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라틴어: Gnaeus Domitius Ahenobarb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년 12월 11일 ~ 서기 40년 1월 |
지위 | 노빌레스, 로마 황족 |
국가 | 로마 제국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부모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버지) 대 안토니아(어머니) |
배우자 | 소 아그리피나 |
자녀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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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원로원 의원, 황족이자 범죄자.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대 안토니아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차남이다. 따라서 모계를 통해 로마 황족이며 황족 특권을 통해 남들보다 5년 일찍 집정관에 취임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티베리우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형제와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게르마니아 땅을 거의 정복한 장군으로 아우구스투스 시대 동안 제국 동부에 대한 행정, 외교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선보인 인물이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지만 악명이 대단해서 세간의 평이 바닥을 쳤는데, 루키우스 자신은 출신 가문과 정반대로 행실이 나쁘긴 커녕 유능한 황족이었고 개인적인 평도 매우 좋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그나이우스는 아버지랑 정반대로 어머니 대 안토니아가 황족이라는 배경을 믿고 온갖 부도덕한 행동과 범죄를 벌었다. 그 결과 당대부터 호부견자의 대명사로 유명했다.
현직 집정관으로 있던 중 벌인 범죄가 추악하고, 질이 너무 나빠 티베리우스 치세 말 황제에게 직접 지목돼 기소됐다. 이때 그는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사형 집행 전까지의 공포를 경험했다.
외사촌형 게르마니쿠스의 장녀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얻었는데 그가 바로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 국가의 적 선고를 받고 몰락한 폭군 네로 황제다.
2. 생애
2.1. 출신 가문과 가계
이름에서 드러나듯, 옛 공화정 시절, 평민씨족 도미티우스 일족 중 가장 강력하고 위세가 대단한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출신이다. 개인이름(프라이노멘) 그나이우스는 출신 씨족 가문인 도미티우스 일족 남성들이 모두 사용하고 애용한 것이며,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유서 깊은 두 프라이노멘 중 하나다.증조부는 옵티마테스파의 일원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증조모는 소 카토의 누이 포르키아이다. 조부는 해군제독으로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러움 속에서 나온, 비루한 인간의 표본"으로 악평을 받은, 집정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조모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알바롱가에서 기원했으나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후예로 알려진 명문 파트리키 일족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능력이 뛰어나고, 인간성이 괜찮은 편인 로마 장군, 외교관, 정치가, 행정가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어머니는 로마 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2차 삼두정치의 한축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결혼해 낳은 첫째 딸 대 안토니아다. 따라서 모계를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를 이었는데, 부모가 기원전 36년 아주 일찍 약혼 후 기원전 22년 혹은 기원전 23년 결혼해 아버지 역시 제정이 사실상 수립된 이후 로마 황족에 준하는 특권과 영예를 선사받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어릴 적 로마 황족의 예우와 권한을 자연스레 부여받았다.
2.2. 막장 황족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부터 로마인들에게 악명을 얻은 도미티우스 가문 내 아헤노바르부스 가 출신의 악명 그대로 막장 황족으로 유명했다. 이는 가문이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부터 얻은 악평, 조부인 아헤노바르부스 제독의 정치적 행보로 얻게 된 불명예로 인해 어릴 적부터 이유 없이 각종 비방성 소문에 시달려, 저평가 받은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다른 점이었다.일설에 따르면, 기원전 16년생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2년 12월 11일생이다. 위로는 큰누나 도미티아, 형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년생), 둘째누나 대 도미티아 레피다와 여동생 소 도미티아 레피다가 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과 그 일가를 극도로 혐오해, 온갖 뜬소문도 사실로 적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나이우스는 일평생 내내 "비열하고 부도덕하며 정직하지 않은 인간"의 표본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가 아닌, 그나이우스와 동시대 사람들의 기록도 비슷해 아들 네로의 막장행보로 얻게 된 불명예가 아니었다.
그나이우스는 형 루키우스와 함께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과거부터 이미지가 최악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악명을 최악으로 만든 막장황족의 대명사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평민귀족(노빌레스)인 출신 가문의 권세와 재력, 어머니 대 안토니아가 황족이고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훌륭한 장군이자 인기 전차기수였던 경력, 외할머니가 소 옥타비아라는 점만 믿고 온갖 사고를 치고 각종 범죄를 수없이 저질러 또래 귀족들 사이에서도 질 나쁘기로 유명했다.
그는 성년식 전, 아피아 가도에서 일부러 본인 소유의 명마를 몰고 질주해 놀고 있는 아이들을 괴롭히고 한 아이의 인형을 고의로 밞았고 제 기분에 따라 또래를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는 그나이우스의 형 루키우스도 비슷했는데, 형 루키우스의 경우에는 동생과 이 짓을 함께 벌이면서 포룸에서 시비를 걸고 "자신을 능욕했다"며 기사계급 남성을 폭행해 눈을 뽑아버릴 정도로 때려 멍들게 했다.[1] 그나이우스의 형 루키우스는 아버지 루키우스를 따라 가이우스 카이사르 수행원으로 시리아로 건너갔는데, 술을 잔뜩 마시고 자유민에게 시비를 걸고 그를 죽을 때까지 때려 죽였다. 따라서 아버지 그나이우스 제독 생전부터 온갖 욕을 이유없이 먹던 아버지 루키우스는 그나이우스의 형 루키우스가 이 사고를 치고 난 직후부터, 잘못된 오해와 뜬소문 등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러 가서 제 기분에 따라, 사람을 때려 죽인 살인마"라는 누명을 썼고, 두 아들의 폭력성과 온갖 시비로 아들 관리도 못하는 못난 아버지로 손가락질 받았다.
그나이우스의 막장 행보는 형 루키우스가 요절한 이후에도 계속됐는데, 그는 매우 폭력적이고 잔인한 형과 판박이이면서도 일찍부터 온갖 범죄를 당연하게 벌이고 이를 은폐했다. 따라서 그는 10대 후반부터 국고 횡령, 폭행, 협박, 여러 여성들과의 불륜, 도박,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기 중독, 고리대금업 등을 저지르고, 여동생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불륜을 맺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품행이 대단히 나빴다. 하여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차남 그나이우스가 가문의 후계자가 된 이후, 벌인 온갖 탈선행동으로 인해 아우구스투스 장례식 직후부터 "아내 외삼촌인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이런 까닭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죽을 때까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이를 벼른 이는 수없이 많았다. 결국,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그나마 보호막 역할을 해준 아버지, 어머니 모두 사망한 뒤부터 위기에 몰렸고, 세야누스 사건 이후, 대대적인 국가 기강잡기에 나선 2대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정식 기소돼 법정에 서게 된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버지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와 게르마니아 전쟁, 일리리아 반란, 파르티아 외교전 등 모든 일을 함께 경험한 전우였고, 친구 중의 친구였다. 어머니 대 안토니아는 여동생 소 안토니아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유일하게 인정받는 황녀인 상황에서 처신을 훌륭히 하고, 매우 정숙했다. 따라서 이 점에서 그나이우스는 온갖 사고를 치더라도, 티베리우스 황제와 그나이우스 부모와의 관계를 생각해, 숙청 전의 세야누스를 비롯한 프라이토리아니 실세들은 이를 눈 감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대 안토니아는 서기 32년 사망했고, 아버지 루키우스는 훨씬 전인 서기 25년 사망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아버지의 사인은 단단히 속을 썩인 그나이우스의 비행으로 인한 병세 악화였을 정도. 그러니 집안 어른인 이모 소 안토니아를 필두로 한 황족들에게 그가 어떤 평을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설명이 가능했고, 세야누스 숙청 이후 정국이 급격히 경색된 상황 속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친인척에게 불만이 큰 정적이나 세야누스 숙청 후 야심 속에서 거물급 인사의 범죄를 밝혀 한몫 쥐려는 마크로 같은 신진급 인사들에게 약점 많고 온갖 범죄를 벌인 그나이우스는 기소된 순간부터 집중포화를 맞아야 했다.
그나이우스가 정식 기소된 이유는 그가 벌인 사기, 국고 횡령 그리고 유부녀들과 불륜을 벌이고 이를 알게 된 동료 원로원 의원들을 협박한 것이 근위대장 마크로에게 제대로 걸려 티베리우스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기소된 문제의 사건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서기 32년, 당해 집정관을 맡았던 시절에 벌어졌다.
이 당시 그는 현직집정관 자리를 이용해, 로마와 이탈리아 내 은행가, 사업가들에게 허위정보, 조작된 사업계획 등을 내밀어 사기를 쳤다. 그는 투자자금으로 받은 거액을 꿀꺽 집어 삼켰고, 전차경주 승부조작에 나서 대회 상금까지 모조리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는 그가 법무관 시절일 무렵부터 해 온 주특기였는데, 법무관 시절에는 주최 측 돈을 강탈했다. 이 사기행각과 거액 편취 범죄에는 여동생 소 도미티아 레피다도 관여됐는데, 이에 누이 대 도미티아 레피다는 이런 그의 행동을 질타했다. 그나이우스의 누나 대 도미티아는 집안에서 부모의 인품을 유일하게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정숙했고, 황제 주변에게도 제대로 된 황족이라고 평가받은 만큼, 이것은 단순한 질타가 아니었다.[2] 하지만 그나이우스는 이런 누나의 지적에도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얼마 후, 피해자들이 항의하면서 드러난다. 현직 집정관에게 속아 거액을 날린 은행가와 사업가들은 항의했고, 피해를 입고 상금을 한푼도 못 받은 전치기수들은 앞장서 따졌다. 이렇게 일이 커지자, 그나이우스는 정의의 사도가 된 양 뻔뻔하게 "미래에 받을 상금을 그 자리에서 지불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면서, 제 지위를 동원해, 이들을 협박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여러 유부녀들과 불륜을 벌이고, 사취한 거액을 이용해 고리대금사업까지 벌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 사건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첩보를 접하고 면밀히 증거를 모은 마크로는 이를 카프레아이 별궁에 보고한다.
보고를 들은 티베리우스 황제는 사실을 알자마자, 법무관과 프라이토리아니를 통해 사건조사를 명한다. 이후 모든 증거가 취합되자, 격분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를 손수 반역죄, 간통죄, 여동생과의 근친상간, 강간죄, 간음죄, 국고횡령죄, 사기죄, 협박죄, 율리우스 법에 따른 고리대금업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해, 재판에 넘겼다. 허나 그나이우스는 자신이 황족이라는 점을 믿고, 당대 최고의 변호사를 여럿 고용해 자기변호로 일관하며 반성의 기미를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함께 기소된 동료,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사람들을 거액으로 포섭하고, 재판이 끝나면 보복을 하겠다는 식의 협박 등을 했다. 이는 함께 간통죄로 기소된 귀부인, 동료의원들과 상반된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거나, 목숨을 끊거나, 피해자에게 피해액 이상을 지급하는 등 반성의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나이우스가 일관하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나머지 이를 공개질타한다. 황제는 마크로가 아닌 개인서신비서와 측근들에게 자신의 서신을 손수 법정에서 읽게 했고, 그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온갖 무서운 말로 꾸짖었다. 이렇게 되자 그나이우스는 겁에 질렸다. 그를 보호해줄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고, 남동생의 뻔뻔함에 누이 대 도미티아는 그를 위한 변명을 해주지 않았다. 이모 소 안토니아와 외사촌형 클라우디우스 역시 그나이우스를 모른 척 했다.
결국 재판 선고일, 티베리우스는 용서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가 유죄판결을 받자마자 직접 사형을 언도하고, 지하감옥에 가뒀다가 전통적인 처형 방법으로 그를 죽여버리라고 지시했다. 즉, 스스로 양 손목 정맥을 자르고 과다출혈로 죽은 다음, 시신이 테베레 강에 던져지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짐과 동시에 재산이 전부 압류된다는 운명이 그에게 남게 됐다. 뒤늦게 그나이우스는 꼼짝없이 반역자로 처형될 상황이 됨에 후회하면서 싹싹 빌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를 선고하게 하면서, 그나마 호의를 베푸는 식으로 선고 당일 처형만은 없게 하고, 그를 지하감옥에 수감하게 했다. 그런데 사형 집행을 며칠 앞두고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서거하고 후임으로 아내의 오빠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즉위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서거로 사형이 연기됐고, 원로원과의 관계 모색을 위해 때마침 칼리굴라가 즉위하고 난 뒤, 새 황제와 원로원에서 모든 사형수들을 사면한다는 포고가 발표됐다. 그나이우스는 겨우 석방됐다.
2.3. 결혼과 아들 네로
그나이우스는 외사촌형 게르마니쿠스가 대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그나이우스의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어머니 대 안토니아가 힘쓴 결과 때문인데,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황제가 결혼을 승낙해 티베리우스 주선 형태로 소 아그리피나가 13번째 생일이 지난 뒤 14살이 됐을 때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이 결혼은 로마에서 열렸고, 두 사람은 로마와 안티움을 오가며 신혼생활을 했다.아들 네로는 그가 석방된 이후, 안티움 고급 별장에서 태어났는데,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나이우스는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이 첫 아이 탄생을 축하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놈이 될 수밖에 없을걸?! 얘는 국가적 위험이 될거야."
이후, 그는 아들을 쿨하게 인지해주고 평소대로 행동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 아그리피나는 오빠 칼리굴라에게 자기 아들에게 마땅한 이름을 지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는 그녀가 오빠에게 아들의 황족 지위를 내려 달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이에 칼리굴라는 자신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1세와 황궁 안에서 국가 사무를 논의하다가 이를 듣고 힐끗 숙부를 쳐다보며 웃곤, "클라우디우스라고 짓는 게 어떠냐?"라고 농담하곤 알아서 하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아그리피나와 그 남편 그나이우스에게도 웃음거리 내지 조롱거리로 인식된 것을 , 칼리굴라가 정곡을 찌른 뼈있는 농담이었다. 따라서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소 아그리피나는 그 말이 전혀 달갑지 않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황제였던 칼리굴라는 사과의 말 없이 첫 외조카 탄생만 축하하면서 축전을 보냈다. 이때 그는 후일 네로가 될 아이의 미래와 아헤노바르부스 가의 번영을 축원해줬는데, 이후에도 칼리굴라는 그나이우스와 아그리피나의 아들에게 카이사르 가의 상속권을 내주지 않았다.[3]
2.4. 죽음
그나이우스는 서기 40년 1월, 고대 에트루리아 지방의 도시 피르기에서 부종으로 죽었다. 그는 운 좋게 사형을 면한 뒤, 과거처럼 범죄행위를 하거나 막장 행동을 하지 않는 등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병으로 온 몸이 붓고, 고통스럽게 되자, 그나이우스는 다혈질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다시금 드러냈다. 그는 병석에서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기분이 좋지 않다며 간호 중인 노예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고통이 심해지면 주변 간병인들을 분이 풀릴 때까지 마구 폭행했다.죽기 전, 유언을 통해 아들 네로에게 유산의 3분의 1을 내주고 그 일부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칼리굴라와 옛 동료들에게 상속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유언장은 그나이우스의 아내 아그리피나가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율리아 리빌라와 함께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한 계획이 들통이 나면서 집행되지 못했다. 아그리피나가 사형을 면하고 섬으로 유배된 뒤,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칼리굴라는 이 유언장을 모두 무시하고, 어린 네로 몫까지 모조리 국고에 귀속시켰다.[4] 이 재산은 후일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른 뒤, 아그리피나가 사면되면서, 유언장 집행 재개 후 네로에게 돌아간다.
3. 사후 이야기
일생 동안 그나이우스는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고, 사후에도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가 난잡한 귀부인 알부킬라와 오랜 기간 불륜 속에서 그녀에게 여러 남자애인을 소개해주고, 함께 부도덕한 일을 벌인 일은 그나이우스의 범죄경력보다 더 큰 질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알부킬라 스캔들로 불린 티베리우스 치세 말 사건 속에서 다른 관련자들과 달리, 끝까지 뻔뻔했고,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아들 네로는 서기 54년 즉위하자마자 아버지를 기리고자 원로원 회의장 안에 서기 55년 동상을 직접 건설하도록 준비시켰다. 이후 네로는 아우구스투스 직계를 모조리 제거한 뒤, 아버지와 본가를 대대적으로 우상화하는데 이는 네로가 몰락하면서 흐지부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