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라틴어: Gaius Trebon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3년 1월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시아 속주 스미르나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아버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5년 |
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12월 31일)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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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심복으로, 갈리아 전쟁과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맹활약하여 집정관까지 올랐다. 그러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의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동참했고, 이후 카이사르가 죽기 전에 정해둔 대로 아시아 속주 총독을 맡았으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 생애
기원전 5세기부터 호민관으로 활동했던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트레보니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그들의 이름은 아피아 가도에 있는 2개의 고대 비문과 에트루리아의 클루시움 시에 있는 2개의 비문에 언급되기도 했다. 키케로는 그의 아버지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 대해 "가장 용감한 시민"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기원전 60년경에 재무관을 맡았으며, 1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우스의 뜻에 반하여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평민 집안에 입양되는 걸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55년 호민관이 되었을 때 삼두정치파로 전향했다. 그는 폼페이우스가 5년간 스페인의 세 속주를 다스릴 권한을 주고, 크라수스가 시리아 총독을 맡아 파르티아 전쟁을 시작할 권리를 인정하는 법안을 제안했고, 뒤이어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임기를 연장하는 법안도 입안했다. 소 카토 등 옵티마테스파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호민관 임기가 만료된 후 갈리아로 가서 카이사르의 부관이 되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여하여 식량 공출을 위해 3개 군단과 모든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했다가 카시벨라누스의 공격을 받았으나 카이사르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성공적으로 버텼다. 갈리아로 돌아온 뒤 현재의 벨기에에 주둔한 3개 군단 중 하나를 지휘했다. 같은 해 겨울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에브로네스 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이에 맞서 아두아투키 족의 영역과 인접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해 반란 진압에 공헌했다. 기원전 52년 초 세노네스 족을 복종시키는 임무를 맡았으며, 뒤이은 알레시아 공방전에 참여하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가장 중요한 전선을 지휘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기원전 51년 2개 군단과 함께 트세나붐에서 겨울 숙영을 하다가, 카이사르의 지시에 따라 비투리게스 족의 영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13군단과 합세한 뒤, 반란을 일으킨 벨로바키족을 토벌하러 출진했다. 벨로바키족은 요새화된 진지에서 숨어 농성했지만, 곧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이후 기원전 49년까지 2년간 벨기에 일대에서 카이사르를 대신하여 통치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로 진격한 카이사르를 지원했으며, 그해 봄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 원정에 착수했을 때 가담했다. 하지만 진군하던 중 마실리아가 귀순을 거부하고 저항하자, 카이사르는 그에게 3개 군단을 맡겨 마실리아를 공략하게 했다. 그는 해군을 이끈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함께 마실리아를 포위 공격했다.(마실리아 공방전)
그는 도시를 공략하고자 거대한 탑을 건설했고, 공병대를 투입해 땅굴을 파서 성벽을 허물게 하였다. 성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거대한 탑 몇 개가 완성되자, 수비대는 곧 항복할 테니 공격을 미뤄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그날 밤 수비대가 어둠을 틈타 출격하여 탑을 불태워버렸다. 이에 분노한 장병들은 탑을 빠른 시일에 재건하고 포위를 더욱 엄중히 했다. 이후 마실리아 시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결국 기원전 49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항복했다. 그는 카이사르와 함게 로마로 돌아왔고,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48년 또다른 법무관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가 "모든 부채를 소멸시키고 1년 동안 임대료를 폐지하는" 급진적인 법안을 제출했다. 트레보니우스는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가 루푸스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고 혈투 끝에 쫓겨났다.이에 집정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가 나서서 루푸스를 축출하자, 루푸스는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와 동맹을 맺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48년 가을 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난 뒤, 키케로는 카이사르와의 항쟁을 포기하고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키케로를 1년간 보호했다.
기원전 47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실정으로 카이사르에게 지극히 적대적인 현지 민심을 수습하려 애썼다. 그러나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 패전 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1] 등 옵티마테스 파가 히스파니아로 망명하자, 그가 이끌던 2개 군단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편으로 넘어가 버렸다. 결국 통제력을 상실한 그는 이탈리아로 피신했다가, 기원전 45년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동행했다.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 전투에 참여하여 결정적인 승리에 일조했고, 이탈리아로 돌아간 뒤 그해 10월 1일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12월 3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가 보결 집정관으로 즉시 선출되어 12월 31일 하루만 맡았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가 끝난 그를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할 계획을 세웠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순조롭게 출세했지만, 그는 카이사르에게 반감을 품고 기원전 44년 초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이 주도한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 그는 암살 계획에 참여한 이들 중 유일하게 집정관을 역임했기에, 음모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키케로는 2번째 필리피카이에서 그가 로마인의 자유를 한 사람과의 우정보다 중시했으며, 권력을 카이사르와 공유하기보다는 타도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주장했다. 이로 볼 때 독립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열망과 영구적으로 독재관을 맡고 왕이 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듯한 카이사르에 대한 환멸 때문에 암살 계획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데키무스 브루투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등 다른 카이사르파 인사들도 이에 가담했으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가담시키려는 계획은 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 암살이 원로원 회의 때 실행되었다. 이때 그는 안토니우스를 입구에서 붙들어 긴 대화를 나누면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를 도우러 가지 못하게 했다. 카이사르가 살해된 뒤 권력을 장악하려 했지만 민심이 전혀 따라주지 않고 카이사르의 병사들에게 살해 협박까지 당하자, 그는 그해 4월에 카이사르가 생전에 정했던 대로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다. 도중에 아테네에서 키케로의 아들을 만났고, 키케로에게 "우리의 행위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아시아에 도착한 뒤, 내전을 준비하고자 도시를 요새화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돕고자 돈과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집정관을 맡았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11월 또는 12월에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돌라벨라는 카이사르 암살 때 해방자파를 지지했지만, 안토니우스와 연계하기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정치 행보를 보였다. 그는 돌라벨라를 신용할 수 없는 자라고 여기고, 식량을 공급해주긴 했지만 군자금을 달라는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돌라벨라는 아시아 속주의 여러 요새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기원전 43년 1월 중순, 최후의 수단으로 야습을 택해 스미르나 시를 공략했고, 이곳에 있던 그는 곧 체포되었다.
키케로는 기원전 43년 2월 중순 원로원 회의 때 "돌라벨라가 가이우스를 채찍으로 친 뒤 참수했고, 그의 머리를 창에 꽂았다"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디오 카시우스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불필요한 고문 없이 즉시 살해되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트레보니우스는 자신을 돌라벨라로 인도할 것을 요구했지만 백인대장은 "우리는 당신을 데려오지 말고 머리만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라고 답하고 단칼에 목을 베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그의 수급은 총독의 관저에 전시되었고, 군인들과 노예들은 시체를 조롱하고 머리를 공처럼 걷어찼다고 한다.
그는 갈리아 전쟁 때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따랐고, 카이사르의 승리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그런 그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 중 한 사람이라 여겼고, 집정관에 앉혀주고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배정하는 등 각별히 총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이사르 암살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이에 대해 "카이사르 덕분에 일어설 수 있었으면서 카이사르의 선행을 최악의 배은망덕으로 갚았다"고 비난했다. 아피아노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을 잔혹한 행위라고 규정했고, 트레보니우스가 정당한 처벌을 받은 첫번째 암살자였다고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