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라틴어: Quintus Aemilius Lepid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년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이세르니누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
동기 | 마르쿠스 롤리우스 |
후임 | 마르쿠스 아풀레이우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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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씨족 출신이지만, 가족 관계는 알려진 바 없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롤리우스'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부관이었는데, 필리피 전투 이후 숙청대상에 오르자 노예로 위장한 뒤 '바르불라'라는 인물에게 고용되었다. 그러다 롤리우스의 정체를 알게 된 바르불라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그를 용서해달라고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를 설득해 롤리우스가 사면받게 한 뒤 롤리우스를 부하로 삼았다고 한다.아피아노스는 이 인물의 노멘(씨족명)만 밝혔을 뿐, 프라이노멘(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21년 집정관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이 된 마르쿠스 롤리우스이며, '바르불라'는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그노멘일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에 맞서다가 생포된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롤리우스가 일전에 그의 은혜를 입었다며 용서해달라고 간청하자,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풀어주기로 했다. 많은 학자들은 롤리우스가 필리피 전투 이후 목숨을 잃을 위기에 몰렸던 자신을 구해준 것에 보답한 거라고 해석한다.
기원전 21년, 집정관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아우구스투스를 선출하려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거절하고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불복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두 사람은 사퇴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폭동에 분노하여 아그리파를 로마로 보내 폭도들을 처단하여 질서를 회복하게 한 뒤, 선거를 다시 실시했다. 그 결과 롤리우스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두 집정관은 이 시기에 파브리키우스 다리를 건설하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웠다.
M LOLLIVS M F Q LEPI[dus m f c]OS EX S C PROBAVERVNT
마르쿠스의 아들 마르쿠스 롤리우스와 마르쿠스의 아들 퀸투스 레피두스 집정관이 원로원의 법령에 따라 다리를 건설했다.
마르쿠스의 아들 마르쿠스 롤리우스와 마르쿠스의 아들 퀸투스 레피두스 집정관이 원로원의 법령에 따라 다리를 건설했다.
이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 15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를 맡았으며, 기원전 15년부터 수년간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1년 집정관을 맡은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