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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1 13:42:28

마르쿠스 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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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황제 겸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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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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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4년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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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우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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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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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년 기원전 2년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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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롤리우스
라틴어: Marcus Lollius
생몰년도 기원전 54년 ~ 기원전 1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페렌티움(오늘날 이탈리아 라치오주 페렌티오)
사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지위 페렌티움 귀족
국가 로마 공화국로마 제국
가족 마르쿠스 롤리우스(아버지)
아우렐리아 코타(부인)
마르쿠스 롤리우스(아들)
푸블리우스 롤리우스 막시무스(아들)
참전 악티움 해전
게르마니아 전쟁
직업 로마 제국 집정관
로마 제국 집정관
임기 기원전 21년
전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이세르니누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동기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후임 마르쿠스 아풀레이우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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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정,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아우구스투스의 측근으로서 행정과 군사 방면에서 여러 업적을 쌓았으나 속주민들을 상대로 가렴주구를 일삼은 탐관오리로도 악명을 쌓았다.

뇌물을 받아 부를 축적하고, 속주민들을 쥐어 짜낸 행적만큼 그 행동거지가 지극히 위선적인 인물로 후대 연구자들에게는 그 평이 좋지 않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2대 황제 티베리우스와는 심한 갈등을 빚어 숙적으로 유명했다. 이런 배경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티베리우스 사이를 이간질하기도 했다. 그러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눈 밖에 나 고발당하자 자결했다. 이 인물 사후, 로마에 복귀한 뒤 아우구스투스의 정식후계자로 등극한 티베리우스에게 탐관오리이자, 위선이 몸에 벤 간신으로 공개비난을 당했다.

2. 생애

기원전 54년경 로마 공화국 페렌티움(오늘날 이탈리아 라치오주 페렌티오)의 저명한 평민 귀족인 마르쿠스 롤리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본래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의 일원이었는데 마르쿠스 롤리우스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모계 친척인 아우렐리우스 일족과 그는 깊은 연관이 있는 셈이니, 그가 아우구스투스의 지지자가 된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어디까지 신빙성 있는지 확실치 않다.

2013년 고대기록 연구 편람 기록에 따르면, 평민귀족(노빌레스)이나 공화정 말~프린키파투스 초에 등장한 노부스 호모(신참자)라고 한다. 참고로 우리로 따지면 가족 성씨에 해당된 코그노멘이 없어 보이나, 로마의 오래된 평민 씨족인 롤리우스 씨족 출신이며 씨족 가계는 사비니족, 삼니움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롤리우스'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부관이었는데, 필리피 전투 이후 숙청대상에 오르자 노예로 위장한 뒤 '바르불라'라는 인물에게 고용되었다가 그러다 롤리우스의 정체를 알게 된 바르불라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그를 용서해달라고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를 설득해 롤리우스가 사면받게 한 뒤 롤리우스를 부하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피아노스는 이 인물의 노멘(씨족명)만 밝혔을 뿐, 프라이노멘(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롤리우스가 마르쿠스 롤리우스와 동일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정치 활동에 뛰어들 때부터 옥타비아누스의 동료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 참가한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된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용서해달라고 청해 옥타비아누스의 허락을 받아냈다.기원전 25년 갈라티아 속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된 뒤 제2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에 전 갈라티아 왕국군을 포함하여 산악 부족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갈라티아인들은 수백년간 이어져온 왕국이 로마에게 흡수된 걸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이들을 달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제 역할을 잘 수행했고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기원전 21년, 집정관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아우구스투스를 선출하려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거절하고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불복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두 사람은 사퇴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폭동에 분노하여 아그리파를 로마로 보내 폭도들을 처단하여 질서를 회복하게 한 뒤, 선거를 다시 실시했다. 그 결과 롤리우스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파브리키우스 다리를 건설하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웠다.
M LOLLIVS M F Q LEPI[dus m f c]OS EX S C PROBAVERVNT
마르쿠스의 아들 마르쿠스 롤리우스와 마르쿠스의 아들 퀸투스 레피두스 집정관이 원로원의 법령에 따라 다리를 건설했다.

기원전 19/18년 마케도니아 총독을 맡아 오드뤼사이 왕국의 왕 코티스 2세의 아들들의 삼촌인 로메탈케스 1세와 함께 트라키아의 베르시 족을 토벌했다. 기원전 18/17년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라인강을 지키는 여러 군단을 이끌었다. 이때 수캄브리족, 우스페테스족, 텐크테리족 연합군이 갈리아로 쳐들어와 국경 지역을 약탈했다. 그는 이를 막으려 출정했으나 격파당했고, 5군단 알라우다에의 군기를 빼앗겼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사건을 수치스럽게 여겨, 10대 후반에 이미 모든 검증이 끝난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를 파견했다. 티베리우스는 롤리우스를 대신하여 사태를 수습했는데, 게르만 연합군은 티베리우스의 로마군이 도착하자 라인 강 너머로 물러났다.

사실상 불신임 형태로 강제소환된 뒤, 군기를 빼앗긴 일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비록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잃지 않았으나, 조카뻘 내지 아들뻘인 티베리우스와 비교됐고, 로마에서 성공과 유능함을 상징한 군지휘권은 사실상 박탈됐다. 즉, 은독수리 군기 문제로 다시는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롤리우스는 이 일로 수치심을 느끼고, 자신을 대신하여 갈리아 총독을 맡은 티베리우스를 적대시했다.

롤리우스의 행동은 당연히 티베리우스와 그 측근무리를 자극했다. 따라서 양측은 감정싸움을 넘어, 서로를 견제하게 되는데 롤리우스와 티베리우스의 대립은 거의 원수와 같을 정도였다. 젊은 티베리우스는 갈리아에서의 일 외에도, 롤리우스가 동방에서 총독을 지내며 벌인 가렴주구 행태를 대단히 경멸해 그를 간신배이자, 자신과 양부의 명성까지 흠집낸다고 여겼다. 이는 롤리우스도 비슷했는데, 그는 티베리우스가 평소 자신과 동료들의 아부에 반응하지 않은 것을 거만함과 자기능력이 뛰어나 자신을 무시한다는 행태로 여겼다. 이는 당시 티베리우스가 대 드루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보다 연장자임에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구도에서 후순위인 현실과 맞물려 롤리우스가 거의 공식적으로 티베리우스를 증오하고 은연 중 그를 비방한 원인이 됐다.

이런 가운데, 개선식 이후 공식 후계자로 데뷔 직전인 대 드루수스가 요절한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의 친아들로, 자신이 유아기부터 친아들처럼 대우해 키운 티베리우스를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강제 이혼 시킨 뒤 대 율리아와 결혼시킨다. 이는 마이케나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20년여 전 결행될 사건이었는데,[1]이는 롤리우스에게는 위기가 된다.

당시 롤리우스와 그 친구들은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정치적 스승 내지 측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티베리우스가 징검다리 후계자로 내세워 진 점을 토대로 기회를 엿봤는데 그 기회는 빨리 찾아온다.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결혼은 성격문제, 율리아의 비행, 고부갈등,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의 미묘한 갈등으로 흔들렸고, 이는 티베릴루스가 첫돌 직전 요절하고 율리아의 비행과 남성편력이 노골화되면서 부부갈등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호민관 특권을 받고 어떻게든 견딘 티베리우스는 번아웃이 온 나머지, 기원전 6년 모든 것을 내던지고 믿음직한 하인만 대동해 로도스 섬으로 떠나버린다.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미묘한 관계를 흔들리게 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멘토였던 롤리우스는 이 관계를 파고 들어 10대에 불과한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티베리우스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갖는데 일정부분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그 영향으로 티베리우스를 무책임한 아버지이자 삼촌으로 여겨, 그를 용서하지 않는데 이는 그가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로 공식데뷔하면서 더 확고해진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티베리우스의 로마복귀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그 뜻을 밝혔다. 이는 맨처음에는 불 같이 화를 냈다가 사실을 알고, 되려 티베리우스에게 대리인 지위를 내리고 로마로 데리고 오려고 한 아우구스투스가 쉽게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오지 못한 이유가 됐다.

기원전 2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동방으로 파견되었을 때, 그는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감사관으로서 동행해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보필했다.

롤리우스는 첫 동방출정에 기쁜 나머지, 1년간 그리스와 지중해 동부 도시를 여행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대신해 실무진과 연락을 취하며 파르티아 문제를 직접 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은 이집트에 가기 전, 로도스 섬에 들린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로도스 섬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던 티베리우스를 만나는데,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연락을 받은 티베리우스는 가족 내 서열을 중시여기는 로마인들의 관습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처럼 항구까지 마중 나와 일행을 정중히 대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가이우스는 계부이자 외삼촌인 티베리우스로 인해 어머니가 처벌받고 자신이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해 모두를 아연실색케 한다. 그는 판노니아에서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집안어른 티베리우스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모욕성 발언을 했고, 이어진 로도스 체류 중에서도 끊임없이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이 가진 악감정을 표출했다.

이때 가이우스의 멘토이며 고문단장을 맡고 있던 롤리우스는, 옆에서 가이우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조장해 두 사람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부추겼다. 이에 참다 못한 아헤노바르부스와 파테르쿨루스는 일을 키우지 말라고 질책했고, 함께 건너온 중립적 인사 술피키우스 퀴리누스 역시 롤리우스의 이런 행동에 혀를 내두른다. 이에 그는 방계황족이며 소 옥타비아의 사위인 아헤노바르부스와 상의 후 원로원에 이 사실을 보고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파견된 백인대장을 소환해 사실관계 확인을 하고,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의견을 보내라고 지시한다.

티베리우스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은 가이우스는 이해해줬지만 롤리우스에겐 반감을 품고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 롤리우스의 행위를 고발하는 서한을 보냈다. 따라서 롤리우스 쪽 인사들이 문책성으로 교체되는데, 이는 티베리우스와 롤리우스의 사이를 최악으로 치닫게 만든다.

이후 시리아에 도착한 롤리우스는 파르티아와의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이 공로를 가이우스에게 돌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소식에 흡족해하며 가이우스가 외교 문제를 매우 잘 해결했다며 칭찬했다. 그런데 얼마 후, 롤리우스는 가이우스에게 파르티아와 내통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5세가 가이우스에게 롤리우스가 파르티아 유력자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수령받았다는 걸 알렸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롤리우스는 유능했지만 사익을 우선시했으며 매우 위선적이었다고 비난했다. 대 플리니우스 역시 부를 축적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사실 롤리우스는 갈라티아, 마케도니아, 갈리아에서 탁월한 행정과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주민들을 쥐어짜거나 뇌물을 받아챙겨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그럼에도 로마의 저명한 인사들에게 호감을 살 정도로 자신을 잘 포장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저명한 시인 호라티우스는 총독들이 탐욕에 휩싸여 속주민들을 쥐어짜는 세태를 개탄하면서도 롤리우스는 이를 초월한 사람이라고 극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현대 학계는 이러한 그의 행보를 볼 때 파르티아 샤한샤와 동방 속주의 유력자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챙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된 가이우스의 고발을 받고, 로마에 소환된 뒤 재판을 기다리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독을 먹고 자살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롤리우스 고발 사건을 무마시켰고, 그의 막대한 재산은 국고로 귀속되지 않았다. 훗날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 회의에서 롤리우스의 부정한 재산 증식과 약탈에 가까운 속주민 착취 문제 등을 거론하며 맹비난했다.

3. 가족

롤리우스는 문학 후원자이며 기원전 31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의 시누이인 아우렐리아 코타와 결혼하여 아들 마르쿠스 롤리우스와 푸블리우스 롤리우스 막시무스를 낳았다.

두 아들 중 푸블리우스 롤리우스 막시무스는 아버지처럼 아우구스투스를 따르며, 기원전 27년부터 기원전 25년까지 히스파니아에서 군복무를 했고 로마 귀국 후에는 수사학을 배웠다. 롤리우스 막시무스는 젊을 적부터 호라티우스와 친구였는데, 그는 호라티우스에게 원로원 생활과 관료생활에 대한 고민, 어려움을 토로하고 그에게서 여러 조언을 받았다. 이때 호라티우스는 그에게 사회적 관계와 상관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존중하고 상냥함과 타인의 생각을 이해할 줄 알아야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런 조언 때문에 롤리우스 막시무스는 아버지 롤리우스, 형제인 마르쿠스 롤리우스와 달리 티베리우스 등의 남성황족들에게 항상 예를 갖췼다. 따라서 그는 후일의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찍히지 않았는데, 그와 관계도 나쁘지 않아 기원전 20년부터는 정치활동보다 시인, 교양인으로 활동해 후일의 황제 티베리우스 밑에서도 경력을 순조롭게 쌓을 수 있었다.

롤리우스와 이름이 같은, 또 다른 아들 마르쿠스 롤리우스는 기원전 12년 집정관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와 노니아 폴라의 딸인 볼루시아 사투르니나와 결혼하여 칼리굴라 황제의 세번째 황후가 될 롤리아 파울리나를 낳았다. 그는 두 딸에게 부친이 가렴주구로 축적한 재물을 모두 유산으로 남겼다.


[1]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마르켈루스가 요절하자 총각인 티베리우스를 대 율리아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아그리파와 미묘한 경쟁 중인 마이케나스가 리비아를 견제하고, 자신과 아그리파의 우정을 유지하면서도 티베리우스를 제어할 요량으로 끼어든다. 하여 그는 아그리파를 새 사위로 강력하게 추천하는데, 이는 단기적으로는 마이케나스에게 도움이 됐음에도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의 단명과 연이은 궁중음모의 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