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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Lucius Cornelius Sulla Felix[1] | |
<colbgcolor=#800080><colcolor=#ffffff> 생몰년도 | 기원전 138년 ~ 기원전 7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포추올리 (現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현 코무네) |
지위 | 귀족 |
칭호 | 행운아(Felix) |
종교 | 로마 다신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첫 번째 부인의 장인) 율리아 코르넬리아 카이사리아 (BC.110 ~ BC.104, 첫 번째 부인) 코르넬리아 술라 (장녀) 아일리아 (두 번째 부인) 클로일리아 (세 번째 부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 (네 번째 부인의 장인)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 (네 번째 부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장남) 코르넬리아 파우스타 (차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다섯 번째 부인의 장인) 발레리아 메알라 (다섯 번째 부인) 코르넬리아 포스투마 (삼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조카)[2] |
참전 | 유구르타 전쟁 킴브리 전쟁 동맹시 전쟁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의 내전 |
직업 | 독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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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술라는 신들의 체면을 손상시킬 정도로 진정 '행운아'라는 사실으로부터 받을 신들의 악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4]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 마르키아에게 보낸 위로문Ad Marciam de consolatione』 中 12.6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 마르키아에게 보낸 위로문Ad Marciam de consolatione』 中 12.6
로마 공화정 말기의 명장으로, 로마 최초의 군사정변을 통해 국가통치권한을 강탈해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된 독재자이며 로마 시민이라도 자신에게 반대한다면 학살을 거행하는 잔혹한 인물이었다.[5] 그러나 공화정을 수호하겠다는 이념을 지녔으나, 결국 그 이념이 공화정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세계사상 매카시즘적 스트롱맨의 시조라 할 수있는 인물로 최초의 대규모 내전을 통해 무력을 동원해서 조국의 정부를 전복하고 법률에 존재하지 않는 '무기한 독재관'이란 특권을 얻어낸 후, 자신에게 반대하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자들은 숙청으로 일소하는 철권통치를 통해 그의 통치 아래 로마 본국은 물론 이탈리아 전역은 정치적 공포에 짓눌렸다. 서구권 학자들이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부르는 기원전 88~기원전 78년 사이에, 술라는 스스로를 원로원 체제의 수호자로 천명하였고 민중파를 모조리 죽여 원로원 계급의 토지 독점과 평민 계급의 빈곤화 속에서 흔들리는 원로원의 입지를 복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술라 본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것과 그의 이상과는 다르게 그의 집권 과정과 체제 개혁은 종국적으로 공화정이 뒤엎어지는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공화정 체제를 붕괴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그의 수혜를 받은 옵티마테스들조차 술라 치하의 잔혹하고 혼란스러운 정세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았을 만큼, 그의 치세는 합리적이고 유능한 정치 구조가 아니라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무력과 권력에 의한 정치였던 것이다.
아래의 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업적을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반란과 숙청을 일삼으며 누구도 거스르지 못할 절대권력을 얻고 국정을 국정을 혼자서 좌지우지했지만 스스로 정계 은퇴를 하고 말년을 보내는 천수를 누렸다.[6] 이 때문에 '행운의 여신의 사랑을 받는 자'로 유명했다. 술라 본인도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행운아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행운을 뜻하는 "Felix"를 성 앞에 붙이는 존칭으로 삼았다.[7]
이름 중간에 명문 코르넬리우스라는 가문명이 붙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그는 당시 로마 공화국에서 몇 안 되는 전통 귀족 출신이었다. 특히 코르넬리우스 가문은 발레리우스, 파비우스 가문과 함께 로마의 으뜸가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술라의 가문은 조상인 루피누스가 은쟁반을 뇌물로 받은 일로 원로원에서 쫓겨난 이후, 술라 때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몰락했고 가문명이 '술라'인 유력 정치인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훗날 술라의 숙청 때 어떤 해방노예가 술라가 자기와 같은 집에서 셋방살이한 과거를 언급하며 3천 세스테르티우스 셋방에서 살던 거렁뱅이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술라는 젊은 시절 하층민인 광대, 배우와 친하게 지냈고, 나중에 집권한 이후에도 이런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술라는 비교적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귀족 가문이 받을 수 있었던 것과 동등한 좋은 교육을 받는다.[8] 공식적으로 5번 결혼했는데, 그 외에도 남녀 가리지 않고 수많은 애인이 있었다고 한다.
뛰어난 군인인 동시에 냉혹함과 권모술수를 겸비한 사람이었고 야전에서의 지휘력과 전술 능력은 그의 전적이 보여주듯 당대 최고였다. 술라의 부하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했고 술라가 카이사르의 정적인 데다 술라와 카이사르 둘 다 내전의 최종 승리자였기 때문에 "양의 카이사르 vs 음의 술라" 등 구도가 거론되기도 한다.[9] 그러나 나이차가 큰 데다 같이 생존하던 시기 서로의 정치적 입지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두 인물이 본격적으로 대결할 일은 없었다.[10]
2. 주요 경력
2.1. 유구르타 전쟁
술라의 본격적인 관직활동은 유구르타 전쟁부터 시작된다.기원전 107년 31살의 술라는 재무관에 선출되었고, 당시 집정관 마리우스의 휘하로 누미디아 왕국에 파병되어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와의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이후 술라의 로마군은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 인근에서 유구르타와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쿠스[11]가 이끄는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여기서 술라는 기병을 이끌고, 적군 우익의 마우레타니아의 보병대를 격파한 후 곧이어 로마군과 싸우던 유구르타의 본대를 공격해 승리를 이끌어 내었으며 그 기세를 몰아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까지 함락했다. 이후 술라는 유구르타의 동맹인 보쿠스 1세를 설득하여 유구르타를 생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게 승전한 술라는 상관 마리우스와 점점 사이가 벌어졌다. 일례로 로마 포룸에 이를 기념하는 조각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조각에서는 유구르타를 잡은 술라만 묘사되어 있고 정작 유구르타를 몰아붙인 집정관 마리우스는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사이가 나쁜 세력가 메텔루스의 선전으로 술라의 공이 알려지게 된다. 이 때문에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는 나빠졌다.
2.2. 킴브리 전쟁
기원전 101년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이 갈리아와 이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에 침략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37세였던 술라는 처음엔 마리우스 밑에서 일하다가 나중엔 다른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밑으로 보내지는데 이를 본다면 마리우스와의 사이가 점점 나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카툴루스 휘하에서 그는 기병을 이끌게 되었는데 마리우스와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맞붙은 베르켈라이 회전에서 그는 대단한 지휘 솜씨로 게르만족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시민들에게 유명해진 술라는 기원전 97년 41세의 나이로 수석 법무관에 선출되었으며, 다음해에 터키 서부 킬리키아 지역의 총독이 되었다. 술라는 이때 파르티아 제국과 외교협상을 벌였는데 주요 내용은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국경으로 정한 것이었다. 협정이 성공적으로 맺어지고 총독 임기가 종료되자 술라는 로마로 귀국했다. 귀국한 뒤 그는 원로원 의원이 되어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적대하는 옵티마테스파의 일원이 되었다.2.3. 동맹시 전쟁
5년 뒤인 기원전 91년에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내의 다른 도시들에게 수여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12]와 더불어 로마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는데 그는 대단한 맹활약을 하여 동맹시 전쟁을 로마의 승리로 마무리짓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처음에 술라는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보좌관으로 남부 전선에 파견되었다. 반면 마리우스와 또 다른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북부에서 싸웠다. 마리우스가 마르시족을 공격할 때 술라는 그와 합동작전을 벌여 마르시족을 무찔렀다.[13]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마지막 공동작전이었다. 두 명장이 이후 역사의 영원한 라이벌이 되는 것을 보면 흥미로운 전투라 할 만하다.
술라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임기를 마치자 남부 전선의 총사령관이 되었다.[14] 우선 폼페야니족[15]의 클루엔티우스와 싸워 그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전사시켰다. 이후 술라는 히르피니족 도시인 아이클라눔의 성벽이 목재인 것을 파악하고 화공으로 점령한 뒤 약탈했다. 이에 히르피니족은 술라에게 투항하였다.
이어 삼니움족의 무틸루스가 그의 타겟이 되었다. 술라는 무틸루스를 격파하고 아이세르니아에 고립시켰다. 술라는 빠르게 삼니움 세력을 정리하고 이탈리아 공화국 세력에 결정타를 가했다.
술라는 동맹시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워 '풀잎관(Corona Graminea)'을 받았다.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술라는 기원전 88년에 50세의 나이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2.4. 1차 로마 진군
술라는 집정관이 된 뒤 동쪽 헬레니즘 제국 중 하나였던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당시 로마는 막 동맹시 전쟁이 끝난 상태였고, 동맹시들은 모두 로마 시민권을 수여받은 상태였다. 로마에선 이들에게 어떻게 선거구를 줄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는 이들에게 기존의 로마 시민들이 갖고 있는 선거구를 웃도는 숫자의 선거구를 줄 것을 원하였다. 원로원이 반대하자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그 때 로마에 있었던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피해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그 뒤 술라가 자신의 군단병이 주둔하고 있던 놀라(Nola)라는 도시로 빠져나가자 폭동을 일으켰던 민중파는 민회를 소집해 술라가 가지고 있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마리우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는 민중파의 지나친 폭거였다. 그 이유는 군단 지휘권은 집정관이 이끄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이를 박탈한다는 것이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빼앗은 지휘권을 아무런 직책이 없는 민간인 신분의 사람[16]에게 준다는 것 또한 전례에 없던 일이었다.
놀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술라는 당연히 분노했는데 마리우스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놀라에 집결된 로마 군단병이 이미 술라에게 사병화된 상태였다. 그 이유는 술라가 군단을 편성하면서 일선 지휘관들을 전부 자신을 따라 동맹시 전쟁을 수행했던 장교들로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우선 지휘권이 마리우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 로마에서 파견 나온 사절들에게 돌팔매질을 해서 쫓아냈다. 그 뒤 술라는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마리우스와 민중파는 이러한 술라의 행동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현직 집정관이 자신에게 주어진 군단을 이끌고 로마 시를 공격한 일은 로마 건국 이래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술라는 민중파가 일으킨 폭거에 더 심한 폭거로 대항한 셈이었다.[17] 따라서 마리우스와 그의 일파들은 로마 시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로마를 장악한 술라는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폰투스 원정을 떠났다.
술라가 떠난 뒤, 두 집정관 중 하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도움을 받은 마리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귀국하여 로마에 입성했다. 마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하자마자 거부권을 행사하는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죽인 뒤, 술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추방형을 내렸다. 그 뒤 마리우스는 7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나 이미 71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그 해에 죽고 말았다.
2.5.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는 놀라를 떠나 그리스에 도착한 뒤 아테네를 공격했다. 로마의 군사력이 강한 것을 보고 로마에 붙기로 결심한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술라에게 사절을 보내 협력하겠다고 제안했고 술라는 이들을 모두 환영했다. 술라는 아테네를 포위한 뒤 곡식을 철저히 차단하여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냈다.이듬해 술라는 북상하여 카이로네이아에서 아르켈라우스가 이끄는 폰투스군을 맞아 싸웠다. 이때 로마군은 4만여 명, 폰투스군은 12만 명이었다. 이곳에서 술라는 적이 돌투성이었던 언덕 아래에 진지를 구축한 것을 발견하고 즉각 싸움을 걸었다. 즉, 팔랑크스를 쓰기에 좋지 않은 로마군의 언덕 아래에 폰투스군이 포진한 것. 적 사령관이 어지간히 무능하지 않고선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로마군은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데다 지형적 유리함도 있어 싸움은 일방적으로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폰투스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로마군의 좌익을 포위하려고 했으나 술라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하여 격퇴했다. 곧 중앙과 우익에서도 폰투스군이 격퇴되면서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사료를 남긴 로마 시대 역사가인 아피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놀랍게도 폰투스군은 11만이 죽었고 로마군의 전사자는 12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 정도 손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현대전과 달리 고대전에서는 전투 중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전사자는 후퇴 중에 발생했다. 보통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는 병사는 전사자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에, 아군은 현장에서 즉사한 군인만 따로 집계하고 적군은 추정 살상까지 포함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수치이기도 하고, 로마인들이 기록한 전투들의 사상자 비율이 실제보다 과장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 현대 학계의 통설이므로 이 수치 역시 제법 과장한 숫자이리라.
폰투스군을 대파한 술라는 집정관 킨나가 파견한 로마 정규군과 조우했다. 로마 정규군은 마리우스가 죽고 후임 집정관이 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이끌고 있었다.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유혹하였다. 플라쿠스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 데다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탈주하여 술라 휘하로 들어갔다.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는 대신 북상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기로 했고 술라는 이들 플라쿠스군을 쫓는 대신 남하하고 있는 폰투스군을 맞아 오르코메노스 곶으로 이동했다.
오르코메노스에서 술라는 폰투스군을 상대로 한쪽엔 참호와 도랑을 파 놓고 다른 편에 군대를 보내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했다. 한쪽은 호수인데다 참호와 도랑으로 압박을 당한 폰투스군은 패주했고 이로써 폰투스군은 대패했다. 이때 참호를 파서 싸운 것은 전사에서 최초로 참호에 병사를 둔 뒤 싸운 예라고 한다.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폰투스가 동원한 병력이 8만 명으로 알려졌다. 기록에 따른다면 12만 명 중 11만 명이 죽고 나서도 뒤이어 8만 명을 동원했다는 말이 된다. 동원력으로 친다면 폰투스는 중국의 거대한 왕조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폰투스의 영토는 아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이탈리아 반도보다 작았고, 또한 이미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시칠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던 강대국 로마가 동원한 병력이 5만여 명임을 비교한다면 이토록 로마군을 웃도는 병력을 전쟁터에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잡병을 징집해서 죽창 들려 내보내는 것이었다면 8만이 아니라 80만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소아시아의 모든 로마, 이탈리아의 시민들을 학살한 미트리다테스 6세의 인간성을 보면 자신의 영토에서 마구잡이로 징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친인척 제거는 물론 키오스인의 씨를 말릴 정도로 잔학했다. 이렇다면 술라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전력의 폰투스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는게 가능하다.
녹색 부분이 폰투스 왕국, 단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저 밑의 아나톨리아(이스탄불 동쪽의 터키 지역)를 완전히 지배 하에 넣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당대 로마에 비하면 한줌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양국의 군사 제도를 보자면 로마군은 로마 시민만 지원이 가능한 데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에 모병제였다. 따라서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시민권법에 따른 기존 로마 시민과 로마 시민이 된 이탈리아인만 모병대상이었다. 반면 폰투스는 전제군주인 왕의 재력으로 고용한 용병과 징집병이 주력이었다. 즉 아나톨리아 전체가 폰투스의 병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폰투스는 보스포루스를 기반으로 스키타이까지 영향을 확대했기 때문에 스키타이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양국의 상황을 보자면 우선 로마는 동맹시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삼니움이란 불씨는 남아있었고[18] 가장 중요한 문제인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을 치러야 했다. 즉, 로마의 술라 정부는 마리우스라는 강력한 적이 주적이고 동방의 적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적이었다.[19] 이탈리아에 주둔한 병사들이 속속 마리우스에 가담하고, 삼니움족도 마리우스를 지원하면서 로마는 마리우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20] 반면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만이 적이었고 서방으로 빠르게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와의 전쟁에 모든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고 로마는 일부만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시아와 킬리키아의 속주 주둔군을 이미 격파한 상태였으며 그리스까지 손을 뻗고 있는 상태였다. 원정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한 폰투스는 많은 자금을 확보한 상태라 술라에게 패하고도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당시 로마는 동맹시 전쟁으로 인한 군비 차출로 국고가 바닥나 있었다. 집정관 술라는 가까스로 군비를 마련하고 6개 군단을 이끌며 원정을 떠났는데 그리스에서도 신전을 약탈할 정도로 군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21]
즉, 폰투스 측의 군세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설사 과장이 아니더라도 완전 불가능한 수의 병력은 아니었고 로마에서는 내전과 경제 상황, 동맹시 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적은 병력만을 출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이 폰투스를 이긴 원인은 술라의 군사적 재능과 로마 병사의 질(술라를 따라 삼니움을 격파한 정예병), 폰투스 장교들의 무능함이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총사령관의 역량이다. 술라가 쓴 전술은 폰투스의 전차와 팔랑크스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폰투스의 전차나 팔랑크스가 오면 로마 보병은 양측으로 비키며 측면에서 공격을 가해 무력화시켰다. 결국 보병전을 벌여 로마 군단병이 폰투스군을 격파했다. 즉, 술라의 전술은 효과적이었고 전투에 승리를 가져온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폰투스군이 훈련이 덜 되었던 점도 있었다.로마와 폰투스의 전쟁을 쭉 보자면, 술라의 원정 이전에 동방에 파견된 아퀼리우스와 카시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공격하다 크게 패배했던 반면 술라와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같이 뛰어난 지휘관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훗날 술라가 남겨놓은 로마 사령관 리키니우스 무레나도 폰투스에 탈탈 털리고 로마로 귀국한다.
패주한 폰투스군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철수하였고 북상 중인 플라쿠스군은 이들을 추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플라쿠스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는 매우 엄격한 지도자였던 플라쿠스가 폰투스군을 맹추격하길 원하였고 그의 부하였던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폰투스군이 떠나고 없는 도시들을 점령한 뒤 약탈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플라쿠스는 핌브리아를 해임하고 로마로 귀국할 것을 명령했는데 핌브리아는 이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플라쿠스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병사들 모두 핌브리아를 따라 약탈을 하기를 원했으므로 플라쿠스를 배신했다. 집정관 플라쿠스는 달아나다 붙잡혔고 핌브리아에게 처형되었다.
이토록 술라의 뒤를 이어 그리스에 파견된 로마 정규군은 막장으로 치달았으나, 이들을 무시한 술라는 그리스 섬들을 점령하는 데 전념했다. 핌브리아의 로마군은 터키 지역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의 잔존 병력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핌브리아군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추격하여 그를 페르가눔이라는 도시에 몰아놓고 포위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배를 타고 피타네라는 도시로 달아났고, 이를 추격한 핌브리아군은 피타네를 포위했으나 미트리다테스 6세의 도주를 저지할 해군이 없음을 안 핌브리아는 술라의 명령으로 해군을 편성했던 루쿨루스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핌브리아의 요청을 거부했고 이를 들은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몰래 강화를 맺기로 했다. 배를 타고 달아난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를 만나 강화를 맺었다. 이때 미트리다테스 6세는 선단 70여 척으로 구성된 해군을 모두 술라에게 넘기고, 3천 탈렌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포로가 된 폰토스 병사들을 전원 석방하는 것뿐인 아주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탈리아인과 로마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로 온건한 강화를 맺은 술라에게 병사들이 너무 관대하게 강화를 했다고 불만을 말하자 술라는 지금 미트리다테스 6세와 강화하지 않으면 궁지에 몰린 그가 핌브리아군와 연합하여 우리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지금 처한 상황을 논리있게 차분하게 설명해서 병사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핌브리아군은 이러한 강화조약이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고 여겼으므로 계속 터키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고 술라는 이들과 맞서기 위해 터키 지역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84년 핌브리아는 술라와 싸우려고 했으나 핌브리아의 병사들은 핌브리아를 따라 집정관 플라쿠스를 살해한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이미 충분한 전리품을 약탈하여 욕심을 채운 상태라 핌브리아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술라에게 붙기로 하였고 병사들에게 배신당한 핌브리아는 자결했다.
술라는 새로 붙은 병사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기존 병사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터키 지역의 점령지에서 마음껏 약탈하도록 허용했다. 이러면서 여러 신전들과 도시들에게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한편 로마의 통치자였던 킨나[22]는 술라와 맞서기 위한 군대를 모아 일리리아를 향해 행군하던 중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킨나의 군대는 술라와 싸워봐야 전리품을 많이 얻을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싸우기를 내켜하지 않았다. 가령 술라군의 경우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나라를 응징하는 것이었으므로 약탈의 기회가 많았다. 약탈은 병사들에게 있어 한 밑천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킨나의 군대는 술라군을 진압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이겨봐야 약탈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았다. 게다가 병사들은 킨나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도 신뢰를 하지 않았는데 킨나의 상대인 술라는 마리우스 휘하에서 이미 유구르타 생포, 게르만족 격파, 동맹시 전쟁 승리 등 여러 전장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명장[23]이었고,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도 연이은 대승을 거두어 당대에 가장 유명한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병사들은 킨나가 술라를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전리품도 얻을 가능성도 별로 없는 데다 고향인 이탈리아를 떠나 싸워야 하니 전쟁을 하러 가는 게 상당히 내키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킨나는 병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쓰기보단 오히려 그들에게 눈이 덮힌 산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병사들은 킨나에게 불만이 쌓인 터에 킨나의 수행원이 보초를 서던 병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구타하자 병사들이 완전히 분노하여 킨나와 그의 일행을 집단으로 공격해서 모두 살해했다. 킨나가 평소에도 술라와 다르게 병사들에게 인망이 없던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다.
2.6. 2차 로마 진군
킨나가 살해되자 로마에선 더 이상 술라와 맞설 만한 인물이 없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기원전 83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술라는 로마로 북상하기 시작했고, 로마에서는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이 저항했으나 워낙 술라에 비해 명성이 떨어진 데다 전술에 있어서도 술라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또한 술라가 이길 가능성이 높아지자 원로원의 유력 귀족들 대다수가 술라 편에 섰으며, 술라에게 맞서기 위해 편성된 군대까지 속속 술라편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하지만 민중파는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가진데다 그들의 군사력은 술라군을 훨씬 압도했다. 게다가 무자비한 술라가 집권하면 죽을 목숨이 될 것이 뻔한 민중파는 사력을 다해 맞서게 되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죽은 마리우스를 존경했기에 그의 아들과 민중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즉 뛰어난 총사령관 술라의 지휘를 받는 소수의 군대와 죽은 마리우스의 위망을 기반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는 대군의 대결이었다.술라는 마리우스의 아들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집정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를 격파하고 다른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대치했다. 스키피오는 술라의 2배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하여 수적으로 우세했다. 술라는 스키피오 군대가 결속력이 떨어지는 것을 파악하여 마치 스키피오와 협상을 하는 것처럼 스키피오 군대에게 접근했다. 스키피오는 술라가 자신과 협상을 바라는 줄만 알고 술라와 자신의 군대가 은밀히 거래하는지 전혀 몰랐다. 양군이 만나자 스키피오의 군대는 와해되어 술라에게 합류하였고 스키피오 진영에는 스키피오와 그의 아들만이 남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술라에게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기원전 82년 술라는 새로 선출된 집정관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일명 '젊은 마리우스)를 프라이네스테에서 박살내고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술라는 오펠라에게 포위 임무를 맡겼고, 젊은 마리우스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려 로마의 유력 인사를 모두 죽이고 로마에서 철수하도록 했다. 술라가 로마를 장악하고 민중파의 카리나스를 크게 무찌를 때, 북부 전선에서는 술라의 부하 메텔루스 피우스가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연달아 격파했다. 당시 24세였던 폼페이우스 역시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민중파 군대를 섬멸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곳곳에서 술라와 그의 부하들의 승전보만이 들려왔다.
한편, 동맹시 전쟁에서 술라에게 크게 패배한 삼니움족의 텔레시누스는 민중파와 손을 잡고 로마로 진격했다. 허를 찔린 술라는 급히 삼니움군에 대적했다. 콜리네 성문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 크라수스가 이끄는 술라군 우익은 적을 무찌른 한편 술라가 직접 이끄는 좌익은 고전하고 있었으며 술라가 투창에 맞을 뻔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전투는 술라의 승리로 끝나고 술라는 저항한 민중파 멤버들을 살생부에 올려 모두 살해했다.
2.7. 술라의 공포정치
최종 승자가 된 술라는 기원전 81년 57세 나이로 독재관이 되었다. 원래 독재관은 6개월이라는 임기 제한이 있었는데 술라는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술라의 독재관은 "법을 만들고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dictator legibus faciendis et rei publicae constituendae)"[24]으로 비상사태가 끝나고 공화국이 재건되면 임기가 만료되는 것이었다. 즉 비상사태가 계속된다는 명분 하에 계속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공화정이 생긴 이래 원로원이 한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준 최초의 사례였고, 훗날 카이사르에게 영향을 미쳐 그가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에 취임해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독재관이 된 술라는 즉시 공포정치를 개시했다. 반대파 학살을 위해 1500명의 명단이 적힌 살생부를 공표했는데, 실제로 살해된 인물들은 무려 9천 명에 달하였다. 원래 술라는 살생부도 작성하지 않고 그냥 죽였다. 끝까지 술라에게 항전하던 정규군 측 6천 명의 삼니움족 전사들이[25]로마 시내에서 실시간으로 학살당하며 지르는 처절한 비명이 들려와 주위 사람들이 공포에 떨자 술라는 낯빛을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죽는 것에 신경쓰지 마시오."
이후 가이우스 메텔루스라는 사람이 무고한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니 그때 술라가 고안한 것이 살생부였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민중파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뿐이었다. 당시 300명이 정원인 원로원의 30배에 해당되는 수를 처형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씨도 남기지 않을 정도의 철저한 숙청이었다.
특히 이렇게 처형된 자의 재산은 몰수된 뒤에 술라의 측근들이 나눠가졌고 이때 크라수스와 같은 인물들은 재산을 엄청나게 불렸다.
이로 인해 술라의 통치시기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공포정치 시대로 각인되었다. 심지어 나중에 티베리우스 통치 말기의 노망이나 네로 말기의 좌충우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대숙청 시기만 해도 원로원 계급만 때려잡았지 지방 기사 계급이나 평민 계급은 건드리지 않았고 따라서 비판 여론이 존속할 수 있었다. 혹독한 숙청으로 도미나투스 전제정치를 개시했다고 평가받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만 해도 "이건 뭐 술라가 흑인으로 환생했나요?"라는 당대의 기록이 남을 수 있었지만 술라 시대엔 그딴 거 없고 걸리면 무조건 죽었다. 그리고 같은 원로원 계급이라도 민중파 영애와의 이혼명령을 거부하면 마찬가지로 그냥 죽였으므로 명목상 수혜자인 원로원 계급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렇게 수많은 민중파 인사들을 학살한 뒤 술라는 로마법 체계를 바꿔 자신이 속한 옵티마테스파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그는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해 정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으며, 평민 집회에서 선출되는 호민관들이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기사계급(에퀴테스)과 로마의 배심원 전원을 원로원 의원들로 채움으로써 귀족들이 사실상 면책 특권을 갖게끔 만들어 놓았다. 이는 훗날 카이사르의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이탈리아 각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휘하의 퇴역 병사들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는 성공적이지 못하여 다수의 병사가 현지에 적응하지 못해 훗날 큰 문제를 일으켰다.
곡물법을 폐지했다. 즉, 민중들은 곡물을 싸고 일정한 매입가로 구매할 수 없게 되었다.
호르텐시우스법[26]을 폐지시켜 민회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내전 당시에 마리우스의 편을 든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토지는 로마의 공유지로 몰수되었다. 삼니움족의 무틸루스, 텔레시누스 같은 지도자들은 술라에 의해 제거되었다.
군사정변에 대비하기 위해 집정관은 한사람만 출정나갈 수 있었고 이탈리아 내에서는 집정관 권한으로 4개 군단만 편성할 수 있게 했다. 또 전직 집정관이 다시 집정관이 되려면 집정관을 지낸 해로부터 10년을 거치도록 정했다.
그리고 속주 총독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고, 원로원에게 막강한 통제권을 주었다. 또 총독이 되기 위해선 명예로운 경력을 거쳐 법무관 이상의 관직에 오르도록 법안을 강화했다.
또한 한 개인이 돌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술라는 로마의 명예로운 경력에 나이 제한을 두었다. 이렇듯 술라는 독재관 임기 중 철저하게 옵티마테스의 권력을 강화하는 식으로 로마법을 고쳤다.
독재관 시기의 민중파 숙청 과정에서 술라는 한 젊은이의 이름을 살생부에 올리는데, 그게 바로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술라는 그에게 당시 아내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 킨나와 이혼할 것을 요구했으나 카이사르는 단번에 거절했다.[27] 분개한 술라는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했으나 여러 사람들의 청원에 못 이겨 끝내 살생부에서 카이사르의 이름을 지우는 데 승인한다. 그러나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 것인지, 마지못해 카이사르를 살려주면서도 술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저 카이사르란 젊은이 안에는 마리우스 수백 명이 들어앉아 있단 말이오."
술라의 개혁은 훗날의 독재를 막기 위해 잠시 독재를 한 것이었지만 술라 사후, 그가 재건한 공화국은 술라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에 의해 무너지고 민중파 카이사르에 의해 결정적으로 붕괴된다.
2.8. 은퇴와 죽음
술라는 독재관을 단 2년 만에 그만뒀는데 이는 과두정 옹호파인 옵티마테스였던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것이었다.[28] 술라의 권력 기반 자체가 옵티마테스였고, 또한 민중파를 공격한 뒤 학살한 것과 뒤이어 한 개혁들은 이들이 공화정의 토대를 흔드는 것을 막기 위해 실행한 것이었으므로 술라가 일인 통치 체제인 독재관을 그만두고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려 놓은 것은 필연적이었다.기원전 80년 독재관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사저에 틀어박혀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회고록의 탈고를 무사히 마쳤으나 곧바로 급작스럽게 죽었는데 당시 사료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술라는 만성적인 알코올 의존증에 빠졌으며 이에 따른 급성 간경화 혹은 위출혈로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술라가 죽은 뒤, 그의 처우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집정관 카툴루스는 그를 국장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집정관 레피두스[29]는 장례식을 치를 명예조차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이 알려지자, 격분한 술라의 퇴역병들이 전 로마에서 몰려들었고 국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자기가 생각한 비문이 새겨졌는데,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3. 술라 개혁의 성과와 문제점
3.1. 성과
술라 개혁의 근본적인 목적은 본인과 그 추종자들, 즉 옵티마테스로 알려진 원로원 내 인사들이 정부 체제를 주도하고 이를 안정된 정부로 이끄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원전 78년 술라는 자신이 은퇴 후에도 이러한 체제가 수립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뿌듯함을 가지며 죽었다. 그렇지만 이런 술라의 개혁은 문제점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벌인 희생에 비해 개혁의 성과는 상당히 별볼일 없었고 이로 인해 공화정 체제는 그의 사후 예상보다 빨리 붕괴하고 만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일부는 성과가 뚜렷한 것도 있었다.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준, 민회에서 재판을 다룬 관행을 폐지하고 모든 재판을 상설 법정체제에 위탁한 법정 개혁 또는 사법부 신설 개혁이었다. 술라는 집권 이후, 원로원 의원들을 배심원에 임명했고 법정 판결 역시 원로원의 입김을 강화시켜 여러 문제를 낳았다. 허나 그는 로마 공화정 시대에서 상당히 진취적이었던 호민관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하려고 한 법정 개혁과 상설 법정의 전문화, 법정 수 증대를 모두 실행에 옮겨, 이를 개혁에 반영했다. 따라서 술라 개혁 이후부터 로마의 치안 판사 제도와 상설 법정은 속주 총독의 부당 취득재산 반환 청구, 선거 위반 및 뇌물수수, 반역죄, 위조 및 사기, 공금횡령, 살인, 폭행의 7가지 틀을 갖추게 됐고, 이는 이 업무를 전담하는 법무관 정원 숫자의 증가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다음으로 술라는 원로원 주도의 반동 개혁이라는 비판에도, 어쨌든 기사계급들에게 원로원 문호를 개방해줬다. 또 로마의 문제 타개를 위해 정무관직들과 속주 총독 정부 사이의 합리적 업무 조정도 신경쓰면서 이 부분에서의 중앙통제의 한계도 일정 부분 해소시켰다. 하지만 이는 그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유기적 연계를 중요시하고, 원로원 내 정치게임의 일상화를 방지해 신참자로 입성한 이들이 현 체제 속에서 자신의 국제를 지지하길 바란 조치였다. 더군다나 이 두 가지 개혁은 문제점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모래성이 붕괴되듯 술라 사후 와장창 무너졌다. 왜냐하면 이후 등장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같은 이들이 자신의 야심을 위해, 술라가 만들어 놓은 공화정 체제의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의 연계를 도리어 자신이 유리한 정치게임에 이용했기 때문이다.[30][31]
3.2. 결과 및 한계
결론부터 말하면 술라의 개혁은 명분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전부 실패했다. 술라 개혁은 법정 개혁 외에는 그의 목적처럼 항구적으로 로마 국제에 자리잡지 못했다. 또한 그의 개혁은 공화정 체제의 종말을 가지고 왔다는 평이 따라올 정도로 여러 문제를 낳았다.우선 술라의 발호 자체가 아무런 집권 정통성이 없었으며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서 집권의 정당성 마찬가지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로마 공화국에서는 발동 즉시 로마시민권자를 재판없이 사형시킬 수 있는 원로원 최종권고의 위헌성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술라는 그 원로원 최종권고조차 없이[32][33] 군대를 일으켜 조국 로마를 짓밟고 노예부대를 동원해 살생부에 오른 반대파를 불문곡직 쳐죽였다. 게다가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고도 반대파가 도심 투기장에 짐승떼처럼 몰려 살해당하며 지르는 비명은 숫제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협박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결과적으로 술라의 모든 정치적 행보는 원로원에 대한 존중은 털끝만큼도 없는 공포정치 그 자체였는데 아무리 옵티마테스들이라 한들 술라를 좋게 생각할 리가 없다. 술라 본인이 개혁을 마친 후 깨끗하게 권력을 내려놓았다고야 하지만 살아있는 술라는 사실상 태상황이나 다를 바 없어서 아무도 술라를 생전에 비판하지 못했다. 결국 로마 공화국의 흉흉한 공포 분위기는 술라가 죽고 나서야 폼페이우스 같은 '술라 키즈'들과 온건파 옵티마테스들에 의해 진정되었다.
또한 술라는 반대파에 대한 효율적인 학살을 위해 무제한적이고 무분별한 사적 폭력을 동원했는데 이는 원로원 권위 회복 공로 따위로는 가릴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였다. 애초에 공권력으로는 반대파 탄압을 적법하게 할 수 없으니까, 술라는 군대를 동원해 협박으로 얻어낸 묵인 하에 노예로 이루어진 인간사냥대를 창설하고 살생부를 작성해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의 민중파 유지들을 불법으로 학살했다. 즉 노예들이 그 많은 사람에게 무슨 약탈 강간 폭행을 가하든 모조리 죽여주기만 하면 상관 안 했던 것이다. 아무리 반대파라지만 어젯까지 한솥밥 먹던 동포들이 버젓이 그런 꼴을 당해나가는데다, 민중파라고 해서 다 시장바닥 출신인 것도 아니었다. 명가 출신 포퓰라레스나 옵티마테스와 혼맥으로 얽힌 평민 유력자도 많았으니, 옵티마테스들도 속으로는 학을 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술라는 원조 명문귀족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중 집정관 경험자인 루키우스가 원로원파라는 이유로 마리우스에게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우스의 조카라는 이유로 스무살도 안된 장손 가이우스를 죽여 없애려고 했고, 가이우스가 킨나의 딸과 이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그대로 척살령을 내렸다. 그 가이우스는 본인이 명문귀족인데다 역시 명문귀족인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의 외손이었고 무엇보다도 술라가 젊어서 사별한 아내 율리아 카이사레아의 친정집 장손이었으니 술라가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는지 보여준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오랜 도피생활 끝에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과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 그리고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의 탄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본질적으로는 술라는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귀족층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민중파들의 권한을 철저히 축소시켰다. 따라서 민회가 법안을 가결하는 권한을 박탈하고 호민관의 거부권과 이들 호민관이 명예로운 경력의 다른 공직에 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문제는 공화정이라는 것 자체가 이들 민중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정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시켜 놓아도 여전히 명예로운 경력의 공직자들은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로마 정부는 민심에 기반할 수밖에 없었으며[34][35]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에서 민중들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결국 이런 요인들로 인해 술라의 개혁이 효과가 있을 턱이 없었고 실제로 술라가 죽고 얼마 안 있어 이러한 개혁들은 모두 폐지되고 원상복귀된다.[36]
또한 술라는 민중파 인사들을 철저히 숙청했으나 이것도 실상 쓸데없는 노력이나 다름없었다. 민중파는 단순한 세력집단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로마 평민들과 이탈리아인들의 요구에 응답한 정치가들과, 그들에 대한 지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37][38] 따라서 이러한 민중파 인사들을 발본색원해 봤자 평민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또 다른 인물을 대표로 내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새로운 민중파 정치가는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술라가 9천 명이나 제거해서 얻은 것이라곤 그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새로운 민중파 정치가들이 나오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은 효과 정도에 불과하였고[39] 로마 공화정을 강화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다.
당시 민중파가 자꾸 위협적으로 성장한 것은 원로원의 전횡이 점차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한 귀족들은 대농장을 경영하였고 그로 인해 로마 중산층은 점차 붕괴되던 중이었다. 그로 인해 빈민층이 넘쳐 결국은 중산층으로 제대로 된 군단병을 구성할 수 없게 되자 군단병을 빈민층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사회가 점점 이 지경이 되었으나 로마 원로원 귀족들은 이러한 것을 방관하였다.
로마 시민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그라쿠스 형제를 비롯한 강력한 호민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국유지 분배를 위한 농지법을 추진하자, 이들을 향해 '원로원 최종권고'를 이용해 무분별하게 학살함으로써 이를 억눌렀다. 마리우스가 등장하여 무산자들인 군단병들에게 퇴직금으로 토지를 지급하겠다고 하자 원로원은 절대로 줄 수 없다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즉, 원로원은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없이 로마가 전쟁을 통해 획득한 넓은 영토를 자신들이 가로채 이를 바탕으로 대농장을 경영하면서 부를 평민들에게 분배하려는[40] 민중파의 유력 정치가들을 살해하면서 맞서온 것이었다.
즉, 강력한 민중파 인사가 등장하는 것의 근본적 원인은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로마 평민들의 불만인데, 근시안적으로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기존의 체제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대응해봤자 제2의 그라쿠스 형제, 제2의 마리우스는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개혁의 한계였다.[41]
더군다나, 술라의 개혁은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래 본인이 직접 스타트를 끊은 로마군의 사병화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없었다는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공화정 말기에 로마에서는 연이어 유혈사태가 벌어지는데, 유능한 장군들이 자신의 군단병들을 사병처럼 부려 정치에 개입하기를 꺼리지 않았기 때문이다.[42] 그리고 이러한 좋지 않은 선례를 만든 사람은 바로 술라 본인이었다. 이렇게 사병화가 진행된 이유로는 중산층 자영농의 붕괴로 로마 군단병이 무산자들로 구성되면서 그들의 생계가 달린 봉급과 퇴직금 문제를 전적으로 그들의 군단 사령관에게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즉, 로마 군단병과 군 사령관의 사이는 용병단과 용병단장 비슷한 관계였다.[43][44]
훗날 최후의 승자가 되는 아우구스투스는 군단병 개인에 대한 봉급과 퇴직금을 명확히 규정하였고 사령관이 아닌 정부가 지급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사병화를 해결하였다.[45] 따라서 제정 시대로 돌입하면 더이상 술라, 마리우스, 카이사르 같이 사병화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중앙 정부를 뒤엎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46] 술라의 개혁에선 이렇게 심각한 문제였던 로마 군단병에 대한 처우 문제가 빠졌고 그로 인해 술라가 물러난 뒤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가 사병화된 군단을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47][48]
이렇듯 술라는 로마 공화정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긴 하였으나 근본적인 문제엔 전혀 접근하지 못했고 결국 그의 개혁은 사후 모조리 묻혀버리고 만다. 술라가 남긴 것이라곤 이탈리아 공화국과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진압한 군사적 업적 및 원로원와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로마 군단병으로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훗날 카이사르가 이를 본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만 있다고 해도 좋았다.
이를 증명하듯 술라가 은퇴하고 얼마 안 가 급사한 이후, 그의 부하이자 내전에서 한몫 단단히 챙겼던 크라수스나 폼페이우스는 후에 민중파를 자처하면서 진짜 민중파였던 카이사르[49]와 삼두정치를 이끌었고 술라파로 불린 세력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술라가 만들어 놓은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을 활용했다. 거기에 공화정을 전복할 큰 요소였던 사병화[50]는 점점 가속화되어 원로원은 술라의 바람과는 달리 그 힘을 점점 잃어갔으며, 결국은 이를 바탕으로 한 프린키파투스[51]가 탄생하게 된다.
술라 입장에서 더 큰 불행은, 그가 선례로 남긴 정적 숙청 방법과 공화정 체제의 운영 원리가 로마 제정의 바이블이 됐다는 점이다. 술라 체제는 기원전 27년과 기원전 23~21년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제안해 통과시킨 1차 조정헌법, 2차 조정헌법과 프라이토리아니, 델라토르 제도 확립에 훌륭한 선례가 됐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점으로 로마인에게 인식됐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란, 카이사르 체제라는 뼈대 위에 술라 체제 혹은 술라 개혁의 살을 붙이고 여기에 원로원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장식한 술라 이후의 공화정 체제이면서도 1인 종신 집권이 당연시된 형태의 로마식 제정이었고, 옥타비아누스파에서 참조한 선례란 곧 술라의 집권과 권력 유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일련의 로마 제정 탄생 속에서 술라의 선례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승리 후 옥타비아누스와 그 파벌에게 명분이 됐다.[52][53] 즉, 술라의 개혁의 목적은 공화정 체제의 복구와 수호였지만, 결국 그의 개혁은 끝내 공화정을 종식시킨 로마식 제정의 시조가 된 셈이다.
술라가 가졌던 권력의 크기와 강세는 훗날 황제들의 시대에나 볼 법한 권력이었는데, 하물며 제정 초기의 황제들도 그처럼 막강하고 침범이 불가한 권력을 누리지는 못했다. 이는 황제정의 확립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며 여러 변화와 인물을 거쳤기 때문이다.[54] 그렇기 때문의 술라의 권력은 정통성이나 신임에 의한 지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정적 말살에 따른 권력이었고 이는 공화정 체제의 로마에 있어선 기형적인 권력이었다. 그의 이념이야 어쨌든 술라의 행적은 반면교사에 가까운 사례들을 마구 남겨서 결과적으로는 필연적인 체제 붕괴를 불렀다.
4. 가족
아내가 총 5명이고 자식도 5명이다.[55] 첫 번째 아내는 일리아이다.[56] 두 번째 아내인 아일리아는 아이가 없었던 것 같다. 세 번째 아내인 클로일리아도 마찬가지.술라는 기원전 88년에 클로일리아와 이혼하고 최고제사장이었던[57]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의 딸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58]와 결혼했다. 메텔루스 가문은 마리우스의 전성기 이전부터 위세를 떨치던 보수파 가문으로 그 영향력이 상당했다. 따라서 술라는 메텔루스 가와 정치적 동맹을 맺게 되었다. 메텔라는 마리우스가 대학살을 벌일 때 술라에게서 낳은 파우스투스와 파우스타를 데리고 그리스로 대피했다. 파우스투스는 훗날 탑수스 전투에 참전하여 카이사르에게 패사했다. 파우스투스는 폼페이우스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 후손들은 제정 초기까지 살아남아 1세기 초에는 집정관을 역임하고, 클라우디우스 1세의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결혼해 황실과도 친척이 되는 등 명문가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파우스투스의 동명이인 손자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와 그 일가는 네로에게 "인품이 훌륭하고 기품이 있다"는 이유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손 브리타니쿠스의 외삼촌인 이유 등으로 견제를 받았다.
술라의 독재관 취임 후에 메텔라 달마티카는 사망했다. 그 후 술라는 검투 경기 관람 중 한 젊은 여인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술라의 토가에서 실밥을 뽑아 가져갔다. 이에 술라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묻자, '당신의 행운을 제가 조금이나마 얻고 싶어서 그랬어요'라고 답했다고. 이 여인은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의 딸 발레리아로 술라의 마지막 아내였다. 딸 코르넬리아 포스투미아를 낳았는데 그녀에 대한 술라 사후의 기록은 잘 남아있지 않다.
조카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카이사르파에 가담해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전했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카이사르군의 우익을 지휘했다.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65년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나 뇌물로 인한 선거 부정으로 판결되어 원로원에서 추방되는 등의 굴욕을 겪었고, 카틸리나의 음모의 가담자로 기소되었지만 키케로의 변호로 겨우 살아난 바 있었다.
술라의 차남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폼페이아 마그나와 결혼해 두 아들을 뒀는데, 이중 장손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쿨루스[59]가 메살리나의 어머니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술라의 증손자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다. 술라의 증손자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팔라스와 부루스의 반역모의 혐의 사건에 연루됐다고 누명을 쓰면서 두 번이나 반역재판에 기소됐고 끝내 네로의 사주를 받아 암살됐다. 그는 당대, 후대 로마인의 평가 그대로 자신의 조상 술라처럼 악인이 아니었지만 인품과 언행 속에서 피어난 특유의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파벌을 모으지 않았는데. 이런 행동은 특유의 온화한 인품 속에서 그를 '따뜻하고 고결한 귀족'으로 이름 높인 이유가 됐다. 그래서 타키투스는 이런 그가 네로의 만행에도 묵묵히 견디고 어떤 저항도 하지 않다가 죽은 것에 대해 "조심성이 많고 소심하고 비열한 구석이 있다"며 네로의 탄압에 저항하지 않은 점을 거론하면서 그 아쉬움을 표현했다. 또 타키투스는 네로가 펠릭스가 가진 고결한 인품과 대중들의 존경을 매우 두려워했다며 그가 네로에게 맞설 어떤 지위도, 권한도 없고, 자신의 증조부처럼 냉혹한 음모를 꾸밀 성격과 재능이 없었다며 그에 대한 아쉬움을 언급했다.
어쨌든 술라의 직계후손인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술라와 다른 묘한 매력과 타고난 인품으로 원로원 동료와 민중들에게 20대의 나이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60] 이런 평판은 "인기가 많고 훌륭해 문제다"고 네로에게 원한을 사서 서기 55년부터 시작된 네로 시대 동안 큰 고초를 겪게 된 이유가 됐다. 그는 네로, 세네카, 부루스, 타겔리누스에게 모두 제거대상이 됐다. 그러나 애초부터 생사람에게 없던 죄를 뒤집어 씌우고, 증인들도 말이 맞지 않아, 네로와 그 추종세력들의 집요한 공격과 두 재판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네로는 자신의 고종사촌형으로 고모의 아들인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진짜 미워하고 시기해[61], 무죄판결 뒤에도 어거지로 그에게 유죄를 내리고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오늘날의 마르세유로 유배보냈다. 이렇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갈리아로 추방된 그는 이곳에서 고초를 겪다가 네로의 명령을 받은 근위대장 티겔리누스에게 암살됐다. 이후 로마에 남은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와 술라의 직계 일가 역시 피소 음모때 누명을 뒤집어 쓰고 모두 살해됐다.[62]
술라의 직계는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가 서기 63년 살해된 이후 그 명맥이 끊겼는데,[63] 술라 가문 중 가문명을 이을 친척 귀족들도 피소 음모 사건 당시 네로에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큰 고초를 겪어 그 위세가 약화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주 적게나마 술라 일가 방계는 생존했는데, 이들 술라 일가 후손들 역시 서기 3세기 초인 세베루스 왕조때 마지막 후손이 억울하게 살해당하면서 완전히 멸문했다. 이 사건에 관해, 동시대 사람으로 당시 고위 원로원 의원이자 전직집정관이었던, 디오 카시우스는 술라 가문의 마지막 후손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카파도키아 총독으로 있던 중, 로마의 미치광이로 유명한 엘라가발루스에게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5. 여담
- 이미지와 비슷하게도 외모가 공포스러웠다. 붉은 빛을 띤 금발에 흰 피부로 푸른 눈을 가졌다. 젊었을 때 상당히 잘생겼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나빠지면서 창백해지고 빨간 여드름이 생겼다.
- 술라가 무제한의 임기를 보장받은 독재관 임기를 단 2년만에 사임하고 일반 시민의 지위로 돌아갔다. 사임 연설 후 연단에서 내려온 술라에게 청중 중 한명이 그동안의 행적에 대해 비판을 가했는데 술라가 그 사람을 가만히 노려보았더니 비판자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하였다. 이후 술라는 자신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 협상과 압박에 매우 능했기 때문에 보쿠스를 설득해 유구르타를 생포하고 나중에 파르티아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렇게 사람을 잘 다루었기에 그가 지휘하는 군대의 파업이나 불만 토로는 거의 없었다.[64][65] 적군의 결속력, 충성심, 전투 의지 등의 부재를 노려서 적을 분열시켜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면 정치력과 술수가 만렙에 달했다.
- 술라의 장군으로 작은 마리우스를 제거한 퀸투스 오펠라가 술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중 앞에서 술라를 비난하며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려 하자 즉시 그를 제거했다. 같은 편이라도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하면 거리낌 없이 죽이는 술라의 냉정함을 알 수 있다.
- 라이벌이라 불리는 마리우스와 19살 차이난다. 거의 아버지 뻘이다. 사실 마리우스와 술라의 경쟁구도는 마리우스가 장수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다. 마리우스가 69세의 고령에 군사 지휘권을 두고 50세의 술라와 경쟁했었다.[66]
- 살생부를 작성하고 독재관에 오른 탓에 당시부터 공포스러운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다. 보수주의자라고 칭송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의 행적이나 개혁을 보면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원로원파와 기사계급만을 위해서 기존의 법과 절차를 무시한 독재자였다는 비판도 받는다.
- 인생 후반에 최전성기를 누렸다. 50세에서 60세까지가 그의 전성기였는데 이는 평민 출신에 지방 출신이었던 마리우스가 50대에 최전성기를 누린 것과 같다.
- 막내딸과 나이차가 60세가 넘는다. 술라의 마지막 아내 발레리아가 낳았고 술라 사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 인재를 보는 눈이 뛰어났다. 폼페이우스, 루쿨루스, 크라수스, 메텔루스 피우스 모두 술라가 발굴해낸 인재들이며 술라의 로마 진군과 그 이후에 큰 활약을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두말할 것도 없고 크라수스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삼두정치를 한 대갑부가 되었으며 루쿨루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무찌른 명장이 되었다. 또 아직 어린 나이었던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하기도 했다.
- 내전 최종 승리자들 중 마리우스, 아우구스투스와 더불어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은 3명 중 한 명이다. 암살된 카이사르와 원정에 실패하고 손자들이 요절해 힘든 말년을 보낸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술라는 말년을 쿠마이에서 편하게 지냈다. 본인도 자기 인생에 만족하여 행운아를 자칭했고 회고록을 집필했다.[67] 하지만 카이사르와는 다르게 그의 회고록은 현재 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는 카이사르보다 운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술라의 후손들까지 '행운아'로 살지 못했다. 술라의 직계손(아들 파우스투스의 손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고종사촌동생 네로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젊은 나이에 마실리아로 유배됐다가 살해됐고, 몇년 뒤 아내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마저 피소 음모 사건 당시 반역죄로 모함받아 살해됐는데 이때 술라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이 났다.[68]
- 동방원정 당시 그리스 신전의 자금을 약탈하려는데 그의 종자들이 어떤 음악 소리를 듣고 아폴론의 경고음이 들린다고 두려워했다. 이에 술라는 그 소리는 아폴론이 자금을 가져가라고 허락한다는 뜻이라며 금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술라를 따랐다. 그렇게 술라는 군자금을 챙겼다.
-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그리스에 있던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의 카이사르와 대치 중이었는데 이탈리아 진군 문제에 대해 '술라도 했는데 나라고 못 하겠느냐' 라고 언급했다. 카이사르는 술라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 가나다도 모른다는 평가를 내렸다.
- 폼페이우스가 카르보 일당을 소탕하고 로마로 귀환할 때 술라에게 개선식을 요구했다. 술라는 불허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대가 요구하는 것이라며 군대를 이끌고 로마 근처까지 진군했다. 술라는 "왜 나는 어린이들과 싸워야 하는건가" 라고 말했는데 어린이들은 젊은 마리우스와 폼페이우스를 의미한다. 그러면서 역시 군단을 편성하는데 이에 폼페이우스는 술라에게 반역의 의미는 없다며 술라의 오해를 풀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술라와 로마 근처에서 만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을 떠오르는 태양에, 술라를 지는 태양에 비유하자 술라는 그의 대담함에 개선식을 허락해주었다.[69] 다만 폼페이우스에게 아내 안티스티아와 이혼하고 자신의 양딸 아이밀리아 스카우라[70]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 생전의 카리스마와 냉혹한 이미지, 묘한 미덕 등으로 제정 시대 로마인들에게 부정적이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매력적인 냉혈한으로 회자됐다. 그 예로 타키투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황제가 자신의 종손, 후계자 가이우스(칼리굴라)가 마크로를 이용해 권모술수를 펼치고 교묘히 영향력을 행사하자 술라를 거론하면서, "우리 가이우스는 술라와 비슷하지만, 그가 가진 미덕만은 가지지 못했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또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껴안고 눈물을 지으면서 칼리굴라에게 "너가 이 아이를 죽이겠지. 그리고 너도 누군가에서 죽겠지."라고 예언할 당시 종손자에게 서두에 꺼낸 인물이 바로 술라였다고. 이 외에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역시 술라와 비견됐는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대대적인 정적 숙청을 보고 로마인들은 혀를 내두르면서, 살생부를 만들어 잔혹하게 반대파를 숙청한 그에게 '푸닉 술라(북아프리카의 술라)'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고 한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로,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폭군 카라칼라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못지 않게 좋아한 위인이자 가장 존경하는 로마인으로 유명해 3, 4세기 제정 시대 로마인들에게 그 이름이 널리 회자됐다. 어느 정도였는지, 원로원에게 서한을 보내 명령하고, 술라의 무덤을 황제의 무덤 수준으로 단장하고, 꽃을 매일 바치게 했다. 동시에 그는 트로이 방문 당시 자신의 동상 좌,우에 술라와 한니발의 전신상을 설치하고,[71] 휘하 군대에게 술라 동상 앞에서 서서 그 충성을 맹세하라고 명하며 이렇게 연설을 했다.
"제군은 로마 공화국의 위대한 장군이시며 위대한 정치가이신 술라에게 경의를 표하라! 그리고 좋은 과일과 꽃을 술라의 조각 앞에 바치고 기도하라!"
카라칼라가 이렇게 술라에게 열광한 이유는 아버지 세베루스가 평소 제왕교육을 시킬 때 정적을 견제하고 원로원을 제어하는 방법은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훌륭했다며 주목하게 하자, 이를 따르면서도 아버지가 세간에 "푸닉 술라"로 불린 점에 큰 관심을 갖게 된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정적, 로마 서민들에게 "푸닉 술라"라는 악명을 얻었던 일을 불명예로 여겨, 자신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와 비교되는 것은 용납해도 술라와 비견되면서 이 별명을 얻게 된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술라는 로마인에게 그 이미지가 냉혈한을 넘어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비열한 악인의 대표명사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카라칼라는 사춘기 이후 공개적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와 함께 술라를 꼭 언급했고, 그 끝에서는 항상 이렇게 말을 마무리 지어, 사람들에게 비양심적이고 잔혹하다고 평가받았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72]보다 술라는 모든 로마인 중 가장 위대하다."
그래서 술라의 무덤이 대대적으로 복구되고, 원로원에서 매일마다 꽃, 과일, 포도주를 올려 술라를 기린 일은 술라 사후 직후의 상황이 아니라 수백년 뒤인 카라칼라 시대때부터였다. 이는 그가 공동황제인 친동생 게타를 직접 살해한 다음날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따라서 이를 들은 로마인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와 그 측근들을 직접 죽인 뒤, 어머니와 이모를 협박하고 2만명의 무고한 이들을 술라가 하던 방법 그대로 모방해 인간사냥하듯 죽여 큰 항의를 받았다. 그런데 이때 그는 자신에게 항의하는 의원, 민중들에게 전설처럼 떠돌던 술라의 발언("무죄이든, 유죄이든 똑같다")을 정색하며 외치고 반발하는 이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카라칼라의 술라 사랑은 진심이었던 만큼, 그는 게타를 죽인 뒤 죄책감에 시달려 발기부전, 환각, 환청, 불면증을 치유코자 동방순행을 떠났을 당시 트로이를 돌아본 뒤엔 술라를 거의 신격화시켜 모셨다.
- 임기응변에 능해 여러 상황에서 위기를 잘 극복했다. 오르코메누스 전투에서 폰투스군의 습격으로 로마군이 겁을 먹어 전열의 일부가 붕괴되자 술라는 선봉에 나서서 "로마 시민들이여, 후대에 누가 그대들에게 총사령관을 버린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오르코메누스라고 답하라!"라고 외쳤고 이에 로마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서 폰투스의 대군를 격파했다.
6. 매체에서
6.1. 소설
6.1.1. 마스터스 오브 로마
로마 내전기를 다룬 콜린 맥컬로의 대하역사소설인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1~3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해당 소설에서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말 그대로 남다른 멘탈을 보여준다.6.2. 드라마
6.2.1. 스파르타쿠스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대하 사극 <스파르타쿠스>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로마의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크라수스에게 동료가 '군대를 로마로 끌어들이라'라고 권유하자 분개하며 술라의 이름을 잠깐 언급한다.술라? 그 파렴치한??
대대로 저주받을 녀석!
대대로 저주받을 녀석!
6.3. 게임
6.3.1. 도미네이션즈
술라의 방패가 유물로 등장한다.[1] 술라에게 붙은 아그노멘. 행운아라는 뜻이다.[2] 이 인물은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를 지지하여 폼페이우스에 맞섰다.[3] 술라의 마지막 정적이자 민중파의 우두머리. 이 말은 카르보가 남긴 유일한 것이다.[4] Lucius Sulla lost his son, yet this did not impair either the spitefulness or the brilliant valour which he displayed at the expense of his enemies and his countrymen alike, nor did it make him appear to have assumed his wellknown title untruly that he did so after his son’s death, fearing neither the hatred of men, by whose sufferings that excessive prosperity of his was purchased, nor the ill-will of the gods, to whom it was a reproach that Sulla should be so truly The Fortunate.[5] 반정혁명과 폭정은 왕정 시절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먼저이고 따지자면 이전에도 왕정폐지사건 등의 정치적 무장봉기는 잦았지만, 국군을 사적으로 차출해서 자국의 수도를 침공해 정부를 전복시킨 것은 술라가 최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봉기는 복수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술라에겐 그런 미명조차 없었다. 그는 그런 미명조차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세력과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6] 로마의 역사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권력자들이 충돌하는 순간들을 살펴보면, 사실 그에게는 진작에 사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력들이 있었다.[7] 그리스 로마로부터 이어지는 고대 서구 사회에서는 개인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로 '행운'을 꼽는 경우가 통념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술라의 최고 덕목은 정치적 감각과 카리스마, 전술적 지휘 능력이나 주변 사람들을 휘하에 두는 개인의 매력이 아니라 행운이었을 것이다.[8] 일설에는 주변의 창녀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학문을 이어갔다고 한다.[9] 정권을 잡은 뒤의 행보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술라는 정적들을 냉혹하게 살해했지만, 카이사르는 정적들을 사면해주었다. 술라는 2년의 독재관 이후 스스로 물러나서 안락한 여생을 보냈지만,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 직에 올랐다가 살해당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후 역사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며 본인의 사후에도 그의 정책 노선을 후계자들이 이어받은 반면 술라는 사망 직후 자신의 개혁 정책들이 본인을 따르던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받으며 줄줄이 폐지되는 쓰디쓴 역사적 수모를 맛보았다.[10] 술라는 당시 권력의 정점을 찍어 맞설 적수가 거의 없던 최종보스급 존재였다. 실제로 어린 카이사르도 그의 눈밖에 나서 술라는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했으나 여러 사람들의 청원 때문에 마지못해 살려주었다. 당시 술라가 진짜로 죽일 마음을 굳게 먹었다면 카이사르는 그날로 끝장날 하루살이 신세였다. 그 때의 카이사르는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미천해서 영향력이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청원에 못이겨 살생부에서 카이사르의 이름을 지우면서도 "저 젊은이의 머릿속에는 마리우스가 100명이나 들어있다."라며 경계하는 말을 했는데, 공화정을 위해 노력했던 술라의 업적이 사후 대부분 엎어진 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통찰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11]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는 누미디아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12] 훗날 카이사르와 맞서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13] 남쪽에 있던 술라가 북진하여 마리우스와 함께 협공한 것이다. 사전에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술라를 마르시 전장에 보내기로 결정한 듯하다.[14] 술라는 이때 처음으로 군대를 총지휘하게 된다.[15] 그 유명한 도시 폼페이의 시민들이다.[16] 마리우스는 당시 아무런 직책이 없던 상황이었다.[17] 비록 마리우스와 민중파가 한 일이 전례가 없던 일이긴 했지만 어차피 로마의 법은 민회가 제정하는 것이므로 불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에 비해 술라가 한 짓은 빼도박도 못할 불법이었다.[18] 술라의 부하 메텔루스 피우스는 술라의 원정 동안 이탈리아에 남아 삼니움의 파피우스 무틸루스를 상대하기 바빴다.[19] 그럼에도 술라가 동방으로 원정간 이유는 원래 본인이 적법한 대 폰투스 사령관임을 보여주면서 외적을 격파하며 마리우스에 대항할 군공을 얻기 위함이었다. 적에게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술라가 폰투스를 멸망시키지 않고 조약으로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던 것도 마리우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 덕에 미트리다테스 6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20] 피케눔에서 4개 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던 사령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술라파였으나 병으로 죽었다. 지휘관을 잃은 피케눔 출신의 병사들은 와해되었고 이탈리아 출신인 마리우스를 따랐다.[21] 그리스 신전은 로마 종교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보통 자금이 부족한 수준으로는 약탈하지 않는다.[22] 마리우스의 지지자로 마리우스의 정권 탈취를 도왔다. 흥미롭게도 이 인물 역시 술라처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다. 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는 이렇게 로마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맞서게 된다.[23] 이 때문에 옵티마테스 파로 시민에게 인기없었던 그가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었다.[24] 이 독재관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으며, 굉장히 교묘하게 설계되었다. 기간으로 정해진 임기가 없었지만 취임부터 비상사태의 종료까지가 독재관의 임기였다. 술라는 공화국 재건을 기치로 걸고 비상시 종결에 임기 종료를 설정함으로써 원로원과 보수파에 공화국 복구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알려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정해진 임기가 없음을 이용하여 민중파와 민중들에게 독재관이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있음을 선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러한 교묘함으로 술라는 자기가 원하는 임기동안 독재관으로서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25] 술라는 이들을 관대하게 처분하겠다고 속였다(출처: 톰 홀랜드, <루비콘>).[26] 평민회에서 의결된 법안이 법적 효력을 갖고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도록 정한 법.[27] 카이사르는 이때 고작 10대 청소년이었다. 술라의 명을 거역하면 무조건 죽음이었고 이혼하면 살려주겠다는 것도 많이 봐준 제안이었는데, 이걸 거절하고 도망친 것에서 이미 후일 로마를 좌지우지하는 걸물이 될 떡잎을 보인 셈이다.[28] 라고는 하지만 애시당초 로마법에는 독재관 임기를 6개월로 제한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념에 충실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모순된 행보였다.[29] 이 레피두스는 나중에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를 펄쳤던 레피두스의 아버지이다. 술라 생전에는 민중파 성향을 감추고 있었으나, 술라 사후에 반란 진압을 거부하고 오히려 반란군에 합류해 반기를 들었다 실패하여 사르데냐 섬으로 유배를 당해 그곳에서 죽었다.[30] 애시당초 그 정도 개혁만으로는 원로원 체제 하에서 일상적인 정치게임을 막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차피 강제력은 술라 자신이 죽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31] 애시당초 이런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의 연계, 아니 술라의 개혁 자체가 애시당초 술라 자신의 야망을 위한 것이기도 했으니 그의 사후 다른 이들이 그를 모방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32] 사실 술라는 원래라면 그 원로원 최종권고를 받아야 하는 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33] 다만 애시당초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것 자체가 원로원에서 민중파를 때려잡으려고 만든 것이니 술라에게 적용될 일은 없었겠지만.[34] 당연히 소 카토처럼 민중을 위한 법을 거부하는 정치가는 절대 선거에서 이길 수 없었고 인기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카토는 집정관에 당선된 적이 없었다.[35] 하지만 반대로 소 카토는 원로원 의원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라티푼티움을 회수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나눠주려는 민중파의 정책을 막았던 과격한 인물이었으므로 원로원파 내부에서는 목소리가 가장 컸다.[36] 이것을 폐지한 정치가들은 다름 아닌 술라 밑에서 한몫 잡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웃기는 점은 이들은 술라의 개혁과 법령을 무시했는데 정작 카이사르는 술라가 정한 법을 온전히 지켰다는 것이다. 술라가 만든 법에 의하면 원래 명예로운 공직에 나서기 위해서는 나이 제한이 있는데 폼페이우스는 편법과 불법으로 이를 피해갔지만 카이사르는 법에 따른 나이에 출사했다.[37] 사실상 민중파의 효시는 그라쿠스 형제다. 이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같은 세대이고 포에니 전쟁 이후에나 등장했으므로 술라의 등장 시기와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즉, 민중파라는 것 자체가 로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무언가가 아닌, 당시 시대상 필요했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었다.[38] 키케로의 정적인 클로디우스처럼 원래는 로마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스스로 평민이 되어서 민중파가 되었던 경우도 있었다.[39] 그나마도 고작 십대에 불과했던 카이사르가 대놓고 민중파임을 인증하면서 술라에게 개겼던 걸 봐도 그리 효과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40] 이 토지를 획득한 건 다 로마군이 피를 흘리면서 로마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었고 로마군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로마의 평민들이었다.[41] 실제로 민중파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42] 물론 술라 이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제외하면 감히 사병화를 꿈도 꾸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특이하게 갈리아 전쟁에서 자신을 따르던 무려 8개 군단을 카이사르 특유의 카리스마로 사병화 시켜서 그렇지 그 폼페이우스도 군단병을 자진해서 해산하였고 은퇴병들을 자신의 정치 세력화하는 방식으로 원로원을 압박하였다. 폼페이우스와 달리 크라수스는 원로원의 견제와 본인의 지나친 돈 밝히는 행적, 군공이라고는 스파르타쿠스 전쟁 승리 정도라 군단병들이 사병화되지 않았다. 소아시아를 평정한 루쿨루스는 본인이 전리품을 가져가 사치하자 군단병들이 오히려 폼페이우스 쪽으로 가려는 초유의 사태를 빚기도 했다.[43] 그리고 사실상 이 사병 문제도 결국은 위의 토지 분배 문제에 수렴된다. 부패한 원로원이 토지 분배를 막은 탓에 먹고 살 수 없게 된 병사들이 자신의 사령관에게 생계를 의지하게 되었다.[44] 그리고 술라 자신도 이런 용병대장이나 다름없었으니 애시당초 위기감을 가지기나 했을지조차도 의문이다.[45] 클레오파트라 사후 이집트 왕가를 해체하고 그 영토는 황제 직할령으로 삼아 막대하게 생산되는 밀을 퇴직병에게 봉급으로 지급한 것이다.[46] 허나 중앙정부의 수장인 황제가 암살당해서 일시적으로 황제 자리가 공백 상태에 빠지면 각 지역의 군사령관들이 황제의 지위를 노리는 내전에 빠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그 외 수많은 군인 황제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로마 제정의 모순점으로 인해 생긴 문제지 술라의 개혁의 문제점과는 큰 관련성은 없다.[47] 이는 술라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술라는 섬세한 지도자라기보단 무골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병사들에게 토지를 주기 위해 에트루리아 사람들에게서 영토를 몰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에트루리아는 로마 건국 때부터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로 이때는 완전한 로마 시민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공화정 치하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시민들이었으며 따라서 이들로부터 땅을 몰수한 것은 정치적 파장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었다.[48] 비슷한 짓을 옥타비아누스도 한 적이 있긴 한데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안으로는 풀비아의 정치 공세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지중해 봉쇄 때문에 식량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로마 시민들의 폭동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군대로부터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위기상황에서 이지선다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술라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49] 마리우스의 친척이었으며 킨나의 딸과 이혼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술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를 수차례 비판하는 등 민중파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물론 당시 정치적 명분이 여기에 있기도 했지만 반대파 탄압에 혈안이 돼있던 술라와 원로원에 정면으로 맞선 것 자체가 꽤나 대범한 행적이다.[50]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군대에는 빈민을 비롯한 민중들이 많은 비중을 가지게 되어서 민중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대변하게 된다.[51] 원수정, 실질적으로는 제정이나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은 어디까지나 특권 있는 로마 1시민인 프린켑스라 강조했으며, 단 한번도 자신을 왕이나 황제 비슷한 용어로 지칭하지 않았다.[52]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승리 직후, 옥타비아누스가 아그리파와 함께 이후 정국을 놓고 고민을 하면서 기원전 27년 1차 조정 헌법 후 시작한 제1차 조정 당시, 술라의 집권과 개혁은 이들에게 바이블로 인식됐고, 그 선례로 훌륭히 사용됐다.[53] 술라가 사병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을 교묘히 합법 아래의 편법으로 만들어낸 로마 황제의 직속 부대이자 정보 부대는 프라이토리아니였다. 그리고 술라의 사례 방지를 위한 목적 등을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이 프라이토리아니를 합법적으로 만들어 활용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그 양자 티베리우스는 두 사람의 집권기간인 70년의 시간 동안 술라의 방법과 기존의 델라토르 제도를 양성화하면서, 범죄자 색출 과정에서 술라가 민중파를 숙청하고 추격하면서 현상금을 거는 방법을 프린키파투스 정착에 널리 활용했다.[54]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흔히 생각하는 무적의 권력자가 아니라 여러 권한을 가진 최고 정치인이었고 권위로는 반신적인 숭배까지 받는 최고 황제나 다름없었지만 행정 상의 권력은 그처럼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흔히 로마 황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범접 불가의 최고 권위자 이미지는 베스파시아누스 때에 비로소 완성되었다.[55] 재혼을 거듭한 결과다. 로마 사회는 일부일처제이고 이혼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혼하는 걸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56] 키베니가 일리아라는 기록은 사료가 오염된 탓이라며 카이사르의 친척인 율리아라는 설을 냈다. 물론 가능은 한 이야기지만, 증거가 전혀 없다. 근거가 되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애초에 라틴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거니와, 그것에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할 만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딸이 있었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콜린 맥캘로우의 명저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이 설을 차용해 술라의 첫번째 아내로 카이사르의 고모인 율리아의 동생 율릴라가 등장한다. 물론 율릴라라는 인물 자체는 창작인물.[57] 물론 술라가 결혼한 시기에는 이미 고인이었고 당시에는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가 최고 제사장이었다.[58] 술라와 결혼하기 전에 원로원의 1인자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의 아내였다. 물론 스카우루스는 술라가 삼니움족과 싸울 때, 카이킬리아와 술라의 결혼 전에 이미 사망했다.[59] 서기 31년 집정관을 지냈고, 40살의 한창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60]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술라와 달리, 증손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나이에 비해 회백색 머리였고 새치머리가 많았다. 그래서 네로는 이것을 약점 잡아 그가 대머리가 아님에도 "숱이 없는 대머리"로 공개적으로 놀리면서 의도적으로 불경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다.[61] 여기에는 파우스투스가 워낙 인품이 훌륭한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네로가 자신의 입양누이이자 전처의 언니였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를 짝사랑했던 것도 컸다.[62] 피소 음모 자체의 진상과 별개로 네로는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에게 결혼을 제안하고 청혼까지 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자신의 아버지를 매일 같이 희롱하고, 남편에게 어기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고 동생들까지 살해한 네로의 청혼을 거절했다. 이에 네로는 근친상간까지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아예 증거도 없이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혈육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를 죽여버린다.[63]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부부는 사이에 펠릭스로 불린 아들을 뒀지만, 두돌만에 요절해 그 뒤를 이을 아들이나 딸이 없는 상태였다.[64] 그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와의 내전 중에 길어지는 전란에 지친 휘하 10군단 병사들이 그에게 불만을 품고 항명사태를 벌였다.[65] 사실 지쳤다는 것은 핑계에 가깝고 실제로는 봉급 인상을 위해 카이사르를 압박하려던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카이사르가 10군단을 해산하고 로마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자 큰 충격에 빠져 항명을 포기했다.[66] 술라가 내전에서 이긴 건 사실 마리우스보다 오래 살아서 그렇기도 하고, 또 술라가 자신의 최전성기에 이미 늙은 마리우스와 맞붙었던 것도 있다.[67] 이를 맡은 게 루쿨루스다.[68] 즉, 술라가 한 짓의 업보가 그의 후손들에게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69] 공교롭게도 이 말은 훗날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더 잘 어울린다.[70]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의 친딸.[71] 이 일에 관해, 동시대 로마제국의 황실 서기관 출신 관료 헤로디아누스는 술라 동상을 세운 것은 카라칼라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술라가 아시아 일대에서 세운 군공이 결정적이었다고 찬사한 이유였으며, 한니발 동상을 세운 것은 그의 조상들이 한니발을 꺾고 오늘날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해 이주한 점을 상징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72] 오늘날에는 칼리굴라로 통칭처럼 당연히 불리나, 로마인들은 칼리굴라를 일부 사람들만 부르는 별칭이라고 표현하면서 가이우스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