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ia Antonia |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 |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직위 | 신격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의 딸 (CLAUDII•CAESARIS•FILIA) |
신상 정보 | |
휘 | Claudia Antonia |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 |
출생 | 서기 30년 로마 제국 로마 |
사망 | 서기 66년 로마 제국 로마 (향년 36세) |
배우자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서기 43년 결혼 / 서기 43년 사별) |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서기 47년 결혼 / 서기 62년 사별) | |
자녀 | 이름 미상의 아들 (2살때 요절) |
부모 | 클라우디우스 1세(아버지), 아일리아 파이티나(어머니) |
형제자매 |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이복오빠), 클라우디아[1](이복언니),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이복여동생) 브리타니쿠스(이복남동생) |
1. 개요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녀, 공주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초대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후손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공주로, 어릴 적부터 엄청난 미인으로 유명했다.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둘째 딸로 이복언니 클라우디아(클라우디아 율리아)가 인지를 받지 못해, 사실상 클라우디우스의 장녀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번째 아내 아일리아 파이티나로 그녀의 유일한 딸이다.
할아버지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대 드루수스, 할머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소 옥타비아의 차녀 율리아 안토니아(소 안토니아). 큰아버지는 게르마니쿠스다. 따라서 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와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사촌 여동생이 된다. 이복동생은 네로에게 살해된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가 되며, 그녀의 시어머니는 할머니의 언니인 대 안토니아의 막내딸 소 도미티아 레피다이다.
두번째 남편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가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살해된 뒤, 정절을 지키다가 5대 황제 네로의 근친상간 요구와 청혼을 거절한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돼 66년 처형됐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첫 결혼
서기 30년, 본국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사계급 출신의 원로원 신흥귀족 가문 출신 아일리아 파이티나로 아버지의 첫 아내였던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가 불륜을 저질러 서기 24년 이혼한 뒤 맞이한 후처다. 외할아버지가 희대의 간신 세야누스를 일찍이 입양해 대를 이은 탓에, 세야누스는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법적으로는 '외삼촌-조카' 사이가 된다. 하지만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모녀와 세야누스가 교류한 흔적은 없다.부모 사이는 괜찮았지만 서기 31년 세야누스가 국가 전복을 시도하다가 몰락한 뒤, 외가가 풍비박산나고 멸족했다. 이때 부모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강제로 이혼했고,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영아기때부터 서기 37년까지 할머니 소 안토니아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아버지, 고모가 모두 선남선녀인데다, 친모 역시 상당한 미인이라서 어릴 적부터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더욱이 그녀는 37년까지 할머니 소 안토니아 밑에서 자라며, 교양이 풍부하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할머니에게 덕성 교육을 받아 품행이 좋았다.
할머니 소 안토니아가 서기 37년,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구명 운동을 하다가 사촌오빠인 당시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대립 중 홧병으로 쓰러져 죽은 직후부터,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밑에서 자랐다.
서기 41년 사촌오빠 칼리굴라가 암살되고, 아버지가 제위에 오르자 팔라티노 황궁으로 거처를 옮겨 43년까지 살다가 그 해에 폼페이우스의 딸 폼페이아의 후손으로 전직집정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와 스크리보니아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결혼했다. 믿을 수 없는 호사가이자 변호사,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첫 남편 폼페이우스는 몇 년 후인 서기 46년 혹은 47년경 동성애 대상인 소년과 침대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기 2세기 말의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남편 폼페이우스는 계모 메살리나의 농간으로 반역죄 누명을 뒤집어 쓰고 처형됐다고 한다. 첫 남편이 어떻게 죽었던 간에 부부 사이가 애뜻하지 않았고, 첫 남편이 양성애 혹은 동성애 성향이 강해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2.2. 두번째 결혼과 네로의 등장
폼페이우스 사후, 아버지와 계모의 결정으로 브리타니쿠스의 외삼촌으로 메살리나의 이부동생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와 약혼 후 서기 47년 결혼했다. 이 결혼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동생 브리타니쿠스의 제위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존속에 필요한 정략혼이었는데, 다행히 부부 사이가 좋았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이에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첫 손자의 탄생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외손자의 탄생으로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대가 이어짐을 기뻐했다. 이는 원로원도 비슷해,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출산과 아우구스투스의 새로운 남자혈육의 탄생을 축하해줬다. 그러나 아들은 2살의 나이에 요절했다.계모 메살리나가 중혼, 국가 전복을 기도하다가 몰락한 뒤, 아버지의 네번째 결혼이 논의됐다. 이때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 이는 사촌언니 소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어머니였던 아일리아 파이티아였다. 파이티아는 강제 이혼 이후 홀로 살았고, 클라우디우스와 강제로 이혼했지만 브리타니쿠스의 미래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부부의 안전을 위해 적합한 결혼대상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팔라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르마니쿠스의 딸로 법적으로는 율리우스 가문 사람이 아닌 황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선, 황제의 조카딸 소 아그리피나가 더 적합하다고 강권했다. 따라서 소 아그리피나가 새 황후로 결정됐다.
소 아그리피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생전부터 자신과 그 일가에게 헌신한 팔라스의 도움으로 황궁에 복귀한다. 오빠 칼리굴라 생전부터 권력욕이 강했던 소 아그리피나는 황궁에 돌아온 이후, 오른팔 팔라스를 이용해 세를 키우고 황궁 전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 남편이자 삼촌인 클라우디우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남편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있었음에도, 무리해서 자신의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훗날 네로)를 황제로 만들려고 했다.
사실 네로가 황제가 된 건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 덕이었다. 네로는 외삼촌 칼리굴라에게 일찍이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 아니며, 그에 따른 특권도 제위도 보장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을 받아 방계황족이어도 제위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칼리굴라 암살에 가담했다가 사이가 크게 틀어져 친황제파 인사들에게 인망도 쉽게 모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의 이런 약점을 보완코자 클라우디우스의 셋째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약혼했던 방계 황족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살리누스를 근친상간 혐의가 있다며 모함해 파혼시킨 뒤, 원로원 의석을 강제로 박탈했다. 아울러 클라우디우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비열하고 야심 많은 철학자 세네카와 근위대장 브루스를 아들 아헤노바르부스에게 붙여주면서 황제의 피해방인 궁정대신 3인방 중 팔라스를 네로 곁에 붙여줬다. 팔라스는 소 안토니아 생전부터 칼리굴라, 소 아그리피나에게 목숨을 다할 정도로 충성을 다한 사람이라서 소 아그리피나는 금세 팔라스의 인맥, 세네카의 명성과 권모술수를 통해 지지세력을 포섭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를 구슬려 옥타비아와 아헤노바르부스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황제의 사위가 된 그녀의 친아들을 자신의 친정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양자로 입적시켜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3. 가문의 멸문과 남편의 죽음
친아들 네로가 양자가 된 뒤 건강하던 클라우디우스가 갑자기 죽었다. 이때 소 아그리피나, 세네카, 부루스는 유언장이 공개됐음에도 황제 집무실을 장악해 모든 문서를 불태우고, 근위대를 움직여 반쯤 쿠데타나 다름없는 형태로 황자 브리타니쿠스를 밀어내고 네로를 제위에 앉혔다. 클라우디우스는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며, 이때 브리타니쿠스를 지키려고 한 해방노예 출신의 장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를 비롯해 방계 황족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부자, 어린 네로의 큰고모로 네로에게는 친어머니와 다름없던 방계황족 도미티아 레피다 등이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후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과 아들 네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칼리스투스를 파면 후 처형한 다음, 게르마니쿠스 자녀들에게는 충성을 다한 궁정대신 팔라스에게 모든 권력을 주고 이를 통해 제국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지만 네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어머니와 대립했고, 여기에 세네카와 부루스가 힘을 보태면서 클라우디우스 사후 4개여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자 관계는 험악해지게 된다. 따라서 소 아그리피나는 통제가 어려워진 네로 대신 자신의 사촌동생이자 의붓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앞세워 권력 투쟁을 벌였고, 이는 브리타니쿠스, 소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가 네로 손에 비극적으로 살해된 이유가 됐다.이런 상황에서 네로는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으로 네로에겐 고종사촌형인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굉장히 미워해,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네로는 아주 어릴 적부터 사촌형 파우스투스를 미워했다.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고대기록상 네로는 확실히 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두려워했고 그가 비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직계조상인 종신독재관 술라와 달리 온화하고 인품이 훌륭했으며 비열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이런 장점으로 모두에게 칭찬받았고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네로는 갈갈이 날뛰며 그를 더 증오했다. 네로가 파우스투스를 미워하고 증오한 이유는, 이 사람이 인품이 좋아 인망이 두텁고, 죽은 브리타니쿠스의 외삼촌이라는 점, 그리고 이 사람의 아내가 로마 최고의 미녀 중 한명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인 이유도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따라서 네로는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 제거한 직후부터 파우스투스를 죽이기 위해 근위대장 티겔리누스 일당을 뒤에 붙여 감시케하고 매일 같이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파우스투스가 나이에 비해 회백색 머리로 새치머리인 점을 비난하면서 "숱이 없는 대머리"라고 지속적으로 놀렸다. 이는 대머리가 아닌 파우스투스가 사촌동생 네로의 놀림에 격분해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도록 유도한 술책이었다. 즉, 네로는 놀려서라도 사촌형이자 양누나의 남편인 파우스투스를 반역죄 중 하나인 불경죄로 기소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파우스투스는 본래부터 조심성이 많고 사람 자체가 온화해 꼬투리 잡을 구실이 없었다. 그는 본래부터 정치적 모임에는 일절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으며, 고종사촌동생 네로가 자신의 앞에 대놓고 무시하고 조롱을 함에도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네로는 본인보다 성숙함을 증명하면서 인망을 쌓게 된 파우스투스를 더욱더 미워하고 두려워 했다. 네로는 사촌형을 진짜 두려워 했고 죽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분명히 음모를 꾸몄을 것"이라고 판단해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티겔리누스에게 명을 내려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제거하려고 서기 55년 조작된 사건을 터트렸다. 하지만 실체도, 증거도 없어 첫 기소는 실패했다. 하지만 서기 58년 네로는 온갖 수를 동원해 다시 기소한 뒤, 무죄로 결론난 사건을 밀어붙여 의심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워 심증 혐의라는 기괴한 논리를 만들어 재판 판결을 뒤집어 버린다. 이어 구명운동이 나오기도 전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갈리아로 유배보낸다. 이후 네로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살해한 직후, 구명운동 움직임이 있던 고종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암살하듯 비열하게 죽인다.
2.4. 피소 음모 사건과 억울한 죽음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65년, 네로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등에게 죄를 덮어 씌우고 스승 세네카와 세네카의 조카 루피누스 등을 죽이면서 피소 음모를 타개할 수단으로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에게 정식 청혼 후 강제로 결혼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 네로의 두번째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가 죽어, 네로는 후처를 찾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로마 최고의 미녀로 30대 중반임에도 혈통과 미모 모두 완벽한 그녀와 어떻게든 결혼하려고 했다. 이는 그녀가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직계손이라는 상징성도 있었기 때문인데, 네로는 근친상간까지 시도할 정도로 어떻게든 그녀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자신의 아버지를 매일 같이 희롱하면서 희화화하고, 여동생과 남동생, 남편을 모두 죽이고 애증관계인 사촌언니이자 계모 소 아그리피나의 죽음까지 경험하며 네로를 진짜 증오해온 터라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에 네로는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손,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손녀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피소 음모를 꾸민 기획자라고 모함해, 서기 66년 그녀를 반역죄로 처형했다.[1] 혹은 클라우디아 율리아라고도 한다. 친모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가 여러 남성과 불륜을 맺고 성관계를 하던 중 임신하고 출산한 딸이다. 이에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할머니 소 안토니아 모두 "우리 가문의 핏줄이 아니다"라고 인지를 거부해, 정상적인 결혼으로 태어난 가문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