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97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 Κωνσταντῖνος Η΄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콘스탄티노스 8세 포르피로게니투스 (Κωνσταντῖνος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
출생 | 960년 |
동로마 제국 | |
사망 | 1028년 11월 11일/12일 (향년 67-68세) |
동로마 제국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025년 12월 15일 ~ 1028년 11월 12일 (2년 11개월) | |
전임자 | 바실리오스 2세 |
후임자 | 로마노스 3세 |
부모 | 아버지 : 로마노스 2세 어머니 : 테오파노 |
배우자 | 엘레니 알리피아 |
자녀 | 조이, 테오도라 |
종교 | 기독교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97대 황제이자 마케도니아 왕조의 제 10대 황제로 로마노스 2세와 테오파노 황후의 둘째 아들이며 바실리오스 2세의 동생. 자녀는 에브도키아(Eudokia), 조이(Zoe, 978년경 ~ 1050년), 테오도라(Theodora, 980년경 ~ 1056년) 등 세 황녀를 두었다. 에브도키아는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곰보가 된 뒤 수녀원으로 들어가 일생을 지냈다. 나머지 조이와 테오도라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계보를 이었다.2. 즉위 전
963년 3월에 아버지 로마노스가 갑자기 사망하자 황제의 자리를 잇게 되었다.[1] 그러나 실제로 두 형제가 통치 1순위로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976년에 들어서였다. 또한 콘스탄티노스는 모종의 이유로 정치의 일선에 나서지 않은 가운데 형의 통치를 보좌하거나 아니면 별장 등에서 한가롭게 일생을 보냈다. 하지만 989년 아비도스 전투에서 적장과 대치하기도 했으며 시리아 원정도 보좌하기도 했다. 이후 그가 정치의 핵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바실리오스가 죽기 직전에 니케아의 별장에 있던 그를 불러오도록 한 이후였다.그가 오랫동안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형 바실리오스가 그를 의도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캐서린 홈즈(Catherine Holmes)같은 경우는 콘스탄티노스가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했으리라는 재평가에는 부정적이지만 적어도 시리아에서 전승되는 교회계 사서에서 콘스탄티노스가 힘이 세지 않거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암시가 있다는 점을 들어 콘스탄티노스가 건강의 문제로 주로 별장 등에서 지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3. 재위 시절
3.1. 기록의 신빙성 문제
그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비잔티움계 역사가는 요안니스 스킬리치스(Ioannes Skylitzes), 미하일 프셀로스(Michael Psellos), 야햐(Yahya)가 있으며 아르메니아 - 조지아 지역에서도 아리스타키스(Aristakes) 등의 역사가가 취급한다. 스킬리치스와 프셀로스 등 중앙 정치 출신의 연대기 작가들은 콘스탄티노스 8세 시대가 이미 꽤 오랜 옛날이었으며 여러가지 어른의 사정으로 기록에 상당한 부정적 윤색이 더해졌다. 미하일 프셀로스의 연대기는 상당 부분 1050년대 ~ 1060년대에 활동했던 요안니스 흐시필리노스(Ioannes Xiphilinos)의 기록에서 따왔는데 흐시필리노스는 그 기록을 카시우스 디오(Casius Dio)의 글에서 따온 것이었으며 특히 콤모두스 치세 부분을 상당 부분 가져온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점을 지적했던 Gary Johnson은 마찬가지로 스킬리치스나 마나세스(Manases)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 영향이 탐지된다고 본다.그렇기 때문에 스킬리치스나 프셀로스의 기록을 가져와서 그의 치세를 비판하는 기존의 논조는 상당한 무리가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야햐, 아리스타키스의 기록 역시 참고해야만 한다.
3.2. 내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후계를 제대로 정하지 못했으며 1021년 ~ 1022년을 풍미했던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의 난 등을 겪으며 말년에까지 군대 통솔을 포기할 수 없었던 바실리오스 2세가 죽은 뒤 콘스탄티노스는 군부와 관료를 모두 통제해야 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근위대같은 경우는 콘스탄티노스의 승계 결정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제국의 동단 바스푸라칸(Vaspurakan) 테마의 절도사를 맡고 있던 니키포로스 콤니노스(Nikephoros Komnenos)가 1026년 / 1027년에 조지아 왕국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한다는 첩보가 입수되기도 했다.니키포로스는 즉각 체포되어 1년간 조사에 들어갔고 결국 조사 결과에 따라 콘스탄티노스는 그를 실명의 형벌로 처벌하였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아리스타키스와 야햐는 콘스탄티노스 8세의 시대에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오랜 전쟁 동안 강제되었던 알렐렝군이라는 세금 제도가 폐지되었다. 알렐렝군이란 주변의 세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미납금을 주변의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로마노스 3세에 의해 직접적으로 폐지되었다는 소리도 있으나, 대체로 콘스탄티노스 8세는 형의 치세 동안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해 갇혀있던 사람들을 석방하고 신규 건축 중이던 감옥을 허물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2]
다만 나브팍토스(Naupaktos)에서 행정 장관에 대하여 일어난 반란에 대해서는 다소간 엄격하게 대하여 주교가 실명 형벌을 받고 주민들 상당수도 처벌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Anthony Kaldellis는 비록 콘스탄티노스를 폭압적 통치자로 보지는 않으나 이를 체제의 불안성을 보여주는 초조함의 한 징후로 해석한다.
3.3. 국방, 외교
전대의 기조를 따라 파티마 왕조(Fatimid)와의 교린이 이어졌다. 물론 국경이 조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1026년에는 전방 사령관 니키포로스가 조지아와 반란을 책동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에게 해로 상당한 규모의 사라센 함대가 출몰하여 제국 해군이 격퇴한 소식 역시 보고된다. 1027년에는 국경을 맞대고 있던 페체네그(Pecheneg) 유목민 군대가 이스트로스 강을 건너와 마케도니아까지 이르렀다. 이에 시르미온 방면을 담당하던 사령관인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Konstantinos Diogenes, ? ~ 1032년)가 불가리아 방면 최고 사령관으로서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국경은 다시 안정되었다.국방상 가장 중요한 동부 지역의 총 지휘관인 동방군 총사령관(Megas Domestikos)에는 환관 니콜라오스가 임명되었다. 그는 비교적 임무 수행에 성공적이었다. 바실리오스 치세 말엽인 1021년의 조지아 원정이 히피아스의 반란으로 조기 종결되었다가 1027년, 조지아 측의 반격으로 요새 몇 곳이 함락된 것을 이유로 원정이 재개된 것이다. 비잔티움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1028년, 니콜라오스는 제2차 원정에 올라 조지아와의 영토 분쟁 지역인 상 타오(Upper Tao)를 확실하게 장악하여 쐐기를 박고자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가 곧 숨을 거둘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곧 귀환하였다.
4. 후계 문제
1028년 11월이 되자 콘스탄티노스의 건강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제국에서는 바실리오스 2세 시절부터 문제였던 후계자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실리오스 2세가 자식이 없어서 그 동생이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그 황제에게도 아들이 없었다. 황제에게는 알리피오스의 딸 엘레니 알리피아와의 사이에서 딸이 3명 있었는데, 맏이인 에브도키아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당시 기준으로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얼굴에 곰보가 생겨) 평생토록 수녀원에서 종교적 삶을 살고 있었고, 둘째 딸 조이는 26년전에 이탈리아로 결혼하러 갔다가 약혼자가 열병으로 죽어버린 덕분에 황궁의 규방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살고 있었다.서방과는 다르게 여성도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동로마 제국의 특성상 조이를 통해서 남편이 제위를 물려받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누가 될 건지에 대해서는 다 죽어가는 황제의 침대 맡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으며 콘스탄티노스는 결국 황실에 충성도 깊고 능력과 시민들의 지지가 상당한 콘스탄티노스 달라시노스(Konstantinos Dalassenos)를 둘째 딸 조이와의 공동 후계자로 낙점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1024년 이래로 안티오키아 도독(Doux of Antiocheia)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위가 비어 있는 위험한 시기에 계승하기에는 조건이 좋지 않았다. (혹은 원로원파가 군인 출신 황제를 꺼렸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새로이 결정된 후보는 로마노스 아르이로스(Romanos Argyros, 968년 ~ 1034년 4월 11일), 콘스탄티노플 시장이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즉각 로마노스를 병석으로 불러들여 아내와 이혼하고 조이와 결혼하여 제위를 승계할 것인지 아니면 두 눈을 잃을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아주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로마노스는 기존의 아내와 이혼 절차를 밟은 뒤, 로마 황제가 되었다.
5. 참고 문헌
5.1. 1차 문헌
Michael Attleiates, Tr. by Anthony Kaldellis,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2012.Michael Psellos, Tr. by E. R. A. Sewter, Chronographia, Yale University Press, 1952.
John Skylitzes, Tr. by John Wortley, Synopsis of Byzantine History, 811-1057,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Aristakes Lastivertsi, Tr. by Robert Bedrosian, History, Sources of the Armenian Tradition, 1985.
5.2. 2차 문헌
Anthony Kaldellis, Streams of Gold, Rivers of Blood, Harvard University Press, 2017.Catherine Holmes, Basil II and the Governance of Empire(976-1025), Oxford Studies in Byzantium, 2005.
5.3. 논문
Gary J. Johnson, 'Constantine VIII and Michael Psellos', Byzantine Studies, Pt. 2 (1982), pp.220-32.[1] 이시기를 재위기간의 시작으로 잡을 경우 66년간 재위 함으로써 역대 로마 제국 황제 중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황제가 된다. 두 번째 최장기 집권 군주는 그의 형 바실리우스 2세[2] 그러나 알렐렝기욘은 가난한 백성들이 내지 못한 세금을 부유한 지주층에게 전가하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제도라 과연 개선인지 개악인지 불분명하다. 결국 교회의 반발로 로마노스 3세 때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