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57대 황제 제노 ZENO | Ζήνων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타리시코다사(본명) 플라비우스 제논(Flavius zeno) |
출생 | 425년 |
로마 제국 킬리키아 | |
사망 | 491년 4월 9일 (향년 65세)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1차 |
474년 1월 29일 ~ 475년 1월 9일 (1년) | |
로마 황제 2차 | |
476년 8월 ~ 491년 4월 9일 (15년) | |
전임자 | 레오 2세 |
후임자 | 바실리스쿠스 (1차) 아나스타시우스 (2차) |
부모 | 아버지: 코디사 |
배우자 |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
자녀 | 레오 2세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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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57대 황제이자 레오 왕조의 제2대 황제로 재위 중 서로마가 망했기(476년)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최초의 '동로마' 황제로 기록되기도 한다. 외국인 이민족까지는 아니지만 로마 국내 일종의 소수민족의 부족장 출신으로서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세간의 인식은 게르만족 족장에 대한 인식이나 큰 차이가 없었고 그래서 반란이 잦았다. 한 번은 진짜로 쫓겨났지만 끝내 다시 복위에 성공하고 천수를 누렸다.2. 생애
정확하게는 소아시아의 이사우리아인 출신으로, 이사우리아인은 제국 영내의 로마인이지만 타우루스 산맥의 산악민족으로서 그리스•로마적인 의미에서 게르만족 등과 다를 바 없는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한 외국 전공서적에 의하면 이사우리아인은 타 종족집단에 비해 동로마 지역에서 일종의 소수민족 비슷하게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한다.[1] 또한 다른 서적에도 '덜 로마화가 되었다'(insufficiently Romanised), (종족 구분이 희미해진 일반 제국민과는 다른) '종족집단'(ethnos) 등으로 지칭되고 있다.[2] 이렇게 이미 제국민이 된 지 몇 백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수민족 비슷하게 독자정체성을 유지했던 집단으로는 아르모리카(現 브르타뉴 반도)와 그 주변 북·서부 갈리아 지역의 바가우다이(Bagaudae)가 있었다. [3]이사우리아 족장으로 본명은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데오테스'였다. 레오 1세의 딸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와 결혼한 이후, 동로마식의 이름인 '제논'으로 바꿨다. 레오 1세는 사위
475년 11월 레오 1세의 황후인 아일리아 베리나와 그 오빠인 바실리스쿠스[4]가 내란을 일으키자 제노는 이사우리아로 도피하였고, 바실리스쿠스가 일시적으로 제위에 오른다. 내란 당시 제노는 경마장에서 전차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군대가 오고있으니 당장 도망가는 게 좋을 거라는 쪽지를 받았다. 제노는 그것을 읽자마자 저항도 하지 않고 뒤도 보지 않으며 도피했다고 한다.
그렇게 제위에 오른 바실리스쿠스는 베리나의 애인을 암살하여 베리나의 지지를 잃었고, 수도에 남아있던 이사우리아 군인들을 학살하였으며, 과세 정책으로 인해 민심도 잃었다.
바실리스쿠스는 쿠데타를 도운 일루스라는 이사우리아인 장군에게 제노를 잡아 올 것을 명령한다. 일루스는 제노의 동생 플라비우스 롱기누스를 인질로 잡아 제노를 조종하려 했지만 바실리스쿠스가 이사우리아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노의 편이 되었다. 제노는 또 바실리스쿠스의 조카 하르마티우스를 구슬려서 20개월 만에 제위를 되찾는다.[5] 제위를 되찾은 후 제노는 하르마티우스를 제거한다. 또 제노는 교회로 피난처를 찾은 바실리스쿠스에게 너그럽게도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을 약속해 밖으로 유인한 다음 진짜로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대신에 그와 그의 가족들을 굶겨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 1세의 작은 딸인 레온티아의 남편, 즉 한국식으로 따지면 제노의 아랫동서이자,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외손자이고 안테미우스 서로마 황제의 아들인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명분은 아내 레온티아가 그 언니 아리아드네와 달리 아버지 레오가 이미 황제일 때(딱 그해인 457년이었다) 태어난 포르피로게니타라서[6], 작은딸 및 작은사위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본인 부부가 아리아드네-제노 부부보다 정통성이 있다는 논리였다. 제노는 결국 제압하고 제위 수성에 성공했다.[7]
477년의 지중해 세계
제노가 복위한 476년 서로마 제국은 오도아케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오도아케르는 명목상으로는 계속 제노를 주군으로 모시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바치겠다고 했으나, 서로마를 멋대로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를 싫어했던 제노는 제국 영토 내 거주하던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족이 오도아케르를 타도하면 그 영토를 동고트족에게 주겠다는 협약을 맺었다. 로마로서는 통제하기 힘들어진 고트족을 서방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고[8], 동고트족으로서는 안정된 영토를 얻을 수 있어 서로에게 득이 되는 것이었다. 테오도리쿠스를 장군으로 임명해 오도아케르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제노의 작전은 성공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반도에 동고트 왕국이 성립되었다.
네 차례의 공의회를 통해 칼케돈 교리(삼위일체론)가 정통 교리로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세계, 즉히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단성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484년 제노 황제와 아카키오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헤노티콘>이라는 문서를 통해 양측을 절충하려 하였으나 이 조치는 교황를 격노케 하였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는 아카키오스 분열 사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은 유스티누스 1세 치세에 이르러서야 봉합되었다.
제노의 황권 강화에 큰 공을 세운 일루스는 승진하여 권력을 잡게되었지만 베리나의 미움을 받았다. 베리나와 그녀의 딸이자 제노의 아내인 아리아드네는 차례대로 일루스의 암살을 시도하지만 그의 귀를 자르는 것만 성공했다. 황후의 암살 작전 뒤에 제노도 가담했으리라고 생각한 일루스는 484년 레온티우스의 반란에 참여했다. 또한 일루스는 유배지로 간 베리나로 하여금 레온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게 만들었는데 제노는 4년간의 내전 끝에 겨우 이들을 제압하고 일루스와 레온티우스는 처형당했다. 재위 중 일어난 반란만 3번이나 되었다.
한편 484년 제노의 종교 탄압정책에 반발한 사마리아인들이 유스타를 왕으로 선출하여 반기를 들었지만 진압당했다.
491년 제노는 사망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묻히고 사흘간 "부탁이야! 제발 꺼내 줘!"라는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두가 황제를 싫어했기에 내버려두었다고 한다.[9] 제노가 생전 인기가 없었던 만큼 시민들은 로마인이자 정통파 황제를 요구하였고 황후 아리아드네와 원로원은 그 후임으로 디라키온 출신의 재무관 아나스타시우스 1세를 추대했다.
[1] 'Two Romes'라는 책의 401p에 'After 400, there were hardly any enclaves of ethnic separatism in the lands that would become Byzantium, and even those (e.g., the Isaurians) did not hold out for long. Certainly there were no ethnic “Greeks” left.'라는 대목이 있다. 대강 번역하면, 400년 이후 동로마 권역에서는 자기들끼리 특구를 이뤄서 살던 소수민족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었던 이사우리아인 같은 종족들도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종족적인 "그리스인"들은 확실히 남아 있지 않았다.[2] Anthony Kaldellis의 'Romanland' 중 4p, 'The deceased emperor Zeno (474–491), whose body lay in state in the palace while this exchange was taking place, was an Isaurian from southern Asia Minor. The Isaurians are stereotypically described in Roman sources as mostly uncivilized mountain dwellers. They made good soldiers, but were perceived by many as violent, greedy, and insufficiently Romanized. Even though they were Roman citizens like everyone else in the empire, “Isaurians and Romans” could be juxtaposed as different categories, and the former could be labeled an ethnos (people, ethnic group, or nation).'[3]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 번역본 1권의 56p에는 '바가우다이 반란은 민족적인 특성을 뚜렷이 보인다. 즉 그 이름도 켈트족을 기원으로 하는 듯이 보이고, 그 성격도 로마화된 시민 문화에 대립하는 '토착적인' 시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4] 그 함대 엄청 말아먹고 돌아온 그 자가 맞는다.[5] 일단 쫓겨났다가도 다시 복위에 성공했으며, 반란자가 피가 직접 섞인 친척은 아니고 인척인 점은(조카사위-처외삼촌) 후대 콘스탄티노스 5세-아르타바스도스의 관계(처남-매부)와 유사하다.[6] 이때부터 벌써 고대 로마에는 없던 포르피로게니투스 개념이 태동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7] 영어 위키백과 Leontia Porphyrogenita 중, 'Ousted from both thrones, Marcianus and Leontia plotted a revolt against Zeno, in 479, which was based on Leontia's right of precedence over her sister as porphyrogenita; the revolt was however quelled.'[8] 격하게 싸워서 둘 다 소모되어 버리면 그게 제국에는 베스트였다.[9] 썩 신빙성이 없는 설화이긴 하지만 꽤 알음알음 퍼져있었던 모양인지, 훗날 이라클리오스 황제 역시 자신이 생매장당할까봐 죽고난 후 사흘간 관을 열어놓게끔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