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황제 참칭자 마그넨티우스 MAGNENTI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마그넨티우스 (Flavius Magnus Magnentius) |
출생 | 303년 |
로마 제국 갈리아 사마로브리바 | |
사망 | 353년 8월 1일 (향년 50세) |
로마 제국 갈리아 루그두눔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50년 1월 18일 ~ 353년 8월 11일 (3년) | |
전임자 | 콘스탄스 |
후임자 | 콘스탄티우스 2세 |
종교 | 확실하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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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반란자. 콘스탄스 황제를 살해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3년만에 진압당했다.2. 행적
303년경 사마로브리바에서 브리타니아 속주 출신 아버지와 프랑크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찍이 근위대에 입대했고, 헤르쿨리아와 요비아 근위대 지휘관으로 승격했다. 그는 맡은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고 병사들을 잘 대해 많은 이의 호감을 샀고, 마르켈리누스 등 궁정 관리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당시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스는 정통교회 신봉자로, 아리우스파와 이교도를 심하게 탄압해 수많은 이들의 원망을 샀다. 게다가 사치를 심하게 부리고 사냥에 몰두하느라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며 성격이 잔인하여 많은 이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해쳤다. 그런 그에게 반감을 품은 장교와 관리들은 마그넨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350년 1월 18일 밤, 아우구스토두눔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마그넨티우스는 황제만이 입는 자주색 토가를 착용하여 황제로 선포되었다. 당시 사냥을 떠나서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던 콘스탄스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피레네 산맥의 헬레나라는 작은 마을로 도망쳤지만, 350년 2월 말 마그넨티우스가 보낸 암살단에게 살해되었다. 마그넨티우스는 빠른 시일에 콘스탄스의 통치 영역이었던 이탈리아, 갈리아, 아프리카, 히스파니아를 장악하였고, 콘스탄스가 관직에 앉혀놓은 귀족들 중 일부를 처단했다. 또한 "로마 세계의 해방자" 같은 문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고,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후손인 유스티나와 결혼하여 부족한 정통성을 보강했다. 다만 동방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인정받길 원했던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형상이 새겨진 주화를 주조하기도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안티오키아에서 동생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그는 사산 왕조군과 일전을 벌이고 있어서 서방으로 군대를 보내기 곤란했다. 그래서 그는 일단 마그넨티우스와 협상하기로 했지만, 곧 양측의 입장 차이가 협상으로 해결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게 분명해졌다. 형제를 살해한 마그넨티우스를 정당화한다면, 이것이 잘못된 선례가 되어서 콘스탄티누스 왕조에 심각한 해악을 미칠 수도 있었다. 또한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스에게 탄압받던 이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는데, 이로 인해 그 역시 이교도라는 비난을 받았다.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였던 콘스탄티우스는 이교도가 활개를 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가 봉기를 일으켜 로마를 점거한 뒤 황제를 칭하다가 마그넨티우스에게 처단되었다.
350년 3월 1일, 일리리아를 지키고 있던 베트라니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여동생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의 요청에 따라 카이사르를 칭한 뒤 마그넨티우스의 일리리아 진출을 저지했다. 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자신이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카이사르를 칭했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에데사에서 베트라니오의 편지를 접한 뒤 사산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는 한편 베트라니오에게 왕관을 보내면서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인정하겠다고 전한 뒤 군자금을 보내고 도나우 강변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런데 베트라니오는 마그넨티우스를 저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콘스탄티우스 2세로부터 자금과 물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연이어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그의 의도를 의심해 요구를 점차 들어주지 않자, 베트라니오는 마그넨티우스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350년 여름,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신의 형제인 마그누스 데켄티우스를 카이사르로 삼았다. 한편 콘스탄티우스 역시 사산 왕조와 평화 조약을 맺고 발칸 반도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마그넨티우스와 베트라니오는 트라키아의 헤라클레이아에 도착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공동으로 사절을 보내 협상을 권고했다. 마그넨티우스는 자신의 딸을 콘스탄티우스 2세와 결혼시키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는 베트라니오와 결혼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를 따랐던 이들의 직책을 유지하는 것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다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제국 서방의 영유권을 마그넨티우스와 베트라니오에게 넘기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와의 협상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베트라니오에게 별도로 사절을 보내 자신과 협력한다면 황제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여동생을 그와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다. 베트라니오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다시 콘스탄티우스 2세와 손을 잡았다. 콘스탄티우스는 일리리아 일대의 나이수스, 시르미움, 또는 세르디카에서 베트라니오의 군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350년 12월 25일 베트라니오의 장교들을 포섭해 일리리아 군단이 자신을 유일한 황제로 받들게 만들었다. 베트라니오는 급히 몸을 땅에 던지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자비를 빌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를 사면하는 대신 지휘권을 박탈하고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다.
그리하여 베트라니오를 퇴위시키고 그의 군대를 흡수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1년 3월 15일 조카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동방의 카이사르로 선포했다.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와의 일전을 준비하기 위해 라인 전선의 군대를 동원하고 게르만 족에게 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351년 봄, 그는 아드리아나 인근에서 콘스탄티우스의 선봉대를 매복 공격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휘하 동방 로마군은 꿋꿋이 진군하였고, 351년 9월 28일 양군이 무르사에서 격돌했다. 무르사 전투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유혈이 낭자한 전투 중 하나로, 당대 기록에 따르면 총합 95,000명이 맞붙어서 55,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무르사 전투에서 패배한 마그넨티우스는 북부 이탈리아로 퇴각했고, 콘스탄티우스는 피해를 수습하면서 다뉴브 강을 건너온 이민족을 상대로 351년 가을과 겨울 내내 전투를 치렀다. 352년 마그넨티우스는 사절을 보내 황위에서 물러날 테니 콘스탄티우스 황제 휘하에서 장군으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거절했고, 다뉴브 강의 안전이 확보되자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마그넨티우스는 갈리아로 퇴각한 뒤 전력을 끌어모아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콘스탄티우스는 메디올라눔에 도착한 뒤 이탈리아의 통제권을 확보한 후 353년 7월 3일 갈리아로 진군했다. 353년 7월, 양군은 몬스 셀레우코스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마그넨티우스는 이번에도 패배를 면치 못하고 리옹으로 도주했다. 그 후 콘스탄티우스의 군대가 리옹을 포위하자, 마그넨티우스는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어머니 및 친척들과 함께 자살했다. 당시 원군을 이끌고 그를 도우러가던 동생 데켄티우스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8월 18일에 세로나에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그를 따랐던 추종자들을 대거 숙청했으며, 동방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없는 동안 동방에서 문제를 일으킨 조카 갈루스를 처형했다. 그 후 354년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마그넨티우스의 난으로 라인 전선이 붕괴되어 게르만 족의 침략에 직면한 갈리아를 수습하게 하였다. 한편 마그넨티우스의 아내였던 유스티나는 살아남았고, 훗날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