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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4:14:53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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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 ignotus: 불명
  • incertus: 불확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가 계속 집권하였거나 아니면 불명의 다른 인물이 선출되었는지 불명확함
황제 겸 집정관 }}}
1년 1년 보결 2년 2년 보결 3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발레리아누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아울루스 비비우스 하비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11년 11년 보결 12년 12년 보결 13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3년 보결 14년 15년 15년 보결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16년 보결 17년 17년 보결 18년 18년 보결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네이우스 레굴루스
18년 보결 19년 19년 보결 20년 21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아울루스 안토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51년 51년 보결 51년 보결 52년 52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베투스 카르미니우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52년 보결 53년 53년 보결 53년 보결 54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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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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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on[…]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78년 보결 78년 보결 79년 79년 보결 79년 보결
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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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티투스 루브리우스 아일리우스 네포스 임페라토르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브리키우스 베이엔토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켈루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리우스 플라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스트라보 티투스 비니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베날리스
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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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보결 97년 97년 보결 97년 보결 97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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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97년 보결 97년 보결 98년 98년 보결 98년 보결
퀸투스 글리티우스 아틸리우스 아그리콜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쿠르비우스 툴루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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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DRVSVS IVLIVS CAESAR
파일:소 드루수스.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Drusus Julius Caesar)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신상 정보
NERO CLAVDIVS DRVSVS[1]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DRVSVS IVLIVS CAESAR[2]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출생 기원전 14년
로마 제국 로마
사망 23년 9월 14일 (37세)
로마 제국 로마
배우자 리빌라
자녀 율리아 리비아,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게르마니쿠스 게멜루스
아버지 티베리우스
어머니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형제 티베릴루스, 게르마니쿠스(입양형제, 사촌형제, 매형)
경력
공직 아우구르[3]
재무관(서기 10년)[4][5]
원로원 상임 이사국 위원[6]
소달레스 아우구스탈레스(서기 14년 - 서기 23년)
집정관 I(서기 15년)
일리리쿰 총독(서기 17년 - 서기 20년)
집정관 II(서기 21년)
참전 일리리아 대반란[7]

1. 소개2. 생애
2.1. 출생과 입양2.2. 공직 경험과 아버지의 즉위2.3. 판노니아 반란2.4. 일리리쿰 파견과 도나우 강 방어 전선 체제 정비2.5. 게르마니쿠스의 사망과 황태자 등극2.6. 세야누스와의 대립2.7. 사망
3. 사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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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Drusus Julius Caesar)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제위계승권자, 정치인, 행정가이자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이다. 보통 친삼촌이자 장인인 대(大) 드루수스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小) 드루수스라고 불리며, 조카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구분하기 위해 드루수스 2세라고도 통칭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의 상속자인 그는 서기 19년 시리아 속주 안티오키아에서 급사한 황태자 게르마니쿠스 사후 그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황실의 한축인 클라우디우스 가의 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원래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의 장손이었다. 그는 입양형제이자 사촌형인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태생적으로 부모 양쪽 모두에게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8]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그의 사촌여동생이자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의 여자형제인 리빌라와 결혼시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양가 모두와 인연을 맺도록 했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의 양숙부이자 5촌 당숙이며 고모부이다. 또한 제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의 사촌형이자 매형이다.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로 출생 당시에는 친삼촌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사촌형 게르마니쿠스와 이름이 거의 똑같은 이름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였다. 그러다가 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공식적인 양자로 입적된 서기 4년, 그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로 입적돼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했다.

드루수스는 서기 10년에 재무관을 시작으로 공직 경험을 시작했다. 이때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정치적 경력을 그대로 뒤따랐는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두 사람을 신화 속 등장인물이자 쌍둥이자리의 주인공인 디오스쿠로이 형제[9]에 비유하면서 이들을 지지했다고 한다.

드루수스는 인기가 없던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달리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역량이 뛰어난 후계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세야누스의 야심을 눈치채고 그와 대립하던 중 서기 23년 9월 14일 갑작스레 사망했다. 훗날 세야누스가 몰락한 뒤, 그의 죽음이 세야누스의 전처의 폭로로 독살이었음이 밝혀졌으며 이는 그의 아내 리빌라와 세야누스의 공모였음이 드러났다.

2. 생애

2.1. 출생과 입양

통칭 소(小) 드루수스, 드루수스 2세라고 불리는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4년 로마에서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티베리우스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첫 아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동복동생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10]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Nero Claudius Drusus)라고 지어줬다.

소(小) 드루수스는 태생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친누나 소 옥타비아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지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이었다. 그의 친할머니는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였으며 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 외할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복심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며 율리아의 두번째 남편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였다. 이 당시, 그의 친부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공식적인 양자가 되지 않았고, 클라우디우스 네로가의 수장이었기에 소 드루수스가 제위를 이어받을 확률은 희박했다.

외조부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 급사하고 작은아버지 대 드루수스마저 기원전 9년 낙마사고로 게르마니아에서 요절한 이후,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던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부모가 강제로 이혼했다. 새로 맞이하게 된 계모 대 율리아와 친부 티베리우스의 사이에는 이복동생인 티베릴루스가 태어났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라는 이름을 받은 이복동생은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큰 사랑을 받았는데, 생후 6개월을 갓 넘긴 직후 사망했다. 갓 태어난 동생 사망 후, 아버지와 계모의 갈등은 시작됐고 설상가상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 리비아 드루실라와 율리아 사이의 갈등까지 폭발한다. 그 결과, 이 결혼 생활은 파탄나는데, 아내 율리아의 끝없는 남성편력과 황실 내 가정불화에 번아웃이 온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 도망치듯 모든 것을 포기하고 로도스섬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이때 아버지, 계모처럼 로마와 아퀼레이아를 오가며 살지 않은, 드루수스는 아버지가 홀연히 떠난 날 홀로 집에 남겨졌다.

다행히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는 어린 드루수스를 돌봤고, 숙모 소 안토니아 역시 그를 보살폈다. 그래서 소 드루수스는 로마에 남아 황실 식구들의 손에서 성장했다. 그러다가 7년이 지난 뒤인 서기 원년, 소 드루수스가 성년식을 치를 나이가 되었을 때 의붓할아버지와 친할머니에게 용서를 구하고 로마로 귀환한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입회 아래 로마에서 성년식을 거행했다.

아버지 티베리우스가 귀환한 지 3년이 지난 해,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양자인 가아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한다. 이렇게 되자 서기 4년, 아우구스투스는 소 드루수스의 아버지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공식적인 후계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7년 동안 친손자처럼 직접 키운 소 드루수스도 본인의 법적 손자로 정식 입양했다. 그래서 그는 이름을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했다.

이 조치 전, 아우구스투스는 소 드루수스의 미래와 황실 내 연합을 공고히 하고자 드루수스의 배필을 구했다. 이런 배경으로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결정과 후원 아래, 서기 5년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요절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망인이 된 사촌누이동생 리빌라와 결혼했다.

2.2. 공직 경험과 아버지의 즉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양손자인 소 드루수스의 인품, 재능이 대단한 것을 무척 아껴 그를 총애했다. 그래서 드루수스가 성년식을 치르고 난 직후부터 그를 아내 리비아와 함께 후원했는데, 서기 4년 정식 입양 후에는 아예 원로원에 데리고 가 그를 자기 손자로 정식 소개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어린 드루수스에게 원로원 의원 자격과 함께,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로 행사할 우선 발언권도 얻어내 선사하고, 공직의 각종 특권들을 마구 부여했다. 여기에 더해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자기 집무실로 오게 해 직접 정치술과 행정실무까지 가르쳤다.

서기 4년, 티베리우스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삼은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처럼 2살 터울인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형제가 티베리우스 사후, 카이사르 가의 두 후계자로서 함께 로마 제국을 운영하길 바랐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일찍부터 차차기 황제로 확정된,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가 밞았던 공직 코스와 사제직을 그대로 따라 밞았다. 정확히 말하면, 게르마니쿠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 수순을 밟고, 소 드루수스가 루키우스 카이사르 수순을 밞으며 포스트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코스를 밟았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격려 아래 차근차근 행정실무, 원로원 인사들을 다루는 법을 연마한 뒤부터 본격적인 명예로운 경력을 밞아 나갔다. 그는 서기 10년부터 재무관을 시작으로 2살 위인 '형' 게르마니쿠스가 경험한 공직 코스를 그대로 따라 밞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사무실을 로마에 개설했다. 최고 제사장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는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제사관에 두 사람을 임명했고, 두 사람이 파트너로서 함께 제국의 각종 명예와 훈장들을 선사받도록 했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일부러 로마에 남겨 두면서 옆에 두고 행정 업무처리, 원로원을 상대하는 정치술 등을 손수 지도했다. 이는 서기 4년 직후,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지도한 것보다 더 심화된 제왕교육이었는데 드루수스는 이 과정 내내 아우구스투스와 그 측근들에게 매우 훌륭한 평을 받았다.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의 또 다른 후원자는 아우구스타였던 친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였다. 그녀는 자기 친손자들을 위해 여러 인맥을 붙여줬고, 귀족들에게 두 사람을 잘 봐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음모론을 펼친 호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리비아가 친아들과 친손자 두 명을 제위에 연달아 올리기 위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독살했으며, 아우구스투스마저 독살했다고 말했다.

친사촌형제지간이기도 한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는 어린 시절부터 친형제 이상으로 유독 사이가 좋았다.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의 또 다른 보호자 역할을 했고, 게르마니쿠스 못지 않은 인격자였다. 이들의 형제애는 두 사람이 소 안토니아 밑에서 유년기부터 함께 자라면서, 두 사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입적되고 나란히 후계자 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더 깊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잘 몰랐던 로마 민중들은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제왕수업을 받고 있던 두 사람을 선의의 라이벌이라고 인식했다.

이런 가운데 아우구스투스는 재무관을 시작으로 공직에 오른 손자 드루수스가 기대 이상으로 총명하고, 기대치를 뛰어넘자 마음 먹고 그를 밀어준다. 그는 드루수스에게 더 큰 권한을 부여하면서, 책임감을 줬고, 주변 측근들에게 그를 칭찬하면서 장차 드루수스가 원로원 내에서 확실한 발언권과 위상을 갖추게 힘을 실어줬다.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직접 원로원에 데리고 간 뒤, 참관인 자격을 겸한 어린 원로원 의원 드루수스에게 새롭게 창설된 원로원 내 상임 이사국 위원 자리를 선사했다. 이는 과거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에게 원로원 의석을 부여하고 이들의 발언권을 특권으로 부여해준 것과 비슷하면서도 더 구체적인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 조치는 어린 드루수스의 원로원 내 위상을 높여줬으며, 드루수스의 발언권을 보장해줬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서거했다. 그는 죽기 전 작성한 유언장을 통해 드루수스에게 상주 자격을 주고 율리우스 가문 대표로 추도사를 작성하고 낭독하는 기회를 내렸다. 그 결과, 소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황실의 뜻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대표로 로스트라 앞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이는 자연스레 그가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율리우스 가문의 미래로 이미지가 굳어진 정치적, 사회적 자산이 됐다.

국장 한달 뒤,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프린켑스 지위에 오른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등극에 참가했다. 이때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자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황실 식구들과 함께 소개됐는데, 겸손한 태도로 인망을 얻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도나우 전선의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군단병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 실행과 보너스 지급 등을 요구하며 파업이 터진다. 이에 원로원과 티베리우스는 28살에 불과한 드루수스에게 티베리우스의 대리인, 원로원 대표단 단장 자리를 내려 판노니아로 향하게 했다.

2.3. 판노니아 반란

파견 당시 드루수스는 나이에 비해 정치짬밥이 상당했고, 아우구스투스 옆에서 직접 제왕교육을 받으면서 일찍이 그 능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늘 로마 또는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과거의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그는 프라이토리아니 외엔 군대와 동떨어져 있었고, 속주 파견이나 군복무는 한 적이 없는 상태였다.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제왕교육을 직접 받은 사람이고, 티베리우스와 원로원 대표로 파견되어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판노니아 출장은 난도 높은 협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군인들의 파업에 파견된 비무장상태의 원로원 및 정부 대표였다.

티베리우스와 원로원, 그리고 드루수스 본인의 예상처럼 판노니아 반란은 시작부터 상당히 분위기가 험악했다. 따라서 근위대와 비슷한 수준의 봉급 인상을 요구하던 도나우 전선의 판노니아 3개 군단의 군단병들을 설득하기 위해 파견된 드루수스는 도착한 숙영지에서 반란을 주도한 주모자들에게 첫날부터 협박을 당했다. 그러나 드루수스는 협박과 야유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고, 주눅들지 않았다. 이때 그는 위엄있게 손을 들어 자신을 협박하던 군단병 1만 8천여 명을 조용히 시켰고, 그들이 침묵하고 집중할 때를 정확히 노려, 차분하게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낭독했다. 서한에는 티베리우스에게 군단 사령관의 권한을 부여받은 드루수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며, 권한 밖의 요구사항은 원로원과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서한 속 내용이 낭독된 이후, 다시 모욕과 협박이 쏟아졌다. 병사들은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거나, 로마에서 고생하지 않고 자란 티가 난다고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지휘관들이 모욕과 협박을 멈추게 했으나, 그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때 반란 주동자와 그 무리는 드루수스가 숙영지에 도착한 직후부터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낭독하고 막사로 들어갈 때까지 드루수스와 수행원들을 협박했다. 이들은 드루수스 일행에게 돌을 던졌고, 협상의 목적으로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드루수스를 포로로 잡아두려고 했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포로처럼 반란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사령관 막사에 머물렀다.

목숨도 장담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드루수스와 그 수행단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근심이 쌓였다. 이때 드루수스는 속이 답답해 막사에서 잠시 나와 하늘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날은 하늘에서 월식이 진행돼 그 분위기가 요상했다. 이때 그는 이 자연현상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드루수스는 군단 내 인망 높은 백인대장들을 은밀히 만나 이들을 설득했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는 이들과 면담 직후, 기본적인 질서마저 사라진 군단의 군율부터 재정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백인대장들은 드루수스를 믿고 따르게 됐다. 드루수스는 백인대장들을 월식으로 두려움에 떤 병사들에게 보내 '달이 사라진 현상은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뒀기 때문'이라고 알려주게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백인대장들에게 병사들을 다독이고, 그들 스스로 반란에서 스스로 이탈하게끔 유도했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월식이 끝난 다음날 아침, 손쉽게 연설 분위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소집할 수 있었다. 이날 아침, 드루수스는 전날과 같이 당당하고 차분하게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통해, 드루수스는 혼란에 빠진 판노니아 군단병들의 군율을 잡았다. 이후 전열을 갖춘 군단병들 앞에 서서, 차분해진 군단병들을 다시 한번 설득하면서, 군단병들의 불만 사항을 로마에 있는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반란주동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반대했지만, 병사들 대부분은 드루수스의 말이 옳다며 그를 지지했다.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그가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를 상대로 쌓은 내공이 발휘된건데, 드루수스는 여기에서 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배운 그대로 노련하게 병사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반신반의하던 일부 병사들까지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판노니아 장병들은 드루수스의 뜻을 적극 지지해, 드루수스의 제안에 따라 파발병을 로마로 보내기로 한다.

이 투표에서 드루수스는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얻어냈다. 이렇게 정치술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태를 해결하고, 판노니아 장병들에게 큰 인상을 준 직후 군단장 아들과 대대장들이 파발병으로 선발돼 로마로 떠난다.

드루수스는 파발병을 로마로 보낸 직후, 다시 한 번 백인대장들을 통해 병사들을 위로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사령관 막사에서 반란을 주도한 페르켄니우스 등 2명에게 면담을 요청한다며 부른 뒤 이들이 막사 안에 들어온 직후 체포, 군법에 따라 즉시 죽였다. 이후 백인대장들에게 명령을 하달해, 아직까지도 주동자 페르켄니우스를 지지하면서 설득 이후에도 반란에 참가 중인 군단병들을 색출해 군법대로 처분케 했다. 이때 그는 눈치를 채고 숲으로 도망간 강경파 반란병들을 추격해 제거했고, 자칫 혼란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다잡아 군기를 유지했다. 이렇게 드루수스는 판노니아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로마로 귀환했다.

2.4. 일리리쿰 파견과 도나우 강 방어 전선 체제 정비

드루수스는 로마 귀환 후 아우구스투스 생전의 예정대로 공직을 경험하면서,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서기 15년 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으로 로마 민중들에게 검투 경기와 전차 경기를 주최했다. 이때 그는 형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자신들이 주최한 경기를 과잉으로 즐긴다고 할 정도로 열정을 선보였다. 따라서 민중들은 대회 기간동안 드루수스를 말을 다루는 재능이 있었던 신화 속 인물 '카스토르'에 빗대 카스토르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그를 지지했다. 이때 폴룩스라는 별명이 붙은 게르마니쿠스도 드루수스와 함께 민중들에게 열광적으로 지지받았다. 민중들에게 짠돌이라고 불리며 인기가 없던 아버지와 달리 민중들의 인기를 얻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공동으로 키르쿠스 경기를 주최해 성공할 당시, 티베리우스는 황실의 이름으로 성공리에 경기를 주최한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얼굴이 도안된 화폐를 주조해 두 사람과 카이사르 가문을 홍보했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지역과 달리 오리엔트 정책에 있어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는데, 그는 과거 아우구스투스가 황태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파르티아, 아르메니아, 유대 문제 해결을 맡긴 것처럼 자신의 황태자 게르마니쿠스에게 서기 17년 오리엔트 문제라는 군사, 외교적 중책을 맡겼다. 이때 드루수스 역시 아들이 수도에 머물면서 안락한 로마 생활에 벗어나길 바라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뜻과 오키덴트 정책의 일환으로 일리리쿰 총독으로 파견됐다.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차차기 황제'로 확정된 형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로서 제왕교육을 받은 드루수스는 전쟁 이외의 실적이 뚜렷했다. 하지만 과거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그 역시 군무와 관련된 제왕교육을 뚜렷하게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파견 전까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남성 황족들의 군사적 업적과 각종 명예를 쌓는 무대로 여겨지던 게르마니아 일대를 판노니아 항명 사태 외에는 견습 형식의 군무 교육조차 경험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때부터 꾸준히 정치, 행정과 관련된 제왕교육을 받았고 실적도 뚜렷했지만, 정작 군무와 관련된 실적이나 경험이 현저히 부족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장래에 로마를 이끌어가야할 친아들이 익숙지 않은 군무를 익히고, 로마군 내에서의 인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그를 과거부터 아우구스투스의 남성 황족들이 군사적 명예를 쌓았던 게르마니아 전선으로 파견시켰다.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소 드루수스는 화려하고 거만한 삶을 살았고,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이런 이유를 내세워 그를 판노니아로 보냈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보고한 쪽이 티베리우스의 복심이던 간신 세야누스였고, 이 시절부터 세야누스는 서서히 야심을 드러내며 소 드루수스 쪽 인사들에게 의심을 받아, 디오 카시우스나 타키투스 주장처럼 소 드루수스가 부도덕한 사생활, 사치와 향락에 빠진 황태자라는 평은 의심을 받고 있다.

일리리쿰으로 파견된 드루수스는 상당히 모범적이고 성실한 생활 아래 총독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업무 성과도 뚜렷했고, 놀랍게도 군대를 이끌고 훈련시키며 방어선 방어와 정비에도 능력을 보였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뜻을 존중해, 3년간 도나우 강 방어선을 정비했으며, 새롭게 정비될 일리리쿰 일대의 판노니아 속주와 달마티아 속주의 행정 사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소 드루수스가 이전의 일리리아 대반란 선례를 참조해, 청렴하고 엄격하게 속주민들을 보호하며 본인 관할인 판노니아, 일리리아, 달마티아로 이어진 일대를 관리한 모습은 큰 인상을 남겼다. 소 드루수스가 부임 후, 군사적 수단 외에도 자신의 외교적 역량과 그동안 배웠던 정치술, 훌륭한 인품 아래 보여준 선정이 아르미니우스를 꾸준히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파견될 당시, 로마는 이 일대에서 게르만족의 일파인 마르코만니족을 상대하고 있었고, 소 드루수스가 로마에서 재무관으로 있을 때 경험한 일리리아 반란 원인이 이 점임을 생각하면 이 성과는 대단했다.

당시 마르코만니족의 족장은 마로보두스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서 유학한 까닭에 되도록 로마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르미니우스의 반 로마 공동 연합 제안을 거절했는데, 결국 부족 내 강경파들의 반란으로 곤경에 처하게 됐다. 따라서 마로보두스는 일리리쿰 총독인 드루수스와 로마 제국의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로보두스에게 도움을 요청받은 드루수스는 이때 합리적이고, 로마 입장에서 최상의 선택을 내렸다. 그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뜻에 따라 마로보두스의 직접 개입 요청은 거부하되, 본인 결단에 따라 마로보두스와 그 가족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원로원과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상황을 전해, 마로보두스 일가 전체에게 로마 시민이자 기사계급으로 살게 하여 하위 지배층으로 삼고, 이들을 이탈리아 내 도시 라벤나에 살게 하며, 그들을 훌륭히 대접했다. 이 소식은 강경파들의 옹립으로 족장이 된 뒤 상황상 로마와 대결을 벌이면 힘들 것을 알게 된 새로운 세력에게 신선한 충격이 됐다. 따라서 마로보두스를 반란으로 내쫓고 족장이 된 카투아르다스도 반란으로 쫓겨나자, 가족들을 데리고 로마에 투항했다. 이에 소 드루수스는 마로보두스 일가 선례를 내세워, 그의 망명 역시 받아들여 그와 그 가족들이 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 포룸 율리에서 살도록 했다.

2.5. 게르마니쿠스의 사망과 황태자 등극

서기 17년에서 20년까지 3여 년간 드루수스는 꾸준히 로마를 위협하던 아르미니우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담당해 성과를 이뤄냈다. 그 사이 서기 19년 10월 10일 안티오키아에 머물던 게르마니쿠스가 갑작스레 고열에 시달리다가 급사했다. 이때 드루수스는 본국 이탈리아로 급히 돌아와 사촌인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죽은 형 게르마니쿠스의 유해를 만나기 위해 테라치나까지 달려갔다. 테라치나에 미리 도착한 그는 클라우디우스, 원로원 의원 중 집정관을 포함한 국가 인사들과 함께 미망인이 된 대 아그리피나와 그 자녀들을 위로하고 유해와 함께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귀환했다. 이때 드루수스는 수도 로마에서 100 km나 떨어진 테라치나까지 도나우 전선에서 말을 타고 달려가 다시 로마까지 귀환했고, 국장으로 열린 게르마니쿠스의 장례식을 총괄했다.

게르마니쿠스와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가 두터웠던 드루수스는 불참한 티베리우스,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안토니아와 달리 장례식 내내 황실 대표로 국장을 치렀으며, 추모 연설을 직접 낭독했다.[11] 얼마 안가 그의 아내 리빌라가 쌍둥이 아들들을 낳았는데 티베리우스는 아들 드루수스와 쌍둥이 손자들이 새겨진 화폐를 통해 아들의 가족들을 홍보했다. 드루수스의 일란성 쌍둥이 아들 중 한명은 일찍 사망했고 한명은 생존했는데 그가 바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이다. 한편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 사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내 두번째 연장자로서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공식적인 후견인이 되었다.

일리리쿰에서 로마로 귀환한 다음해인 서기 21년, 드루수스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뽑혔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에 따라 게르마니쿠스와 파트너로 3년마다 집정관에 뽑혔는데, 이 해 처음으로 티베리우스의 파트너로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때 그는 로마를 떠나 네아폴리스(나폴리) 근교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를 대신해 원로원 내 갈등을 제어하고 공공사업 업무를 담당했는데, 정치와 행정 모두에서 유능함을 선보였다. 특히 그는 공공사업에서 발생한 불필요한 비용의 원인을 찾아내고 수주 과정에서 발생한 부패를 찾아내 관료들의 부패와 도급업자들의 횡포를 처벌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난 다음 해인 22년,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처음으로 부여받았는데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뜻에 따라 34살의 나이에 접어든 드루수스를 황태자로 확정지었다.

2.6. 세야누스와의 대립

서기 22년, 티베리우스 황제는 폼페이우스 극장 화재 사건을 완벽하게 처리한 세야누스를 칭찬하면서, 세야누스 전신상을 폼페이우스 극장에 세워줬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 주변으로 야심 많은 추종자들이 몰려들고 세야누스의 형제, 친척, 입양 가문 집안 사람, 친구들은 속주 총독, 지방 장관, 고위 관료로 승진했다. 세야누스는 이탈리아 기사계급 야심가들의 롤모델이 됐고, 그가 가진 근위대장 자리는 어떤 원로원 의원, 황족들보다 막강해졌다.

당시, 소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며 티베리우스의 친아들라는 정치적, 혈연적, 사회적 위상을 제외해도, 부황 티베리우스가 해야 할 프린켑스 세나투스 역할도 맡아 처리하고 있었고, 인망을 얻고 있었다. 원로원은 그를 실질적인 리더로 여겼고, 로마군 역시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하류 일대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게르만인 사크로비르, 플로루스의 반란을 이곳 사령관 가이우스 실리우스의 지휘 아래 제압된 이후 보인 조치 및 갈리아, 게르마니아 하류 일대 장병 사기 진작 등 아래에서 그 충성심을 강하게 내비쳤다. 이는 곧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가 사소한 반란 진압 후에도 본인의 뜻과 인품으로 임페라토르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뜻했다. 원로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티베리우스의 형상이 죄인을 보호하는데 사용된 형상으로 이용되면서 원로원이 골치 아파했던 문제를 드루수스가 원로원을 대신해 적극적이고, 공정하게 해결하는 것을 보자 드루수스에 대한 원로원 내부 인기는 크게 치솟았다. 이때 드루수스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달리, 자신의 조부 아우구스투스가 떠오르는 정치력을 보여주면서, 불만을 토로한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게 했고, 그와 갈등한 이들을 불러 중재하고 토론했다. 그 결과, 문제의 원인이 된 귀부인 안니아 루필라를 체포해 투옥하면서, 민감한 사안 속에서 황족들이 언급될 문제는 사라졌고, 드루수스는 본인에게 책임과 의무가 없는 조치들도 스스로 떠맡아 귀감을 보인 점에서 그 인기가 더욱 치솟았다. 여기에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제왕교육을 받으며, 원로원 내 모든 파벌을 중재하고, 그 의견을 모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원로원의 입장을 명쾌하게 전달해주면서, 원로원에게 그들의 대표이자 확실한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원로원이 소 드루수스에게 세야누스에 대한 우려를 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서기 20년부터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었다. 소 드루수스는 인격자로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예의바른 황족이었기에 아직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원로원의 우려 표명, 세야누스의 교묘한 파벌 구축은 젊은 황태자가 세야누스를 요주의 인물로 주목하면서 경계한 계기가 됐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처럼 프라이토리아니가 가진 장단점을 인식했던 터라 제국의 2인자를 넘어 1인자를 위협할 수 있는 세야누스 부하들을 주시하며 이들을 휘하에 넣고 통제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아들의 생각과 달리 세야누스를 더욱 신뢰했다.

그 결과, 서기 22년에서 23년으로 넘어갈 무렵,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Socius Laborum"(수고로움의 동료)라는 거창한 칭호를 수여받을 정도로 신임을 굳힌다. 그는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 1만 2천 명을 전부 지휘하게 됐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기사계급에 불과한 그에게 이례적으로 법무관으로 추천해 원로원 의원이 될 길을 열어줬다.

프라이토리아니, 델라토르 모두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지시 아래 움직이더라도, 그 모든 명령과 통제가 세야누스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소 드루수스가 확실히 우려하고 있던 문제였다. 따라서 세야누스가 소시우스 라보룸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며, 로마 역사상 최초로 거창한 칭호를 쓰는 분위기에 관해, 드루수스는 이 문제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제어하지 못할 경우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고 확신했다.

소 드루수스는 아직 어린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과는 달리 나이와 경험이 출중했다. 서기 4년 직전부터 아우구스투스 생전, 아우구스투스의 지시와 격려 아래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로서 티베리우스 사후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제왕 교육을 받아왔고, 연륜이 쌓이면서 그 정치술과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능력은 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예측처럼 노련미가 상당했다. 그렇지만 이보다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은 소 드루수스가 인품, 실력으로 얻은 인기와 명성이었다.

당시 소 드루수스는 인기 없고, 냉혈한으로 단단히 찍힌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달리 원로원, 평민,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 모두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는 판노니아 총독으로 파견돼, 뛰어난 행정력과 외교 능력을 선보였다. 판노니아 총독으로 있는 기간 동안엔 로마군을 이끌며 병참, 외교, 방어전략 모두에서 탄탄한 능력을 선보였다.

축제가 열리면 매우 무관심한 아버지와 달리, 과거의 아우구스투스처럼 열정적으로 평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였고, 조부에게서 배운 대로 빵과 서커스를 시기 적절하게 활용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정부패에 대해선 굉장히 엄격하고 공정해 원로원 귀족, 기사계급 관료,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들 모두 그를 좋아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요절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공식적인 보호자였고, 황실 내 음모도 중재자로 완만히 해결하는 황태자였다. 즉, 권좌에 대한 야망이 있는 세야누스와 같은 이들에겐 그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소 드루수스 역시 같았다. 그는 두 번째 집정관을 맡던 당시의 연말 사건 때문에 세야누스를 위험인물로 확신하여 정계에서 몰아낼 결심을 굳히고 준비 중이었다.

서기 23년 소 드루수스가 원로원의 모든 의원들의 불만을 접수해 움직이기 전인, 21년 연말 ~ 22년 초 당시, 소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와 그 부하들이 단순한 근위대장과 측근들이 아니라고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 사회에서 고령에 접어든 부황 티베리우스의 업무를 함께 떠맡으며 피로도가 누적됐다가, 과로로 몸이 나빠져 어쩔 수 없이 휴식을 취한 적이 있었다. 드루수스는 정신력과 책임감이 남달랐기에 끝까지 내색하지 않다가, 어쩔 수 없이 원로원에 출석하지 못했다. 이때 원로원 의원들과 시인들은 게르마니쿠스 못지 않은 인품, 검증된 정치력과 실력을 보인 드루수스가 몸을 제대로 회복하길 바라는 헌사를 발표했다. 로마 서민들은 드루수스를 주제로 한 찬송시를 들으며 함께 기원을 했는데, 세야누스 쪽의 근위대 정보원들이 이 찬송 행사를 주최하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인기를 끌어올린 시인 클루토리우스 프리스쿠스가 "재미없는 찬송시"라는 투로 떠들었다고 모함해 조사 없이 그를 반역법으로 기소하자마자 죽였다. 이 사건은 세야누스의 지시로 프라이토리아니 내에서 델라토르로 활동한 세야누스 부하들이 마치 황제 부자가 결정한 듯 법 절차를 무시하고, 티베리우스 황제나 소 드루수스에게 보고 없이 법에 따라 집행한다는 식으로 마음대로 사람을 죽인 일이었다. 이에 소 드루수스는 격분했으나,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런 아들과 원로원의 불만을 달래면서, 추방이나 처형은 기소 직후 반드시 황제에게 보고되어야 하며, 만일 처형이 결정된다면 원로원이 자신의 결정을 먼저 알 수 있도록 10일 전에 이를 통보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도입했다.

따라서 서기 23년 초,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을 대표해 아버지에게 세야누스 문제를 거론할 때, 작심하고 이 문제를 제기할 결심을 했다. 물론 그는 일전의 일 속에서 신중히 움직였다.

드루수스는 자존심 강하고 매우 이성적인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일방적으로 들이박는 방법을 쓰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 맞게 시기적절하게 세야누스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 결과 세야누스와 그 파벌은 위기에 봉착하였다.

황태자 드루수스는 서기 20년 자신의 처남이며 사촌동생인 클라우디우스를 통해 어떻게든 황실과 엮이려는 세야누스의 행동을 눈치채고 있었다. 세야누스는 이 당시, 클라우디우스의 어린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자기 사위로 맞이해 종국적으로 황실 일원으로 올라갈 야심에 부풀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드루수스는 서기 15년 판노니아 파업 사태부터 세야누스를 직접 데리고 다니며 그 인성과 비열함도 알고 있어 경계 중이었다. 따라서 서기 22년, 세야누스가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총애만으로 황족, 원로원 의원 중 개선장군 수준의 공을 세운 인사들도 못 받는 특권을 선사받은 것에 대해 드루수스가 공식적으로 티베리우스에게 의견을 표한 순간 세야누스는 위기에 빠지게 됐다. 드루수스는 노련하게, 때마침 벌어진 극장 관객들과 근위대 사이의 다툼 당시 근위대 병사들이 벌인 비행을 명분삼아, 그들의 상관 세야누스가 제대로 부하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 등을 부각시켰다. 동시에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민감할 문제를 부각시켜, 모두가 쉬쉬하는 이야기를 공론화시켰다. 티베리우스가 아들이 있음에도 세야누스를 2인자로 여기고 있고 자꾸 힘을 키워주면서 정국에 여러 문제를 낳는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60대로 로마 사회에서 언제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티베리우스는 이를 인지해 이 점을 신경쓴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소 드루수스는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이날 그는 부황에게 상황을 짚어가며 보고하다가, 노골적으로 세야누스를 간신이라 칭하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공화정 전통을 위협하는 세야누스와 그 일당을 없애야 한다'고 성토했다. 그는 이어 세야누스를 감싸는 아버지에게 객관적 증거를 거론하면서, 논리적으로 따졌다. 프린키파투스 체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게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된다고 말한 그는, 원로원 귀족과 각 속주 총독들이 '세야누스가 황제 배경만 믿고 설친다'고 불만을 표하고 있는 점이 얼마나 위험한 문제인지 짚으면서 아버지에게 해결을 촉구했다. 이런 모습은 평소 효자로 이름나고, 신중하기로 유명한 드루수스가 일평생 동안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행동이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놀란 모습을 보이다가, 자신에게 따져 묻는 아들을 되레 크게 혼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 회의가 열린다. 이 당시 드루수스는 아버지와 공동 집정관을 하면서, 각종 부정부패를 잡아내고 수도 사업 등 로마의 주요 행정 조치의 문제점, 비용 처리 문제 등 어렵고 복잡한 사무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원로원에게서 자발적 지지를 얻어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날, 세야누스는 원로원 회의 중 헛소리를 하면서 국정 과제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드루수스는 논리적으로 세야누스가 내린 판단을 지적했다. 이에 세야누스는 자신이 서기 4년 직후부터 윗사람으로 모신 드루수스에게 막말을 퍼부었고, 이는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인격자로 이름난 소 드루수스가 이성을 잃고 폭발한 원인이 됐다고 한다.

결국 이 날,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 회의 중 논쟁이 붙은 세야누스의 발언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다가, 세야누스의 비열함에 격분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 주먹 한 번으로 세야누스를 때려 단번에 내리치고 그를 땅바닥에 때려 눕혔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는 원로원 안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처지가 됐다. 이 사건 직후, 세야누스는 벌벌 떨면서 귀가했는데, 자기 부하들에게 "황제가 고령이라서 서거하면, 곧 황제 아들인 아우구스투스 손자 놈이 제위에 오를 것이다." 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지만 세야누스는 이 발언 후, 주눅들기는 커녕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소 드루수스를 반드시 제거해야 될 정적으로 점찍는다. 결국 세야누스는 자기 본심을 알아채 마찰을 빚고 있던 황태자 소 드루수스를 제거할 계획을 짜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아내로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이었던 리빌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녀를 유혹했다. 이는 손쉬운 계략이었다. 리빌라는 엄청난 미인이나, 거만하고 질투심 많은 공주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2살 위인 오빠 게르마니쿠스, 1살 위인 오빠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에게 열등감을 느껴 이들을 숙적으로 여기고, 바로 아래의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자기 앞길을 막는 짐짝으로 여겨 구박할 정도로 인격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했다. 따라서 세야누스가 그녀를 유혹했을 때, 리빌라는 자기 남편인 1살 위의 소 드루수스가 어릴적부터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 부부와 친형제, 친남매처럼 사이가 깊고, 자기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챙긴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 곧바로 세야누스와 손을 잡는다.

근위대장인 세야누스는 이런 황실 내 분위기를 이용해, 야심 많고 불만 가득한 리빌라에게 접근한 후, 온갖 말로 리빌라를 구워삶아 그녀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때 세야누스에게 푹 빠진 리빌라의 요구에 따라 세야누스는 3명의 아이를 낳았던 아내 아피카타와 이혼하고 리빌라와 결혼 약속을 했고, 장차 제위를 소 드루수스와 리빌라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게 주겠다고 맹세했다. 이어 그는 리빌라를 통해, 소 드루수스의 어린 딸 율리아 리비아에게도 호감을 얻고 종국에는 리비아와도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

이어 세야누스는 리빌라에게 할아버지 같은 시종이자 주치의 에우데모스, 환관 류그도스도 끌어들이게 했다. 드루수스의 술잔 관리인, 집사, 시종까지 리빌라와 세야누스의 강요, 거짓말, 협박 등으로 모조리 강제 포섭됐다. 이후, 리빌라와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에게 약간의 독을 서서히 먹이며 병사로 위장할 준비를 끝냈다.

2.7. 사망

서기 23년 9월 14일 건강하던 드루수스가 시름시름 앓더니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그는 세야누스와 대립 중이었다. 일각에선 극소수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건강하던 그가 급사한 것을 믿지 못했다. 그렇지만 주치의, 시종들이 모두 급사했다고 주장해 그 누구도 황태자가 독살되었다고 반박하지 못했다.

3. 사후 이야기

25년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었던 리빌라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티베리우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드루수스가 죽은 이후 상심에 젖은 티베리우스는 서기 26년 나폴리로 갔다가 결국 카프리 섬에서 은둔 정치를 펼친다. 이때부터 세야누스 주도로 대대적인 고발이 빈발해 게르마니쿠스 일가와 그 측근 등이 연이어 반역죄로 고발됐다. 이때 드루수스의 장조카이자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 역시 세야누스에게 반역죄로 고발돼 유배지로 추방되었고, 드루수스의 둘째 조카인 드루수스 카이사르 역시 세야누스가 그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유혹해 불륜을 저지른 뒤 함정을 만들어 무고하는 방식으로 황궁 지하실에 유폐시켰다.

이후 세야누스는 드루수스의 유일한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가이우스마저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고 했는데, 이 음모는 소 안토니아에 의해 저지되었다.[12]

드루수스가 죽은지 8년이 지난 31년, 세야누스의 아내 아피카타는 자신의 맏아들이 세야누스와 반역을 주동한 공범으로 처형되자 그 충격으로 자살하기 전 티베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드루수스의 아내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불륜관계였으며,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이 공모해 걸림돌인 드루수스에게 조금씩 독을 먹여 급사하게 만들었다고 폭로했다. 당시 카프리 섬에서 은둔정치를 펼치던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 사후 세야누스가 리빌라와의 재혼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한 일을 거절했던 사실, 다른 문제에서 자신에게 정면으로 대들지 않던 아들이 꾸준히 논리적으로 세야누스의 문제점을 거론했던 사실 등을 상기한 뒤, 그 폭로가 사실이라고 결론내렸다.

외아들이자 합법적 후계자의 죽음에 관한 전모를 알아차리고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그때까지 아직 살아있던 세야누스의 어린 두 자녀뿐만 아니라 세야누스 가문 사람 전체와 그 노예들, 친세야누스파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솔들을 남김없이 몰살시켰다. 또한 드루수스 암살 사건의 공범인 며느리 리빌라 역시 자살하게 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리빌라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에게 리빌라를 보냈다. 자기 딸이 남편과 손자들을 죽이는 데 일조한 광경을 모두 목격한 소 안토니아는 살려달라고 비는 친딸을 어린 시절을 보낸 방에 감금한 뒤 물 한 모금도 못 주게 하고 출입구를 전부 폐쇄해서 굶겨 죽였다. 남편을 젊은 시절에 여의었으나 재혼하지 않고 손수 자녀들을 키우면서 정절을 지킨 소 안토니아의 입장에서 리빌라가 한 행동은 그야말로 배신 그 자체였기에 절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태어날 당시 본명[2]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양자가 된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함께 나란히 손자로 입적 후의 공식 이름. 본인 역시 모든 공문서, 사문서에 이 이름을 서명했고, 원로원 역시 그를 드루수스 카이사르라고 부름.[3]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입양 직후부터 부여받았다. 이 직책을 받은 다음, 소 드루수스는 형식적으로 서기 7년부터 사실상 감찰권과 우선발언권을 가진 재무관이면서도 참관인 자격으로 원로원에 입성한다.[4] 황족 특권에 관한 특별법 아래 남들보다 5살 어릴 때 첫 재무관(7년)이 된, 입양형제이자 사촌형, 처남 게르마니쿠스보다 3년 늦은 서기 10년에 처음으로 재무관이 됐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리리아 대반란으로 함께 로마에 사무실을 개소한 게르마니쿠스가 재무관 신분으로 첫 참전을 했기 때문이다.[5] 게르마니쿠스가 서기 11년까지 갱신 형태로 재무관을 지내면서, 참전 경력을 인정받는 식으로 조영관, 법무관을 지내지 않고, 쿠르수스 호노룸의 꽃으로 불린 집정관 자격을 얻을 때,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법무관 경력을 지냈다고 인정받으면서,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수여받았다.[6]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 내준 자리로 소 드루수스가 의문사하기 전까지 소유했다.[7] 아버지 티베리우스, 사촌형이자 입양형제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참전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에서 군사훈련을 꾸준히 받으면서 공로가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원로원에게 승인받아 내려진 결과다.[8] 소(小) 드루수스의 사촌인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경우, 어머니 소(小) 안토니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아그리파의 딸 빕사나아와 티베리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소(小) 드루수스는 혈연상 아우구스투스와는 남이었다.[9] 카스토르폴룩스[10] 이 당시 그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존칭을 원로원에게 부여받지 않아서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라고 불렸다.[11] 당시 티베리우스는 장례식 불참 이유에 대해 게르마니쿠스의 친어머니 소 안토니아는 아들의 요절에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워 참여하지 못했고, 할머니인 리비아는 고령임에도 소 안토니아를 병간호하느라 참가하지 못했으며, 자신은 고령인 노모와 아들의 죽음으로 몸져누운 소 안토니아 모두를 간호하던 중이라서 참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12] 이때 소 안토니아는 목숨을 걸고 티베리우스에게 상황을 전달해 세야누스의 위협에서 자신의 혈육들을 지켜낸 충성스러운 노예 팔라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자유를 줬다. 따라서 팔라스는 해방노예로서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막내 아들 클라우디우스를 모셨는데, 클라우디우스는 훗날 황제가 된 뒤 영리한 팔라스를 재무장관에 임명해 크게 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