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라틴어: Marcus Junius Silanus Torquatus | |
생몰년도 | 미상 ~ 32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제국 미상 |
사망지 | 로마 제국 미상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조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버지) 아이밀리아 레피다(아내)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들) 유니아 칼비나(딸)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아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아들) 유니아 레피다(딸)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19년 |
전임 |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
동기 |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
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노빌레스 씨족이었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파트리키로 승격된 유니우스 실라누스 가문 출신으로, 조부는 기원전 25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토르콰투스는 19년 한 해 동안 집정관을 역임했고,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와 함께 법무관에 의해 해방된 노예가 참정권을 받는 것을 금지하고, 그들의 후손이 상속권을 갖는 것을 금지하는 렉스 유니아 노르바나(lex Junia Norbana)를 제정했다.그 해 7월에는 발부스가 사임한 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가 동료 집정관으로 부임했다. 두 집정관은 해방노예의 자유에 대한 찬반 투표가 동률일 경우 자유를 지지하는 투표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 유니우스-페트로니우스 법(lex Iunia Petronia)을 제정하고,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12월 10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16일 게르마니쿠스에게 바칠 영예에 대한 원로원 결의를 반포했다. 이후 32년부터 38년까지 아프리카 총독을 맡은 것을 끝으로 기록상에서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토르콰투스는 서기 13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1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소 율리아의 딸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해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46년 집정관을 역임했지만, 54년 형제 루키우스의 원수를 갚으려드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는 소 아그리피나의 사주로 처형되었다. 차남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는 53년 집정관을 역임했지만, 64년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을 자랑했다는 혐의로 네로 황제에게 자살을 강요당했다. 삼남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약혼했지만, 네로와 옥타비아를 결혼시키고 싶어한 소 아그리피나가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바람에 원로원에서 추방된 뒤 클라우디우스 1세와 소 아그리피나가 결혼하던 날 자살했다.
장녀 유니아 칼비나는 비텔리우스 황제의 형제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의 부인이며, 차녀 유니아 레피다는 30년 집정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결혼하여 도미티아 롱기나 황후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