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Gnaeus Claudius Severus | |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Gnaeus Claudius Severus |
출생 | 133년, 로마 제국 갈라티아 폼페이오폴리스 |
사망 | 미상, 로마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스토아 철학자 |
가족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장인) 소 파우스티나(장모)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아버지)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아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베루스(첫째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둘째 아들) 안니아 파우스티나(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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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스토아 철학자. 서기 2세기 로마 제국의 스토아 철학자로, 소요 학파 철학자로 유명하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둘째 사위로, 아내는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이다. 아들은 보통은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라고 많이 부르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와 이름 미상의 첫번째 아내에게서 얻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베루스가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에게 모두 처남 콤모두스를 보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르쿠스 황제 부부의 추천 아래 2번 집정관에 오르고 부마에 걸맞은 지위, 특권, 영예를 받았다. 그렇지만 받은 영광, 영예만 추구할 뿐, 콤모두스 재위 첫해부터 콤모두스를 전혀 돕지 않아, 이 부분에서 동서 지간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등 안토니누스 황실 식구 전체에게 큰 미움을 받았다.
2. 생애
서기 133년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 지방(옛 폰투스 왕국 일대)에 있는 그리스 도시 폼페이오폴리스에서,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폰투스 그리스 귀족으로 서기 1세기, 2세기의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이다.폼페이우스가 폰투스 왕국을 멸망시키고, 세운 7개 도시 중 하나인 그리스 도시 폼페이오폴리스를 대표한 그리스 귀족 가문 출신이다. 어느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는지, "파플라고니아의 대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린 이 도시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저명한 가문의 고귀한 혈통으로 평가받았다.
이런 평가 그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트라야누스 황제의 최측근 중 최측근이었다. 할아버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트라야누스의 오랜 친구로, 로마 제국 동부 일대 행정과 방어선 정비를 담당했던 거물 정치가, 행정가였다. 그는 트라야누스가 105~106년 아라비아 페트라이아를 병합할 때, 이를 실무에서 직접 담당했고, 페트라에서 아카바까지 연결된 트라야누스 가도 건설을 총책임졌다. 그의 비서이자 보좌관은 아폴로나리우스였고, 아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와 함께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를 초대 총독이 되어 이끌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도 비슷했다. 그는 트라야누스의 신임이 대단했던 아버지처럼,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집정관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트라야누스의 오촌조카인 하드리아누스와 친분이 두터웠고, 그의 스승이 됐다. 아울러 그는 트라야누스 누나의 후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 시절 그의 정치 교사이자 스토아 철학 스승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아주 일찍부터 로마 정계, 사교계, 학계에서 스토아 철학자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는 교양이 풍부했고, 스토아 철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를 비롯한 이들과 두루 친분을 쌓았다.
그렇지만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철학에 몰두만 했다. 이는 그가 학자로 사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실제로도 조용하고 오로지 자신의 안녕을 바랬던 소극적 성향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보다 12살 어린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를 어떻게든 옆에 두려고 했다. 이는 소 파우스티나 황후도 비슷했는데, 이는 세베루스의 가문이 가진 힘과 명망을 동맹세력으로 두려고 한 목적이 컸다. 그래서 그는 151년에 태어난 둘째 딸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를 일찍이 그와 약혼시켰다. 그러면서 마르쿠스 황제는 그에게서 큰 영감을 얻어 사위를 넘어 친구라고 일평생 불렀다. 이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를 매일 만나, 자신이 심취한 스토아 철학에 대한 모든 것을 주제로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극찬을 했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첫 결혼으로 맞이한 이름 미상의 아내와 사별했고, 사이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베루스로 불릴 갓난아이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명성과 권력이 대단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둘째 딸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가 6살임에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159년 결혼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황제는 자신의 딸을 아내로 맞기에 약점이 뚜렷한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를 위해, 자녀가 없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조카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가 이 아이를 양자로 입양하도록 주선까지 해줬다. 이때 그의 나이는 26살이었다.
후처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와의 사이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를 얻었다. 이때 아내 안니아 갈레리아 아우렐리아 파우스티나는 12살이었는데, 첫 아이를 낳은 그녀는 163~165년인 대략 12~14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그렇지만 그는 더는 재혼을 하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서 큰 총애를 받은 만큼, 두번째 결혼으로 맞이 했던 아내와 사별한 이후에도 잘 나갔다. 그는 2번이나 집정관에 추천받아 올랐다. 이때 그의 동료 집정관은 동서지간으로 루킬라 공주의 남편이며, 콤모두스의 공식 보호자로 선정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였다.
176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가 콤모두스,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를 데리고 아테네를 방문할 때 아버지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와 함께 나란히 그리스 여행을 따라갔다고 한다. 그는 황제 가족의 일원으로 아테네를 둘러보고 아테네 각계 최고 거물들에게 "황제의 사위이자 친구"로 소개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는 맏사위이자 콤모두스의 공식 보호자인 동료 집정관 폼페이아누스와 비교해, 그가 더 돋보인 부분이 됐다.
세베루스는 167년, 173년 두 번 집정관을 지냈는데, 173년 집정관이 된 해에 후원자 자격으로 고향 폼페이오폴리스의 최고 명예 시민이 됐다. 그리고 같은 해, 마르쿠스 황제 부부의 후원 속에서 생일 기념으로 고향 폼페이오폴리스에 헌정 비문과 기념 제단이 설치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하지만 그는 장인, 장모가 집정관에 두 번이나 추천을 해주고, 그들에게 콤모두스 보호자에 걸맞은 지위, 특권을 하사했음에도, 지극히 콤모두스에게 무관심했고 계속 거리를 뒀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로마에서 존경받는 학자로 일평생 살았다. 이런 모습은 장인 생전, 그에게 주치의 갈레노스를 시의(侍醫)로 추천하고, 마르쿠스 황제가 서거할 때까지 서신을 교환하고 정견을 나눈 것을 생각해보면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 큰 충격 속에서, 페렌니스, 클레안데르로 대표된 간신들이 판을 치던 콤모두스 재위 기간 속에서도,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로마에 머물고 있음에도 어떻게든 황제를 지키고 정상생활을 하도록 힘쓴 처제, 동서들과 대비된 모습이 됐다. 이렇게 되니, 그는 겁쟁이, 졸장부 등으로 불렸고, 특권을 받아 누릴 뿐 끝까지 무책임한 사람이 됐다. 특히, 그가 특권은 모두 받고 적극적으로 행사하면서도, 장인이 죽은 뒤에는 대놓고 무책임하게 모든 유언을 어긴 부분은 원로원에서 대놓고 지적하지만 않을 뿐 조롱받는 원인이 됐다.
그래서 콤모두스 생전부터 "사람이 비겁하고 비열하다.","장인 도움으로 두번이나 집정관을 하고도, 유언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고 조롱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계속 책임 회피를 했다.
이런 배경으로 황족이라는 점을 후광으로 정치적 야망이 컸던 아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는 외삼촌 콤모두스 생전부터 어떻게든 황족, 귀족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안토니누스 황실 황족들에게 대우만 형식상 받을 뿐 존재감이 없을 만큼 무시 받았다. 그 결과, 그는 외삼촌 콤모두스가 192년 12월 31일 암살되고 193년 1월에 안토니누스 황실의 남자 황족들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원로원이 발의할 때에도 그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