 전투이고, 다른 것들은 Battle of Adrianople (disambiguation)에 나와 있거나 연도를 직접 붙여야 나온다.[4]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썩은 개고기를 주는 대신, 고트족의 아이를 노예로 데려갔다고 한다.[5] 황제 발렌스와 로마 정부가 제대로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실제로, 율리아누스 황제와 요비아누스 황제가 연이어 죽어, 운이 좋게 황제가 된 처지치고는 당시 발렌스의 역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회합에서 의견이 모여 황제와 정부에 제대로 전달되었을 경우, 주인-대리인 관계를 악용한 도덕적 해이가 들켜 총독 두 명은 큰 책임을 지게 된다. 커리어가 꼬이거나, 삭탈관직당하는 건 당연하고 여차하면 처형당할 수도 있다.[6] 서게르만계 바타비족의 땅, 지금의 네덜란드[7] 후에 서고트족으로 발전한다.[8] 후에 동고트족으로 발전한다.[9] 훗날 스틸리코가 라다가이수스의 게르만족 난민 연합체를 막겠다고 동원한 병력이 정예도 아니고 오합지졸까지 합쳐서 30,00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