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34대 황제 갈리에누스 GALLIEN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이름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 (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
출생 | 218년 |
로마 제국 | |
사망 | 268년 9월 (향년 50세) |
로마 제국 메디올라눔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53년 9월 ~ 268년 9월 (15년) | |
전임자 | 아이밀리아누스 |
후임자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부모 | 아버지 : 발레리아누스 어머니 :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
배우자 |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피파 |
가족 | 소 발레리아누스 (이복형제) |
자녀 | 발레리아누스 2세, 살로니누스, 마리니아누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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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33-2대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장남으로 253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올랐다.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탈리아에 침입한 게르만족을 격퇴하는 등 아버지와 제국을 동, 서로 각각 맡아 내전과 외적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이끌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사산 왕조 페르시야의 샤푸르 1세의 책략으로 포로가 되어버리자, 그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치세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먼저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 대대적으로 침략했고, 각지의 로마군 사령관들이 황제를 자칭했으며, 급기야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이 잇따라 난립해 제국이 삼등분 되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갈리에누스는 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외적과 반란군을 토벌했으나 268년 반란을 성공적으로 토벌하던 도중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로마 제국에서 황제가 최초로 관용령이라는 이름의 포고문을 발표하고, 이전 황제의 박해령을 폐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259년 관용령을 반포해 기독교도와 교회 재산을 국가에서 보호했고, 261년에는 기독교를 합법 종교로 승인했다.
2. 생애
2.1. 출신가문과 초기 경력
갈리에누스는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첫 부인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은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소 발레리아누스)가 있었는데, 그는 이복동생이었다. 고향은 갈리에누스 시대때 발행된 동전이나 비문에서 드러나듯, 에트루리아 지방 남부의 도시 팔레리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한편 로마 공화정 말 ~ 원수정(프린키파투스) 분야의 최고 권위자 사임 등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외가가 오랫동안 터잡은 산니움 지방의 에그나티와도 유년기부터 꽤 인연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갈리에누스가 태어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세기 그리스 연대기 작가 요안니스 말라라스는 갈리에누스가 사망 당시 50세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른다면 갈리에누스는 218년에 태어났을 것이다.에트루리아(오늘날의 토스카나) 지방을 대표하는 리키니우스 가문 출신이다. 로마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아는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노빌레스 가문인, 크라수스를 배출한 그 리키니우스 가문이다. 흔히 고대 로마 역사에서 공화정 시대에 등장한 에트루리아계 로마 명문 귀족 정도로 알려진 이 가문은, 그 역사가 로마 편입 이후만 따져도 공화정 초창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에트루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역사는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처럼 리키니우스 가문은 씨족 성씨 자체도 그 뿌리인 에트루리아어에서 따왔고, 이는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묘비명에서도 확인된다. 더욱이 리키니우스 가문은 공화정 초창기부터 에트루리아 지방을 넘어 로마 안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에트루리아계 로마귀족으로 유명해 기원전 493년 선출된 초창기 호민관 멤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등의 거물급 원로원, 민회 내 대정치인들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이런 친가처럼 외가 역시 서기 3세기 당시 그 역사가 유서 깊은 이탈리아 귀족 가문이다. 외할아버지는 230년에 집정관을 지낸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마리니아누스, 외삼촌은 판노니아 사령관, 아시아 속주 총독, 수도장관을 지낸 에그나티우스 롤리아누스다. 따라서 어머니의 외조부는 저명한 철학자이자 정치가 아울루스 에그나티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가 되며, 퀸투스 비리우스 에그나티우스 등은 갈리에누스 친모와는 6촌 이내의 친척이 된다.
외가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기원한 오래된 이탈리아 평민가문 에그나티우스 씨족이다. 갈레리우스의 외가는 친가와 비교해 그 역사가 대단하진 않았고, 사치스럽고 난잡한 사생활로 지탄받았으나 재력이 대단하고 이름을 날린 원로원 의원, 장군을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즉, 제정 시대의 다른 명문가와 비교하면 아주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 집안 중 하나였다. 이 가문은 동맹시 전쟁이 벌어질 무렵부터 원로원 의원을 이미 2명이나 배출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산니움계 로마인 가문으로 유명했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에그나티우스 가문 역시 공화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귀족 중 하나였는데, 갈리에누스는 아주 어릴적부터 친가와 외가를 오가며 성장했다.
갈리에누스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지만, 친가와 외가 모두 서기 3세기 무렵 로마제국 안에서 오리지널 로마-이탈리아 세습 원로원 귀족이었으니 자택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철학, 웅변술, 군사 기술 등을 교육받고 성년이 되었을 때 군대에 입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가 장성해 나이가 꽤 있는 상태에서 보결집정관에 취임한 것을 보았을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밑에서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이력은 잘 알려지지 않지만, 리키니우스 가문의 장남인데다 아버지가 로마 안에서도 원로원 내 실력자이고 부친이 에그나티우스 가문 사람들과 여러 난관을 극복한 것을 보면 갈리에누스가 그 중간에서 여러 역할을 하면서 상당한 경력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1]. 더욱이 외할아버지가 전직집정관이었던 만큼 그 재력 역시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서기 3세기 무렵 명문가 자제들처럼 훌륭한 교육을 받고, 원로원에 입성하기 전까지 로마군 장교로 군복무를 하면서도 부친 곁에서 정치활동과 행정실무 보조 업무 등을 다양하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그는 황제가 되기 약 10년 전에 그리스 혈통 원로원 귀족 가문 태생의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와 결혼해, 세 아들 발레리아누스 2세, 살로니누스, 마리니아누스를 낳았다.
253년 10월 22일,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에 올랐다. 이때 그는 원로원에게 1세기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선례에 따라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해 동의를 얻어냈고, 플라비우스 왕조 이래 세습체제 구축을 시작한 로마 황제들이 그렇듯 자신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를 253년 보결집정관에 추천해 당선시켰다. 이렇게 장남을 공동 황제에 올리고 차남을 보결집정관에 당선시켜 로마 안에서의 리키니우스 가문 입지를 강화시킨,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의 도발을 막기 위해 동방으로 떠났다. 이때 갈리에누스는 라인강과 도나우 강에서 게르만 민족을 격퇴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남았다.
2.2. 공동 황제
갈리에누스는 공동 황제로 즉위한 뒤 253년부터 258년까지 도나우 강 유역과 일리리아 일대를 순방했고 대부분의 기간을 라인 강 국경 지역에서 보냈다. 로마 제국의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이 기간 동안 게르만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라인강을 수차례 건너 게르만 족의 여러 부락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에게 적대적인 당대의 역사가들도 이 시기 라인강 일대의 로마군의 승리는 갈리에누스의 지휘 덕분임을 인정했다. 255년 또는 257년, 갈리에누스는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 사실은 그가 로마를 잠깐 방문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는 255년 또는 256년에 도나우 강 국경 지대에 머무르는 동안 발레리아누스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258년에서 260년 사이,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의 침략에 맞섰고 갈리에누스는 게르만족의 침략 저지에 몰두했다. 판노니아 방면군 사령관 잉게누우스는 두 황제가 다른 지역에서 정신이 팔리느라 자신에게 신경 못 쓰는 틈을 타 황제를 참칭했다. 발레리아누스 2세의 주화 생산은 258년을 끝으로 돌연 중단되었는데, 아마도 이때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사료에서는 발레리아누스 2세가 어떻게 죽었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258~260년 사이에 발칸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잉게누우스가 그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그가 잉게누우스에게 살해됐다고 해석하는 것은 과대해석이라는 지적이 많다.
발레리아누스 2세는 사후 신격화됐고, 그 직위를 동생 살로니누스가 승계 형태로 평화롭게 이어 받은 것이 확인된다. 또한 이집트에서 발굴된 2개의 파피루스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 2세는 258년 여름에 사망했고, 8월에 조부 발레리아누스, 아버지 갈리에누스와 함께 카이사르 발레리아누스라고 언급된 것을 끝으로 나오지 않아, 그가 병으로 요절했을 확률이 높다. 또 다른 파피루스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258년 2월 15일 당시를 적은 이 파피루스에는 그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위엄있다는 찬사가 적혀 있다. 역사가 데이비드 포터는 발레리아누스 2세와 잉게누우스의 반란은 큰 관련이 없으며, 260년 발레리아누스가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를 상대로 에데사 전투를 치르다가 사로잡히면서 로마 세계가 대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잉게누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실바누스, 포스투무스의 지도하에 후방에 남겨두고 260년에 발칸반도를 건너 아우레올루스가 지휘하는 새로운 기병부대를 이끌고 무르사 또는 시미늄에서 잉게누우스와 격돌해 대승을 거뒀다. 잉게누우스는 수도로 정했던 시미늄이 무너진 후 도주하다가 사망했다.[2]
258년~260년 사이, 갈리에누스가 잉게누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국경 지대의 군대 일부를 차출한 틈을 타, 알레만니족이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그들은 라인강 하류 방어선을 돌파해 갈리아를 공격했고, 일부는 스페인 남부까지 도달해 타라고나를 공격했다. 알레만니족은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일삼고 이탈리아로 진군해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급히 소집한 로마군의 저지를 받은 그들은 약탈품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철수했다. 그러던 중 메디올라눔에 이르렀을 때, 갈리에누스가 친히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을 받았다. 알레만니족은 메디올라눔 전투에서 대패했고 일부 병력 만이 알프스 산맥을 간신히 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알레만니족은 10년간 로마 제국을 침략하지 않았다.
이렇듯 갈리에누스는 제위 내내 숱한 반란과 외적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성공적으로 수습해 자신이 황제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췄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260년,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한다.
2.3. 전대미문의 위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color: #4A3800,#FFF; margin: -5px 0px" | 키리아데스 | 포스투무스 | 소 포스투무스 | 라엘리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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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갈리에누스의 재위 기간 동안 나타난 32명의 황제 참칭자를 아테네의 30인 참주에 빗대어 똑같이 '30인 참주'라고 불렀다.[3]
2.3.1. 포로로 잡힌 아버지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앞의 샤푸르 1세를 새긴 부조[4] |
아버지가 포로로 잡히고 동방의 잔여 군대마저 반란을 일으킨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갈리에누스였지만, 당시 그는 잉게누우스의 반란과 알레만니족의 침략을 수습하느라 동방에 갈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발칸 반도 주민들이 동요한 나머지 현지 사령관 레갈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레갈리아누스는 수개월 동안 황제를 칭하고 적의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싸웠으나 결국 록솔라니족에게 패해 살해당했다.[5]
261년 봄,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를 동방으로 파견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그는 261년 봄 또는 초여름에 알리리쿰에서 반란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뒀고 마크리아누스의 두 아들은 살해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갈리에누스는 더이상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반란에 가담했던 오데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dux Romanorum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오데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여전히 그에게 적대하는 반란군을 토벌했다.
2.3.2. 갈리아 제국
260년, 갈리아 방면군 지휘관 포스투무스는 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전리품을 빼앗았다. 그는 이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에게 나눠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지휘관 실바누스는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게 맞는다며 자신에게 보내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포스투무스의 병사들은 분노하여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포스투무스는 즉각 그들을 이끌고 쾰른을 포위했고, 쾰른 시민들은 몇 주 후에 실바누스와 갈리에누스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넘겨주고 항복했다. 포스투무스는 즉각 두 사람을 처형했다.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자신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포스투무스와 맞서기 위해 군대를 모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게르만족의 침략이 거셌기 때문에, 그는 몇 년간 갈리아 반란 진압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265년, 갈리에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격해 포스투무스를 어느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을 일단 용인해주기로 하고 포스투무스가 이탈리아로 공격하지 않고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대신 격퇴하는 조건하에 그가 갈리아 제국 황제를 칭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후 포스투무스는 로마의 정치 제도를 본떠 제 나름대로의 제국을 운영했다.
2.3.3. 이집트의 반란
262년, 이집트 총독 루키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갈리에누스는 로마의 귀중한 곡물창고인 이집트가 상실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장군 아우렐리우스 테오도투스를 급파해 아이밀리아누스를 토벌하게 했다. 262년 3월 30일, 테오도투스는 테베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이밀리아누스를 생포한 뒤 곧바로 처형했다. 그러나 테오도투스 역시 반란을 도모하다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이집트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이 당시 외적의 침략, 내전, 키프리안 역병, 기근으로 인한 이집트의 참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서신을 남겼고, 이는 이 시대의 혼란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소중한 자료로 다뤄지고 있다.2.3.4. 게르만족의 대침입
267년, 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그들은 처음에 흑해를 건너 발칸 반도를 유린하고 아테네, 스파르타 등 그리스의 많은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함선을 구성해 지중해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약탈했다. 로마 해군은 이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그들이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챙긴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막지 못했다. 이듬해, 훨씬 더 많은 침략군들이 해상을 통한 침략을 개시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지난해에 맛본 쓰디쓴 패배를 잊지 않고 해군을 제때에 투입해 트라이스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육상에서는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였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고트족은 발칸 반도를 초토화한 후 갈리아, 이탈리아로 진군했다.2.3.5. 팔미라 제국
267년, 갈리에누스로부터 동방 속주 전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데나투스는 고트족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조카 또는 사촌인 마에오니우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아내 제노비아는 즉각 마에오니우스를 처형한 뒤 동방의 권력을 이어받아 오데나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바발라투스를 오데나투스의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실권을 잡았다. 제노비아는 갈리에누스의 치세 때는 로마에 충성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갈리에누스 사후인 270년에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동부 속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의 속주를 침공해 점령했다. 또한 그녀는 바발라투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팔미라 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의 난립으로 인해 3등분되고 말았다.2.4. 갈리에누스의 개혁
2.4.1. 군제 개혁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의 난립과 외적의 침략, 반역자들의 창궐로 인한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대 역사가들에게 부정적으로 평가 받았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그를 좀더 긍정적인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갈리에누스는 자신에게 닥친 전대미문의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제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력을 다했고 몇 가지 유용한 개혁을 실시했다.먼저, 그는 제국의 어느 곳에서나 신속하게 배치될 수 있는 기병조직을 창설했다. 이 기병대는 변경에서 떨어진 후방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가 변경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접하는 즉시 출격해 현장으로 달려가 적을 무찔렀다. 이 기병조직은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은 군인 황제들이 유용하게 활용해 로마 제국을 전란에서 구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전방에 있는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제국 요충지(시르미움, 밀라노 등)에 배치하고 그 도시를 요새화 하였다. 따라서 이제 야만족들은 도나우강 근처의 군단기지 뿐만 아니라 요새화된 도시까지 뚫어야 했다.
또한 코호르스 지휘관(=대대장)인지 군단 참모인지 애매모호하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완전히 대대장 직책만 수행하게 했고, '프라이포시투스' 직위가 군단 참모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2.4.2. 행정, 원로원 개혁
이 황제 시대의 개혁 중 가장 급진적이고, 불만을 낳은 건 행정 개혁과 원로원 개혁이었다. 갈리에누스의 조치는 그가 죽기 전 제국이 회복될 기반을 닦아놓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여러 조치들의 터전을 만들었음에도 이 사람에 대한 평가가 박하게 된 이유가 되었고, 사후 그의 일가가 원로원에게 연좌제를 받게 된 이유가 됐다.갈리에누스의 행정, 원로원 개혁의 핵심을 간단히 말하면, 황제 중심의 중앙정부 권한 강화였다. 따라서 그의 여러 행정, 원로원 개혁은 황제 주변의 고위관료들에 대한 개혁보다는 황제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정적일 수도 있는 속주 총독, 원로원에게 그 초점이 맞춰졌다.
갈리에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군 사령관이 되는 것을 금지[6]했고 문관과 무관을 엄격히 구분했다. 그 결과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할 군 사령관들은 군사 전문가들이 전담하게 되었고 원로원 의원들의 권력은 약화되어 황제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원로원 속주의 총독은 원로원 의원들이 계속 차지했다. 즉 군사관련 분야만 전문가인 군인출신의 기사계급이 맡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황제령 속주, 원로원령 속주까지 기사계급 출신 인사들을 기존의 총독 자리에 배치하고, 그들이 부임한 속주에 대해 민간과 군대의 권위 통합을 부여했다. 반면 원로원령 속주의 경우, 지속적으로 민간과 군대를 이분화한 뒤 원로원 출신 총독들의 권한을 민간 분야의 황제 대리인 정도로 격하시켰다. 따라서 원로원의 위세와 명성은 이 조치가 발표되고 시행된 이후부터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갈리에누스의 개혁은 예전의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데키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같은 케이스들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 반면 그의 이 조치는 이후 진짜 순수 군인출신 황제들의 등장을 초래하게 됐으며, 민간과 군대의 이분화 조치는 후기 로마제국 속주들에서 양쪽의 이해충돌과 법령 해석 및 이해의 차이 등의 부작용도 초래했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2.5. 관용령(259)과 기독교 탄압 무효화 조치
리키니우스 갈리에누스는 정적들에게 평가받길,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한 독단적인 황제로 불렸고 실제 그의 모습도 세습왕조와 강력한 황제권에 힘을 쏟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가 주도했던 기독교 탄압 정책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여러 조치, 사건, 추정상 그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의 훌륭한 협동 황제이자 조력자임에도 부친의 강력한 기독교 탄압에는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본인의 사촌동생 혹은 조카로 추정된 성녀 리키니아가 순교했던 일에 갈리에누스가 부친을 좋게 여기지 않은 점, 기독교도 원로원 동료와 친가 친척들인 리키니우스 가문 사람들이 발레리아누스의 무분별한 탄압으로 황실 영지로 추방돼 강제 노역을 한 조치가 발레리아누스 몰락과 갈리에누스 단독집권과 동시에 모두 무효화됨과 동시에 원상복귀 시킨 점 등에서 확인된다고 한다.259년 아버지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와의 에데사 전투에서 포로가 되자, 갈리에누스는 로마 제국 안에서 점차 교세가 확산되고 각계의 교세가 넓어지고 있던 기독교 탄압을 무효화했다. 그러면서 259년 관용령으로 알려진, 로마 제국에서 황제가 최초로 관용령이라는 이름의 포고문을 발표하고, 이전 황제들인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의 박해령을 모두 폐기했다. 이어 261년에는 기독교를 불법 종교가 아닌, 합법 종교(religio licitia)로 인정해 이를 믿는 로마인과 교회의 무분별한 탄압을 다시 한번 무효화시켰다. 이 결과, 갈리에누스 정부는 강제로 빼앗은 교회 소유의 땅을 되돌려주라는 칙령을 발표해 교단의 재산을 인정했으며, 예배 장소, 묘지 복원 역시 허락했다.
갈리에누스가 당시로서는 급진적으로 비춰진 이런 발표와 포고문을 연이어 발표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의 조치 이후 상술했듯이 쌍둥이 칙령으로 불린 257년 명령과 258년 명령에 따라 고초를 겪은 이들의 무분별한 탄압은 중지됐다고 한다.
하지만 갈리에누스의 이 칙령은 기독교를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이후 로마 제국은 갈리에누스의 조치에 따라, 디오클레티아누스 집권 전까지 로마 정부가 기독교에 대해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처럼 탄압을 가하지 않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 기독교는 난세기인 군인황제 시대 동안 급격하게 성장. 군인 황제 시대로 불린 난세를 종결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이르러서는, 로마인의 10%를 신자로 삼는 거대 종교로 성장했다.
2.6. 암살
갈리에누스는 제국 곳곳에서 터진 반란을 진압하면서도, 꾸준히 리키니우스 가문을 항구적으로 세습왕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그는 동생 소 발레리아누스, 외사촌 에그나티우스 루킬루스를 265년 집정관에 나란히 추천해 당선시켰으며, 자신의 아들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의 이런 결정은 원로원 개혁으로 단단히 화가 난 원로원 의원들에게, 갈리에누스의 지나친 직계 일가 권력강화로 비춰졌다. 여기에는 갈리에누스와 외가 에그나티우스 가문 사람들의 사치스럽고 난잡한 사생활, 과거 갈리에누스 친모와 그녀의 조카들에 대한 여러 잡음과 그 소문도 회자돼, 그 불만을 고조시켰다. 그래서 265년의 여러 조치는 원로원 의원들이 그를 미워하고 증오한 분수령이 됐다.이런 상황에서 268년, 그동안 갈리에누스와 함께 반란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으로 칭했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포위 공격 후 승리를 앞둔 시점에 자신의 장교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들은 모두 갈리에누스가 중용했던 일리리아계였는데, 어떤 이유로 갈리에누스를 암살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이유 탓에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는데 대체로 나오는 분석에 따르면, 크리스트교 확산 방지를 위해 그리스-로마 전통 종교와 신플라톤 철학 등을 적극 후원하면서 반감을 사고 있던 갈리에누스가 제국의 중요한 방어선인 도나우 방어선과 그 일대 국방 문제에 큰 힘을 쏟지 않는 것에 대해 그를 지지해주던 일리리아계 장군들마저 불만을 품었고, 그 결과가 불신임의 의사표시인 암살이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아우레올루스가 황제의 휘하 장교들을 황제가 처단할거라는 위조 문서를 황제 진영에 넘어가게 해서 이에 격분한 장교들이 황제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음모를 주도한 사람은 아우렐리아누스라고 한다.
한 기록에 따르면, 달마티아 사령관 세크로피우스가 아우레올루스의 군대가 밀라노를 탈출해 도주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갈리에누스는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급히 자신의 장막을 떠나 평상복 차림으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려 했다가 세크로피우스에게 살해됐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침상에서 자던 중에 살해당했다고 한다. 또 에우트로피우스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밀라노에서 암살될 당시에 황제의 동생인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도 같이 살해됐다고 한다. 반면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기록에서는 황제와 달리 황제의 동생은 로마에서 살해됐으며, 이때 갈리에누스의 막내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마리니아누스도 같이 살해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가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을 주도한 이는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였다. 하지만 조나라스는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한 이가 마르키아누스라고 지목한 반면 조시무스는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지목했다. 헤라클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의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가족과 그의 지지자들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막고 그의 전임자를 신격화할 것을 요구해 승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띄우기 위한 주장이므로 전부 사실은 아니다. 갈리에누스의 직계 가족은 전부 살해됐고,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 역시 갈리에누스와 함께, 혹은 갈리에누스의 어린 아들과 함께 살해됐다. 다행히 계모와 소 발레리아누스의 자녀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발레리아누스 즉위와 갈리에누스 단독황제 등극에 크게 기여한, 갈리에누스의 외가인 에그나티우스 가문 내 사람들도 방계황족인 이유로 살해되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이중 갈리에누스의 외사촌으로,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와 265년 공동집정관을 지낸 에그나티우스 루킬루스와 그 형제들 역시 갈리에누스 형제가 죽은 뒤 원로원 명령으로 처형됐으며 여러 측근들도 살해됐다.
갈리에누스의 무덤은 로마 남쪽의 비아 아피아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3. 외모 및 사생활
- 갈리에누스는 여러 부분에서 하드리아누스와 가장 비슷한 황제로 평가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지은 아름다운 문구의 시, 문학 수필 그리고 여러 철학자들과 예술 장려 때문이었다. 이는 당대 로마인, 4세기 작성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포함한 후대 로마인들에게 한결같이 신랄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다음과 같이 찬사를 받은 이유였다.
"당대의 시인들과 수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를 빛나게 했다."
그의 예술 후원과 문인, 철학자 후원은 정치적 의도도 있었겠지만, 이 사람의 평소 취미와 성향이 지극히 문학가, 시인, 예술가적인 이유도 컸다고 한다. 따라서 갈리에누스는 후대 로마인들에게 위대한 마지막 이교도 철학자로 평가받은 플로티노스 등을 후원했고, 본인 역시 어느 결혼식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라틴어 시구절를 지어 발표하거나, 일반적인 연설에서도 모두의 귀를 사로잡는 아름다운 문구의 연설문을 손수 지어 발표했다.
-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해 공화정 이래 로마를 대표하는 귀족가문이 된 리키니우스 집안 출신답게, 꽤나 고전적인 귀족이었지만, 성향은 외가 쪽 인사들처럼 사치스럽고 난잡해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으며 양육된 점을 빼곤 주목할 만한 점이 없다"고 대차게 까였다. 이에 관해, 고대기록들은 갈리에누스가 이런 성향을 갖게 된 것은 친모와 외가 식구들의 성향과 사생활을 판박이로 빼다 박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갈리에누스가 사후 평가가 나쁜 점에서 의심될 부분일 수 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의 아버지 발레리아누스는 리키니우스 가문 태생의 명문가 수장임에도 겸손했다는 기록이 여럿 있고, 실제로도 고풍스러운 면모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형과 함께 피살된 이복동생 소(小) 발레리아누스 역시 비슷했다고 하는데, 소 발레리아누스 역시 눈에 띨 정도로 상당히 잘생긴 꽃미남에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학식이 상당했다고 칭찬받았으며, 갈리에누스의 계모 역시 그 평가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갈리에누스 형제가 암살(또는 로마에서 살해) 됐을 때 동생 소 발레리아누스가 형 때문에 불쌍하게 죽었다고 동정여론이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갈리에누스 일가가 원로원에게 처형될 때 소 발레리아누스 일가와 그 후손들까지 몰살됐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소 발레리아누스의 아내와 아이들이 살해되거나 원로원에 기소됐다는 기록도 없다.
-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고전주의 풍의 조각과 예술을 사랑하고 장려했으며, 유능한 군지휘관이자 행정가로서 꽤나 엄격함과 규율의 중시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행동했다. 그러나 재위 중반 이후부터는, 본래부터 고상한 취미가 많은 탓에 사치에 몰두했고 화려함을 추구했다고 한다.
- 제위 등극 이래 늘 빛나는 왕관을 쓰고 대중 앞에서 등장했고, 황제를 상징하는 보랏빛 토가를 입거나 보석과 황금 버클로 치장한 자주빛 망토를 두르고 살았다고 한다. 또 피파를 첩으로 맞이한 이후에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 이 부분에서도 큰 비난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후대 로마인 저자들에게 대놓고 황제복을 입고 왕관과 보석, 황금을 두른 절대군주에 가까웠다고 평가받았다.
- 아내 코르넬리아 살로니나는 그리스인이었고, 하드리아누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로마귀족 중에서도 꽤나 헬라 문화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런 점과 별개로 갈리에누스가 서기 258년 이후부터 암살된 268년까지 10년 내내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두번째 아내 피파(피파라)였다. 그는 아내와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였고 관계도 나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피파를 사랑했고 서로를 좋아했다고 한다. 피파는 게르만족 족장 아탈루스의 딸로 로마와 게르만족이 258년 상호조약을 맺으면서 로마로 건너온 인질이었는데, 갈리에누스와 피파는 결혼식을 올렸고 피파는 258년 이래 그의 두번째 부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진심어린 연인관계였고 서로의 사랑을 진정한 관계로 여겼기 때문에 일반적인 남편과 첩실 관계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 로마인 사가들은 갈리에누스와 피파의 사랑에 관해 "서로 진정한 사랑을 나눈 연인"이라고 말하며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같이 갈리에누스를 극도로 혐오한 로마인 사가들은 이를 "수치스러운 사랑"이라고 할 정도로 갈리에누스가 타락한 증거로 거론하고 그가 몰락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7]
- 피파와의 사랑, 절대군주적인 패션과 행동, 사치를 꽤나 했던 생활방식 등으로 까이긴 했지만, 늘 제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산산히 부서진 제국의 질서 회복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용감하고 엄격한 군율을 본인조차 지킬 정도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또 생각 역시 상당히 유연하고 관용적인 현실주의자였고, 결단력 역시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다.
- 공동황제였던 아들 살로니누스 갈리에누스 역시 평가가 상당히 안 좋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경우에는 아예 "고귀하게 태어나 황실에서 자란 점을 빼곤 서술할 가치조차 없다"면서, 거론하기는 싫은데 자기들에게 기록을 남기라는 높으신 분들 명령으로 기술한다는 것이 직간접적으로 나올 정도.
4. 평가
갈리에누스는 당대 로마인들의 평가, 위서《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와 3세기 이후의 전통적인 로마사가들의 기록 모두로부터 지극히 무능하고 모든 것이 부정적인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고대 기록들은 갈리에누스가 통치술이 무능한 황제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정도로 비양심적이었으며 부친의 죽음이 전해진 날에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오락에만 치중한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가 잔인한 품성과 기회주의적인 모습들을 보여준 황제였으며, 능력이 평범함에도 자기과시가 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성향이 심해 무능했다고 비난받았다.이런 이유로 인해 전통적 사가 중에서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적국의 포로로 잡히는 굴욕, 연이어 터지는 황제 참칭자들의 등장과 음모, 계속해서 침공해오는 이민족들, 3분할 된 제국의 상황, 최악의 자연재해와 계속되는 기근 등으로 정신없던 상황들은 모두 그가 무능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단언하고, ‘3세기의 위기’를 갈리에누스의 탓으로 모두 돌리면서 268년 벌어진 암살이 긍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설령 갈리에누스가 개인적으로는 군사적 재능과 통치술이 기민했던 부친 발레리아누스보다는 우유부단하고 부족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불운한 상황과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8년간 동분서주한 갈리에누스의 부단한 노력과 군제 개혁 등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재평가받고 있다.
[1]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아프리카 속주에서 농장주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자처했을 때,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접촉한 원로원 유력자가 발레리아누스였다고 고대기록들은 말한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발레리아누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지해주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온전히 따라달라면서 막시미누스 측 인사들의 암살도 요구했다. 이에 발레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요구대로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일단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지지해주면서도, 자신에게 위험부담을 떠맡긴 두 사람을 고도의 정치술을 이용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제대로 몰락시킨다. 이때 그는 자신과 악감정도 없고, 천상 군인이자 동료 원로원 의원인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탄핵하거나 소환하긴 커녕, 편지를 정중히 보내 "황제를 자처한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당신을 탄핵해달라고 하더라"고 알려준 뒤, 원로원과 자신은 카펠리아누스 당신을 존중하니 물러나주는 것도 좋지 않냐는 식으로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제대로 엿먹인다. (그 뒷 이야기는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 문서 참조 바람)[2] 일부 기록에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3] 다만 이 중 일부는 아테네의 30인 참주와 숫자를 맞추기 위해 추가된 가상 인물이다.[4] 이란 쉬라즈 근처의 나크쉐 루스탐 유적에 있는 다리우스 1세의 무덤 바로 옆에 새겨져 있다.[5] 일부 사료에는 레갈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없었던 갈리에누스가 록솔라니족을 꼬드겨 그를 공격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사료의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6] 정말로 금지를 시키는 법 또는 황제령을 발표 했는지는 불확실하다.[7] 섹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이 이렇게 갈리에누스와 피파의 사랑을 비난한 이유는, 갈리에누스가 피파의 아버지 아탈루스에게 다른 게르만족들을 격파하는 대가로 로마 영토를 일부를 아탈루스의 부족들에게 사실상 넘겨준 조약의 일부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