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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7:16:19

아울루스 겔리우스

이름 아울루스 겔리우스
(Aulus Gellius)
출생 미상
사망 170년 이후
직위 학자

1. 개요2. 생애3. 아티카의 밤(Noctes Attic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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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문헌학자.

2. 생애

그의 생애에 대한 단서는 오직 그의 저서인 <아테네의 밤(Noctes Atticae)>에서만 간접적으로 확인되며, 다른 고대 학자들의 기록에는 파악할 수 없다. 14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이었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가 남긴 편지에 '겔리우스'라는 인물이 거론되나, 이 인물이 문헌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학자들은 <아티카의 밤>에서 겔리우스가 간접적으로 밝힌 설명을 토대로 출생년도를 100년대 말, 113년, 118년, 123년, 130년, 134년 등으로 다양하게 잡는데, 학계에서는 대체로 2세기 초반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겔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젊었을 때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맡고 있었던 섹스투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와 이야기를 나눴다고한다. 클라루스는 말년에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역임했고 146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졌지만, 언제부터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맡았는 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출생지와 출신 역시 불분명하다. 삼니움 전쟁을 통해 로마에 복속된 삼니움인들은 '겔리우스'라는 성을 흔히 사용했기 때문에, 그가 삼니움 출신이라는 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여럿 있으니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겔리우스는 로마 뿐만 아니라 아테네에서도 우수한 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술했는데, 이로 볼 때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로마에서 활동하던 소피스트인 아렐라테의 파보리누스를 멘토로 여겼으며, 로마 황제 페르티낙스의 스승이었던 술피키우스 아폴로나리스 등 로마의 여러 교사를 언급했다. 한편 그리스에서는 플라톤의 추종자인 루키우스 칼베누스 타우루스의 수업에 참석하면서 철학을 공부했다고 하며, 견유학파 키니코스 학파 철학자였던 페레그리누스 프로테우스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1]

겔리우스는 그리스에 머무는 동안 정기적으로 피티아 대회에 참석했다고 언급했으며, 150년대 초 로마에서 판사로 활동하면서 법적 절차에 관한 서적을 연구하고 로마법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이들과 두루 상담했다고 밝혔다. 이후의 생애와 사망 날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3. 아티카의 밤(Noctes Atticae)

그의 유일한 작품인 '아티카의 밤'은 언어, 문학, 철학, 법률 등의 고대 문헌, 특히 동시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문헌들을 집대성했다. 이 작품의 장르는 매우 모호해서 현대 학자들 마다 다르게 분류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작품을 짧은 에세이 모음이자 수필의 선구자로 간주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문헌 전집으로 취급했다. 총 20권 434개의 장으로 이뤄졌는데, 그 중 제6권의 시작 부분과 끝 부분, 제8권 전체[2] 외에는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겔리우스는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에 대해 긴 겨울 밤 동안 아티카(아테네 외곽)에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대 문헌을 모으는 데 관심을 기울였지만 다양한 분야의 모든 기록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하는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의 <인간과 신의 고대사>와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발언을 인용해 자신의 이같은 신조를 표현했다.
"많은 지식은 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기준을 설정하고 이에 맞는 글들을 취사선택해 저서에 싣는 방식을 택했다. 어떤 기준으로 그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도덕적으로 옳거나 자녀 교육에 쓸만하다고 여겨지는 글만 선택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문제를 상기시킬 수 있는 글을 주로 수집했을 거라고 본다. 그가 이 저서를 언제 출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 연대를 부여할 수 있는 당대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섹스투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가 146년 2번째로 집정관을 역임했던 것을 언급했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디부스(Divus: 신성)"라고 부른 것을 볼 때 하드리아누스 사후에 출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학자들은 150년에서 160년 사이에 출간되었을 거라고 본다.

겔리우스가 저서에서 인용한 작가들의 범위는 매우 넓다. 다양한 추정에 따르면, 그는 250명, 275명, 또는 400명 이상의 저자를 인용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대부분의 동시대 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이 인용한 작품의 제목만 언급하지 않고 해당 구절이 쓰여진 책의 페이지 수까지 언급할 정도로 좀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밝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인용한 고대 문헌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지 않고 이 구절이 진실한지를 알아내는 책임을 독자에게 맡겼다. 그가 참고한 저서 대부분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에게 중요한 저서로 간주된다.

그는 기원전 2~1세기 로마 작가들을 매우 존경해 그들의 글을 가장 많이 인용했다. 특히 대 카토,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작품을 가장 많이 인용했다. 또한 시인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베르길리우스,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신니우스 카피토를 높이 평가했으며,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서술 스타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역사서를 많이 인용하면서도 리비우스 자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고, 포에니 전쟁의 주요 사료를 제공한 <로마 역사>의 저자인 폴리비오스에 대해서는 단 한 번 언급했다. 겔리우스는 로마 제국 초기인 1~2세기 학자들은 로마 공화국 후기의 학자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여겼는데, 특히 세네카를 저열한 학자라고 악평했다.

겔리우스는 다양한 고대 문헌을 제시, 비교할 뿐 스스로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종종 표현했다. 그는 라틴어 문법과 관련해 성공적인 단어 선택, 정확한 사용 및 문체의 우아함을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고려했으며, 주로 문체의 장점을 기준으로 저자를 평가했다. 다만 법학을 다룰 때는 문체를 고려하지 않았다. 여기에 고대 철학자들간의 논쟁을 다룰 때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들의 의견만을 인용했다. 종교에 대해서는 로마 다신교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신들에 대해 종종 언급했지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대에 떠오르던 기독교인과 반기독교 성향 인사들간의 논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겔리우스의 저서는 중세 시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많았다. 락탄티우스아우구스티누스는 겔리우스의 뛰어난 지식과 저서 스타일을 높이 평가하고 저서에 담긴 내용을 많이 인용했다. 4~5세기 문헌학자 마크로비우스는 그의 저서를 기반삼아 유사한 저서를 집필했지만, 겔리우스보다 좀더 체계적으로 편집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에라스뮈스, 미셸 드 몽테뉴, 프란시스 베이컨에게 널리 인용되었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역사학계에서도 고대의 부족한 문헌 증거들을 보충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취급하고 있다.


[1] 겔리우스는 당대의 유명한 수사학자인 헤로데스 아티쿠스도 알고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친하지는 않다고 밝혔다.[2] 목차만 전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