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로마 제국 비정통 황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Gaius Avidius Cassius | |||
존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Gaius Avidius Cassius Augustus) | ||
출생 | 130년,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 키루스 | ||
사망 | 175년, 로마 제국, 황제령 아이깁투스 | ||
재임기간 | 로마 제국 비정통 황제 | ||
175년 4월 ~ 175년 7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경력 | 집정관, 시리아 속주 총독 | |
부친 |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헬리오도루스 (Gaius Avidius Heliodorus) | ||
모후 | 율리아 카시아 알렉산드라 (Julia Cassia Alexandra) | ||
쟁립자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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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반역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였으나, 황제가 사망했다는 헛소문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한 인물이다.[1]2. 생애
2.1. 초기
130년경 시리아의 키루스에서 부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헬리오도루스와 모친 율리아 카시아 알렉산드라 사이에서 출생했다. 고향 키루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 중 한명으로 디아도코이 전쟁 속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한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도시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300년 직후 건설됐는데, 그가 태어나기 전인 서기 1세기 무렵부터는 로마 제국 동부에서 이름 있는 행정, 군사, 상업 중심도시로 명성이 대단했다. 안티오키아와 유프라테스 강이 교차하는 제우그마 사이의 무역로에 있었고, 자체 주화를 따로 주조했고, 프레텐시스 제10군단이 주둔한 군사기지였기 때문이다. 즉, 그의 고향은 로마 통치 속에서 시리아 속주의 주요 중심지였는데, 이런 고향처럼 그와 그 일가는 제국 동부에 둔 인맥이 대단했다.그의 부모는 모두 당대 로마 사회 안에서도 최상류층이었다.
부친 헬리오도루스는 기사계급 출신이나, 최상류층이었고, 최고 수준 교육을 배운 엘리트 관료였다. 그는 기사계급 출신 관료가 가장 높게 오를 수 있던 관직을 지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아래에서는 황제 서신을 처리하고 담당한 황실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137 ~142년의 5년 동안은 기사계급 신분의 관료가 귀족 반열에 오를 기준점이 된 황제령 아이깁투스(오늘날의 이집트) 장관으로 있으면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다만, 믿을 수 없는 사서로 악명이 자자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부친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분노를 사서 황제에게 욕설 섞인 공격적인 서한을 받았다고 한다.
모친 알렉산드라는 유대 왕족이자 로마 귀족이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손 중 한 명인 유니우스 실리누스의 딸 유니아 레피다[2]의 후손이었다. 허나 외할머니 유니아 레피다는 베레니키아누스의 아내 카시아 레피다의 딸로, 코르불로 장군의 아내 카시아 롱기나의 조카임에도 혈연을 제외하곤 가세가 기운 상태였다. 그 이유는 카시아 롱기나, 카시아 레피다 자매의 아버지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네로 시대 후반에 벌어진 피소 음모 사건[3]으로 66년 추방됐다가 베스파시아누스 집권 후 추방형 해제가 되었음에도 원로원 의석만 겨우 회복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외조부는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낸 전직 집정관, 전직 보결집정관 출신의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베레니키아누스다. 따라서 외조부를 통해 콤마게네 왕국의 마지막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헤로데 왕조 헤로데 대왕의 후손을 포함한 여러 왕족들과 친척 관계였고, 모친 알렉산드라는 유대 공주로 불렸다.
이런 혈통적 배경 중 당대부터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생애, 경력, 인맥을 살펴볼 때 가장 높게 평가받은 점은 외조부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베레니키아누스였다는 부분이었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외조부가 헬레니즘 세계의 그리스계 왕국인 킬리키아 왕자로, 동방 인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외조부의 부친은 아르메니아 왕에 올랐던 티그라네스 6세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다. 따라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외할아버지를 통해 그리스,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유대, 아나톨리아, 파르티아 왕족들의 피를 모두 물려받았고, 외조부의 혈연과 인맥을 통해 일찌감치 제국 동부의 지역유지들과 자연스러운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시리아 키루스 태생이지만, 그는 유년기부터 일찍이 로마로 돌아와 이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이었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헤로데스 아티쿠스 등 저명한 학자 밑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당시 카이사르 신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일찍부터 친구가 되고 친구집단에 속한 영광까지 얻었다. 로마 사회 안에서 황제의 친구 집단이란 성공이 보장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와 그 일가에 대한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신임은 현대의 상상을 뛰어 넘을 만큼, 대단했다.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이런 배경 덕에 웅변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유 속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게 일찌감치 여러 명예를 선사받았다. 그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쿠르수스 호노룸의 시작인 재무관을 154년 임명받는 형태로 지냈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통치 후반이 될 무렵엔 황제의 추천을 업고, 전직 법무관 자격의 장군 경력을 시작하여 3군단 갈리카의 레가투스 레지오니스의 지위에 올랐다. 고속 승진이었는데, 친구 관계를 맺고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된 직후부터는 마르쿠스의 아우이자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를 수행했다.
이때 그는 161년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루키우스 베루스가 황금 동상 등을 시리아 속주로 가지고 오는 문제 등을 본인의 인맥을 동원해 슬기롭게 해결했고, 전쟁 개전때부터 병참, 행정, 외교, 전쟁수행 모두에서 만점에 가까운 활약을 선보였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165년 군을 이끌고 파르티아군의 병참로를 기습해 로마군이 결정적으로 승리하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공격해 에데사를 시작으로 니시비스, 셀레우키아, 크테시폰까지 함락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해, 제국 전역에는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파르티아를 넘어 인도까지 진군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다만 로마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페스트가 돌면서 로마 제국 전역에 '안토니누스 역병'이 닥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흔히 냉혈한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대에는 동시대 사가 디오 카시우스가 극찬했듯이, 능력이 대단하고 굉장히 멋지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애초에 그가 냉혈한으로 소문이 난 이유 자체가 로마-파르티아 전쟁 당시 제3 갈리카 군단장에 임명된 뒤 FM대로 군율을 적용해 생긴 이미지에 후일 반란을 일으켜 생긴 것이라서, 진짜 모습과 세간의 평은 빈틈없는 영리한 엘리트 상의 전형으로 비춰졌던 것으로 보인다.
라틴어, 그리스어, 현지어 모두에 능통하고 능력이 탁월하면서도 문무를 겸비해,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등과 함께 로마-파르티아 전쟁 이후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 엘리트 인재의 대표격이 됐다. 파르티아 전쟁 내내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칭찬했다. 그래서 루키우스 베루스의 형으로 공동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동생 루키우스의 칭찬을 듣고 그를 높게 평가해, 164년 말(혹은 165년 초) 카시우스를 원로원 의원에 임명했다. 어쨌든 164년부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승승장구했는데, 두 황제 중 실질적인 정제와 같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크게 신임해 그를 높이 기용했다. 그래서 166년 5월, 마르쿠스 황제와 집정관을 함께 역임해, 로마 제국 안에서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임기 후, 마르쿠스 황제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로마 제국 총독 중 "꽃 중의 꽃"이라는 평을 듣는 위상과 실권 모두 최고 자리인 시리아 코일레 속주 총독에 임명했다. 이는 황제가 그를 직접 점찍어, 제국 동방 일대 최고 책임자로 삼았던 것을 의미했다.
그는 동방의 정세에 밝고 군대를 정예로 육성하는 솜씨가 탁월하여, 시리아 속주에 주둔 중인 로마군의 기강을 유지시켰으며, 동방에서 소요가 일어나는 즉시 신속하게 진압하였다. 170년경 이집트 주민들이 곡물 가격 인상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달려갔다. 반란 규모가 상당했고, 반란군이 이집트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기에 까다로웠지만, 그는 5년 안에 진압에 성공했다. 당시 게르만족의 연이은 침략을 막느라 정신없던 마르쿠스는 동방을 훌륭히 다스리는 그를 매우 신뢰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르쿠스와 황후 소 파우스티나는 순한 성격인 콤모두스의 앞날을 걱정하여 카시우스를 후견인으로 삼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2.2. 반란
그런데 175년 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자신을 이토록 신뢰하던 마르쿠스를 배신했다. 그는 황제가 역병에 걸려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믿고 그해 5월 3일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배경에 소 파우스티나가 있을 거라는 주장은 당대부터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제기된다. 하나는 카시우스가 파우스티나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남편의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져서 아편에 의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일부러 남편이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놔서 차기 황제를 꿈꾸는 야심가가 섣불리 행동에 나서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두 번째 설은 파우스티나가 카시우스에게 "황제가 곧 서거할 것 같고, 콤모두스는 아직 어리니 그대가 제위를 이어달라"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 설을 제기한 로마 역사가들은 훗날 카시우스가 죽자 자신과 마르쿠스가 주고받은 서신 발췌문을 제시하면서 혐의를 부인했다고 덧붙였다.현대 학자들은 파우스티나가 카시우스에게 보냈다는 서신을 가짜로 간주하지만, 파우스티나와 카시우스의 반란 간의 연관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디오 카시우스는 파우스티나가 남편의 건강이 나빠지는 상황을 두려워하여 자신과 아이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피하고자 카시우스에게 의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토록 싫어하는 사위 폼페이아누스를 밀어내기 위해 카시우스를 끌여들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누명을 쓴 것일 뿐일 지도 모른다. 아무튼 반란을 일으킨 그는 나중에 마르쿠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반란을 꿋꿋이 이어갔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르쿠스는 병사들을 소집하여 이 사실을 알린 뒤, 군단에 카시우스와 자신 중 더 나은 황제를 선택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병사들은 한 목소리로 마르쿠스만이 유일한 황제이며 카시우스는 배신자라고 외쳤다. 마르쿠스는 원로원에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면서도, 카시우스가 죽거나 자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원로원은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마르쿠스를 지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카시우스는 동방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7개 군단을 확보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식량을 책임지는 이집트로 진격했고, 이집트 총독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스타티아누스는 카시우스의 황제 즉위를 축하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국의 많은 귀족들은 카시우스에 반대했다. 일설에 따르면 마르쿠스와 카시우스의 스승이었던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카시우스에게 "미쳤느냐!"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고 하며, 이집트 주둔 로마군은 마르쿠스를 지지한다는 뜻을 표명하고 총독을 체포한 뒤, 이집트로 진군하는 반란군에 대항해 수비를 강화했다. 여기에 카파도키아 총독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베루스는 카시우스를 성토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군대를 규합하여 반란군 진압에 착수했다.
이렇듯 황제의 생존 사실이 퍼져 동방군이 카시우스 적대로 돌아서고 군심과 민심까지 부정적으로 흘러가자, 당초 카시우스를 따라 반란에 뛰어들었던 장병과 장교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현군인 마르쿠스를 적대했다가 역적으로 낙인찍혀 개죽음당하느니, 카시우스를 자기들 손으로 처치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75년 7월 말, 카시우스를 따랐던 백부장이 습격해 그를 죽이고 머리를 마르쿠스에게 보냈다. 당시 마르쿠스는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총독 가이우스 베티우스 사비니아누스를 로마로 보내 수도를 지키게 하고, 병사들을 규합하여 동방으로 향하려 했다. 이때 여러 게르만족이 지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마르쿠스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다 카시우스의 수급이 도착하자, 그는 이것을 보기를 거부하고 정중히 매장하도록 했다.
3. 사후
카시우스가 허망하게 죽으면서 반란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압되었지만, 마르쿠스는 동방으로 가서 민심을 다독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황후와 고문들을 이끌고 동방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소 파우스티나 황후가 병사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불필요한 복수를 피하고 싶어서 카시우스가 남긴 어떤 편지도 읽지 않았다. 따라서 마르티우스 베루스는 시리아에 입성한 뒤 카시우스가 주고 받은 모든 서한들을 불태웠으며, 반란에 합류한 이들에 대한 과도한 피의 보복 역시 황제의 명령에 따라 하지 않았다. 이는 카시우스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그래서 장남 아비디우스 헬리오도루스는 목숨을 건져 겨우 추방형에 처해졌으며, 카시우스의 딸 아비디아 알렉산드라 부부는 반역과 무관했던 그녀의 삼촌에게 보호받는 형태로 목숨을 건졌다. 다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원로원은 이 사건 이후 파견지역 출신이나, 이 지역이 부모, 가족과 연관있는 경우 해당 속주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법을 바꿔 제2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사태를 막았으며 총독들의 반란을 제어할 각종 장치를 만들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따라서 175년 이후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출신지 혹은 부모, 친인척이 태어난 지역의 총독에 오르지 못했다.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명성과 기량을 겸한 능력자였고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신임했던 당대의 권력자이자 거물이었다. 그가 계속 생존했더라면 그의 지위와 위상, 저력 그리고 야망으로 마르쿠스 황제 사후 무능한 후계자 암군 겸 폭군 콤모두스 치세에서 큰 영향을 끼쳤을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훨씬 더 좋은 조건 하에서 제위를 노려 도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는 음모론을 불문하고 잘못된 처신으로 자멸하고 말았다.
[1] 임금의 신임을 받다가 임금이 죽었다는 헛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 고려의 강조와 비슷하다.[2] 아우구스투스의 딸 대 율리아가 두번째 남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서 얻은 딸 소 율리아의 외손녀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밀리아 레피다, 모친의 아버지는 로마의 오래된 명문귀족 유니우스 가문 출신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였다. 따라서 혈통적으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이 됐다. 그렇지만 외할머니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소 율리아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처벌받아 황족 지위를 박탈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혈육이자 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와 약혼했다가, 소 율리아 부부가 불경죄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처벌받고 몰락해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와 결혼해 낳은 차녀이기도 하다.[3] 고대기록들에 따르면, 피소 친구의 노예 부부가 주인이 피소와 음모를 꾸민다고 고변해 터진 사건이라고 하나 현재는 네로, 티겔리누스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의견이 팽배하다. 저명한 원로원 의원 칼푸르니우스 피소, 네로의 스승이자 권신이었던 세네카와 세네카의 조카 루카누스 등이 이 사건으로 자살, 처형됐고, 이 사건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로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마지막 직계후손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가 네로의 근친상간 요구, 근친혼 청혼을 거절했다가 이 사건의 기획자로 몰려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