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라틴어: Marcus Petre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프리카 속주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페트레이우스 안티나투스(아버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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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오랜 세월 수많은 전장을 전전한 베테랑 군인으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로 침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적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이후에도 폼페이우스를 위해 카이사르에 맞섰으나 탑수스 전투 패전 후 누미디아 국왕 유바 1세와 함께 자결했다.2. 생애
비천한 평민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02년 킴브리 전쟁 때 집정관 퀸투스 루타키우스 카툴루스의 부관이었던 그나이우스 페트레이우스 안티나투스가 그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는 기원전 62년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그에 대해 "트리부누스 밀리툼, 장교 및 부관으로서 30년 이상 군에서 복무한 노장"으로 묘사했다. 그밖의 경력은 알려진 바 없으나, 기원전 91~88년에 벌어진 동맹시 전쟁과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내전 등 여러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폼페이우스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고자 히스파니아로 출진했을 때 그도 따라갔을 거라고 추정했다.그는 기원전 62년 집정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휘하 부관으로서 카틸리나의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카틸리나와 친분이 있던 안토니우스는 결전을 벌이길 원하지 않았지만, 그는 당장 진압해야 한다고 독촉했다. 그해 1월 양군이 피스톨라 인근에서 조우했을 때, 안토니우스는 질병에 걸렸다면서 그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그는 참전 용사를 전투 진형의 최전선에 배치하고, 연설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인 뒤 전투에 뛰어들었다.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후방에 있던 베테랑 부대를 투입시켰고, 반란군은 결국 섬멸되었고 카틸리나는 전사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토벌군 역시 큰 손실을 입었고, 로마 시민들은 이 전투를 그다지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기에 개선식은 열리지 않았다.
기원전 59년 집정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농지법에 반대한 소 카토를 지지했다. 카토가 일시적으로 체포되자, 그는 카이사르에게 "나는 원로원에서 당신과 함께 있는 것보다 감옥에서 카토와 함께 있길 원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농지법이 민회에서 통과되는 걸 끝내 막지 못했다.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는 두 번째 집정관이 되었고 5년간 가까운 히스파니아, 먼 히스파니아, 그리고 루시타니아 속주를 다스릴 권한이 주어졌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남기로 하고, 그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그리고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폼페이우스를 대신해 히스파니아를 다스렸다. 그는 루시타니아에서 2개 군단을 이끌었고, 바로는 2개 군단으로 먼 히스파니아를 다스렸으며, 아프라니우스는 3개 군단으로 가까운 히스파니아를 다스렸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모든 히스파니아 총독들은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로 쳐들어오자, 그는 자신이 속한 지방의 부족에서 보조군을 모집한 뒤 북쪽으로 이동하여 아프라니우스와 합세했다. 학자들은 계급은 집정관을 역임한 아프라니우스가 더 높았지만, 군사 경험과 결단력 및 역량에서는 그가 우세했다고 평한다. 양군은 일레르다 일대에서 맞붙었는데(일레르다 전투), 초기에는 카이사르가 설치한 다리가 끊기면서 보급로가 끊어지는 바람에 폼페이우스 측이 우세했지만, 카이사르가 특유의 임기응변을 발휘해 보급로를 재건하고 군대를 주도면밀하게 이끌었던 데다, 히스파니아 속주민들이 점차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서면서 전황이 점차 불리해졌다.
아프라니우스는 민심이 카이사르 쪽으로 쏠리자 켈티베리아인들의 영역으로 후퇴하기로 했지만, 카이사르가 그들을 추격해 압박을 가하자, 어쩔 수 없이 고지대에 진영을 갖췄다. 카이사르는 모든 보급로와 수로를 차단했고, 폼페이우스군은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떨어져서 몹시 곤궁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몰래 군영에 들어와서 접촉하면서, 아군이 전의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귀순하려 한다는 게 밝혀지자, 아프라니우스는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하려 했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군대를 소집하여 폼페이우스를 위해 끝까지 싸우라는 내용의 연설을 해 군기를 다잡고, 군영에 들어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보이는 대로 모조리 죽이게 했다. 그 후 사실상 지휘를 그만 둔 아프라니우스를 대신해 카이사르에 대적했으나 끝내 봉쇄를 풀지 못했고, 아프라니우스가 카이사르에게 귀순하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카이사르는 자비를 베풀어 그들 모두에게 거취의 자유권을 주었고, 그는 아프라니우스와 함께 에페로스의 디라키움에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달려갔다. 기원전 48년 8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그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코르기라에서 함대를 이끌고 온 소 카토와 파트라이에서 만났고, 카토와 함께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이후 메텔루스 스키피오 휘하에서 카이사르와 대적했다.
기원전 46년 1월 4일 루스피나 전투에서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함께 7~8,000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1,600명의 갈리아 및 게르만기병, 그리고 상당한 수의 누미디아 경보병을 이끌고 카이사르군을 괴롭혔다. 한 때는 카이사르군을 포위하여 화살비를 퍼부어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끝까지 대열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대응해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라비에누스가 한 병사가 내던진 창에 말이 찔러 낙마하는 바람에 중상을 입자, 그가 지휘권을 맡았다. 카이사르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을 상대로 테스투도 진형을 결성해 모든 원거리 공격을 막게 한 뒤, 적의 기세가 약해지자 일제히 필룸을 던지고 돌격하게 해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진영으로 철수했다. 이때 페트레이우스 역시 중상을 입었다. 다음날 새벽 카이사르가 철수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쫒지 않았다.
"스키피오의 몫을 남겨둬라"
기원전 46년 4월 6일 탑수스 전투에 참여해 카이사르와 대적했으나 끝내 참패하자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함께 도주했다. 그들은 누미디아의 도시 자마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지만, 현지인들이 받아주지 않아 누미디아 왕실 영지 중 한 곳으로 피신했다. 카이사르의 자비를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자살을 결심했다. 자살 방식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르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와 유바 왕은 저녁 식사 때 서로를 죽였다고 한다. 익명의 작가가 기술한 <아프리카 전쟁기>에 따르면, 그들은 결투를 벌여서 그가 유바 왕을 죽였고, 이후 단검으로 목을 찌르려 했지만 실패하자 하인을 시켜 자신을 죽이게 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단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