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라틴어: Lucius Arrunti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7년 이전 ~ 3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루키우스 아룬티우스(아버지) 아이밀리아(아내)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양자)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6년 |
전임 |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가이우스 아텔리우스 카피토 |
동기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라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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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정치인. 아우구스투스 치세 말기와 티베리우스 치세 때 활약한 인물로, 탁월한 능력과 영향력을 갖춘 인물로 아우구스투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치세 내내 견제를 받다가 37년경 근위대장 마크로에 의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자살했다.2. 생애
아버지 루키우스 아룬티우스는 아티나 시의 부유한 볼스키 귀족 가문 출신이자 그 지역의 부자의 아들이었다.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등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을 상대로 해방자 내전을 치를 때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부자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숙청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아버지까지 살해당하자, 아룬티우스는 노예와 추종자들을 무장시킨 뒤 이탈리아 해안으로 탈출한 후 시칠리아로 건너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했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약이 체결되면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던 인사들이 사면받자, 아룬티우스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옥타비아누스의 부관이 되었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 때 함대 중앙 편대를 이끌었으며 기원전 2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그가 언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누구인지, 초기 생애는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서기 6년에 40세 이상만 맡을 수 있는 집정관을 역임한 것을 볼 때 기원전 27년 이전에 출생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지만 7월 1일에 사임하고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보결 집정관을 맡았다. 남아있는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가 아우구스투스 치세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로원 내부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 손꼽힌 것만은 분명하다. 타키투스는 그를 흠없는 덕목을 가진 사람이자 부자이며, 용감한 성품을 갖췄으며, 저명한 자질을 부여받았으며, 그에 상응하는 대중의 존경을 받은 인물로 묘사했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14년 죽음을 눈앞에 둔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의 마지막 면담에서 3명의 인사를 거론했다. 그는 마니우스 레피두스는[1] 국정을 맡을 만한 능력이 있지만 이를 맡기를 싫어한다고 평했고,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는 기꺼이 그 임무를 감당하려 하겠지만 그럴만한 능력은 없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아룬티우스는 최고의 권력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기회가 오면 감히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레피두스와 갈루스를 언급했다는 것은 당대에 이견없이 받아들여졌지만, 일부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룬티우스의 자리에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대신 거론했다고 한다. 이 4명 중 레피두스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이 되었지만, 아시니우스 갈루스와 아룬티우스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내내 갈등을 벌였다.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는 그토록 사랑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강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이혼해야 했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재혼한 아시니우스 갈루스를 미워했다고 기술했다. 특히 갈루스는 소 드루수스가 빕사니아와 자신의 아이라는 주장까지 하여 티베리우스의 진노를 샀다고 하며, 결국 티베리우스에 의해 아사했다. 반면 아룬티우스에 대해서는 별다른 원한이 없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재능이 풍부하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뛰어난 예술감각과 동등한 공적 명성을 갖췄다"라고 호평하자 자연히 아룬티우스를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어떤 근거로 아룬티우스가 제국을 이끌 능력이 있으며 이를 얻을 기회를 노릴 거라고 평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티베리우스는 숨을 거둔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서 후계자로 지명된 후, 원로원 회의에서 자신이 제국을 이끌 책임의 일부를 지겠지만 전부 지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자 갈루스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직을 원하느냐?"라고 되물으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을 분할하는 게 아니라 전체 권력을 받기를 원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룬티우스 역시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하면서 티베리우스에게 책임을 원로원에 떠넘기지 말고 다 맡으라고 요구했다. 티베리우스는 짐짓 이를 받아들였지만 내심 "어떤 관직을 맡으려고 그러느냐?"라고 비꼰 두 사람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었다고 한다.
15년 티베리스(테베레) 강이 범람하면서 로마 시가 상당한 피해를 입자, 아테우스 카피토와 함께 홍수를 통제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두 사람은 티베르 강의 지류를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도시가 침수될 가능성을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개선안은 지류를 돌릴 경우 자기들 땅이 침수될 것을 우려한 로마 주변 소도시 유력 인사들의 반발을 샀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새로운 위원회인 쿠랄로레스 리파룸(Curalores Riparum)을 설립했다. 그는 이 위원회에도 참석하여 티베리스 강을 통제할 방안을 계속 논의했다.
20년,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항명과 살해, 군기 위반, 국가에 대한 반역을 꾀한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피소는 동료 의원들에게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청했는데, 그 중엔 아룬티우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피소에 대한 여론이 매우 좋지 않은 점을 고려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21년에는 마메르쿠스 스카우루스와 함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2]에게 고발당한 친척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변호했다.
25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피소가 원주민들에게 암살당했다. 티베리우스는 아룬티우스를 그 지방의 새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그가 로마를 떠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고 대리인을 통해 간접 통치하게 했다. 그가 그곳에 직접 가서 현지에 주둔한 3개 군단을 이끌면서 막강한 재산과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될 거라 판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타키투스는 33년 티베리우스가 총독과 군단 지휘권을 맡을 만한 인물들이 로마를 떠나 현지로 가서 일하는 걸 꺼리는 경향을 비판한 것에 대해 "그는 아룬티우스가 스페인에 가지 못한 지 10년이 지났다는 걸 잊어버렸다"고 비꼬았다.
31년, 아룬티우스는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부하인 아우세우스와 산퀴니우스로부터 고발당했다. 그가 어떤 혐의로 고발당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분명하지 않지만, 세야누스가 이 시기에 "프린켑스에 대한 불경" 혐의를 적용해 수많은 인사를 숙청했던 것, 이듬해에 가이우스 카실리아누스가 코타 메살리누스를 불경죄 혐의로 고발했다가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면서 "아룬티우스를 고발했던 아우세우스와 산퀴니우스와 동일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로원의 명령이 내려졌다"는 타키투스의 서술을 볼 때, 그는 두 사람에게 "프린켑스에 대한 불경"을 저지른 혐의로 고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 숙청을 단행하고 그에게 걸린 혐의를 풀어주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37년, 원로원은 근위대장 마크로로부터 알부킬라를 "프린켑스에게 불경을 저지른 자"라고 비난하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그리고 루키우스 아룬티우스를 공범자이자 간통자로 고발하는 서신을 받았다. 알부킬라는 세야누스의 심복이자 크레무티우스 코르두스를 고발한 인물인 사트리우스 세쿤두스의 아내였으며, 여러 남자와 간통하면서 세야누스가 음모를 꾸미는 데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기로 악명 높았다. 여기에 마크로는 카르시디우스 사케르도스, 폰티우스, 프레겔라누스, 라일리우스 발부스가 알부킬라의 "강간 장관(stuprorum ministri)"이었다고 덧붙였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아룬티우스는 자신에게 또다시 불경 혐의가 적용되자 자살을 결심했다. 친구들이 좀 더 두고보고, 정 안 되면 도피하자며 자결을 만류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나는 충분히 오래 살았네. 단지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오랫동안 세야누스에게 모욕과 위협을 받더니 이제는 가증스러운 마크로의 범죄에 고통받으며 노년을 끌고 간 것이지. 죽어가는 프린켑스의 마지막 날을 피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새로 등장할 젊은 프린켑스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오랜 경험을 가진 티베리우스가 영혼을 변조시키고 동요시키는 이 권력의 도취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겨우 어린 시절을 갓 넘기고 모든 것에 무지하거나 그릇된 방식으로 양육된 가이우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린애에서 갓 벗어나 아무것도 모르고 해독 속에서 자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세야누스보다 한층 더 나쁜 자인 마크로의 지도를 받으며 통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결국 혈관을 잘라 스스로 죽었다. 반면 그와 함께 불경 혐의로 기소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비비우스 마르수스는 티베리우스 사후 무죄 방면되었고, 알부킬라, 카르시디우스 사케르도스, 폰티우스, 프레겔라누스, 라일리우스 발부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자살을 강요당했다.
그는 아이밀리아를 아내로 들였으나 아들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후손이며 서기 8년 집정관을 맡았고, 서기 17년 아프리카의 총독으로서 베르베르인 지도자 타크파리나스를 격파한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차남을 양자로 삼고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크리보니아누스는 32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하는 등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양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원한을 품었다. 4년 후인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가 암살당한 뒤 클라우디우스 1세가 황위에 올랐을 때 일리리쿰 총독을 맡고 있던 그는 황실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복구하기를 원하는 인사가 원로원에 많다는 걸 눈치채고 42년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 등 동지들을 끌어모으고 많은 군단에게 막대한 뇌물을 줘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달마티아에서 거병하여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이에 호응하지 않고 흩어지면서 5일만에 진압되었고, 이사 섬으로 도망친 뒤 자살했다.
[1] 로널드 사임은 마니우스가 아닌 마르쿠스 레피두스(6년 집정관)가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피두스 가문의 복잡한 가계도와 작명법 때문에 결론을 내기 힘든 문제이다.[2] 네로 황제 치세 때인 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에서 맹활약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