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52대 황제 호노리우스 HONORI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Flavius Honorius) |
출생 | 384년 9월 9일 |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사망 | 423년 8월 15일 (향년 38세) |
로마 제국 라벤나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93년 1월 23일 ~ 423년 8월 15일 (30년) | |
전임자 | 테오도시우스 1세 |
후임자 | 요안네스 |
부모 | 아버지 : 테오도시우스 1세 어머니 :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
배우자 | 마리아, 테르만티아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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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52대 황제.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에 서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였다.2. 생애
2.1. 공동 즉위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아일리아 플라킬리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공동황제가 되었다가 395년 아버지가 붕어하자 단독 황제가 되었고, 그의 형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2.2. 혼란한 재위 기간
그의 통치 기간은 게르만족에게 당하는 침략의 연속이었다. 즉위 직후부터 시작된 반달족, 알란족, 고트족 및 수에비족의 연속된 침략으로 서로마 제국의 국방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409년에는 멀리 브리타니아에서 SOS 요청을 보내는데도 군대가 없어서 도저히 보낼 수가 없으니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통보까지 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이후 브리타니아 주둔군은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누스 3세를 황제로 옹립한 다음 갈리아 지역으로 '철수'해 버렸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3세에 의해 콘스탄티누스 3세의 세력은 격파되었고[1] 이와 같은 수훈으로 콘스탄티우스 3세는 나중에 호노리우스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며, 1년도 안 되어서 병사했지만 어쨌든 공동황제까지 올라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로마 제국은 실질적으로 브리타니아 속주를 상실했다.[2][3]2.3. 통치
이런 막장 상황에서 그가 한 일은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환관들에게 휘둘렸다고는 하지만 커서도 개념이 없긴 마찬가지라 즉위 초기부터 자길 지켜주었던 장인이자 매형[4]인 스틸리코 장군을 408년에 처형하고, 408년부터 410년까지 서고트의 대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는데도 자존심때문에 뻗대다가 결국 410년 로마가 관광당하는 꼴을 맞이해야 했다. 물론 자기는 그동안 황궁이 있었던 라벤나에 숨어있었는데, 여차하면 아드리아 해를 통해 동로마로 도망치려고 했다. 역시 그 형에 그 동생.이후 알라리크가 병으로 어이없이 죽고 나서 로마 시 재건에 다소나마 힘을 쓰기도 했지만 여전히 통치에 관심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활약했던 휘하 장수였던 콘스탄티우스 3세에게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5]를 시집보내는 한편 공동 황제 자리까지 줘서 그에게 통치와 전쟁을 떠넘겼다. 이후 콘스탄티우스 3세가 급사하자[6] 갈라 플라키디아와 그 자식들을 해치려 들었고, 이에 경악한 갈라 플라키디아는 삼촌을 쏙 빼닯은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를 데리고 동로마로 도망쳤다.그 뒤 2년도 지나지 않아 이 집안의 유전병 비슷[7]한 감이 있는 부종으로 붕어했다. 향년 만 38세의 나이였다.
3. 이교(Paganism) 금지 정책
일을 뭔가 했다면, 아버지의 기독교 국교화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415년에는 '이교' 사원을 용도 변경하는 것 및 이교의 희생 제사에 바쳐진 적이 있었던 모든 물건은 공적인 공간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했다. 한 해 뒤인 416년에는, 조카인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와 공동으로 제국 전체에서 '이교도'들의 공무담임권을 박탈했다. 423년에는 기존의 '이교' 억제법들을 재강조했고, 또한 '이교' 의식을 거행한 죄로 체포됐던 사람들의 모든 재산을 압수하는 조치를 취했다.4. 취미
<닭 치는 호노리우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83년 |
취미가 닭을 기르는 것이었다고 한다.[8][9] 그중 가장 사랑하는 닭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알라리크가 로마 성문을 뚫고 들어오자 전령이 로마가 끝났다고 전했다. 이에 호노리우스는 슬피 울며
"우리 닭 로마가 죽다니"
라고 오열했다. 전령이 그게 아니라 도시 로마가 함락당했다고 설명하자, 호노리우스는 안색이 바뀌며 "나는 우리 닭 로마가 죽었다는 얘기인줄 알았다"
라며 안도했다는 참으로 황당한 일화가 전해진다. 여담으로 호노리우스는 당시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인 라벤나에 있었다."참으로 닭스러운 황제였다."
라고 래리 고닉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세계사》라는 책에서 서술했다. 그리고 이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 여기서는 형 아르카디우스한테 대들다가 입닥치라는 형의 일갈에 충격을 먹어 진짜 닭을 치는 장면으로 나온다.[10]5. 호노리우스를 위한 변명
호노리우스가 통치자의 자질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능한 인간이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호노리우스도 억울한 점은 있었다. 좋은 알맹이는 형 아르카디우스가 쏙 빼가고, 자신에게는 폐허나 다름없는 서로마를 남겨주었으니 이는 호노리우스가 아니라 테오도시우스 1세라도 별 수 없었다. 물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고, 원래는호노리우스 시대 서로마의 상황이 얼마나 안 좋았냐면, 3세기의 위기가 끝나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피땀 흘려 재건한 로마군이 동서 통틀어 군단병만 최대 28만에 최대 60만이라는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호노리우스 시대의 서로마로 오면 스틸리코가 3만 가지고 지지고 볶고 하는 수준까지 추락해버린다. 아무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먼치킨이어도 재위기간 20년 동안 수십만을 아예 만들어낼 수야 없던 걸 생각하면, 호노리우스가 물려받은 서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려받은 3세기의 위기 직후의 로마보다도 몇 배는 상태가 안 좋았던 셈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당연히 잦은 내전과 외세와의 전쟁에서의 실패인데, 일단 콘스탄티우스 2세가 율리아누스를 지나칠 정도로 자극하다가 아주 시원하게 발리다 죽었고,[11] 율리아누스도 대 페르시아 원정 와중에 전사해버리면서 정예병 몇만도 같이 날려먹었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 시대엔 브리타니아와 아프리카에서 연속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심지어 그라티아누스는 쓸데없이 강경한 종교정책으로 당시 서로마의 '본토'라고 할 수 있던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큰 피해를 입히는 3차례의 내전을 자초한다. 마지막으로 별다른 명분도 없이 서방 황제를 공격해서 죽여버리고 그가 지니고 있던 병력까지 날려먹은 아버지 테오도시우스까지, 호노리우스가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사람만 여기까지 무려 최소 6명이다! 애초에 호노리우스가 이 자리에 앉게 된 것도 자기 의지도 아니고 무려 9살(...)에 아버지가 서방 대립황제 자리를 떠맡겼기 때문인데,[12] 사고는 선대들이 다 쳐놓고 자기보고 수습하라니 사실 호노리우스도 꽤 황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즉위 초부터 동로마와 서로마가 서로 으르렁대느라 국력을 모을 틈도 없었다. 게르만족 출신의 무장들 간의 대립으로만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로마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방 교회간의 주도권 다툼, 로마 원로원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간의 권위 다툼 등, 그야말로 서로마와 동로마를 양분하던 지배 세력간의 총체적인 다툼이 서로마 지역의 제위 참칭을 2차례나 제압했으며 기독교의 권위를 크게 세우는 등 많은 일을 했고, 권위가 높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과 함께 일시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로마인 이야기》 14권에서 무슨 악의 축처럼 묘사되었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자마자 대제가 스틸리코에게 호노리우스 뿐만 아니라 아르카디우스까지 맡겼다는 주장을 펼쳤으며[13] 로마 원로원의 실세로 역시 《로마인 이야기》 14권에서 암브로시우스의 라이벌마냥 묘사되었던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도 스틸리코를 신나게 애널서킹하며 그를 지원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분열 현상이었던 것이다. 황제들의 권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호노리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14]
너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데다가 이미 몇 차례에 걸친 내전과 외침 등을 거치면서 서로마 일대의 경제는 상업, 제조업, 교역 등이 막장이 되었고, 서기 4세기 이후부터 서로마 제국 영내의 도시들은 호노리우스 즉위 이전부터 아주 빠른 속도로 쇠락하는 중이었다. 다행인 건 이탈리아 반도 내 도시들의 경우, 410년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이라는 대충격에, 생각만큼 심각한 파괴와 경제적 쇠퇴를 덜 겪었다는 사실인데,
더욱이 호노리우스가 맡게 된 서로마 제국은 서기 2세기 후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심각한 지리적인 단점을 노출한 동네였다. 이는 4~5세기 내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든 게르만족들의 침공을 이후 서로마의 역대 황제들도 제대로 손쓰기 어려운 이유였는데, 서로마 제국의 서방 방어선은 무려 2,400km나 되었다. 다행인건 형 아르카디우스의 치세때 골치를 안긴 일리리쿰의 320km 방어선이 동로마 제국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인데, 그럼에도 다뉴브 강 하류 외의 모든 서방 방어선은 온전히 서로마 제국 몫이었다. 그런데 서로마 군대는 와해되고, 게르만족은 계속 내려와서 신나게 관광을 태우는 판이었으며 제대로 된 관료층도, 군대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로마는 라인 강~다뉴브 강 외에도 브리타니아 섬에서는 칼레도니아인들의 침공을 받았고, 해상에선 앵글로색슨족의 연이은 침공에 더해[16] 북아프리카 서부까지 무어족 등 각종 사막 유목민들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말도 안 되는 방어막을 이유로, 군대를 돌려 서로마 안에서 가장 부유한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는 외적들까지 이벤트처럼 침공한 터라 호노리우스의 골치를 썩였다. 이는 호노리우스가 과거 티베리우스, 트라야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혹은 가까운 선대의 두 대제 못지 않은 군사적 재능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서로마 제국의 현실은 동로마 제국과 결정적인 차이였다. 형이 맡게 된 동로마 제국은 상황이 가장 안 좋을 시기에도 대규모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능한 관료 집단이 존재했다. 경제 역시 사산 왕조 페르시아 및 그 너머 동방과의 교역으로 여전히 돈줄이 마르지 않았고, 지중해 동부 해안 도시들은 식료품, 원자재 등의 교역까지 여전히 활발했다. 심지어 도시 경제와 생활 역시 서로마와 달리 악화되지 않았고,[17] 문화 수준 등도 서로마보다 훨씬 나았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무능한 아르카디우스가 통치했던 동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버텨낸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그 이후로도 이슬람, 슬라브족, 불가르족, 페체네그족 등의 침입도 버티고, 마케도니아 왕조의 중흥을 이루어내게 되며 중세가 끝날 때까지 버티게 된다.
아르카디우스도 무능한 건 매한가지라, 훈족이 쳐들어오고 동고트족이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그저 하는 일은 질질 짜면서 마누라 치마에 매달리는 것 밖에 없었다고 대차게 까였다. 그가 호노리우스처럼 욕을 먹지 않는 건 빨리 죽은 점, 그리고 동로마는 서로마와 같은 굴욕을 당하지 않을 만큼 국력이 강했던 점, 그래서 1,000년을 넘게 갔고 그런 1,000년 제국의 시조격이라서 본인 자체의 치세야 어찌 됐건 일정 정도의 위상을 인정받았던 점[18] 덕택일 뿐이다.
최근에는 《Honorius: The Fight for the Roman West AD 395-423》라는 책이 해외 유명 출판사인 Routledge에서 나왔는데, 이 책의 저자는 책 서문(Acknowledgements)에서부터
"It had struck me that Honorius was truly the great survivor of his day. How was this possible if he was, as so many have claimed, such a terrible ruler?"
("호노리우스가 자신의 시대에 진정 대단한 생존자였다는 점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그가 그렇게 끔찍한 통치자였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라고 하며 호노리우스의 재평가를 주장했다.("호노리우스가 자신의 시대에 진정 대단한 생존자였다는 점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그가 그렇게 끔찍한 통치자였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다만 이런 재평가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도 408년 호노리우스의 스틸리코 억지 처형으로 이탈리아 반도로 소집된 모든 군단이 배신해 로마 함락이라는 대사건을 일으킨 건 실드의 여지가 없다고 혹평하고 있다.
6. 대중 매체에서
<토탈 워: 아틸라>에서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장한다. <토탈 워 시리즈> 특성상 국왕의 트레잇은 중요한데, 주어진 트레잇이라는 게 가히 핵폐기물에 가깝다. 트레잇은 "무자비함"과 "우유부단한 공격자"인데, 턴 당 영향력 -1, 공격 시 군대의 사기 -3이란 효과를 가진다. 게다가 나이도 17세라 자연사하려면 수십년을 기다려야 한다. 때문에 유저들은 바로 호노리우스를 암살하든, 자살시키든 해서 황제를 유능한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로 바꿔준다. 굳이 호노리우스를 굴리고 싶다면 그나마 영향력 추가 획득 수행원을 붙여주고, 총독으로 부임시켜서 써먹는 게 방법인데, 이 경우엔 총독직을 오래 하면 "친절함"이란 트레잇이 붙는다. 전 지역의 공공질서를 +1 해주는 좋은 트레잇 같지만 이게 더 총독을 오래할수록 업그레이드되면서 "나약함"이라는 트레잇이 되고, 이때 전 속주 부패도 10%가 늘어나서 수입이 줄어든다. 게다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안정화돼서 턴골이 2만 원쯤 되어가면 이 즈음에 "인색함" 트레잇이 붙는데, 초기에는 페널티 없이 모든 건물에서 얻는 부를 %로 늘려주지만, 이것도 나중에 "수전노" 트레잇으로 바뀌고 이러면 부패도 전 지역 +10% 트레잇이 붙는다. 그래서 부패도가 무려 20%나 증가한다.<문명 5>의 시나리오 '로마의 몰락'에서 서로마의 지도자로 나온다. 다행히 <토탈 워: 아틸라>와는 달리 종특에 페널티는 없다. 적 유닛을 처치하면 체력이 50%인 상태로 편입되는데, 적자로 유닛이 해체되고, 불행 페널티가 있으니, 병력 보충에는 도움이 된다. 야만인 고유유닛은 사기적인 고유 승급도 달고 나오니 나쁘지 않다. 그래도 난이도는 최상이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의 알라리크 캠페인에서 등장한다. 직접적으로 알라리크와 고트족을 상대한 스틸리코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호노리우스가 악역으로 자리잡았다. 정착지를 원하는 알라리크에게 계속 통수를 때리지만 역사대로 마지막 시나리오에서는 로마가 고트족에게 관광당한다. 사실 호노리우스가 한 일들을 보면 좋게 묘사될 수 없는 게 맞다. 당장 스틸리코를 죽인 것부터가.
대체역사물 《로마 디펜스》에선 주인공의 등장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나름 버프를 받았다. 그 버프란게 주인공이 친위대장으로 부임한 뒤 알라리크가 그리스에서 깽판을 벌이자 주인공에게 들은 표트르 1세의 이야기에 빠진지라 친정을 선포하며 친위대를 이끌고 스틸리코를 지원온다. 그 뒤 스틸리코와 주인공에게 패배한 야만족 부대들을 붙잡는데 성공한데다가[19] 그 뒤 일어난 가이누스의 반란에서도 뭘 몰라서(...) 벌벌 떨고만 있던 형 아르카디우스와 달리 평정심을 유지했고, 반란 진압 뒤에는 포로로 잡힌 군단병들에게 꿀밤 한 대씩 먹이며 잘못은 루키우스가 했고, 너희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며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기에 동방에서 평가가 떡상한다. 물론 반란 때문에 충격에 빠진 형이 칩거해 버린 탓에 업무 지옥에 시달렸지만...[20] 이후로도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지원하는 등 원역사와 비교도 안되는 나름 개념찬 행보를 보이고 있어 이 세계관에서는 원역사보단 평가가 좋아질 듯 하다. 동방에서 돌아와서는 이전에 마리우스가 지나가듯이 한 말에 넘어가 연금술에 심취해있다. 녹 제거제인 옥실산을 발견하는 등 나름 성과를 거두지만 말도 안되는 일에 빠져있다고 스틸리코는 탐탁지 않아하고 있다. 그 와중에 제철소를 설립해 게르마니아를 노리쿰급의 강철 생산지로 만들어버리고 게르마니아에 오래 머물며 게르마니아에 대한 관심을 보인 덕에 황제에 대한 게르마니아 시민들의 평도 좋은 편이다. 문제는 주인공의 딸을 임신시키는 바람에 화가 난 마리우스가 "죽여버리겠다"라고 편지를 써보내자 살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호노리우스의 5중 성벽을 만든다. 그마저도 원래는 10중 성벽을 만들려 했는데 반으로 줄인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3중인걸 감안하면 제대로 정신줄을 놓은 듯 하다.
[1]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사례와 유사하다.[2] 참고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브리타니아 지역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은 없었다.[3] 그러나 현지에 잔류한 로마군과 켈트계 브리튼인 출신의 로마인들이 끈질기게 저항하여, 앵글로색슨의 정복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으며 웨일스와 콘월, 스코틀랜드, 브르타뉴로 이들 중 상당수가 빠져나갔다. 흔히 알려진 아서왕 전설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였다.[4] 테오도시우스 1세의 형인 대(大) 호노리우스는 두 딸만 남겨놓고 일찍 죽었는데,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 중 동생이던 세레나를 양녀로 맞이해서 당시 게르만족 출신 무장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뢰할 만했다는 스틸리코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스틸리코는 세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을 차례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이었던 호노리우스에게 시집보냈다.[5] 알라리크의 처남이었던 아타울프와 결혼해서 자식을 두기도 했지만 둘 다 죽었다.[6] 동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급사했기 때문에 독살설도 있다.[7] 테오도시우스 1세도 부종으로 붕어했다.[8] 제정 말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눈 속의 독수리》에도 나온다[9] 의외로 관상용 닭 사육은 상당히 유서가 깊은 취미 중 하나이다. 수십 가지의 독특한 품종들이 있고, 한국 원산의 예쁜 품종도 꽤 있다. 나름 비단잉어 사육처럼 고상한 취미로 봐줄만도 한데 황제라는 인간이 송휘종마냥 이것에만 심취했으니 문제였다.[10] 물론 작중에서는 언급은 하면서도 호노리우스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이 지어낸 심하게 과장된 루머일 거라고 덧붙였다. 호노리우스의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누가 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막을 수 있겠어? 저들이 결국 로마를 멸망시키고 말 거야!"라고 억울한 듯 항변하는 대사와 함께.[11] 단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했기에 이 때는 주로 동로마가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12] 만약 테오도시우스 1세가 좀만 유연하게 마그누스 막시무스 때 자기가 했던 일처리를 참고해서 호노리우스를 서방 부제로 삼는 대신 에우게니우스를 승인해주는 식으로 협상을 했으면 호노리우스 입장에선 훨씬 나았을 것이다. 에우게니우스가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아 통치 능력이 기록에 남은 건 없으나 원로원과 아르보가스트가 공동으로 황제로 합의할 정도로 교양도 인맥도 충분한 인재였던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자식 교육은 최악 중 최악인 아버지보다 옆에서 보고 배우기에도 좋은 스승이었을 수도 있다.[13] 역사가 조시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 1세는 게르만족의 침공에 맞서 계속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서로마 일대를 다스리게된 호노리우스만을 무장인 스틸리코에게 맡겼을 뿐,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던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는 신뢰하던 재상이었던 루피누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르카디우스는 이때 17세로 거의 성년에 근접한 나이였기 때문에 스틸리코가 섭정을 수행할 이유는 희박했다. 다만 조시무스는 엄청난 스틸리코 안티였기 때문에 가감해서 들을 필요는 있다.[14] 호노리우스는 로마 원로원의 자발적인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내전에서 승리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군사력으로 원로원을 겁박해서 승인한 것이다. 원로원도 딱히 대안이라 할 사람도 없고 국력도 바닥까지 떨어진 마당에 새로 내전 하기도 찝찝해서 호노리우스에게 그나마 대놓고 반기를 들었단 기록이 없는 것이지, 원로원이 호노리우스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가지고 힘을 합쳤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15] 심지어 북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계 지방 호족으로서 반란을 일으켰던 길도(Gildo)는 아프리카를 서로마에서 떼내 동로마에게 바친다는 소리까지 했다.[16] 도버 해협을 포함한 영국 해협 관리를 위해 해협의 브리타니아쪽 해안을 작센 해안(Litus Saxonicum; Saxon Shore)으로 지정했고, 작센 해안 담당 백작/지휘관(Comes Littoris Saxonici per Britanniam; Count of the Saxon Shore)이라는 자리를 신설했을 정도였다.[17] 이게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은 7세기 중반의 이슬람 정복 이후였다.[18] 아르카디우스의 이름을 딴 아르카디오폴리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있었고, 트라키아의 중심지(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 수원 정도의 포지션)였다. 아르카디우스에 대한 평가가 심하게 나빴다면 이런 요지에 이름을 붙여줄 리가 없다.[19] 이때 상황이 야만족 패잔병과 추격하던 마리우스의 로마군이 엇갈린데다가 호노리우스 주위에는 숫적으로 열세인 친위대 뿐인지라 자칫 호노리우스가 포로로 잡힐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랬던 상황이 호노리우스의 단순함에서 비롯된 패기+사기가 박살나있던데다가 라틴어 구사자도 없었던 야만족이라는 기막힌 콜라보가 이루어져 수만 명의 야만족이 호노리우스 앞에 일제히 무릎꿇는 대사건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20] 물론 본인 직급이 황제인만큼 밑의 관료진에게 짬처리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