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Lucius Pomponius Flaccus | |
생몰년도 | 미상 ~ 33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움브리아 지방 이구비움 |
사망지 | 로마 제국 시리아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형제)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17년 |
전임 |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
동기 |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
후임 |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
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움브리아 지방의 도시인 이구비움(현재 구비오) 출신이다. 조상에 대한 정보는 없으며, 형제로 16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가 있었다.그는 형과 함께 시인 오비디우스의 친구이자 후원자를 맡았으며, 오비디우스는 폰토스로 유배된 뒤 두 형제에게 편지를 잇따라 보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자신을 위해 중재해 달라고 청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호주의 저명한 로마 전문 역사가 로널드 사임은 오비디우스가 그의 형제인 그라이키누스에게 보낸 시의 내용을 토대로, 플라쿠스가 11년이나 12년부터 모이시아 총독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의 레가투스였다고 추정했다.그는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 16년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가 형제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함께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자살했을 때, 플라쿠스는 원로원에서 반란이 진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개 감사의 날을 지정하자는 제안을 올려 통과시켰다. 17년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한 뒤, 모이시아 총독을 맡았다.
18년, 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의 공동 국왕 코티스 3세와 레스쿠포리스 2세가 통치 영역을 놓고 갈등을 벌인 끝에 레스쿠포리스 22세가 코티스 3세를 함정에 빠뜨려 가뒀다. 레스쿠포리스 2세는 코티스 3세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꾀했다고 고발하면서, 자신에게 트라키아 전역을 다스릴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티베리우스가 자세한 경위를 알고 싶으니 로마로 와달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감옥에 수감된 조카를 살해했다.
19년, 티베리우스가 코티스 3세가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자 재판을 열고 레스쿠포리스 2세를 소환했다. 레스쿠포리스 2세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레스쿠포리스와 친분이 있던 플라쿠스가 "내가 그대의 신변을 보장해줄 테니 조속히 로마로 가자"라고 설득했다. 레스쿠포리스 2세는 그 말에 따라 로마로 가기 위해 모이시아 속주로 들어갔고, 플라쿠스는 '명예 경비대'라고 밝힌 병사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 병사들은 얼마 안가 돌변해 레스쿠포리스 2세를 생포한 뒤 로마로 호송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플라쿠스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와 함께 이틀 동안 밤새 연회를 즐기고 술을 실컷 마셨다. 그 후 티베리우스는 플라쿠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피소를 우르바노 지방 장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32년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플라쿠스는 헤로데 안티파스 왕에 의해 축출된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에게 피난처를 재공했다. 타키투스는 그가 33년 재임 중에 사망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