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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45대 황제 콘스탄스 CONSTAN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스 (Flavius Iulius Constans) |
출생 | 322/323년 |
로마 제국 | |
사망 | 350년 1월 (향년 27세) |
로마 제국 갈리아 비쿠스 엘레나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37년 9월 9일 ~ 350년 1월 (13년) | |
전임자 | 콘스탄티누스 1세 |
후임자 | 마그넨티우스 베트라니오 |
부모 | 아버지 : 콘스탄티누스 1세 어머니 :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
형제자매 |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헬레나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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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45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막내 아들로,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두 형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와 함께 제국을 삼분할했다.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를 격파한 뒤 그의 영역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서방 전체를 관할했다. 이후 게르만족의 침략을 연이어 격퇴하는 등 군사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백성들을 수탈하고 부하들을 억압하는 등 내치에서 문제를 드러냈고, 결국 350년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으로 피살되었다.2. 생애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에우트로피우스와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그는 30살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320년경에 출생했을 것이다. 반면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그가 27세에 사망했다고 기술했다. 이에 따르면 323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좀더 가까운 시기에 활동했던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콘스탄스의 아버지는 사두정의 내전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통합한 뒤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등 각종 개혁을 단행한 콘스탄티누스 1세이고, 어머니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아버지의 궁정에서 라틴어 교사 아이밀리우스 마그누스 아르보리우스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다.
333년 12월 25일, 그는 아버지에 의해 카이사르로 선포되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그가 카이사르로 선포된 날 밤에 "온 하늘이 빛으로 오랫동안 불타올랐다"고 하며, 이로 인해 세간에서 그의 통치가 나쁠 거라는 징조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335년 재위 30주년 기념 행사 때, 콘스탄티누스 1세는 후계 계획을 대중 앞에서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속주를 담당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를 담당하며,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담당한다. 여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 조카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는 각각 트라키아와 폰토스의 왕으로 선임되었고,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 본인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군림하면서 아들들을 감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335년 여름 이탈리아에 보내진 콘스탄스는 로마에서 통치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336년경 근위대장 플라비우스 아블라비우스의 딸인 올림피아스와 약혼했다. 그러던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붕어했다. 이에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등 콘스탄티누스의 친족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몰렸다가 그해 여름에 대거 피살당했다.(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이때 근위대장 아블라비우스도 반역 혐의로 비티니아의 자기 영지에서 살해되었다. 그 후 콘스탄스는 337년 9월 9일 시르미움에서 두 형제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었고, 올림피아스와 이혼했다.[1]
세 형제는 제국을 정식으로 삼분할했지만, 곧 여러 방면에서 마찰을 벌였다. 이에 338년 8월 3일에 모에시아 속주의 수도인 비미나시움에서 다시 모였다. 추방된 주교들이 자기 교구로 돌아가게 하는 사안은 쉽게 정해졌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할권과 달마티우스에게 속했던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의 관할권이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지 여부는 쉽사리 결정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분쟁 지역을 막내인 콘스탄스에게 넘김으로써, 제국을 공평하게 3개로 분할해 평화를 확실히 보장하기로 결의했다.
338년 가을, 콘스탄스는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사르마티아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사르마티쿠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받았다. 339년 4월 6일에는 판노니아의 도시인 사바리아를 방문해 통치력을 행사했다. 고대 사료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2세는 합의가 맺어진 뒤에도 당시 15~18세였던 콘스탄스의 양육권을 행사하려 했다고 한다. 그는 막내 동생의 영역에 법령을 반포하고 고위 관리를 임명했다. 콘스탄스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트라키아를 넘기고 동맹을 맺으려 했다.
콘스탄스가 이렇듯 통치를 독자적으로 행사하면서 자신의 뜻에 순순히 따라주지 않자, 콘스탄티누스 2세는 힘으로 영역을 확장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스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2세는 영토 재분배를 요구했으나 콘스탄스에게 거절당하자 전쟁을 단행했다고 한다.
340년 초,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그는 동생이 이 당시 발칸 반도의 니사에 머물고 있어서 이탈리아에서 당장 방어할 수 없을 테고, 그의 형제의 영역에 근무하는 군대와 관리들은 선임 황제인 자신에게 넘어갈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동생이 일리리아에서 급히 파견한 군대와의 첫번째 교전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는 전사했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전투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다가 죽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그가 "위험을 경멸하면서 부주의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기술했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콘스탄스가 파견한 군대의 사령관은 거짓으로 패퇴하면서 매복한 지점으로 적을 유인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의심하지 않고 추격하다가 매복에 걸렸고, 병사들이 궤멸될 때 자신 역시 낙마하여 많은 상처를 입고 죽었다고 한다.
콘스탄스는 형의 유해를 알사 강에 던지게 한 뒤 형이 가지고 있던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를 모조리 자기 것으로 삼은 후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칭호에 'Maximus Victor ac Triumphator(가장 위대한 승리자이자 정복자)'라는 문구를 덧붙였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로 양분되었지만, 콘스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보다 훨씬 많은 영역을 가졌다. 특히 일리리쿰,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까지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341년과 342년에 프랑크족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했으며, 343년 1월 25일 보노니아에서 영불해협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해군을 증강하고 이를 담당할 군사 지도자를 선임했다. 여기에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피트족 및 스코트 족을 격파하고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수리했다. 또한 정찰에 참여하고 지역 사령관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하는 새로운 특수 부대를 창설했다. 또한 로마에 있는 아그리파의 목욕탕이 그의 치세에 복원되었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한 삼위일체론을 신봉했고, 337년경에 세례를 받은 유일한 현직 황제였다. 반면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고, 아리우스파에 적대적인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오를 추방했으며, 343년 세르디카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오의 무죄가 선고되었음에도 추방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 콘스탄스는 345년 대군을 이끌고 국경지대에 진군해 "아타나시오를 더 이상 핍박하지 말라.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전쟁을 불사하겠다"라고 협박했다. 마침 사산 왕조군이 동방 전선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기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생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아타나시오를 알렉산드리아로 복귀시켰다. 이후 두 사람은 화해를 도모하고자 346년에 공동으로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렇듯 군사적으로는 유능한 면모를 보였지만, 내치에서 연이은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341년 이교도들이 희생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공표했고,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이들을 대거 처형했다. 게다가 신하들로부터 최대한의 돈을 짜내려 했으며, 최고 입찰자에게 관직을 매매하는 사업에 깊이 관여했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그렇게 뜯어낸 돈을 가지고 사치를 심하게 부리고 사냥에 몰두하느라 정무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그는 "잘생긴 야만인 인질들"과 동성애를 서슴지 않아 군인들의 경멸을 샀다고 한다.
결국 350년 1월 19일 밤 아우구스토두눔에서 열린 연회에서, 헤르쿨리아와 요비아 근위대 지휘관 마그넨티우스가 황제만이 입는 자주색 토가를 착용하여 황제로 선포되었다. 당시 사냥을 떠나서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던 콘스탄스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피레네 산맥의 헬레나라는 작은 마을로 도망쳤지만, 350년 2월 말 마그넨티우스가 보낸 암살단이 들이닥치자 교회에 숨으려 했지만 붙잡힌 뒤 끌려나온 후 칼에 찔러 죽었다. 마그넨티우스는 빠른 시일에 콘스탄스의 통치 영역이었던 이탈리아, 갈리아, 아프리카, 히스파니아를 장악하고 황제를 칭했고, 콘스탄스가 관직에 앉혀놓은 귀족들 중 일부를 처단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이에 불복해 동생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방으로 진군하면서, 로마 제국은 내전에 휘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