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Lucius Sergius Catilina)
(기원전 108년 ~ 기원전 62년)
1. 개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몰락귀족 출신 채무혁명론자. 원로원에 대항하여 반란을 기도했으나 진압당해 죽었다.카탈리나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고 나무위키의 여러 로마 관련 문서에도 오기되어 있는데, 로마자 표기에서 보이듯이 카틸리나다.
2. 생애
2.1. 청년기
선대가 집정관을 지냈고, 유서깊은 귀족 가문인 세르기우스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카틸리나 본인의 시대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가세가 크게 쇠퇴하였다.[1]동맹시 전쟁 당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즉 우리가 익히 아는 폼페이우스의 아버지) 밑에서 키케로, 폼페이우스와 함께 참전했으며, 술라의 내전 시기에 술라 휘하에서 활약했다.
기원전 73년 여사제와 간통 혐의를 받았으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의 도움으로 무죄가 되었다. 기원전 68년 법무관이 되고, 2년간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2.2. 낙마와 위기
쿠르수스 호노룸을 밟은 카틸리나는 기원전 65년 집정관직에 출마하려 했으나, 속주민들이 권력 남용으로 기소한 탓에 재판에 회부되어 집정관 입후보 시기를 놓쳐 후보 자격을 상실했다. 재판은 무죄가 되었지만 집정관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다음해에도 집정관에 출마했지만,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밀려서 낙선하였다. 이 때부터 '채무 전액 강제 탕감'이라는 과격한 공약을 내걸기 시작했다. 이 공약은 원로원 체제의 경직과 수구화가 유발한 격심한 빈부격차와 만성채무의 늪에서 신음하는 영세 자영농들과 몰락귀족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지만 법에도 명시할 만큼 사유재산권을 신성불가침으로 간주했던 대부분의 로마시민들에겐 냉전기 공산주의 만큼의 어그로가 끌렸다. 더욱이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은 빚을 도저히 못갚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었고 반대파들은 법에 명시된 채권자의 권리 사수를 위해 결사항전을 불사할 태세였으므로 양측간 분쟁은 극한으로 치달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산자들은 담보로 잡힐 재산도 없어서 카틸리나를 지지하지 않았다.
기원전 63년에 세 번째로 집정관 선거에 도전했으며 이번에도 채무 전액 강제 탕감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3등에 그쳐서 낙선했다. 그런데 이번에 선출된 집정관 가운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당하고, 무레나의 유죄가 확정되면 카틸리나가 집정관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시류를 읽은 당대의 스타 변호사 키케로가 나서서 무레나를 변호하여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바람에 카틸리나는 또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선거를 하려면 막대한 돈을 써야 했고 이 돈은 빚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카틸리나는 3번에 이르는 낙선으로 막대한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카틸리나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2.3. 모반 음모
카틸리나의 주변에는 채무 강제 탕감을 원하는 지지자들이 모여들었다. 카틸리나는 결국 합법적인 선거로는 절망적인 현실을 개선할 수없다고 판단, 이들을 규합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해 채무 강제 탕감을 실현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무리의 동료는 귀족이지만 금권 선거가 과도한 로마의 선거 풍토 때문에 빚이 많이 있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전직 법무관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이었다.그런데 반란음모치고는 보안이 지나치게 허술해서 로마 전역에 소식이 다 퍼지고 말았고, 집정관 키케로까지 이 음모를 알고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으며, 카틸리나는 거사를 앞두고 있음에도 태연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여 의원들은 소문이 많이 퍼졌음에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돈은 썩어나게 많지만 하도 인망이 없어서 선거에서 번번히 물먹던 크라수스와 역시 초대형 악성채무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음모의 공모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정확히는 크라수스는 돈을 빌려주는 채무자 입장이었지만 채무 강제 탕감으로 손해볼 분량의 막대한 재산을 선거운동에 투입해도 당선되지 못할거라 여겨질 정도로 지독하게 평판이 나빴다.
10월 21일, 키케로는 카틸리나를 대상으로 한 원로원 최종권고를 결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카틸리나는 끝까지 증거를 제시하라고 주장했다.
2.4. 카틸리나 탄핵
11월 8일, 원로원 회의에서 키케로는 '카틸리나 탄핵'이라는 장문의 연설(카틸리나 탄핵 제1연설)로 카틸리나를 탄핵한다. 카틸리나는 특별한 반론도 없이 로마에서 도망쳤으며, 에트루리아(지금의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방)로 도망쳤다. 11월 9일 키케로는 시민들에게 탄핵 연설(카틸리나 탄핵 제2연설)을 하였다.여전히 결정적인 물적 증거는 없었지만, 키케로는 증거 확보를 위해서 반란에 참여한 갈리아 인으로 하여금 음모 가담자들의 서명을 받아오게 하는 함정수사로 물증을 확보하고, 카툴루스 등 로마에 남아 있던 음모자 5명을 체포한다. 12월 3일 키케로는 민회에서 보고 연설을 한다.(카틸리나 탄핵 제3연설)
12월 5일, 원로원 회의에서 음모자 5명의 처형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논의에서 쟁점은 원로원 최종권고가 있더라도 과연 '민회의 항소권'을 무시하고 '로마 시민'을 처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제출했으나, 카토와 키케로는 열렬하게 처형을 주장(카틸리나 탄핵 제4연설)하여 결국 처형이 결정되었다.
2.5. 최후
기원전 62년 1월, 대규모 토벌군이 조직되었다. 카틸리나는 동료 3,000명과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달아나다가 토벌군에 포위되었고, 카틸리나 자신을 비롯하여 3,000명 전원이 몰살되었다.2.6. 의의
첫번째로는 카틸리나의 로마 공화정 전복 시도 및 그 추종자들 중 카탈리나처럼 선거로 빚더미에 올라선 높으신 분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은 로마 공화정의 모순이 옵티마테스[2][3]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대표적 사례로 지적되곤 한다. 로마 공화정은 공직자들에게 봉급을 전혀 지불하지 않았는데,[4] 이 무렵에 이르면 자신의 지위 등 동원한 수단은 다 써서 떼돈을 벌려고 하는 한탕주의 밎 이로 인한 빈부 격차가 만연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아우구스투스가 관리들에게 공식적으로 봉급을 지불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5]두번째로 과연 음모를 실천하지도 않았는데도 원로원 최종권고를 날려서 카틸리나를 탄핵, 처형한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이냐는 점이다. 실제로 원로원에서도 이 일에 대해 격론이 오갔고 카이사르는 이에 대해 카틸리나 처형을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업적을 과대포장하기 좋아하는 키케로가 밀어붙이는 바람에 결국 카틸리나와 그 일당은 처형되었고 키케로는 그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거머쥐게 되었다. 하지만 정적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이 일에 대해 판결이 나지 않은 로마 시민을 함부로 죽인 자를 축출하는 내용의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켰고 이로 인해 키케로는 공직에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3. 여담
키케로는 4차례에 걸친 카틸리나 탄핵 연설을 책으로 펴냈으며, 이 책은 아직도 고전라틴어의 교본으로 쓰일 정도의 명문으로 인정받는다.[6]이탈리아 화가 체사레 마카리가 19세기에 그린 '카틸리나 탄핵'이라는 그림이 유명하다. 좌측에는 밝은 조명을 받으며 열변을 토하는 키케로와 그 주변에 모인 원로원 의원들을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어두운 그림자 아래서 주변에서 고립되어 혼자 고뇌에 빠져 있는 카틸리나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이 그림에서는 키케로가 카틸리나에 비해 나이가 더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카틸리나가 키케로보다 2살 더 많다.
카틸리나 탄핵 당시 벌어진 야사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이름난 초대형 채무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카틸리나와 공모자라는 의심을 받았는데, 카틸리나를 탄핵하는 원로원 회의 때 카이사르에게 웬 편지가 와서 이를 읽고 있자 그의 정적인 소 카토는 그 편지가 카이사르와 카틸리나가 공모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카이사르는 이건 단순한 개인 편지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카토의 주장에 못이겨서 결국 카토에게 편지를 건네 주었다. 카토는 편지를 받아서 읽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카이사르에게 "작작 좀 밝혀라, 이 바람둥이야!"라고 호통쳤다. 알고 보니 그 편지는 카토의 씨다른 동복 누나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가 카이사르에게 보낸 뜨거운 연애 편지였다고.
[1] 세르기우스 가문에 속하는 다른 인물로는 로마의 상업적인 굴 양식의 선구자인 세르기우스 오라타가 있다.[2] 정치적으로 파트리키, 노빌레스 즉 귀족 가문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 또는 신흥 귀족으로 원로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벌족파로 번역하며, 반대로 플레브스 즉 평민 가문 계열에 속하거나 평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정치가들은 포풀라레스라 하여 민중파로 번역한다.[3] 다만 이 기준이 항상 들어맞지는 않는다. 후술할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도 대표적인 민중파 정치인이지만 원래는 유명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즉,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차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입장이 중요했지 출신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 카토나 키케로같은 대표적인 옵티마테스도 원래는 평민 귀족이나 기사 계급 출신이었다.[4] 국가가 관리나 정치인들에게 봉급을 주는 것이 공화정에 봉사하는 전통에 어긋난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지층 확보를 위해 벌이는 공공 사업 같은 것은 전부 사비 혹은 빌린 돈으로 해결해야 했다. 당연히 재산은 마이너스로 가는게 기본이었다. 대놓고 돈벌이를 할 수준까지의 직위에 올라가지 않는 한 재산을 늘리는 방법은 전쟁으로 땅이나 재산 등을 차지하거나 돈없는 농민의 땅을 강탈하거나 하는 것뿐이었는데, 카틸리나 때에 와서는 딱히 전쟁을 할 필요도 없고 내부의 토지 독과점도 이미 끝난터라 모두 불가능해졌다.[5] 이는 이미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했던 바 있다. 재산에 관계 없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정을 택한 나라답게 무산자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공직 대가의 보수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6] 다만 키케로가 4차례나 카틸리나 탄핵 연설을 책으로 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카틸리나를 처형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