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7대 황제 요비아누스 IOVIAN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비아누스 (Flavius Claudius Jovianus) |
출생 | 331년 |
로마 제국 모에시아 싱기두눔 | |
사망 | 364년 2월 17일 (향년 33세) |
로마 제국 아나톨리아 다다스타나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63년 6월 26일 ~ 364년 2월 17일 (234일) | |
전임자 | 율리아누스 |
후임자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부모 | 아버지 : 바로니아누스 |
배우자 | 차리토 |
자녀 | 바로니아누스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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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율리아누스가 죽고, 군대의 추대로 제위에 오른 로마제국의 황제. 약 8개월간 재위했는데,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 암살된 듯하다.2. 생애
331년 신기두눔(현재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바로니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근위대장을 지냈으며, 요비아누스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라 근위대에 들어간 뒤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이 되었다. 이후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하자 종군하였으며, 율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군대에게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363년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당시에 요비아누스도 종군했기 때문에, 그해 6월에 황제가 되자마자 요비아누스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바로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던 군사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페르시아 황제와 잘 협상하여 페르시아군에게 추격받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도시 앙카라와 티그리스 너머의 로마 영토를 할양하고, 아울러 아르메니아 왕국의 종주권도 포기해야만 했다. 이런 조건으로 이루어진 퇴각은 당시에 대단한 불명예로 간주되었으므로, 요비아누스가 빠르게 인망을 잃는 원인이 되었다.
요비아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재정립하기 위해 굴욕적인 강화라는 무리수를 두며 빠르게 퇴각했으나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퇴각 도중에 364년 2월 다다스타나[1]라는 곳에 차린 자신의 천막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중독사였는데, 독버섯을 잘못 먹었다는 말도 있고 가스(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요비아누스의 치세가 이어진 기간은 겨우 만 7개월에 불과했다.
요비아누스는 황제로 있는 동안 교회에 헌금하기를 허용하고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와 마술을 믿음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최고 사형까지 처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를 강력하게 옹호했다.[2]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은 테오도시우스 1세 때가 아니라 사실상 요비아누스의 치세 때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덕분인지 죽어서 성당에 묻혔다.
요비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발레티아누스 1세, 발렌스 형제가 요비아누스의 큰아들 바로니아누스의 눈 하나를 멀게 해 제위 계승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요비아누스의 아내는 살아남았지만 남은 생애 동안 자신도 암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당대에도 암살이라고 추정한 사람이 많았을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그리스도교를 강력히 옹호하고 힘을 실어준 그의 인생이 이름과 대립한다는 사실이다. 요비아누스란 이름은 Iovis에 라틴어의 명사화 접미사 -anus를 붙인 것인데, 뜻을 풀이하면 요비스(Iovis)에게 속한 자, 또는 요비스의 사람이다. 요비스는 로마의 전통신 유피테르(Iuppiter)를 가리키는데, 사실 유피테르란 명칭은 '아버지 요비스(Iovis pater)'란 호칭이 단축된 것이다. '유피테르에게 속한 자'란 이름을 받은 사람이 로마 황제가 되어 그리스도교를 편들고 그리스-로마의 전통종교를 억압하였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