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 라틴어: : Marcus Valerius Messalla Messallinus | |
생몰년도 | 기원전 36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아버지) 칼푸르니아(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계모) 발레리아 메살리나(누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이복 형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아들) 발레리아 메살리나(딸)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년 |
전임 |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갈루스 술피키우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후임 |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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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행적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는 기원전 61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는 기원전 3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어머니 칼푸르니아는 기원전 59년 집정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소 카토의 딸인 포르키아 사이의 딸이다. 누이 발레리아 메살리나는 서기 11년 집정관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와 결혼했다. 코르비누스는 칼푸르니아 사후에 기원전 75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손녀로 추정되는 아우렐리아 코타와 재혼해 서기 20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를 낳았다.기원전 21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 15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의 일원이 되었으며, 기원전 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서기 6년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총독을 맡고 있던 그는 마르코만니족의 왕 마로보두스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조성하던 티베리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속주민들을 대거 징발해 대규모 보조병 부대를 창설한 후 라인강 전선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데시타이트족 출신의 바토와 브레우키족 출신의 바토를 지도자로 내세워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켰다.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일리리아 반란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은 티베리우스는 마르코만니 왕 마로보두스와 평화협약을 맺은 뒤 신속하게 판노니아로 진군했다. 그는 먼저 일부 병력을 이탈리아로 보내 반란군이 이탈리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하게 한 뒤, 일리리아 경계로 진군하면서 메살리누스에게 제20군단을 이끌고 앞서 가게 했다. 이 군단은 일리리아 반란군과 맞서 싸우느라 전력 소모가 커서 정원의 절반인 2,500명밖에 없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메살리누스는 도중에 20,000명 가량의 반란군에게 둘러싸여 섬멸될 위기에 몰렸지만, 부하들을 잘 통솔해 포위망을 돌파한 뒤 후퇴하다가 추격해오는 적을 매복 공격해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 이후 제20군단은 '발레리아 빅트릭스'[1]라는 칭호를 받았고, 메살리누스는 훈장을 수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풍기 문란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토미스에 유배된 시인 오비디우스는 메살리누스의 고귀한 출생, 고귀한 성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탁월한 웅변력을 칭송하는 시를 3편 지으면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를 설득해 자신을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메살리누스는 이에 응하지 못했고, 오비디우스는 죽을 때까지 토미스에서 살았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 사망 후 로마의 새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가 첫번째 원로원 회의를 열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메살리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원로원의 모든 구성원이 매년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살리누스는 뒤이어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의 게르만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마르스 울토르 신전에 두 사람의 황금 동상을 세울 것을 제안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3. 가족 및 후손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얻었다. 일부 학자들은 메살리누스의 아내가 소(小) 클라우디아 마르켈라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일부 학자들의 추정이 사실일 경우, 메살리누스는 아내보다 연하가 된다.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는 서기 2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딸 발레리아 메살리나는 17년 법무관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갈루스와 결혼했다. 메살리누스의 사위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갈루스는 무명의 이탈리아 기사계급 집안 출신으로, 메살리누스의 데릴사위였다. 그는 일반적인 로마인 결혼관습과 달리 아내보다 연하였고, 장인의 도움으로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 법무관이 됐다. 그는 이모뻘 나이였던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결혼해 두 아들을 사이에서 얻었다. 이렇게 얻은 두 아들이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이다. 이들은 모두 원로원 의원이 됐는데, 외할아버지 메살리누스는 두 외손자를 자신의 가문에 입양하지 않는 대신, 이들에게 발레리우스 가문의 오래되고 명망 높은 코그노멘을 각각 대대로 물려받게 하고, 발레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메살리누스의 두 외손자와 그 직계 후손들은 성씨만 빕스타누스일 뿐 발레리우스 성씨를 진짜 노멘으로 여겼다.
외손자 중 딸의 큰아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는 58년과 59년에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으며, 아들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가 있었다. 그러나 아들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는 서기 63년 사제에 임명됐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다른 후사도 남기지 못해 대가 일찌감치 끊겼다.
딸의 작은아들은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이다. 그는 서기 48년에 후일 황제가 될 비텔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올랐다. 그는 형의 후임으로 아시아 속주 총독을 59년과 60년에 걸쳐 연임했다. 아들은 후일 네로, 비텔리우스를 연달아 공개연설로 맹비난하면서, 이들을 폭군, 양아치라고 각각 비난해 갈채를 받은 용감한 연설가이자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이다.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의 아들인 그는 네로 황제가 피소 음모를 시작으로 베네벤툼의 음모 등 아래에서 많은 원로원 의원, 장군을 숙청한 가운데에서 소년임에도 네로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만큼, 배짱이 대단했다. 그는 네 황제의 해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비텔리우스 군을 상대로 벌인 내전에서 모이시아에 주둔한 제7군단 클라우디아를 이끌던 군단장이 목숨을 구하겠다고 도망친 상황에서, 군단병들을 독려해 비텔리우스를 상대로 실질적인 군단장 역할을 맡아 승리를 거둘 만큼 용감한 군인으로, 로마군 장교를 지낼 때부터 외증조부 메살리누스처럼 용감한 군인이라고 평가받았다. 역사가로 유명한 타키투스의 친구로 아부와 타협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했다. 다만, 어머니가 첫 결혼에서 얻은 이복형으로 친형제와 같았던 마르쿠스 아퀼리우스 레굴루스를 변호한 일로 사후 평가가 깎였다. 그의 이복형 아퀼리우스 레굴루스는 네로 시대때 훌륭한 연설가였지만, 동시에 악명 높은 델라토르였는데,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는 이복형이 결백하다며 고발된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의 방계인 빕스타누스 메살라 가문의 명성으로 원로원을 설득해 무죄를 이끌어냈다. 따라서 10대 시절에 공개적으로 네로를 비난했던 과거와 엮여 명성이 깎이게 됐는데, 이복형 레굴루스가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부자의 신임을 받은 점 때문에 그가 이렇게 변호한 것 역시 이런 현실 때문이라는 주장이 많다. 그는 티투스 황제때 로마에 유행한 전염병으로 35살 정도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하지만 메살리누스의 외증손자인 그는 같은 이름의 아들[2]이 있었고, 그 가계는 연달아 3대가 젊은 나이에 요절함에도 모두 대를 이어나가, 연설가 빕스타누스 메살라의 증손자는 세베루스 왕조 시절에는 로마 제국의 대표 명문가 중 하나인 신(新)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로 종종 불리는 가문을 만들었다. 그가 바로 후일 카라칼라의 살생부로 처형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이다. 그는 발비누스의 매형 혹은 사촌 매형으로, 아주 어릴 적에 정치적 위상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대가 끊겨 멸족한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을 노멘 젠틸리키움 아래 부활시켰다. 그는 이때 성대한 행사를 열고, 메살리누스의 외손자인 빕스타누스 메살라 이래 스스로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의 후손이라고 여겨 이를 무척 강조했다. 그는 메살리누스의 딸 발레리아 메살리나를 그 명분이자 시조 삼아 성씨를 바꿨고, 이렇게 탄생한 가문이 제정 시대부터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모두까지 등장한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문이다. 이 가문은 트라세아 프리스쿠스가 카라칼라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뒤에도 살아 남았는데, 프리스쿠스 트라세아의 손자로 새로운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를 서로마 제국 말까지 권세가로 만든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아래에서 위세를 떨친다. 이때 이들 명성으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 역시 회자되면서 그 이름이 간접적으로 서로마 시대 비문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