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Marcus Cornelius Fronto) |
출생 | 95년경 |
사망 | 160년대 후반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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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정치인, 작가, 수사학자.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스승이었다.2. 생애
서기 95년경 누미디아 속주 수도인 키르타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로 넘어간 라틴계 주민의 후손이었지만, 자신이 "리비아 유목민"의 후손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일찍이 그리스 수사학을 공부하였고, 하드리아누스 통치기 때 로마로 건너와서 변호사와 연설자로 맹활약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키케로에 조금 못 미치지만 탁월한 수사 능력을 갖춘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생전에 소 카토, 키케로, 퀸틸리아누스의 글을 기반을 둔 여러 편의 수사학 저서를 출간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2편의 라틴어 문법서는 부분적으로나마 전해진다.변호사로서 활약하면서 큰 재산을 벌어들여 웅장한 저택을 지었고,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예술의 보호자를 자처한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정원을 구입하였다. 그러던 중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초청을 받고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스승으로 발탁되었다. 이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프론토와 평생 서신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유지하였다. 이 편지는 1815년 밀라노 암브로시아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는데, 마르쿠스 황제 뿐만 아니라 안토니누스 피우스, 루키우스 베루스와 주고받은 것도 많이 남아 있다.
일상적인 이야기가 주류이지만, 로마 제국 초기 라틴 작가들에 대한 그의 견해와 언어와 문체에 대한 가르침이 파편적으로나 담겨 있어서, 프론트의 수사학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대강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로마 공화정 시절 작가들이 사용했던 어휘를 되살려서 쇠퇴해가는 라틴어를 활성화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엘로쿠티오 노벨라(elocutio novella: 새로운 말씨)를 기획하였는데, 지극히 인위적이고 실생활에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비평을 받기도 하지만, 라틴어 산문 집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마르쿠스 황제가 이 편지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곤 했기에, 그의 인간됨을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역사기록이다.
143년 8월과 9월에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아시아 총독으로 삼아주겠다는 제안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말년에 쓴 편지에서는 딸 한 명을 제외하고 모든 자식을 잃은 것에 씁쓸해 했다. 160년대 후반기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여담
- 능력과 재능은 최고이지만, 인격적으로는 인간말종이었던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달리 인격적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다. 이는 제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록에서도 곳곳에 보이는데, 프론토는 제자에게 손찌검과 폭행, 폭언은 기본으로 행사해 "애정결핍과 폭력성, 잔혹성을 상류층 자제에게 전달해주는 교육자"로 까인 아티쿠스와 많이 비교됐다. 그는 노예들에게도 상냥하고 좋은 주인이었으며, 성품 자체도 목가적이고 따뜻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에게 큰 존경을 받았고, 마르쿠스 황제는 스승 프론토가 죽을 때까지 그와 계속 교류했다.
-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나란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가정교사로 있었지만, 서로 교류가 없다시피했고, 실제로도 아티쿠스의 재능을 인정만 해줄 뿐 혐오해 이 인간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점만 놓고보면 헤로데스 아티쿠스를 극도로 혐오해 상종조차 못할 인간이라고 여긴 소 파우스티나 황후보다 살짝 온화하게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 외에도 프론토는 본인 스스로를 '타고난 그리스인'으로 자화자찬한 아티쿠스와 달리 그리스어만 고집하지 않고 모국어인 라틴어 사용에서도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프론토 본인이 남긴 글을 보면 "같은 시기에 가정교사를 맡은 것이 사실일까"하는 의심도 들 정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