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라틴어: Paullus Fabius Maximus | |
생몰년도 | 미상 ~ 서기 14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버지) 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동생) 파비아 파울리나(여자형제) |
배우자 | 마르키아[1] |
자녀 |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년(정규) |
전임 |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
동기 |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 |
후임 | 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율루스 안토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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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 원로원 의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최측근이자 인척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은 비슷한 무렵의 14년 여름 자택에서 선친처럼 급사해, 당대와 후대 로마인에게 많은 논란을 낳았다.2. 생애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로마 건국과 시작을 함께 한 유구한 파트리키 대가(大家) 파비우스 씨족의 막시무스 가문 출신이다. 다만, 개인이름에 해당한 프라이노멘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본래 혈통은 아이밀리우스 가문이다. 그의 직계 조상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장남으로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에 입양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이다.그가 태어날 무렵,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 나머지 "가장 오래되고 저명한 명망가 중의 명망가"로 자타가 인정한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은 공화정 후기 무렵부터 지위와 명성이 쇠퇴하다 못해 추락 중이었다. 그래서 로마사 권위자 로널드 사임은 파비우스 가문이 "집정관에서 한 세대를 놓쳤다"고 평한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권세가 예전만 못했을 뿐, 그의 집안은 여전히 부유했고, 그의 친인척들은 쿠르수스 호노룸을 밞으며 번창했다.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카이사르의 특사 중 한 명이었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증손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이사르가 단독 집정관에서 물러나 임기 제한이 없는 독재관을 맡겠다고 발표한 뒤, 기원전 45년 10월 1일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된 인물로, 기원전 45년 12월 31일 돌연 사망했다.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이름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삼남매 중 첫째였다. 밑으로는 남동생 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여자형제 파비아 파울리나가 있었다.
아버지 사후 이야기는 잘 모르나, 그가 처음 맡은 직책은 쿠르수스 호노룸의 선출직 첫 관문 재무관(콰이스토르)였다. 기원전 22년에서 19년까지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동부 속주를 순행할 때, 황제 밑에서 재직했다. 그러다가 집정관 직을 마친 뒤,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재직했다. 총독 재임 기간은 정확히 모른다. 왜냐하면 기원전 10년 ~ 기원전 8년까지 재임했다는 주장과 기원전 6년 ~ 5년까지 재임했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이 기간 동안 황제의 허락 아래 본인 얼굴이 새겨진 여러 개의 지방정부 동전을 주조하고 관리했다. 또 그는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통치 중, 이 일대의 그리스계 주민들의 호소로 아우구스투스를 현세의 신이자 신의 대리인으로 모시면서 제전을 벌이겠다는 요구를 받았다. 이때 그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이를 보고했고,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을 통해 이를 슬기롭게 해결한 뒤, 로마 제국 역사상 첫 황제 신격화를 통한 올림픽을 주최해 우승자에게 왕관을 주는 행사를 거행했다. 이때 그는 속주를 위한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다. 이 달력은 헬레니즘의 과거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선례를 빗대어, 새해를 아우구스투스의 생일 9월 23일에 시작했다. 그러나 이 달력은 자치정부와 시의회를 통해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모신 아시아 속주의 그리스계 도시에게 통용됐다.
파비우스는 아르발 형제단(Arval Brethren)의 일원이었다. 이 사제단이 아우구스투스가 집권 후 자신의 친인척과 측근에게만 내려진 점에서 볼 때, 그가 얼마나 총애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기원전 3년 파비우스는 레가투스 아우구스티 프로 프라이토레 또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이 되었다. 이때 그는 켈트족의 도시를 점령하고 루쿠스 아우구스티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현재 스페인의 루고이다.
시인이자 풍자작가 유베날리스의 후원자 중 한명이 그의 후손이었고, 그와 그 아들 역시 생전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등에게도 후원을 아끼지 않아, 이들에게 관대한 후원자, 덕망 높은 귀족으로 찬사를 받고 그들에게 송가, 찬사 등을 선물받았다. 이는 이탈리아 주민들에게도 같아, 이탈리아의 아트리에는 그의 인망과 관대함을 칭찬한 기념비가 설치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 중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모두와 관계가 좋았고, 티베리우스가 정식 후계자가 된 뒤에도 관계가 좋고 협력 관계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한 점에서 이는 후일 괴담이 되고 이 내용이 고대기록자 중 신뢰 있는 기록에 언급돼, 이 점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황제가 악명을 떨치는 원인이 됐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저택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처형된 일로 갓 취임한 티베리우스 황제가 포스투무스를 죽이라고 명했다는 의심이 있어,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급사에 관해 여러 이야기가 돌았다. 그 내용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실려 있는데, 그에 따르면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함께 유배된 섬에서 추방생활 중인 포스투무스를 만났고, 아우구스투스와 포스투무스가 화해했을 때, 동행한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이 증인이 됐다고 한다. 그래서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급사한 것은 직간접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신뢰를 저버린 것에 대한 보복이며 티베리우스 혹은 리비아 드루실라가 그를 암살했거나 처형했을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다만, 오비디우스의 경우,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죽음을 아우구스투스의 분노 때문이라고 평하면서 아우구스투스에게 그가 살해됐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적고 있다.
타키투스의 이 이야기와 그 진실성, 정확성은 현대 역사가 중 아주 고리타분한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에게 의문시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괴담이 진실이 된 예시로 언급된다. 먼저 당시 로마 제국의 정치 구도상 그를 죽였다는 인물들에게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급사한 일은 이익이 아니었고,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티베리우스를 지지한 아우구스투스 최측근이며, 대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다. 또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우구스투스 후계자 등극 및 직위 승계 등을 도왔고, 소 드루수스의 후계구도 참여에도 힘을 보태는 등 리비아, 티베리우스 입장에서 볼 때 정적이라고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또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가족력 역시 타키투스의 주장이 신빙성 없다고 평가받는 증거가 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역사 분야에 다양한 학문 전문가들이 가세한 뒤부터였는데, 의학 분야의 로마사 연구 논문 등에서는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선친 퀸투스, 동생 아프리카누스, 아들 페르시쿠스 모두 건강했다가 죽은 터라, 그의 돌연사 가능성 역시 뇌출혈 혹은 심근경색 같은 것으로 선친이나 아들처럼 갑자기 죽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를 배제할 수 없다고 평한다.
3. 가족
기원전 20년에서 기원전 10년 사이, 기원전 38년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그 아내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모 소(小) 아티아의 딸 마르키아와 결혼했다. 그의 장모 아티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모였기 때문에, 마르키아는 황제의 사촌이었다. 따라서 이 결혼 이후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인척이 됐다.이 결혼에서 그는 기원전 1년 또는 기원전 2년생으로 알려진 아들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를 뒀다. 그가 죽을 당시, 아들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가 14세 밖에 되지 않아, 1년 뒤인 15년 6월 페르시쿠스는 정식으로 아버지의 사제 직을 잇게 됐으며,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의 추천 아래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재무관, 조영관, 법무관까지 오르고, 40세 이후 집정관 추천권까지 받아,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에도 권세가 대단했다. 따라서 페르시쿠스는 이런 배경으로 세네카에게 누구보다 특히 사악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등이 페르시쿠스를 좋은 사람으로 평했다. 아들 페르시쿠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 돌연사했다.
[1]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어머니 아티아의 자매 소(小) 아티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의붓형이자 이모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결혼해 얻은 딸이다. 즉,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종사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