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빅토르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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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비정통 황제 플라비우스 빅토르 FLAVIVS VICTOR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빅토르 Flavius Victor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 |
사망 | 388년 8월 |
로마 제국 트리어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84년 또는 387년 - 388년 8월 | |
전임자 | 그라티아누스 |
후임자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부모 | 아버지 : 마그누스 막시무스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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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51-2대 황제. 아버지 마그누스 막시무스에 의해 공동 황제로 지명되었으나 아버지가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패망한 뒤 처형되었다.2. 생애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브리타니아에서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을 역임하던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갈리아로 쳐들어가 서방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를 주살했다. 이후 여세를 몰아 로마로 진격하려 했으나 동방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플라비우스 보토를 사절로 보내 이를 저지했다. 그는 막시무스가 이탈리아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용인해준다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막시무스의 지위를 인정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또한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도 막시무스를 설득했다.이에 막시무스는 384년 평화 조약을 체결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 서부에서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자신은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의 황제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387년, 막시무스는 평화 조약을 위반하고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밀라노에서 달아나 테오도시우스에게 의탁했고, 막시무스는 삽시간에 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제국의 서방을 통치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한편, 빅토르가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은 고대 문헌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의 즉위를 기념하는 주화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면서 드러났다. 빅토르가 언제 즉위했는지에 대해 384년설과 387년설이 제기되지만 불확실하다. 특이한 점은 그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의 수가 아버지 막시무스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보다 더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막시무스가 자신만의 왕조를 세우고자 일부러 아들의 주화를 대량으로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388년 7월,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해 막시무스를 공격했다. 막시무스는 이에 맞서 사브 강 근처의 사스키아에 진영을 두고 적과 대치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몇 번의 전투에서 모조리 패했고 병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에 프랑크 족이 북부 갈리아를 침략하면서 막시무스의 입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로 달아났으나 적에게 포위되자 항복했고 자비를 간청했지만 곧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빅토르는 트리어에 머물고 있다가 388년 8월 아르보가스트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