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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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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77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
Κωνσταντῖνος Ε΄
파일:Solidus_of_Constantine_V_(transparent_background).pn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콘스탄티노스 5세 코프로니무스
(Κωνσταντῖνος Ε΄)
출생 718년 7월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775년 9월 14일 (향년 57세)
동로마 제국
재위 기간 로마 황제
741년 6월 18일 ~ 775년 9월 14일 (34년)
전임자 레온 3세
후임자 레온 4세
부모 아버지 : 레온 3세
어머니 : 마리아
배우자 하자르의 이리니, 마리아, 에우도키아
자녀 레온 4세, 니키포로스
흐리스토포로스, 니키타스, 에우도키모스
안티모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안투사
종교 기독교
1. 개요2. 치세
2.1. 즉위, 찬탈, 복위2.2. 내정2.3. 영토 : 일희일비
2.3.1. 동방에서의 승리2.3.2. 라벤나 상실 (751년)
2.4. 강력한 성상 파괴주의2.5. 불가리아 원정
3.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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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77대 황제. 엄격한 성상파괴주의를 고수한 탓에 동시대의 교회 사가로부터 많은 비방을 당했으나, 현대 역사가들로부터는 가장 중요한 동로마 황제 중 하나이자 걸출한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히샴과 대결하던 중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르타바스도스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였지만 아나톨리아 테마의 도움으로 복위에 성공하였다. 그는 이후 성상파괴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후 3차 무슬림 내전(피트나) 및 압바스 혁명을 틈타 동방의 이슬람 영토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에 치중하는 동안 이탈리아의 거점인 라벤나랑고바르드 왕국에게 뺏기고 말았다. (751년) 다만 불가리아와의 전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트라키아를 보전해내었다. 그는 비록 성상 파괴를 강화했지만 30여년의 기나긴 통치기간 동안 국경을 안정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황제의 별칭은 코프로니모스로, 직역하면 똥덩어리(...), 의역하면 똥싸개(...)라는 뜻이다. 이는 그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 세례대에 똥을 지려버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1]

2. 치세

2.1. 즉위, 찬탈, 복위

718년 7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한창이던 때 레온 3세마리아 황후 사이에서 출생했다. 720년 부황과 공동 황제가 되었으며, 741년에 레온 3세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계승하여 즉위했다. 이는 685년 콘스탄티노스 4세에서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의 왕조 내 세습 이후 거의 60년만에 이루어진 세습이다.(둘 다 부자세습) 하지만 세습은 절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즉위하자마자 아르메니콘 테마의 사령관이자 본인의 매부였던 아르타바스도스에게 당시 3차 피트나로 어지럽던 우마이야를 공격하여 고토를 수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국경을 향하던 그는 수도로 회군하여 황위를 찬탈하였다. 콘스탄티노스는 부친 레오 3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론자였으나 아르타바스도스는 성상 옹호론자였다. 아르타바스토스는 방패 위에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와 함께 올라 그로부터 대관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성상 파괴 진영은 아나톨리콘 테마와 트라케시안 테마로 구성되었고 아르타바스도스의 성상 옹호 진영은 아르테미콘 테마와 옵시키온 테마가 중심이었다. 743년 11월, 두 세력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에서 맞부딪쳤고, 콘스탄티노스 군이 이겼다. 바로 끝난 것은 아니었고 아르타바스도스가 우마이야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던 등 다소의 전개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스가 승리하여 복위하게 되었다.[2] 아르타바스도스와 두 아들 니키타스, 니키포로스는 원형경기장에서 공개적으로 실명되었고, 그에게 대관을 해주었던 아나스타시오스 총대주교는 곤장을 맞은 후 벌거벗은 채로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경기장을 한바퀴 도는 수모를 받았다. 종전 서술에는 실명형을 당하지는 않았다고 되어 있었고, 영어 위키백과에는 채찍질 및 실명형을 당했다고(whipped and blinded) 되어 있는데, 754년까지 11년간 더 살았던 것으로 보아 전자 쪽이 더 타당하다고 보인다.[3] 총대주교 직첩도 잠깐 회수되었다가 아르타바스도스 시절에 성상 옹호론으로 돌아섰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자 콘스탄티노스는 그를 용서해주고 총대주교에 바로 복직시켰는데, 이는 총대주교의 힘을 누르고 황권을 드높이려는 콘스탄티노스 5세의 속셈이었다.

2.2. 내정

과학진흥에 힘을 기울여 궁정 천문학자를 신설했다고 한다. 766년에 가뭄이 들자, 그간에는 기능을 좀 잘 못해도 그럭저럭 굴러갔던 상수도 체계를 시급하게 개보수해야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 망가져서 기능이 떨어졌던 이후로 방치되었던 수도교를 개보수하는 큰 공사를 벌였다. 이 공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지, 저 멀리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쓰인 '나폴리 교회사'(Gesta Episcoporum Neapolitanorum)에는 이 공사가 망가진 수도관 안에 살면서 독을 뿜어내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을 죽여왔던 용을 퇴치한 것에 비유되어 있다.[4] 여러 각주에 나온 유튜브 출처 제목의 'Dragon-slayer'가 이 의미다. 이 외에도 'The Legend of Constantine V as Dragon-Slayer'라는 학술 논문 또한 존재한다. 출처는 'Eastern Roman History' 유튜브의 Constantine V: The Dung-named Dragon-slayer이다.

2.3. 영토 : 일희일비

2.3.1. 동방에서의 승리

콘스탄티노스의 재위기간은 동방의 아랍-이슬람 세계가 3차 피트나 및 우마이야-압바스 왕조교체로 혼란했던 시간이었다. 동로마 군대는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게르마니키아(現 터키 마라쉬; Marash)를 점령하였다.(746년) 그리고 트라키아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도시를 방어하게 했다. 사실 7세기 동방 영토 상실 이전의 게르마니키아가 그렇게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주민을 이주시킬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아버지 레온 3세의 출생지가 게르마니키아였던 것이 크게 작용한다. 영어 위키백과 Marash에 의하면 645년에 동로마가 이슬람에게 뺏겼다고 하고, 레온 3세는 685년생이므로 적국의 영토에서 태어난 것이다.[5] 하지만 이 외의 도시들은 오히려 접수하고서 고의적으로 파괴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으로 공세 및 안정화 작업이 지지부진하여 결국 다시 뺏겼다. 황제부터가 인구밀도가 높은 콘스탄티노플 시내를 피해서 니코메디아로 피난을 갔었을 정도이니 원정과 국책사업이 제대로 굴러갔을 리가 없다. 745년 ~ 747년간 제국 내에 유행한 흑사병은 인구의 1/3을 앗아가며 541년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래로 제국의 가장 많은 인구 손실을 유발하였다.[6] 한편, 콘스탄티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 부족을 그리스 본토 및 에게 해의 여러 섬의 인구를 이주시켜 채웠다고 한다.[7] 저 때의 콘스탄티노플의 인구수는 2.5~5만명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다만 아나톨리아의 인구 부족은 달리 대처할 수 없었다. 747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진한 아랍 함대를 그리스의 불로 격파하였고 아르메니아, 더 나아가 (무려 백년만에) 메소포타미아까지 공격하는 위엄을 보였다. 하지만 영토는 결국 아랍 세계가 혼란상에 빠졌다고 한들 근본적인 국력차가 있어서 새 압바스 왕조가 안정되자 대부분 다시 뺏겼고, 그 사이에 현지 인구를 동로마 내지로 옮긴 것이(특히 유럽으로) 군사활동의 주 성과였다고 한다. 접수했던 여러 도시들을 일부러 파괴했던 것도, 어차피 국력차 때문에 오래 유지하지 못할 땅인데, 인구만 빼가고 도시는 파괴함으로써 아랍 측이 다시 탈환해도 동로마에 대한 유격 거점으로 쓰기 어렵게 하거나, 쓰더라도 도시 재건에 다소 시간이 걸리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8]

2.3.2. 라벤나 상실 (751년)

동방에서의 활약과는 달리, 서방에서는 제국의 위세가 약화되었다. 라벤나 시민들은 성상 파괴주의를 밀어붙이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고, 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이스툴프가 라벤나를 점령하고 에우티키오스 총독을 죽였다. 이로서 제국의 북이탈리아 거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라벤나 뿐만 아니라 안코나, 리미니 등 펜타폴리스 일대, 페루자도 랑고바르드 왕국에 빼앗겼다. 다만 755-6년에 걸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축출했고, 피핀 3세는 로마 교황에게 이 영토를 헌납함으로서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피핀의 기증)

손을 놓고만 있던 건 아니라서 랑고바르드 및 교황은 물론 프랑크 왕국과도 교섭해보았지만[9]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군사적 개입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10] 즉 이탈리아 전선은 소아시아 전선 및 발칸 전선에 비해서 우선순위가 밀리기 때문에 - 콘스탄티노플 은 발칸반도의 동쪽 끝에 있고 좁은 해협만 건너면 소아시아이다 - 흑사병으로 타격 받은 상황에서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포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2.4. 강력한 성상 파괴주의

754년 2월 10일, 황제는 칼케돈 동남쪽의 도시인 히에리아(Hieria)에서 시노드를 열었다. 콘스탄티노플 세계총대주교가 마침 죽고 새 세계총대주교를 뽑기 이전의 공석 상태라서 20년간의 혼란 당시의 황제였던 티베리오스 3세의 아들이자 에페소스의 주교였던 테오도시오스가 사회를 맡았고, 몇달에 걸친 회의 끝에 그해 8월 29일에 결론이 공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은 명확히 규정할 수 없으므로 유한한 공간의 형상(이콘)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성상은 우상숭배로 간주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황제는 '새로운 콘스탄티누스(대제), 12사도와 동급이신 분, 우상숭배를 타파하신 분'으로 칭송받았다.[11]

레온 3세 때에 성상파괴운동이 시작되며 성상과 성유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던 수도원은 탄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5세 시기에 그 강도는 이전과 바교할 수 없을만큼 강해졌는데, 바로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 직접적인 억압이 미친 것이다. 그에 강력히 반발하던 비티니아의 대수도원장 스테파노스는 투석형으로 죽었고 트라키아에서는 수백명의 수사(남성 수도자), 수녀(여성 수도자)들이 공개적인 모욕, 신체 절단, 심한 경우에는 처형까지 받았다. 트라키시온 테마의 총독은 남녀 수도자들을 모아놓고 결혼을 강요하고 거부하자 수사들의 수염에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런 식으로 제국 각지에서 수도원의 성물과 재산이 매각되어 황제의 금고로 들어갔으며 수도원 토지 역시 몰수되었다. 다만 이러한 수도원 파괴 운동의 와중에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고문서들이 파괴되어 8세기의 동로마 역사를 암흑 시대로 기록되게 하였다. 수도원 억압으로 인해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후, 대부분 수도원 출신이던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하지만 그를 변호해 보자면, 연속된 전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위안을 찾아 수도원으로 몰려들었고, 그 덕에 수도원의 재산과 규모는 늘어났던 반면, 농촌 인구와 농업 생산성, 군인의 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제국의 경제와 국방력에 큰 손실이 되어 콘스탄티노스는 중흥기를 준비할 인력과 재산을 창출해내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황제를 400년 전쯤 황제인 발렌스율리아누스에 비유하며 비난했던 수도승 안드레아스는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으로 끌려와 채찍질당해 죽었다고 한다. 발렌스는 아리우스파였고,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12] 고트족에게 패하고 죽었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에는 안 들키게 기독교인 코스프레를 했지만 즉위하자 그리스-로마 전통 다신교도임을 드러내며 다신교 부흥 정책을 내세웠으며, 페르시아 원정을 갔다가 불미스럽게[13] 죽었다. 즉 이 둘의 공통점은 정통파 기독교도가 아니며, 전사했다는 것이다. 즉 황제 당신도 성상파괴운동을 벌였으니 정통파 기독교도가 아니며, 또한 저 둘과 마찬가지로 말로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곱게 죽기는 힘들었다.

2.5. 불가리아 원정

740년대 후반의 승리로 시리아, 아르메니아 인들이 제국에 투항하였는데 콘스탄티노스는 게르마니케아로의 이주로 빈 땅이 생긴 트라키아 북부에 그들을 정착시켰고 새로운 성을 쌓았다. 이에 불가르 측은 716년의 협약 (비무장지대 설정) 위반이라 주장하며 코르미소쉬 칸의 지휘 하에 남하하였지만 아나스타시아 성벽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완패했고, 비네흐가 쿠데타를 일으켜 새 칸으로 등극했다.(756년) 이후 전쟁은 매년 이어졌다. 759년에는 Rishki Pass의 전투에서 불가리아가 이겼지만, 그 여세를 몰아서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평화협정을 맺자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비네흐와 그 일가를 모두 죽이고서 텔레츠를 새 칸으로 옹립했다. 불가리아의 슬라브인들은 이런 정세불안으로 제국으로 피난 왔고, 이들은 아나톨리아로 이주되었다.[14] 참고로 이렇게 유럽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것은, (멀리 재배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이산가족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인적 집단 자체를 한 덩어리로 유지시키지 않고 분산배치했던 것과 더불어, 로마의 전통적인 디바이드 앤 룰 통치술이었다.[15] 아예 자기의 연고지와 한참 먼 지역으로 재배치되면 그 곳 현지인들과는 말부터가 잘 안 통하니 뭉쳐서 반란을 선동한다던지 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기댈 데는 제국 당국밖에 없게 된다. 동쪽 출신 사람을 서쪽에, 서쪽 출신 사람을 동쪽에 배치함으로써 제국 내 지역색을 줄이고 통합을 추구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763년 6월 30일에 큰 전투가 일어났는데( Battle of Anchialus (763)), 콘스탄티노스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친정하여 하루종일 벌어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오랜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개선식과 그를 기념하는 경기가 열릴 수 있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새 칸으로 옹립된 텔레츠는 얼마 재위 못 하고서 이 패배의 책임을 묻고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추대된 사빈 칸은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유약해 보인다고 또 귀족들이 분개해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했다고 한다.[16] 이후 우모르가 칸에 올랐으나 40일 만에 토크투, 바얀 형제에게 피살되었고, 이들 형제 역시 1년밖에 버티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뒤이어 새 칸으로 등극한 파간은 동로마 제국과의 협상을 원했고, 콘스탄티노스 5세와 협상을 논의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자리에서 불가리아인들의 변덕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불가리아의 평화를 수호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협상은 성공리에 마무리되는 듯했고, 파간은 수도로 귀환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돌연 기습을 가해 불가리아 영내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이에 불가리아인들이 격노하여 파간에게 책임을 물었고, 그 역시 1년 만인 768년 피살되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칸이 7명이나 전쟁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교체되는 엄청난 불안정에 빠졌는데, 이는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재위 기간이 길었고, 또 이탈리아를 과감히 손절하며 이슬람 세력도 정권교체로 정신이 없었던 덕에 불가리아에 집중할 여력이 되어 꾸준하게 공세를 넣었던 것이 누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7]

이와 같은 불가리아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황제로 동로마인의 집단의식에 강하게 각인되었는지, 수십 년 뒤인 812년, 니키포로스 1세가 이끄는 로마군이 그 전 해 811년에 플리스카에서 크룸의 매복에 걸려서 황제가 전사하고 두개골이 술잔 신세가 되는 대패를 당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 목전까지 역공해 온 불가리아군의 위협에 맞닥뜨리게 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묘역에 몰려가서 석관에서 시신을 끌고 나온 후 시신을 향해서 "깨어나서 위험에 처한 그대의 신민들을 구해주시옵소서"하고 외쳤다고 한다.[18] 평시라면 대단한 불경죄였겠지만, 대패하고 난 직후인데다가, 침략자가 아닌 내국인으로서 황제의 묘역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말이 시민이지 평범한 시민이라기보다는 귀족, 유력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여하튼 이후 772년, 773~774년, 774~775년에도 불가리아에 계속 전쟁을 벌였는데, 앞의 둘은 일진일퇴였던 것으로 보이고, 뒤의 전쟁은 선공을 들어온 것을 성공적으로 막고서 해군으로 역공을 가려는데 역풍이 불어 좌절되었다.[19] 그리고 나서 텔레리그 칸은 위에서 나온 전임 칸들과 똑같이 전쟁 패배로 왕위가 위태로워지자 밀서로 망명 의사를 전하면서 불가리아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를 물어봤는데 황제가 왜였는지 몰라도 그 명단을 알려주자 칸은 쟤들이 스파이들이구나 하고 모두 처단했다고 한다.(...)[20] 이에 대한 보복으로 775년 8월에 재차 친정에 나선 콘스탄티노스는 폭염으로 다리가 붓자 아르카디오폴리스를 거쳐 회군하였는데, 수도를 목전에 두고 배 위에서 죽었다.(9월 14일) 향년 57세였다.

한편 텔레릭은, 앞선 것처럼 궁정 내 동로마 스파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동로마로 망명할 경우에 예상되는 후환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귀족들을 더더욱 두려워했는지, 콘스탄티노스의 아들로서 새로 즉위한 레온 4세에게 재차 망명을 타진하였다. 동로마 당국은 이를 받아들여, 피난처를 제공하고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주었으며, 이리니 황후의 사촌을 결혼상대로 붙여주었고 테오필락토스라는 세례명을 주어 정교회로 개종시켰다.[21] 부황이 적국 군주 때문에 원정을 나갔다가 병이 악화되어 죽었는데도, 그 원흉인 적국 군주가 망명해 오자 대접을 잘 해주는 것이 재미있다.

3. 참고자료


[1] 정교회 유아세례가 상당히 거친 것을 감안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론 황제에게 똥덩어리라는 별칭을 붙인 것도, 그 별칭이 유래된 이야기가 사실 거짓이고 이를 꾸며낸 것도 모두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박해받은 성상옹호론자 연대기 작가들이라는 설도 있다.[2] 일단 쫓겨났다가도 다시 복위에 성공했으며, 반란자가 피가 직접 섞인 친척은 아니고 인척인 점은(처남-매부) 전대의 제노-바실리스쿠스의 관계(조카사위-처외삼촌)와 유사하다.[3] 마취, 소독 등이 없었거나 초보적이던 전근대에 실명형을 당하면 세균감염 등 위생 문제로 대다수가 그리 오래 못 가서 죽었기 때문이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라는 예외가 존재하지만. 영어 위키백과의 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문서에 따르면 그는 1078년에 실명형을 당하고도 최소한 1094/5년까지는 살아 있었다고 한다.[4] 'Byzantium in the Iconoclast Era, C. 680-850: A History' 중 162p, 원문: 'The project was sufficiently impressive to spill over into other arenas, generating the legend of Constantine V as a dragon slayer, according to which Constantine dispatched a dragon blocking an aqueduct, whose appalling smell killed many.[5] 단 출생만 거기에서 하고, 어릴 때 자의로든 아니든 어쨌든 국경을 넘어(...) 이사우리아에 정착하여 거기가 실질적 고향이었기 때문에 이 왕조를 소위 '이사우리아 왕조'라고 하는 것이다.[6] 7세기부터 이어진 전쟁에 전염병까지 겹치자 고대 로마부터 내려오던 귀족 계급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7] 영어 위키백과 Constantine V 중, 'The same year saw a serious outbreak of plague in Constantinople, which caused a pause in Byzantine military operations. Constantine retired to Bithynia to avoid the disease and, after it had run its course, resettled people from mainland Greece and the Aegean islands in Constantinople to replace those who had perished.'[8] 출처: 'Eastern Roman History' 유튜브의 Constantine V: The Dung-named Dragon-slayer[9] 공동의 적인 랑고바르드를 양쪽에서 협공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10] 영어 위키백과 Constantine V 중에서 'Constantine sent a number of unsuccessful embassies to the Lombards, Franks and the papacy to demand the restoration of Ravenna, but never attempted a military reconquest or intervention.'[11] 'Byzantium in the Iconoclast Era, C. 680-850: A History' 중 162~163p, 원문: 'As Paul Magdalino has observed, the 754 council acclaimed him as "New Constantine", the equal of the apostles, who had abolished idolatry.'[12] 장소부터가 이 당시의 불가리아와의 국경과 가까웠다.[13] 넓게 보면 전쟁통에 전쟁터에서 죽었으니 전사이지만 좁게 보면 적군에 의한 전사인지, 아군 기독교인에 의한 암살인지부터가 갈린다.[14] 이렇게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재배치된 슬라브인을 가리키는 (영어 위키백과)' Asia Minor Slavs'라는 용어까지 있다. 이들의 후손 중 하나가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반란군의 주동자였던 슬라브인 토마스이다.[15] 서로마 멸망의 신호탄은 로마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협상력이 떨어져, 이민족에 대한 이 전통적인 정책(뭉쳐서 살려면 멀리 가든가, 아니면 흩어져 살든가)의 강요가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고트족이 멀리 가지도 않으면서[22] 종족 단위로 뭉쳐 있는 상태로 제국 영내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했다.[16] 출처: 'Eastern Roman History' 유튜브의 Constantine V: The Dung-named Dragon-slayer[17] Constantine V 문서 중, 'The cumulative effect of Constantine's repeated offensive campaigns and numerous victories caused considerable instability in Bulgaria, where six monarchs lost their crowns due to their failures in war against Byzantium.'[18] Sergio Bertelli의 'The King's Body; Sacred Rituals of Power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Europe' 중 30p, 원문: 'At the time of the siege of Constantinople by the Bulgars, in 812, the crowd broke down the gates that led to the imperial tombs and dragged the body of Constantine V from its sarcophagus, crying: "Arise! Save your endangered people!"'[19] Telerig 문서 중, 'However, in October 774, Telerig sent an army of 12,000 men to raid Berzitia, Macedonia, and transfer its population to Bulgaria.' 및 'Constantine surprised the Bulgarians and won a resounding victory. The subsequent attack on Bulgaria failed since the imperial fleet had encountered contrary winds in the Black Sea.'[20] Constantine V 중, 'In 775, the Bulgarian ruler Telerig contacted Constantine to ask for sanctuary, saying that he feared that he would have to flee Bulgaria. Telerig enquired as to whom he could trust within Bulgaria, and Constantine foolishly revealed the identities of his agents in the country. The named Byzantine agents were then promptly eliminated.'[21] Telerig 중, 'In spite of his apparent success, Telerig found it necessary to flee to the new Byzantine emperor, Leo IV the Khazar, in 777. The Byzantine government gave Telerig asylum and the title of patrikios. Telerig converted to Christianity under the name of Theophylaktos and married a cousin of Empress Eire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