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라틴어: Gaius Ateius Capito | |
생몰년도 | 미상 ~ 2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아버지)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5년 |
전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
동기 |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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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아버지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는 기원전 55년 호민관을 역임했으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 이를 강하게 규탄하고 릭토르들에게 크라수스를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릭토르들이 이에 따르지 않자, 그는 화로에 향과 제물을 던지고 크라수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쿠라수스는 이를 묵살하고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으나 카르헤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그는 일찍이 에퀴테스 신분이며 저명한 법학자인 아울루스 오필리우스로부터 법학자로 교육받았으며, 변호사이자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와 웅변가이자 변호사로서 라이벌 관계였는데,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가 공화정 체제를 강하게 추종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복종하길 거부해서 여러 고초를 겪은 데 비해, 그는 아우구스투스를 강력하게 지지했기에 많은 호의를 얻었다. 기원전 17년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에 따라 루디 테렌티니[1]와 관련된 시빌라 예언서에 대한 법적 설명을 제공했다.
서기 5년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와 함게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13년 로마 시의 하수도를 관리하는 관원에 선임되었다. 15년 티베리스(테베레) 강이 범람하면서 로마 시가 상당한 피해를 입자, 그는 루키우스 아룬티우스와 함께 홍수를 통제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두 사람은 티베르 강의 지류를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도시가 침수될 가능성을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개선안은 지류를 돌릴 경우 자기들 땅이 침수될 것을 우려한 로마 주변 소도시 유력 인사들의 반발을 샀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새로운 위원회인 쿠랄로레스 리파룸(Curalores Riparum)을 설립했다. 그는 이 위원회에도 참석하여 티베리스 강을 통제할 방안을 계속 논의했다. 서기 22년에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로마법과 관련한 여러 작품을 집필했지만 현존하는 건 하나도 없으며, 후대 작가들의 인용문을 통해 제목만 전해진다. 그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으로는 'De pontificio iure(폰티펙스에 관한 법률에 관하여)', 'De iure sacrificiorum(제사법에 대하여)', 'Coniectanea(잡다한 글, 법률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고 한다.)', 'De officio senatorio(원로원 건물에 관하여)', 'Epistulae(서간)'이 있으며, 그 외에도 아우구르에 관한 제목이 알려지지 않은 한 작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피토는 법학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제자인 마수리우스 사비누스의 이름을 따서 사비니우스 학파로 알려지게 된 법학자 학파가 결성되었다. 그의 저서는 6세기까지 읽히고 인용되었는데, 법학자들보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 아울루스 겔리우스 등 문헌학자들에게 주로 인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