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Tiberius Claudius Pompeianus) |
출생 | 132년[1], 로마 제국 시리아 코일레 속주 안티오키아 |
사망 | 193년,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
직위 | 원로원 의원, 전직 집정관, 황제 고문, 장군, 로마 황족 |
가족 | 배우자 루킬라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장모 소 파우스티나 처남 콤모두스 동서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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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 집정관이자 장군, 황제 개인 고문, 황제 보호자이다. 로마 원수정 시대를 거론할 때, 언급되는 장군 중 한명으로, 동서지간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함께,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대정치가이자 충신으로 유명하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 장군으로, 파르티아와 게르만족 중 한 갈래인 마르코만니족과의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뛰어난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우이자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가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요절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 루킬라의 두 번째 남편으로 낙점돼 결혼 후 황족이 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아래에서 군부와 원로원을 대표하는 핵심인물로, 장인 생전에 장인에게서 카이사르 칭호를 한 차례 제안받고, 처남 콤모두스 치세에서 반란을 꿈꾼 이들에게서 두 번이나 황제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장인의 유지, 처남 콤모두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내세워 모두 거절해 더 큰 존경을 받았다.
193년 1월 1일, 처남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다음날, 원로원에게 동서지간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함께 황제 자리를 제안받았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이를 정중히 거절한 뒤 다섯 황제의 해 동안의 혼란기 동안 국가 존립과 치안 유지에 힘을 썼다. 따라서 로마민중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더 큰 존경을 받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즉위 이후, 평범하게 원로원 활동을 하다가 193년 사망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시리아 코일레 속주의 주도로, 로마 제국 동방의 두번째 대도시 안티오키아에서 이 지역 출신 그리스 혈통 기사계급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125년생이라고 하나, 실제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보다 7살이나 적은 132년생이다. 전체이름에서 드러나듯, 조상이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때 클라우디우스 1세의 로마시민권 특별법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취득했다.[2]아버지는 안티오키아 출신의 기사계급이며 부모 모두 안티오키아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다. 어릴 적 삶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모가 기사계급이고 폼페이아누스라는 사내가 젊은 시절부터 훌륭한 교양 지식을 가지고 있고 상류층들이 아는 예법을 몸에 익혔던 것으로 봤을 때 어릴 적부터 수사학, 웅변, 라틴어, 그리스어 등의 기본 교육을 훌륭히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2.2. 청년 시절
자세한 경력은 불분명하나, 대략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부터 대개의 또래 속주 태생 로마인 지식인들처럼 군복무를 하면서 관료가 되기 위한 경력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기사계급이고, 태어나기 100년 전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만큼 고향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장교로 군경력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3]폼페이아누스가 역사에서 처음 이름을 등장한 것은 서기 161년부터다. 로마는 161년~166년까지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렀는데, 이때 폼페이아누스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으로 공동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 휘하에서 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이 당시 그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등과 함께 상당한 공을 세웠는데,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에서 전쟁을 하기 얼마 전 원로원 의원에 정식 임명돼 군단장 직에 재임명됐다고 한다. 이를 살펴보면 폼페이아누스는 가족 중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된 노부스 호모(신참자)라고 하더라도, 의외로 안티오키아 내에서 최상류층 기사계급 집안의 아들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파르티아 전쟁 당시, 폼페이아누스는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와 그를 따라온 로마 제국 수뇌부들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군사, 행정 방면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쳐 서기 162년 보결집정관에 추천돼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2.3. 마르코만니 전쟁과 루킬라와의 결혼
파르티아 전쟁이 끝난 직후, 폼페이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와 그 측근들에게 아주 정직하고 능력이 출중한 장군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 측의 추천 때문인지 몰라도, 루키우스의 형이자 공동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폼페이아누스를 다누비우스 강(오늘날의 다뉴브 강) 유역 전체 방어선을 담당할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총독 겸 다누비우스 전선 야전사령관(제2군단 아듀트릭스 군단장)에 임명했다.[4] 이때가 164년인데, 폼페이아누스가 28~31살 사이 정도에 원로원 의원이 되고 불과 1년만에 보결집정관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신참자인 그가 4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런 승진을 한 것은 2세기 로마 제국의 인재풀 전체에서도 군계일학의 먼치킨 엘리트가 분명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평가받는다.폼페이아누스는 164년부터 168년 말까지 판노니아에서 근무했는데, 166년 말(또는 167년 초) 롬바르디아족 6000명이 판노니아를 침공하자, 로마군을 이끌고 이들을 모조리 격퇴했다. 이때 그는 30대 중반의 젊은 장군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대비까지 하여 그들을 격퇴했는데, 롬바르디아인들의 침공은 마르코만니 전쟁의 서막이라서 그 책임은 더 막중해졌다.
167년 말, 게르만족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 중인 세력 중 하나인 마르코만니족이 마음 먹고 판노니아를 침공했다. 이들의 목표는 다누비우스 강과 판노니아를 넘어 부유한 본국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이남의 그리스였기에 침공 강도는 매서웠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는 그들의 침공을 막고자, 대규모 원정을 계획해 원로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안토니누스 역병이 더 심해져 원정대는 168년 초까지 판노니아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는 판노니아 일대 로마군이 고전한 이유가 됐는데, 폼페이아누스는 놀라울 만큼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며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로마 제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그는 완벽하지 못한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대처했고, 올바른 상황보고로 두 황제가 올바르게 전황을 파악할 수 있게 도왔다. 이렇게 되자 두 황제는 젊은 장군 폼페이아누스를 더욱 신뢰했다, 그래서 두 황제는 그에게 군사 자문까지 구했는데, 이 시기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우 루키우스 베루스처럼 폼페이아누스를 진심으로 신뢰해 그를 두 황제를 보좌할 최측근 군사고문으로 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게르만족 일부가 북이탈리아 최대 도시 중 하나인 아퀼레이아를 침공했는데, 두 황제는 노예, 검투사까지 징집해 이를 격퇴했다. 하지만 밤낮으로 격무에 시달린데다 여러 전쟁으로 피로감이 심해진 까닭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가 뇌졸중 증세를 호소하다가 쓰러져 169년 1월 요절했다. 당시 루키우스 베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 루킬라와 결혼했고, 공동황제였다고 해도 사실상 후임황제이자 후계자였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크게 좌절했다. 그리고 이때 마르쿠스 황제의 눈에 띈 이가 형제가 모두 신뢰한 37살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였다.
폼페이아누스는 미혼이었고, 신참자임에도 교양이 풍부하고 능력은 원로원 내에서 최고 수준으로 뛰어난 인재로 자타가 인정했다. 더욱이 그는 동방 출신임에도 모두에게 큰 존경을 받고 인정받았는데, 파벌을 만들거나 가입하는 등의 야심가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아 적도 없었다. 이런 점은 마르쿠스 황제 입장에서 아우의 빈자리를 메꾸고, 어린 후계자 콤모두스의 미래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루킬라의 재혼감으로 폼페이아누스가 직접 낙점받은 이유가 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녀 루킬라 |
타고난 미남이었던 루키우스 베루스와 비교해 폼페이아누스는 로마 상류 여성들이 선호한 미남은 아니었다.[5] 그러나 말년에 제작된 조각상에서 보여지듯 평균 이상의 키, 괜찮은 외모를 가졌고 인품이 대단히 훌륭하고, 정신력이 강하고 책임감이 대단했다. 그렇지만 루킬라는 어린 시절부터 공주라는 지위와 훌륭한 자신의 조상들, 부모 양쪽의 혈통, 그리고 수백년째 이어진 귀족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현역 원로원 의원 폼페이아누스가 자기와 격이 맞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특히 그녀는 새 남편이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때 로마 시민권을 얻은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이었고 본인 대에야 비로소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임을 혐오스럽다고 주장하면서 아버지에게 불만을 대놓고 표출했다.
루킬라 입장에서 보면 이 결혼은 황후(아우구스타)라는 신분까지 박탈되는 결정이라서, 그녀는 어떻게든 폼페이아누스와 엮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귀부인의 삶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고, 자신이 동생 콤모두스 때문에 희생된다고 생각해 격렬하게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이는 폼페이아누스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고 불만을 가질 만 했다. 그는 루킬라와 달리 미혼이었고, 이 결혼이 첫 결혼이며, 본인이 원한 결혼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정략혼이라고 해도, 그는 일평생동안 황제 자리를 꿈꾸거나, 황족 대우를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크게 꿈꾸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 본인에게 짐이 될 이 결혼 명령을 쌍수를 들 정도로 반기지 않았다. 도리어 신분과 지위를 생각하면 폼페이아누스 쪽에서도 루킬라와의 결혼은 아쉬운 점이 있고, 매우 부담스러운 강제명령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후 파우스티나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화를 내는 루킬라 편을 들며 재혼 직전까지 "폼페이아누스는 우리와 격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충돌했다. 소 파우스티나는 아들 콤모두스의 안위를 대단히 걱정했음에도, 딸 루킬라가 격렬하게 반발해 딸 편을 들었는데, 이후에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를 견제하기 위해 공동 후견인으로 세우려고 노력하는 등 폼페이아누스를 온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르쿠스 황제는 아내와 당사자의 반대에도 황실과 제국의 안녕 등을 고려해 무시했고, 결혼을 강행시켰다. 나이 차이도 서로 적당하고, 폼페이아누스의 재능과 충성심, 외모 모두 당시 로마 안에서 1등 신랑감인 것을 생각해보면 황제 역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후일 소 파우스티나 역시 폼페이아누스를 온전히 믿지 않다가, 유언으로 그에게 아들 미래를 맡긴 것을 생각해보면 비슷하게 전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169년 결혼식을 올렸다. 하여 부부 사이는 자연스레 냉랭했는데, 루킬라는 결혼 이후에도 남편 폼페이아누스를 대놓고 무시해 결혼생활은 최악으로 흘러갔다. 그래도 다행히 이 결혼에서 두 사람은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170~217)를 낳았고, 이 결혼 이후 마르쿠스 황제는 딸 루킬라의 아우구스타 칭호가 박탈되지 않도록 하고 폼페이아누스에게 여러 명예를 주면서 두 사람의 자녀도 제위계승을 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줬다.
이렇게 폼페이아누스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일원이 된 직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맏사위 폼페이아누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계속해서 각종 영예와 칭호를 부여했다. 냉랭했던 장모 역시 막내아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요절해, 아들이라곤 콤모두스 밖에 남지 않아 그나마 믿을 수 있는 폼페이아누스와 화해했다.
결국 169년 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폼페이아누스를 어린 콤모두스를 지켜줄 보호자이자 대부로 지명했다. 이때 황제는 그에게 카이사르 칭호까지 내려주겠다고 한 다음, 루킬라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도 후계자가 될 특권을 정식으로 내렸다. 하지만 폼페이아누스는 여러 조치 중 핵심인 카이사르 칭호를 받지 못하겠다고 황제에게 간곡히 호소하면서, 이 결정은 장차 콤모두스 안위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거듭 뜻을 밝혔다. 이런 호소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폼페이아누스의 카이사르 칭호 부여 제안을 철회했다. 그러나 다른 조치와 영예 수여는 예정대로 폼페이아누스 부부에게 수여됐다.
카이사르 칭호 부여 시도가 무산된 이후, 마르쿠스 황제는 이런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 속에서, 맏사위를 더욱 신뢰하게 된다. 이때 황제는 폼페이아누스를 본인이 출정한 전쟁터에서 황제를 사실상 대리하는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래서 마르코만니 전쟁의 실질적인 총책임자는 맏사위 폼페이아누스 몫이 됐다. 이 결정 당시, 황제는 40살도 되지 않은 사위를 보좌할 여러 장군들을 곁에 붙여줬다. 그중 한명으로 낙점된 참모격 장군이 파르티아 전쟁과 게르만족과의 게릴라 전쟁에서 두루 공을 세운, 해방노예 아들인 이탈리아 출신 장군 페르티낙스인데, 그는 다시 반대파들의 무고로 뇌물죄 등에 기소돼 고초를 겪다가 무죄가 확정된 뒤 폼페이아누스 곁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2.4. 장인의 죽음과 마르코만니 전쟁의 종결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 동안, 폼페이아누스는 군사작전과 병참 운영, 속주 재건 등에서 큰 공을 세워, 군사적 경험이 부족한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보좌했다. 이때 그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 여러 장군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고 황제 역시 이런 사위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래서 173년 황제는 폼페이아누스를 직접 추천해 두 번째 집정관에 오르게 해줬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 기간동안 언제 죽어도 모를 정도로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진 상태였는데, 이 시기동안 폼페이아누스는 여러 군사작전을 진두지휘하면서 장인과 처남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180년 3월 17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병영 기지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이때 폼페이아누스는 동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콤모두스를 잘 보좌해달라"고 고명을 받았다.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18살된 아들 콤모두스가 단독황제로 선포됐다.
이 당시 로마의 승리가 분명해도, 로마 국고는 오랜 전쟁으로 각종 특별세를 걷을 정도로 위태로웠고 로마인들의 전시특별세 피로도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민심 역시 자칫 흉흉해질 위기였다. 그래서 여러 고문들은 갓 단독황제가 된 콤모두스에게 현실적인 이유를 내세워, 서둘러 전쟁을 종결짓고 로마로 귀환해야 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폼페이아누스는 곧 있으면 완전 정복될 마르코만니 전쟁을 완료해야 한다고 콤모두스와 원로원, 재정 고문을 설득했다. 그러나 콤모두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법과 관습에 따라 게르만족들과 평화교섭 협상을 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180년 가을, 마르코만니 전쟁은 종결되고 콤모두스는 장군들과 함께 로마로 귀환했다.
2.5. 애증의 콤모두스
처남 콤모두스 |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등 여러 제장들의 만류에도 콤모두스가 경제, 재정고문과 원로원 의원들의 요청에 따라 전쟁을 마무리하자, 젊은 황제와 경험많은 일부 장군 사이의 갈등이 시작됐다. 이 당시 콤모두스는 폭군도, 암군도 아니었고 괜찮은 후계자였는데, 이런 내부적 상황은 182년 폼페이아누스의 아내이자 콤모두스의 맏누이 루킬라가 콜로세움에서 콤모두스 암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일련의 사태로 확대되는 이유가 됐다.
당시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의 결정에 불만을 품었음에도, 장인이 죽기 전까지 간곡히 아들 콤모두스 안위를 부탁한 것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폼페이아누스와는 동서지간으로,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파딜라, 안니아 갈레이아 파우스티나, 코르니피키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도 비슷했다. 하지만 코르니피키아의 남편인 푸닉 출신의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 막내 공주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의 남편인 푸닉 출신의 명문 귀족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는 더 높은 권세를 위해, 동생 콤모두스에 대한 원한으로 똘똘 뭉친 루킬라의 음모에 가담했다. 이는 폼페이아누스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도 비슷해 그들은 182년 콤모두스를 실제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해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된다.
콤모두스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 사오테루스가 별개의 사건으로 암살되자 한층 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두 차례의 암살 사건으로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는 며칠을 끙끙 앓을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조사 결과까지 알게 되자 완전히 사람이 변하더니 쓸데없는 의심병이 생기고 정상생활조차 힘들어 할 정도로 사람이 변해버렸다. 다행히 콤모두스는 암살에 개입하지 않은 맏매형 폼페이아누스를 계속 신뢰했고, 그를 아버지이자 삼촌처럼 따랐다. 그렇지만 이 사건 이후,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 측근과 원로원에게 루킬라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계속 의심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콤모두스의 광기는 심해지고, 근위대장 페렌니스, 클레안데르의 부정부패와 전횡이 심해지는 가운데 콤모두스는 아예 손을 놓고 폐인 생활을 하며 놀고 먹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이는 처남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폼페이아누스가 애증 관계가 된 처남 콤모두스에게 크게 실망한 이유가 됐다.
하지만 폼페이아누스는 장인, 장모의 유지도 있고, 동서지간이며 동료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콤모두스의 누이로 플라우티우스의 아내인 파딜라와 끝까지 콤모두스 갱생에 힘을 쏟는 것을 보고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원로원에 남아, 불만이 쌓이고 있는 원로원 동료와 군대 장교들을 설득했고, 장인이 콤모두스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 콤모두스 움직임을 막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는 또 다른 동서관계인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대비된 모습이었는데, 이 사람은 훌륭한 스토아 철학자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에게 가장 큰 총애를 받은 사위임에도 끝까지 무책임하고 비열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그래서 폼페이아누스의 이런 모습은 파딜라, 플라우티우스 부부와 그가 세간에 충신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됐다.
그렇지만 콤모두스의 광기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클레안데르가 근위대장이 된 뒤 매관매직이 일상화되면서 상황은 훨씬 안 좋게 흘러간다. 이런 상황에서 각지의 군대는 반란을 꿈꾸고 있음에도, 살아생전 선황이 보인 헌신과 안토니누스 가문의 노력을 생각해 안토니누스 황실 식구 중 가장 존경받고 있던 그에게 두 번이나 접근한다. 그들은 "황제에 오르겠다고 말만 해주면 제위에 올려주겠다"고 제안했고 두 차례에 걸쳐 "황제가 제발 되어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이에 그는 그 제안을 받자마자 모두 거절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콤모두스가 실망스러워도 선황과 본인을 생각해서 참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렇지만 동료 의원들과 군대의 요청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폼페이아누스는 본인의 나이가 많고, 눈병이 있다며 이탈리아에 있는 시골집으로 떠나 버렸다. 당시 폼페이아누스의 나이가 로마 제국에서 한창 나이로 평가받은 40~50대에 불과함을 생각하면 너무 빠른 은퇴선언이었다. 그러나 이 은퇴선언과 사실상의 은둔생활에도 여러 인사들은 폼페이아누스와 어떻게든 접촉하려고 시도해, 그는 로마에 얼굴도 비추지 않고 시골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2.6. 콤모두스 암살과 다섯황제의 해
20대 후반에 접어들 무렵인 190년 직전부터 콤모두스의 부도덕하고 광적인 행동은 정신불안으로 점차 심해졌다. 특히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클레안데르가 죽고 난 뒤였는데, 이때 콤모두스는 애첩 마르키아, 새로운 침실 하인이 된 그리스인 해방노예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레토)를 형식적인 친정체제에서 신뢰했다. 따라서 이런 점을 걱정한 파딜라,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부부는 콤모두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면서, 황궁 별관으로 아예 들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콤모두스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을 했다. 하지만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에 대한 충성을 밝히며, 반 콤모두스 움직임을 견제함에도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 192년 11월, 콤모두스는 콜로세움에서 플레부스의 경기 날 자신의 살아있는 헤라클레스의 화신임을 자처하며 검투사로서 보여줄 수 있는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콤모두스가 192년 11월 수많은 맹수들을 혼자 힘으로 다 죽이는 초인적인 능력을 공개할 당시,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을 손수 초대해 관람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오 카시우스, 동서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등은 반강제로 이 경기를 모두 관전했다. 그런데 처남의 막장행각을 참다 못한 매형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는, 동서지간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를 비롯한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유일하게 콜로세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상 문제였다고 하는데, 디오에 따르면 이건 핑계였다. 대신 그는 자신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대리인 자격으로 내보낸 뒤, 아들을 통해 자신이 콤모두스의 안녕과 선전을 빈다고 의견을 밝혔다. 허나 폼페이아누스는 이 행동을 통해, 변해버린 처남 콤모두스에게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폼페이아누스가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받들고, 콤모두스를 지켜주겠다는 것만은 지켜주기 위해 아들을 보냈을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리고 1달 뒤인,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황궁에서 애첩 마르키아, 침실 시종장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사주를 받은 개인 레슬링 교사에게 교살됐다.
192년 12월 31일 저녁,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다음날인 193년 1월 1일 원로원과 근위대에서 폼페이아누스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에게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이때 폼페이아누스는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함께 원로원에 출석해 후임황제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본인과 자녀 모두 황제 자리에 뜻이 없다고 밝히면서 혼란해질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코르니키피아와 불륜 관계인 페르티낙스가 후임황제가 됐는데, 그는 얼마 안 가 근위대와 갈등을 빚다가 암살됐다. 이후 라이투스는 근위대 부하들과 함께 권좌를 경매형식으로 팔았고, 그 자리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손에 넘어갔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근위대가 자신을 온전히 지지하지 않고, 동료들도 본인을 손가락질하자 폼페이아누스에게 급히 공동황제가 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오랜 전쟁으로 몸이 늙은이와 다름없이 안 좋고, 눈 문제도 있다며 거절했다. 이는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도 비슷했는데, 그는 다섯황제의 해 동안 벌어진 온갖 추태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터라 단호히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판노니아 사령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를 자처하고 로마로 진격했다. 그러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플라우티우스에게 평화교섭을 요청하면서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를 거절했고, 플라우티우스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본인 소유의 시골별장으로 은퇴해 은거해버린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이에 로마에 있던 폼페이아누스에게 평화교섭을 요청하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는 다섯 황제의 해 동안,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막장 행각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터라,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허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 역시 명백한 불법 행위이며, 이 과정에서 무수한 목숨이 희생돼 이 문제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내며 반대 의사를 사실상 밝혔다.
2.7. 말년과 사망
폼페이아누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군해, 황제가 되고 이후 경쟁자와 그 파벌을 모두 숙청할 당시 로마에서 평범하게 원로원 의원으로 있었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고 193년 로마의 자택에서 향년 60세의 나이에 죽었다. 사인은 젊은 시절부터 장인과 함께 다양한 전쟁을 치르며, 일찍부터 몸이 크게 상해 건강 상태가 나빴던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후일 동서지간이며 우정을 나눈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세베루스 왕조 내 권력다툼으로 누명을 쓰고 자살형식을 빌려 처형된 것(205년)을 생각해보면, 폼페이아누스가 193년 병으로 죽은 것은 천운이었다. 왜냐하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우스를 죽일 때, 옛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족 중 권좌에 오를 수 있는 후보군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6] 더욱이 폼페이아누스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가 카라칼라와 게타의 골육상쟁 당시, 게타 지지자로 몰려 누명을 쓰고 피살된 뒤 목이 효수된 것을 생각해보면 폼페이아누스가 장수했을 경우 세베루스에게 보복을 받지 않아도 비슷한 비극을 당했을 확률은 높아보인다.
3. 여담
- 최근에야 132년생이고, 루킬라와 결혼 당시 30대 중후반의 초혼으로 밝혀졌지만 과거에는 125생으로 추정돼 루킬라와의 결혼 당시 중년의 중늙은이(?)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시오노 나나미는 48살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에, 20살도 안 된 19살의 루킬라가 격렬히 반대했을 것이라고 추정했고, 이 인물의 경력이 추정으로만 예측할 당시를 기준으로 저술한 까닭에 폼페이아누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을 벌어지기전까지는 일개 1개 군단 사령관에 불과하고 경력도 전무하다시피한 인물에서 고속승진한 사람으로 묘사 중이다.
- 장모 소 파우스티나가 결혼 당시 완강하게 반발한 루킬라를 지지했고, 그를 견제하고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아들 콤모두스 후견인 중 한명으로 내세웠지만 루킬라의 남편이 된 뒤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 황제의 맏딸을 아내로 맞이한 연상의 유능한 무장이고 개인의 야심을 앞세우지 않은 유능한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훗날 동로마 제국의 부마이자 군정의 거두였던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도 비교된다.
[1] 과거에는 125년생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132년생으로 밝혀졌다.[2] 이런 배경 때문에, 이 특별법에 따라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들이 많은 제국 동방(특히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출신들은 클라우디우스라는 성씨를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1세기 후반부터 3세기까지 등장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등 원로원 의원, 장군, 집정관, 수도 장관 중 노멘(성씨)으로 클라우디우스를 사용한 로마인들은, 어머니가 진짜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고 양가 모두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인 막시무스(푸피에누스)를 제외하면 폼페이아누스처럼 거진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출신이다. 일례로 3세기 초 세베루스 왕조에서 복수의 집정관 경력을 가지고 있고 수도장관까지 오른, 디오 카시우스의 동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만 하더라도 그리스인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또 다른 사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역시 그리스인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특별법으로 시민권을 얻은 그리스인의 후손이다.[3] 대개의 기사계급 출신 청년들은 군에 입대할 경우, 일반 사병이 아닌 장교부터 경력을 쌓았다.[4] 그가 부임한 제2군단 아듀트릭스는 오늘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기지를 둔 로마군 부대로, 로마군 내에서 게르마니아, 시리아와 함께 3대 주력군 중 하나인 판노니아 일대에서도 강력한 핵심부대였다.[5] 로마 귀부인들이 생각하는 미남의 기준은 금발머리+파란눈이었다고 한다.[6] 그래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아들, 딸은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 카라칼라처럼 비열하고 냉혹함에도 정도는 지키는 황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