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라틴어: Manius Aemilius Lepidus | |
생몰년도 | 미상 ~ 21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제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버지) 아이밀리아 레피다(딸)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11년 |
전임 |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
동기 |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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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는 기원전 21년 집정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이다. 기원전 5년 이후에 아우구르를 맡았으며, 11년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올랐다가 7월에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넘겨줬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14년 죽음을 눈앞에 둔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의 마지막 면담에서 3명의 인사를 거론했다. 그는 마니우스 레피두스는[1] 국정을 맡을 만한 능력이 있지만 이를 맡기를 싫어한다고 평했고, 갈루스는 기꺼이 그 임무를 감당하려 하겠지만 그럴만한 능력은 없다고 평했다. 또한 루키우스 아룬티우스(6년 집정관)는 최고의 권력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기회가 오면 감히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레피두스와 갈루스를 언급했다는 것은 당대에 이견없이 받아들여졌지만, 일부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룬티우스의 자리에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대신 거론했다고 한다. 이 4명 중 레피두스와 피소는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이 되었지만, 갈루스와 아룬티우스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내내 갈등을 벌였다.20년, 친척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첫 남편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는 그녀를 간통죄, 마녀, 독살 시도 혐의로 고소했다. 그는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위해 변호를 맡았지만, 유죄 판결이 내려지는 걸 막지 못했다. 21년, 로마 시인 클루토리우스 프리스쿠스가 2년 전에 게르마니쿠스가 죽을 때 그를 찬양하는 글을 써서 티베리우스에게 상금을 받은 걸 떠올리고,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 드루수스가 중병에 걸리자 그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그러나 소 드루수스는 회복되었고,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자 당해 집정관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로부터 소 드루수스가 죽기를 바랐다는 불경죄로 고발했다. 이에 그는[2] 클루토리우스의 시는 위험하지 않고 단지 취향에 맞지 않고 품위가 없을 뿐인데 사형은 너무 가혹하며, 프리스쿠스를 자살로 이끌고 황제가 종종 그랬듯이 자비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프리스쿠스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집정관의 주장을 따르기로 하고 프리스쿠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즉시 집행했다. 티베리우스는 프리스쿠스가 처형된 후 원로원에 편지를 써서 그들의 충성심에 감사했지만, 그들의 성급함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명했다. 이후 형 선고와 처형 사이에 10일의 간격을 두도록 하는 법률 개정이 이루어졌다.
21년, 마니우스는 아시아 총독에 부임했다. 이에 대해 14년 집정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그가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변호한 걸 문제삼아 아시아 총독에 부임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원로원 의원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미래의 로마 황제 갈바의 아내였다.
[1] 로널드 사임은 마니우스가 아닌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피두스 가문의 복잡한 가계도와 작명법 때문에 결론을 내기 힘든 문제이다.[2] 6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