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라틴어: Lucius Cornelius Lentulus Cr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아들)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9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동기 | 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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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지만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뒤 폼페이우스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살해되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씨족의 일원이지만, 아버지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라는 것 외에는 기원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동 시대에 활동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의 아들인데,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두 사람이 친형제이거나 이복 형제였을 것이라 추정한다.그러나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으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의 아들이 키케로에 보낸 편지에는 그를 "루키우스 렌툴루스"라고 언급하기만 했던 것을 볼때 가까운 혈연 관계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그노멘인 크루스(Crus)는 '정강이'를 의미한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정한 고위 관직의 나이 제한 규정을 토대로 봤을 때, 그는 기원전 98년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젊은 시절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의 세르토리우스 전쟁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에 하데스의 거주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발부스는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가 되며, 기원전 40년에 집정관이 되었다. 발부스는 한 편지에서 그를 "카이사르 못지 않게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기원전 61년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역임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에서 열린 보나 데아 여신을 기리는 행사에 여장을 하고 잠입하다가 발각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고발했다. 남자의 출입이 금지된 행사에 함부로 출입했으니, 유죄 판결이 내려진다면 신성모독 혐의로 사형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척지고 싶지 않아서 그를 비호한 덕분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기원전 58년 법무관을 맡아 호민관 클로디우스의 맹공을 받는 키케로를 지지했다. 그는 집정관 중 한 명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에게 키케로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기원전 50년 집정관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지지했고, 폼페이우스는 그를 지지했다. 선거 결과 그와 폼페이우스의 또다른 지지자인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막대한 부채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내전이 가능한 한 빨리 시작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군사 지휘권을 일임하였고, 기원전 49년 1월 1일 첫 원로원 회의 때 타협을 제안한 카이사르의 편지를 읽는 걸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카이사르의 편지를 체택하는 걸 단호히 반대했고, 폼페이우스를 믿고 카이사르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만일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카이사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한 의원이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서 빼앗아 둔 2개 군단이 로마 인근에 주둔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카이사르가 로마로 귀환할 때 이 군대로 자신의 신변이 위협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격분하여 카이사르를 옹호한 의원들에게 맹비난을 퍼붓고, 그들의 신변에 무슨 위협이 있을지 보장하지 못한다고 협박했다. 결국 온건파 의원들은 입을 다물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정해진 날짜 이전에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결의했다.
이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곧바로 로마를 떠나 남쪽으로 달아났다. 카이사르의 친구였으며 그에게도 고마운 감정을 품고 있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는 그를 찾아가서 카이사르와의 대결을 그만두고 로마로 돌아오도록 설득했지만, 그는 그러기엔 너무 멀리 가버렸다고 답했다. 그는 캄파니아에서 지원군을 모집하려 했지만, 민심이 생각과는 달리 따라주지 않으면서 병사가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싸우길 포기하고, 2월 중순에 그에게 모든 병력을 이끌고 브룬디시움에 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명령에 따랐고, 3월 초 선봉대를 이끌고 디라키움으로 건너갔다. 그해 여름 아시아에서 2개 군단을 추가로 모집한 뒤 그해 말에 에피로스에서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파르살루스 전투 전날, 그는 로마를 공략한 후 카이사르의 정원과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호화로운 집을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의 하인들의 천막은 승리를 상징하는 담쟁이 덩굴로 덮여 있었다. 전투 당일에는 폼페이우스군의 측면을 지휘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참패하고 말았고, 로도스로 도망친 뒤 안티오키아로 향하려 했지만 거절당하자 폼페이우스와 함께 이집트로 망명했다. 그러나 펠루시움에서 폼페이우스와 함께 이집트 관원들을 만났다가 폼페이우스가 살해될 때 체포되었고, 감옥에 끌려간 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는 기원전 38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