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라틴어: Lucius Calpurnius Piso | |
생몰년도 | 미상 ~ 서기 24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버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형)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년 |
전임 | 퀸투스 파브리키우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
동기 |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후임 |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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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노빌레스)이다. 이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저명한 분파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위세를 떨친 피소 가문이었다. 조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기원전 65년 재무관을 역임했으나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되었다.아버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휘하의 히스파니아군에서 재무관으로 근무했다. 두 장군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뒤 아프리카 속주로 도망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 휘하에 들어가 누미디아 기병대를 지휘했다.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 패전 후 카이사르에게 귀순하여 용서받고 로마로 돌아갔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발발한 후 2차 삼두정치파와 '해방자'파 간의 전쟁(해방자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해방자파의 편에 들어가 필리피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삼두정치가들의 용서를 받고 로마로 돌아갔고,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 지내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집정관을 맡았다. 그해 6월 아우구스투스가 병세가 악화되어 죽을 지경에 몰리자 가장 신임하는 친구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인장 반지를 넘겨주며 후계자로 지명했을 때, 그는 로마의 병력 및 재원 관련 기록물을 넘겨받으며 아그리파와 공동으로 로마를 이끌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던 피소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제스처를 통해 왕정이 세워지는 걸 두려워하는 원로원을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병마를 이겨내고 회복하면서 이 조치는 무효가 되었다.
이렇듯 명문가에 아우구스투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명망 높은 공화정 수호자였던 피소에게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있었는데, 루키우스는 차남이다. 그는 기원전 1년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서기 6년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으며, 정치 직책 외에도 아우구르를 맡았다. 당시엔 그의 사촌이자 기원전 15년 집정관이며 이름이 비슷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도 있었는데, 당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기원전 1년 집정관 루키우스를 아우구르, 기원전 15년 집정관 루키우스를 폰티펙스라고 칭했다.
루키우스는 원로원에서 엄격함과 합법성을 대표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서기 16년 연설에서, 그는 원로원 의원들의 점점 늘어나는 공직 획득 시도와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후 로마를 떠나려 했지만, 티베리우스 황제와 친족들의 간청으로 그만두었다. 이후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의 절친한 친구인 우르굴리니아를 알려지지 않은 범죄로 고발했다. 그러나 그녀는 심문을 위해 법정에 출두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황궁으로 가서 리비아의 보호를 받았고, 리비아는 친구에 대한 비난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 여기고 피소를 비난했다. 이에 피소는 우르굴리나를 황궁에서 강제로 끌고 가겠다고 위협했다.
티베리우스는 어머니가 고발당한 사람이 법정에 출석하는 걸 저지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걸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우르굴리나가 합법적으로 체포됨으로써 어머니가 굴욕을 당하도록 허용할 수도 없었기에 몹시 고뇌했다. 그러다가 우르굴리나가 집이나 리비아의 방에서 담당 법무관의 심문을 받게 한 후, 티베리우스 본인이 그녀의 범죄에 대해 피소가 요구하는 벌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서기 20년, 형제 그나이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형제 그나이우스를 직접 변호했지만 티베리우스 황제를 비롯한 황실 인사들의 거센 비난과 민중의 적의로 인해 재판은 극도로 불리했고, 결국 그나이우스는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에 자살했다. 그는 이 당시에는 형제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서기 24년, 퀸투스 그라니우스라는 인물이 루키우스가 사적인 대화에서 불경스러운 말을 했으며, 집에 독약을 보관해 두었고, 원로원에 출두할 때는 항상 검을 들고 다녔다고 고발했다. 원로원은 루키우스를 소환해 심문하기로 했지만, 루키우스는 재판을 받기 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