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Lucius Valerius Messalla Thrasea Priscus) |
출생 | 미상[1] |
사망 | 212년 |
직위 | 원로원 의원, 전직 집정관, 황제 고문 |
가족 | 부친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모친 헬비디아 프리스킬라 배우자 코엘리아 발비나 친척 발비누스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손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막시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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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황제 고문이다. 보통은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로 불린다.2세기 후반 등장해 3세기부터 5세기까지 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원로원을 지배한, 발레리우스 가문 중 하나인 신(新) 메살라 가문을 만든 개창자다. 아버지 이름에서 드러나듯, 본래는 이탈리아 신흥귀족 가문인 빕스타누스 가문 사람이나 더 큰 권력을 얻고 본인의 정통성을 올리기 위해 노멘 젠틸리키움을 단행해 스스로의 성씨를 직계 선조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의 어머니, 즉 현조모 가문의 성씨로 바꿨다.
율리아 돔나의 오랜 친구로 그녀의 차남 게타를 지지한 후원자이자 최측근인 까닭에, 서기 212년 카라칼라의 대규모 숙청 당시 살생부 초기 희생자가 되어, 카라칼라 면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2. 생애
제정 시대 로마 귀족들의 가계를 연구한, 프랑스의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에 따르면 네로, 비텔리우스 폭정에 항거했던 원로원 의원이자 배짱 좋은 연설가 빕스타누스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빕스타누스의 직계손인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주장 그대로 2000년대에 로마 근교의 티볼리 일대에서 로마 시대 비문들이 대거 발굴되면서, 이는 사실로 밝혀졌는데 여기에 따르면 어머니는 전직집정관 루키우스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의 딸 헬비디아 프리스킬라인 것이 확인된다.티볼리에서 발굴된 부친의 비문에 따르면 아버지는 110년, 어머니는 115년생이라고 하며, 모두 로마 태생이다.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실상 장녀 루킬라와 같은 148년생이라는 말도 있고, 150년생이라는 주장도 있어 과거처럼 그가 죽을 당시 상당한 고령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아우구스투스부터 티베리우스 시대까지 총독, 집정관, 장군 등을 지내며 명성을 쌓은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저명한 장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의 외손자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의 직계 후손이다. 따라서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 이래로 발레리우스 가문의 코그노멘인 메살라를 대를 이어 사용했다.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부계는 직계 선조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 외엔, 이 사람의 직계 3대가 모두 요절했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는 70세까지 살았는데, 그 아들인 증조부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는 서기 80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전염병에 걸려 어이없게 요절했다. 증조부 빕스타누스가 원로원 입성 전부터 네로에게 한번, 비텔리우스에게 한번 이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며 배짱 좋고 정의롭다는 웅변가로 큰 인상을 줬던 것을 생각해보면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이는 그 아들로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할아버지인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도 비슷해, 그 역시 115년 집정관을 지냈음에도 꽤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부친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는 원로원 의원으로 법무관을 지내기도 전에 일찍 사망했다.
고조부 때부터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의미로 메살라를 노멘 뒤에 코그노멘으로 반드시 붙였지만,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아예 성씨를 바꿨다. 즉, 로마인들이 말하는 노멘 젠틸리키움을 스스로 단행해 본래 가문의 조상과 절연하고 본인의 혈통 중 정치, 사회적으로 가장 명성 높은 집안을 부활시켜 성씨를 갈아 엎었다. 노멘 젠틸리키움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이후의 율리우스 성씨 하사,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이나 클라우디우스 1세때 원로원이 통과시킨 <오스티아 항구 건설에 따른 특별법>처럼 성씨를 대상자들에게 내려주는 경우에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조상과 그들의 이름, 지연 등을 소중히 여긴 로마 귀족 당사자와 가문 일족의 노멘 젠틸리키움은 가문 일원 모두에게 단순한 개성(改性) 절차와는 차원이 다른, 가문 개창이었다.
여기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렇게 지어줬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확실치 않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아주 일찍이 본래 성씨를 버리고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의 어머니 출신 가문으로, 메살리나를 배출한 로마 건국 당시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명문 파트리키 일족인 발레리우스 가문 중 하나인 메살라 가문의 성씨로 스스로 개성했던 만큼 그와 그 부모, 친척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아주 일찍이 성씨를 바꿨고, 이 새로운 이름으로 원로원 의원이 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신 메살라 가문으로도 불리는 이 사람과 그 후손들 일가는 예전의 메살라 가문과 달리 빕스타누스 가문에서 가이우스와 함께 애용한 루키우스를 개인이름으로 사용한 특징 등이 남아 있다.[2]
스스로 정치적 명성을 끌어올리고, 명예로운 경력과 가문의 이름을 통해 권력을 쥐기 위해 노멘 젠틸리키움을 단행할 만큼이나, 일찍부터 야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보통의 로마 귀족 중 제 스스로 노멘 젠틸리키움을 단행하는 이들은 진짜 야심이 대단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발비누스의 고모 혹은 할머니뻘 집안 어른인 코엘리아 발비나와 결혼했다. 아내 코엘리아 발비나는 마르쿠스 아쿠일리우스 코엘리우스 아폴리나리스의 딸로 후일 황제가 되는 발비누스의 외사촌 누나일 수도 있는데, 그녀의 일가는 당시 원로원을 지배한 귀족 가문 외에도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일대와도 연관 있던 집안이었고 그리스 혈통이라서 이 사람의 야망을 충족하기 매우 적합한 처가였다.
이 결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2~3세기 내내 수많은 원로원의 정계인사를 배출한, 퀸투스 폼페이우스 팔코의 폼페이우스 팔코 가문과 1세기 때 활동한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의 피를 모두 물려받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인 칼비우스 가문과 발비누스 가문 모두와 동맹을 맺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그는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덱토르의 동료 집정관으로 196년 취임했으며, 본인의 혈통과 처가의 인맥 등을 총동원해 가공할 만한 아우구스타 율리아 돔나와 친구가 되고, 성격적 결함이 적어 인망이 두터운 게타의 후원자이자 게타 정파의 핵심 인사까지 오르게 된다.
디오에 따르면 살생부 명단에 오른 이 중 율리아누스 아페르 부자가 화를 면하고, 오래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존경받는 원로원 의원 라에누스가 고령의 시한부라서 카라칼라의 살생부 맨 위에 이름을 올린 이 중 1번타자로 숙청됐다고 한다. 이때의 일에 대해 디오는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이탈리아 혈통의 원로원 의원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절부터 세베루스 가문에 헌신했지만 황제 지시로 끌려가 비참하고 잔혹하게 살해됐다고 한다. 실제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최후는 끔찍했다.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어머니 돔나의 친구임에도, 엄청난 부자이고 게타의 오랜 측근인 까닭에 게타가 죽은 직후, 기소도, 재판도 없이 개처럼 끌려간 다음, 카라칼라 면전에서 참살된 뒤 그 자리에서 머리를 잘리고 남은 시체는 버려졌다.
3. 후손 이야기
비참하게 살해되고 머리는 효수됐지만, 카라칼라에게 가문 전체가 연좌제에 처해지는 굴욕은 겪지 않았다. 이는 처가쪽이 카라칼라 최측근이고 처조카 내지 처가 친척 발비누스가 카라칼라의 총애를 받았던 덕에, 또 율리아 돔나가 건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잔혹했던 카라칼라 역시 이 사람의 가문을 뿌리 뽑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무리가 있어 그랬을 확률도 있다고 한다.그가 개창한 신 메살라 가문은 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존속했다. 외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원로원에서 추방되지 않고, 원로원 의원으로 여전히 활동했다. 헌데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손자, 증손자는 원수이기도 한 세베루스 왕조와 발비누스 편을 들지 않았고, 아들 역시 세베루스 왕조에게 적극 협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베루스 왕조의 위기와 몰락을 방관했고, 발비누스의 친척임에도 그 상대편인 막시무스(통칭 푸피에누스)를 적극 지지하고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몰락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손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증손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막시무스는 서기 3세기, 4세기 로마 제국의 황제들과 원로원 전체를 정치적 판단력과 승부수로 판을 바꾼 대정치가답게, 이 판을 주도해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모두를 몰락시켰다.
조금 더 후손 이야기를 하자면, 손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막시무스는 233년과 256년 집정관을 역임했던 원로원 의원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명예로운 경력을 시작해, 재무관에 오르기 전 원로원 안에서 1년 동안 단 3명만 선발하는 화폐 관리 담당 업무를 맡았을 정도로 원로원 내 최고 엘리트 귀족들이 밞아 나간 코스만 역임했다.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트락스가 지나칠 정도로 국방비 명목으로 세금을 걷고 강탈하듯 재물을 빼앗자 이에 맞서 반 막시미누스 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절, 그는 반 막시미누스 운동을 펼친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등 이탈리아 귀족들과 함께 했는데 할아버지의 원수 내지 방관자인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지지하지 않았다. 도리어 푸피에누스의 오른팔 내지 참모 역할을 하면서 이탈리아 귀족 세력을 모았고, 이 사람의 대리인 자격으로 트락스 진영과 고르디아누스 가문 진영과 협상대표가 됐다. 즉, 그는 푸피에누스 쪽을 지지하면서 트락스와 대립함에도, 발비누스 쪽이나 로마 제국의 부와 명성을 모두 장악해 권력을 누린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세 황제와는 완전히 손을 잡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이 사람의 가문은 원로원에서 권세를 유지했는데, 이런 태도 때문에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시대 동안에는 로마 동부와 푸닉 출신들에게 제대로 찍혀 고위직을 얻지 못했다. 허나 그는 필리푸스 아라부스 몰락에 기여하며,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막시무스를 볼루시아누스 동료 집정관으로 취임시켰다. 이 결과, 이들은 푸피에누스,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볼루시아누스, 발레리아누스를 연이어 지지했는데, 그들이 정치적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이들을 도우며 권세를 유지했다. 다만, 이들이 갈리에누스를 지지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증손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막시무스의 직계 후손들은 이사람의 6대손 발레리우스 바수스까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모두에서 이교도 로마귀족 일가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아들의 증손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서기 319년 로마시 행정장관을 지냈다. 그 손자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바실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 대제와 그 장남 크리스푸스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는데, 로마 전통과 이탈리아 원류 정신을 지키는 이교도 원로원 의원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서 큰 이름을 날려, 반대편인 기독교도들에게도 그 명망이 대단했다. 이는 이 사람의 아들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도 비슷했는데, 그는 서로마 일대 출신임에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아들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근위대장을 지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서로마 원로원에서, 후처에게서 낳은 아들은 동로마 원로원에서 비기독교와 기독교를 대표한 원로원 의원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중 첫 아내의 아들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셉티미우스 바수스는 서로마 원로원과 비기독교 인사들을 대표한 원로원 의원으로 유명했는데, 그 이름은 포로 로마노에 있는 비문에 남아 있다. 이 비문에 따르면, 발레리우스 바수스는 이복동생과 달리 비기독교도로 로마 원로원 내에서 그라티아누스 시절, 황제의 일방적인 기독교 정책의 문제를 지적했다고 하며, 이탈리아와 서로마 입장을 대변한 고귀한 원로원 의원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던 간에, 이 사람이 개창한 신 메살라 가문은 이후 세베루스 왕조 후기와 군인황제시대 내내 여러 정치적 음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인사들을 연이어 배출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적극 지지해 콘스탄티누스 왕조 아래에서 서로마와 이탈리아 일대를 대표하게 된다. 따라서 로마 건국부터 로마의 역사와 함께한 본래의 발레리우스 가문 이상으로 로마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 루킬라와 비슷한 나이대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150년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2] 발레리우스 가문 내 지파 중 하나인 메살라 가문은 푸블리우스, 마르쿠스, 포티투스를 사용했고, 루키우스는 제정 시대 악랄한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지탄 받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본래 빕스타누스가 성씨이나, 가문을 높이고자 성씨를 스스로 바꾼 신 메살라 가문은 본래의 메살라 가문과 달리 푸블리우스, 마르쿠스, 포티투스를 사용하지 않고, 빕스타누스 가문에서 대를 사용한 루키우스만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